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국
1. 평화가 밥
평화(平和)는 동양사회에서 기본적으로 ‘밥(米)을 사람들(口)에게 균등하게(平) 나누어준다(和)’는 것을 의미한다. 밥이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곳에 평화가 있고, 평화가 있는 곳은 밥이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세상일 것이다. ‘평화가 밥이다’는 매우 평범한 말이지만 그 속에 격렬함이 내재해 있다. 동서고금의 민중항쟁은 밥상 공동체가 해체되었을 때 일어났다. 지배계급이 백성들에게 평화의 밥을 주지 않아 밥상 공동체가 무너졌을 때, 민중들은 항쟁의 맹아를 키우기 시작한다. 중국의 크고 작은 항쟁은 농민들의 밥상 공동체가 유린되면서 일어났다. 러시아 혁명도 예외가 아니다. 1917년 혁명 당시 평화의 밥이 그리운 러시아 민중들은 “빵을 달라! 평화를 달라!”고 절규했다. 밥상 공동체가 깨져 민중항쟁이 일어난 사례를 멀리 러시아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바로 조선 땅에서 평화의 밥을 달라고 절규한 민초들의 항쟁이 터졌으며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 후기의 민란이 한반도 분단의 원류를 형성한 것이다. 한반도 분단은 (국제)정치적으로 1945년 해방 이후에서 비롯되었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민생고(民生苦)로 말미암은 19세기의 민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의 학정, 지배계급의 가렴주구‧토지수탈로 밥상 공동체를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민(民)의 저항이 민란으로 폭발하고 이 민란이 이어져 갑오 농민전쟁이 발발했다. 갑오 농민전쟁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터지면서 외세가 한반도 문제에 개입했으며, 그 결과 한반도는 국제 대리전의 전쟁터로 전락한다. 19세기의 민란⟶신미양요→갑오 농민전쟁⟶청일전쟁⟶명성황후 시해 사건→아관파천→러일전쟁⟶을사 보호조약⟶의병전쟁→한일 합병조약⟶일제(日帝)지배⟶일제의 패망과 민족해방⟶미 군정⟶한국전쟁⟶정전⟶분단체제로 이어져 오는 가운데, 민초들의 평화로운 삶은 아예 불가능했다. 民이 잘사는 길을 모색할 겨를이 없었다. 평화의 밥을 먹을 수 없는 民의 유랑‧삶의 분단, 생활세계의 분단이 밥상 공동체의 해체로 이어져 사회‧경제적 분단이 가중되었다. 19세기 이후의 사회‧경제적 분단이 1945년 이후의 (국제)정치적 분단과 어우러져 한반도 분단의 원류를 이룬다. 그러므로 조선후기부터 비롯된 사회‧경제적 분단(및 이로 말미암은 민중의 밥상 공동체 해체)을 거론하지 않는 한반도 분단론은 단견에 그친다. 민생고로 인한 밥상 공동체 해체가 사회‧경제적 분단을 낳은 조선후기의 민중생활사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김승국, 35/41~43)
2. 민란ㆍ농민전쟁으로 이어진 조선후기의 민중생활
조선의 임금 중 정치를 가장 잘 했다는 정조의 치세가 끝나갈 무렵인 1798년에 경기도 영평 현령으로 나간 박제가가 정조에게 올린 장계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이 이 산골 고을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볼 때마다 화전을 일구고 나무를 하느라 열 손가락 모두 못이 박혀 있었지만 옷은 십 년 묵은 해진 낡은 솜옷이고, 그 집은 허리를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는 움막이었습니다. 연기가 가득하고 벽은 바르지도 않았는데, 그 먹는 것은 깨진 주발에 담긴 밥과 간도 하지 않은 채소뿐입니다. 부엌에도 나무젓가락만 있었고 아궁이 위에는 항아리로 만든 솥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무쇠 솥과 놋수저는 이정이 몇 차례 꿔다 먹은 곡식 값으로 이미 빼앗아갔다는 것입니다.”
정약용은 암행어사 임무를 마친 뒤 자신이 본 농촌의 참상을「적성촌의 한 집에서」라는 시로 남겼다;
“시냇가 허물어진 집 뚝배기처럼 누웠는데 겨울바람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드러났다. 묵은 재에 눈 덮인 아궁이는 차갑고 체 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스며든다. 집 안의 물건은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두 팔아도 7,8전 되겠네.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와 닭 창자 같은 마른 고추 한 꿰미. 깨진 항아리는 헝겊으로 발라 막고 무너앉은 시렁대 새끼줄로 얽어맸네. 놋수저는 이미 이정에게 빼앗기고 무쇠 솥은 이웃 부자가 빼앗아갔네. 검푸르고 해진 무명 이불 한 채뿐인데 부부유별 따지는 것은 마땅치 않구나. 어깨 팔뚝 드러난 적삼 입은 어린 것들 한 번도 바지 버선 못 입었으리. 다섯 살 큰 아이는 기병으로 올라 있고 세 살 작은 애도 군적에 올라 있네. 두 아이 군포로 500전을 바치고 나니 죽기나 바랄 뿐 옷이 무슨 소용이랴....아침 점심 다 굶다가 밤에 와서 밥을 짓고 여름에는 갖옷 입고 겨울에는 베옷 입네. 들 냉이 깊은 싹은 땅 녹기를 기다리고 이웃집 술 익어야 지게미라도 얻어먹겠네. 지난봄에 꾸어먹은 환곡이 닷 말인데 이 때문에 금년은 정말 못 살겠네.”
