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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5) --- 사회적인 조건 ② 김승국 1. 평화가 밥 평화(平和)는 동양사회에서 기본적으로 ‘밥(米)을 사람들(口)에게 균등하게(平) 나누어준다(和)’는 것을 의미한다. 밥이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곳에 평화가 있고, 평화가 있는 곳은 밥이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세상일 것이다. ‘평화가 밥이다’는 매우 평범한 말이지만 그 속에 격렬함이 내재해 있다. 동서고금의 민중항쟁은 밥상 공동체가 해체되었을 때 일어났다. 지배계급이 백성들에게 평화의 밥을 주지 않아 밥상 공동체가 무너졌을 때, 민중들은 항쟁의 맹아를 키우기 시작한다. 중국의 크고 작은 항쟁은 농민들의 밥상 공동체가 유린되면서 일어났다. 러시아 혁명도 예외가 아니다. 1917년 혁명 당시 평화의 밥이 그리운 러시아 민중들은 “빵을 달라! 평화를 달라!”고 절규했다. 밥상 공동체가 깨져 ..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4) --- 사회적인 조건 ① 김승국 1. 중립정책-사회적 평화-평화경제의 3박자 어느 나라이든지 대외적으로 중립외교를 펼치려면, 국내사회가 평화로워야한다. ‘사회적 평화’가 중립외교의 필요조건이다. 국내에서 사회적 평화가 유지되어야 위정자들이 대외정책으로서 중립외교를 전개할 수 있다. ‘사회적 평화’가 좀 낮선 용어이므로, ‘평화 지향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평화의 상태’라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다. 더욱이 중립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내의 사회적 평화가 필수적이며, 중립국가가 된 다음에 사회적 평화가 강화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코스타리카,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의 국가들은, 중립국가가 되기 이전에 사회적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중립국가가 된 이후에 사회적 평화가 질적으로 향상되었다. 대내적으로 사회적 ..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3) --- 역사적인 조건 ⑪ 김승국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수립된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에 대한 인적청산을 하지 않아, 노론-친일파가 온존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 상당수는 친미파로 ‘전향’하여 한국사회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노론의 모화(慕華)가 친일파의 모일(慕日), 친미파의 모미(慕美)로 바뀌며 숭배(慕)의 대상이 중국(華)~일본(日)~미국(美)으로 바뀌었을 뿐, 외세(종주국)에 사대하는 몸짓은 그대로이다. 그런 몸짓을 하는 몸체의 원조가,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끊은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인 서인이다. 서인 중에서도 최명길의 주화론을 꺾은 척화파가 원조중의 원조이다. 다시 말하면 ‘서인 척화파’의 斥和~노론의 慕華~친일파의 慕日~친미파의 慕美로 이어지는 사대주의가 자주ㆍ중립 외교(자주 노선 없이 중립화를 이룰 수 없고, 자주 외교.. 더보기
코스타리카의 비무장 영세중립---남북통일에 주는 함의ㆍ시사점 김승국 코스타리카의 정식명칭은 Republica de Costa Rica이고 통칭은 Costa Rica이다. Costa Rica는「풍부한(Rica) 해안(Costa)」이라는 뜻이며,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이 땅에 상륙했을 때 조우한 先住民(인디헤나; Indígena)이 금세공(金細工)의 장식품을 몸이 지니고 있었던 데에서 이 이름이 붙었다. 공식적인 영어표기는 Republic of Costa Rica이고 통칭은 Costa Rica이다. 우리말로 ‘코스타리카 공화국’이라고 표기하면 정확하며 이 글에서는 ‘코스타리카’라는 국명을 사용한다. 중앙 아메리카 남부에 위치하는 이 나라는, 북쪽의 니카라과, 남동쪽의 파나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남쪽은 태평양을 북쪽은 카리브해를 향하고 ..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2) ---역사적인 조건 ⑩ 김승국 1. ‘중립외교의 이정표’를 가로막는 차단막 최명길은 호란(정묘호란ㆍ병자호란)의 위기 극복 대안으로 변통(變通)의 논리를 내세움으로써,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이으려 했다. 변통이란 새롭게 전개되는 현실에 맞추어 때로는 명분을 굽혀서라도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명나라의 적인 후금과 겉으로는 화약을 맺고 안으로 군대를 양성하여 앞날을 대비하고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광해군이 추구한 실리외교를 조금 절충하여 ‘친명(親明)’의 관계는 유지하고 ‘和金[후금과의 和親]’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이화, 318) 이렇게 광해군 중립외교를 변용한 최명길의 ‘변통’은 고집불통의 척화파에 의해 단절되었다. 최명길은 청의 진영을 오가며 화의에 앞장섰다...