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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3) --- 역사적인 조건 ⑪

김승국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수립된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에 대한 인적청산을 하지 않아, 노론-친일파가 온존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 상당수는 친미파로 ‘전향’하여 한국사회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노론의 모화(慕華)가 친일파의 모일(慕日), 친미파의 모미(慕美)로 바뀌며 숭배(慕)의 대상이 중국(華)~일본(日)~미국(美)으로 바뀌었을 뿐, 외세(종주국)에 사대하는 몸짓은 그대로이다. 그런 몸짓을 하는 몸체의 원조가,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끊은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인 서인이다. 서인 중에서도 최명길의 주화론을 꺾은 척화파가 원조중의 원조이다. 다시 말하면 ‘서인 척화파’의 斥和~노론의 慕華~친일파의 慕日~친미파의 慕美로 이어지는 사대주의가 자주ㆍ중립 외교(자주 노선 없이 중립화를 이룰 수 없고, 자주 외교 없이 중립 외교 없다)를 차단한 역사가 흘러왔고, 분단시대인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다. 이러한 몇 백 년의 ‘반(反)자주ㆍ중립의 역사’를 어떻게 청산하면서 중립화 통일을 이룰 것인가?


1. 영세중립 원년 이후의 역사적인 조건 탐색


위와 같은 문제제기를 하면서 영세중립 원년(1815년) 이후의 역사적인 조건을 탐색한다. 이 탐색의 대상은 慕華~慕日~慕美의 뿌리인 모화사상이고, 모화사상의 상징적인 인물인 김상헌ㆍ송시열이다.


  1) 모화사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하여 조선유학자들 사이에 모화사상이 크게 일어났다. 명나라를 존숭하는 것은 춘추시대에 모든 제후국이 주나라를 존숭하는 것과 동일한 의리이다. 명나라를 옹호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것은 ‘임금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尊王擁夷]’는 것을 대의로 여기고 사생결단하여, 이를 다투며 도덕적 절의에 기초하여 이것을 주장하였다.(현상윤, 260)


그리하여 이 사상과 주장은 널리 국민에게 침투하여 도덕이 되고 의리가 되며 여론이 되어 수백 년 동안을 시종일관하였다. 삼학사의 죽음(주1), 만동묘(萬東廟)의 제향(祭享)(주2), 숭정(崇禎) 및 영역(永曆) 기원의 사용(주3) 등을 보면 저간의 소식을 짐작할 수 있다.


  2) 김상헌


모화사상 고취에 있어서 김상헌은 실로 대표자이고 영수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이후에도 여전히 존명론(尊明論)’을 주장하고 ‘복수설치(復讐雪恥;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어 내림)’의 의견을 고조하였다. 이제 그 언론을 들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명나라 신종 황제의 재조(再造)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깊은 계곡에서 방황하고 피눈물이 흘러 눈물이 메말라 버리고 주야로 마음을 맹세하는 것은 다만 하나의 검으로 머리를 베고 신하의 심장을 갈라 보이고자 할 뿐이다”
그리하다가 마침내 그는 청나라의 요구에 의하여 ‘척화(斥和)’의 죄명으로 심양에 압송되었다. 그러나 김상헌은 의연하게 배명사상(拜明思想)을 선전하고 고취하였다.(현상윤, 261~263)


  3) 송시열


모화사상, 사대주의의 특색은 화(華)라는 중국민족에 대하여는 무조건 숭배하는 대신에 華 이외의 딴 민족에 대하여는 오랑캐와 야만인이라고 멸시하는 것이요 큰 자(者), 강한 者에게는 무조건 굴복하면서 작은 者, 약한 者는 천시하고 멸시하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 자체가 중국인들이 멸시하고 천시하는 이족(夷族)이건만 또 중국인에게 갖은 멸시와 천대를 받았건만 제 생각은 하지 못하고 딴 민족에 대해서는 夷族이라고 멸시하고 만족(蠻族)이라고 천시하였던 것이었다.
이것이 소위 모화사상, 사대주의의 가장 가소로운 점이었다.
우암(尤菴) 송시열을 영수로 한 우리 나라 선유(先儒)들의 모화사상, 사대주의는 이상에 말한 그 가소로운 특색을 가장 잘 구현시킨 것이었다.
철저한 모화사상, 사대주의로만 일체를 꾸려놓고 이것을 국시(國是)로까지 定하게 한 송시열과 그의 추종자들은 3백여 년 명나라가 아니면 날이 새지 않을 정도이었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은 찾아볼 생각도 하여 본적이 없다.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못난 짓이었더냐? 생각만 하여도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권오돈, 69~71)