당시의 3정(三政; 田政ㆍ軍政ㆍ還政) 문란을 직감하게 하는 문구이다. 정약용의 시조『애절양(哀絶陽)』을 읽어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 시조는 갈밭의 마을에서 한 젊은 아낙이 통곡을 하는데, 그 이유인 즉 죽은 시아버지와 금방 태어난 아이가 버젓이 군적(軍籍)에 올라와 있어, 관아에 찾아가 호소를 해도 소용이 없고 오히려 세금 명목으로 소마저 빼앗기게 되자, 억울함을 참다못한 남편이 방에 들어가 칼로 자신의 성기를 자르면서 “내가 이것 때문에 군포를 내게 된다”라고 말한 사연을 노래하고 있다.(도현신, 130~131)
이와 같은 민중들의 비평화ㆍ구조적 폭력은, 당시의 농업제도의 소유관계에서 비롯된다. 정치경제학적으로 표현하면 생산수단의 불평등에서 비롯된다.
조선 후기에 토지로부터 배제된 농민들은 지주층의 농지를 차경(借耕)하는 시작(時作)농민이 되거나, 그것도 여의치 못한 농민은 임노동층(賃勞動層)이 되었으며 또 상공업으로 전업(轉業)하는 자도 있었다. 소수의 지주층이나 부농층이 대부분의 농지를 점유함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농민은 극히 영세한 토지 소유자로 전락했다. 농지는 주로 부농층이나 지주층에 의해서 소유되고 대부분의 농민은 더욱더 영세한 토지소유자가 되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완전한 무전(無田)농민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있었다. 토지소유는 이 시기에 재부축적(財富蓄積)의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였으므로 토지의 집적(集積)이 성행했다. 이와 같은 토지집적 과정을 통해서 토지로부터 배제되는 농민층은 더욱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식자층에서는 토지소유를 중심한 이와 같은 농민층의 분화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귀결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부호군(副護軍) 허전(許傳)이 이 무렵의 농민층의 분화현상을 상호(上戶), 하호(下戶), 소호(小戶), 빈호(貧戶), 잔호(殘戶), 독호(獨戶), 걸호(乞戶)의 계층으로 표현하고, 그와 같은 농민경제의 실정이 농민 반란을 유발하는 배경이 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었음은 그 한 사례이겠다. 농민층 분화과정의 격화, 즉 토지로부터 배제되는 농민의 격증(激增)이 농민 반란의 원인임을 지적한 것이다. 농민층의 움직임은 이제 당연한 논리로서 봉건적인 체제 그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시작(時作) 농민층의 사회경제적 처지는 필경 생존을 위한 활로의 타개를 지주층과의 관계개선에서 찾게 되는 데서, 이들의 농민층에 대한 끊임없는 항쟁, 특히 항조(抗租)운동이 야기되었다. 항조(抗租)는 개별적으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 그들은 집단적으로 거납(拒納)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갑오 농민전쟁 직전에 있었던 충남 당진군 합덕 농민들의 그곳 지주인 이반(李班)에 대한 항쟁도 그러한 예였다. 이곳에서는 6개 촌락의 농민들이 항쟁을 벌였고, 이 항쟁은 마침내 이반(李班)을 소가축출(燒家逐出)하는 민란으로 확대되기까지 하였다. 항조(抗租)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그 중에서도 전주ㆍ남원ㆍ태인ㆍ여산ㆍ임피ㆍ부안ㆍ정읍ㆍ고부 등에서 심했는데, 이 지역은 갑오 농민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김용섭, 6~54 요약)
이처럼 농민층의 분화~저항(抗租)~민란~농민전쟁으로 격화된 사태의 책임은 당시의 집권세력인 서인ㆍ노론 세력이 져야한다. 서인ㆍ노론 세력이 인조반정을 통해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광해군 중립외교가 가져올 ‘중립정책-사회적 평화-평화경제의 3박자’를 놓친 역사적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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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김승국『잘 사는 평화를 위한 평화 경제론』(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 김용섭『한국 근대 농업사 (1)』(서울, 지식산업사, 2004)
* 도현신『옛사람에게 전쟁을 묻다』(서울, 타임스퀘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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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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