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1) ---역사적인 조건 ⑨ 김승국 앞의 글에서 주화ㆍ척화의 논쟁을 해석학적으로 이해하면서 중립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최명길ㆍ김상헌의 和-戰-守 논쟁은 오히려 변증법적이다. 和와 戰은 안티테제(Anti These)인데 어떻게 ‘守(백성의 목숨ㆍ민족의 생명ㆍ임금의 목숨ㆍ사직을 지킴)’라는 Synthese로 수렴할 것인가의 논쟁이어서 변증법적이다. 기본적으로 和를 These로 삼는 최명길과 戰을 These로 삼는 김상헌의 和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두 사람 사이의 이해의 지평이 다르기 때문에 지평 융합(Horizontverschmelzung)하기 힘들다. ‘和(청나라와의 강화)=降(항복)’이라는 김상헌은 ‘戰해야 和의 길이 열린다’는 모순 속에서 守를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최명길은 ‘和=降’의 등식은 성립되지 않고 和를 통해..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0) ---역사적인 조건 ⑧ 김승국 남한산성 논쟁의 텍스트(Text)를 해석학적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주화파ㆍ척화파의 ‘화(和)’에서 중립의 가치를 찾는 숙제가 남아 있다. 이해는 어린아이의 옹알거림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햄릿’이나 ‘이성 비판’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른다. 거석들, 대리석, 음악적으로 채색된 음색, 몸짓, 단어, 문자, 행위들, 경제 규정이나 헌법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인간의 정신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며, 해석을 필요로 한다.(빌헬름 딜타이, 36) 남한산성 논쟁의 주역인 최명길과 김상헌의 몸짓, 말투, 음색, 일거수 일투족, 옹알거림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며 해석을 필요로 한다. 두 사람의 격렬한 논쟁 속에 스며 있는 현실에 대한 이해의 차이, 세계관ㆍ이념의 차이, 논쟁을 위해 사용하는 한자 단어, 논쟁이 기록..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19) ---역사적인 조건 ⑦ 김승국 1. 병자호란과 중립의 가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쫓겨간 인조는, 청나라에 대한 항복의 수위를 놓고 완급을 조절하기 위해 신하들과 심각한 논란을 벌였다. 이 논쟁 즉 ‘남한산성 논쟁’은 중립의 가치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준다. 광해군의 국제감각을 이어받은 최명길(주1)이 주화(主和; 청나라와의 강화교섭에 적극적임)를 주장했고, 이에 맞선 김상헌은 숭명사대의 척화(斥和; 오랑캐인 청나라와 싸워야하므로 되도록이면 청나라와의 강화교섭을 늦추며 버텨야 한다)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남한산성 논쟁에서 ‘중립ㆍ중립화ㆍ영세중립’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없었겠지만, 주화(主和)ㆍ척화(斥和)의 ‘和’를 어떻게 풀이하느냐에 따라 중립의 가치를 찾을 수 있겠다. 후금(..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18) ---역사적인 조건 ⑥ 김승국 1. 광해군의 국제감각을 이어받은 최명길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지 5년 후인 1627년에 후금의 군사가 물밀듯 밀려와 한양을 함락시키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새로운 임금인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나 끝내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인조 정부는 맹약을 어기고 계속 명(명나라)을 지원하면서 후금을 배반했다. 이에 후금은 사신을 보내 강경하게 조선을 힐책하자 후금의 사신을 죽여 우리의 뜻을 보이자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이에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전에 후환을 없앤다는 정책에 따라 1636년 조선을 점령하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 두 전란 때 광해군은 강화도와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이런 현실을 지켜보았다. 이때 광해군의 심정은 어떠했을.. 더보기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17) ---역사적인 조건 ⑤ 김승국 1. 광해군의 군사적인 중립 정책 1) 강홍립에 내린 밀지 “觀形向背” 여진의 후금이 만주에서 일으키는 새로운 정세에 면밀하게 대처한 광해군은, 현명한 외교정책을 써서 국제적인 전란에 빠져들어 가는 것을 피하였다. 인조정권과 달리 광해군의 외교노선이 후금의 경계심을 풀고 조선을 비교적 중립적 세력으로 인식하게 했다는 점은 일정한 근거가 있다. 1619년 살이호 전투에 원군을 파견할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에게 밀지를 내려 “상황을 보면서 처신할 것이지 적에게 이동하는 것을 보여주어 먼저 공격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이삼성, 536) 광해군은 명나라의 강력한 요구와 출병에 동조하는 조정 대신들의 압력에 못 이겨 끝내 명나라에 대한 파병을 결정한다. 사면초가에 몰린 끝에 1만 3,000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