송시열이 활동할 무렵 주자학은 조선에서 이미 그 순기능을 다한 학문이었다. 주자학은 절대적 위치에서 상대적 위치로 내려와야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주자학을 강화하는 역사의 반동으로 나아갔다.
송시열은 “다행히 주자 뒤에 나서 학문이 어긋남이 없다”고까지 말했지만 그 주자학이 정치에 적용될 때 어긋남이 너무 컸던 것이 송시열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는 조선 전체의 비극이기도 했다.
송시열은 주희의 의리론을 조선으로 가져오는 것, 즉 소중화(小中華) 사상을 주자학의 조선화(朝鮮化)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소중화란 명분이 아니라 사회발전에 맞게 학문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유학의 진정한 조선화는 소중화가 아니라 양반 사대부 중심의 중세 유학을 농민을 포함하는 일반 양인 중심의 근세 유학으로 바꾸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 사고 속에서 신분제 철폐를 주장해야 했다.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같다는 의미의 천하동례(天下同禮)를 주장해야 했다.
그러나 송시열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대부라는 계급의 이익이었고, 서인ㆍ노론이라는 당(黨)의 이익이었다.
그는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黨益)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걸었다. 결국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이덕일, 395~398)


[중립외교의 선구자인] 광해군은 도덕과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청나라와 타협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광해군]는 도덕과 현실, 윤리와 힘을 일원화시킨다. 아니 현실과 힘의 편에 선다. 현실주의이고, 책임 있는 태도이다.
반면 서인과 송시열은 도덕과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청나라와 강경하게 대결하는 길을 걸었다. 대결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도덕과 현실, 윤리와 힘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2원화시킨다. 그리고 도덕과 윤리를 선택한 반면 현실과 힘을 완전히 포기한다. 현실적 힘이 받쳐 주지 않는 도덕과 명분 주장-그거야 삼척동자도 알 수 있듯이 완전히 깨지는 길이었다. 병자호란의 패배가 바로 그것이다.
그 이후 충청도 노론의 우두머리 송시열은 소중화론,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대결을 이끈다. 청나라에 대한 증오심이 서인 정권의 집권 명분이 된다. 송시열의 소중화론은 일종의 정신 승리법이다.(노신『아큐 정전』을 보면, 아큐는 ‘정신 승리법’으로 강한 자를 이긴다. 정신적으로만 승리하는 것이다.)(손영식, 206)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병자호란 때 조선을 점령한 후금은, 서인 정권이 무능하기 때문에 온존시킨다. 김상헌ㆍ송시열이 이끄는 서인 정권의 무능이 생존 전략이 되었다. 서인 집단이 무능함을 생존 전략으로 삼을 정도라면, 조선의 퇴락과 낙후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는 새로운 국가가 등장했어야 한다. 그러나 나타나지 않았다. 실학이 등장하기는 해도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 했다. 새로운 국가를 세울 새로운 사상은 없었다. 그렇다고 지주-지식인-사대부 계급을 대체할 강력한 계급도 나타나지 않았다. 소작인 층은 여전히 약한 계층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낡고 반동적인 세력[서인-노론 세력]이 여전히 집권했고, 서서히 쇠잔해져 가서 백색 왜성이 되어간다.(손영식, 173)


조선이 백색 왜성이 되어간 원인이,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끊은 서인-노론 집단의 모화사상에 있음을 강조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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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권오돈「李朝의 모화사상」『신세계』1963년 6월호
* 이덕일『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서울, 김영사, 2000)
* 현상윤 지음, 이형성 교주『풀어 옮긴 조선 유학사』(서울, 현음사, 2003)
* 손영식『조선의 역사와 철학의 모험』(울산, 울산대학교 출판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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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1) 홍익한(洪翼韓)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의 죽음을 말한다.
(주2) 만동묘(萬東廟)의 제향(祭享)이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만동묘를 세워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 그리고 남쪽으로 쫓겨 간 의종(毅宗)을 제향(祭享)하기 위한 것이다.
(주3) 숭정(崇禎)과 영역(永曆)은 명나라 말기 의종(毅宗; 1628~1644)과 영명왕(永明王; 1647~1662)의 연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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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