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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4) --- 사회적인 조건 ①

김승국


1. 중립정책-사회적 평화-평화경제의 3박자


어느 나라이든지 대외적으로 중립외교를 펼치려면, 국내사회가 평화로워야한다. ‘사회적 평화’가 중립외교의 필요조건이다. 국내에서 사회적 평화가 유지되어야 위정자들이 대외정책으로서 중립외교를 전개할 수 있다. ‘사회적 평화’가 좀 낮선 용어이므로, ‘평화 지향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평화의 상태’라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다.


더욱이 중립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내의 사회적 평화가 필수적이며, 중립국가가 된 다음에 사회적 평화가 강화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코스타리카,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의 국가들은, 중립국가가 되기 이전에 사회적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중립국가가 된 이후에 사회적 평화가 질적으로 향상되었다. 대내적으로 사회적 평화를 위해 노력한 집권세력이 대외적으로 중립정책을 펼치며 국익을 신장시키는 사례를 영세중립가에서 볼 수 있다. 코스타리카의 아리아스(Arias)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영세중립 국가의 틀을 강화하면서 사회적 평화를 질적으로 향상시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코스타리카 뿐만 아니라 스위스ㆍ오스트리아 등의 영세중립 국가의 지도자들은, 영세중립 정책을 통해 전쟁을 회피하며 중립정책을 통한 평화 배당금(Peace Dividend)을 경제발전에 돌려 윤택한 ‘평화경제(Peace Economy)’를 일궜다. ‘중립정책-사회적 평화-평화경제의 3박자’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3박자를 이루어내는 정치세력이 한반도에서도 등장하여 중립화 통일을 성취해야할 것이다.


‘중립정책-사회적 평화-평화경제의 3박자’에 관한 이론적인 틀이 없으므로, 비교평가를 통한 이론화를 시도한다. 비교적 ‘중립정책-사회적 평화-평화경제의 3박자’를 갖추려는 정치세력과 비교적 ‘중립정책-사회적 평화-평화경제의 3박자’를 갖추지 못한 정치세력을 상호비교하면 좋을 듯하다.


사회적 평화(국내)-중립정책(대외)의 짝을 이루며 평화경제 발전을 도모한 정치세력(임금, 대통령, 정당, 정권)을 'A'라고 표현한다. 이와 달리 사회적 비평화(주1)(국내)-종속외교(대외)의 짝을 이루는 ‘비평화 경제(평화 지향적이고 지속가능한 경제에서 벗어난 경제, 사회갈등을 증폭시키거나 분쟁ㆍ전쟁 지향적인 경제체제, 현재의 한반도 분단체제 아래의 경제체제)’를 ‘B'로 표기한다. A의 상징은 코스타리카의 아리아스 정부이다, 한반도에서는 광해군(光海君) 정부가 A에 가깝다. 이에 반하여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仁祖) 정부는 B에 가깝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은 자료를 소개한다.


“사전(私田)의 확대 및 사유(私有)의 증대는 선조(宣祖) 이후 특히 1592년부터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기 및 그 이후에 더욱 심하였다. 임진왜란에 의하여 전국이 적에게 유린되자 농민은 이산(離散)하여 토지는 황폐화(荒廢化)하고 막대한 인구는 사망하였다. 인조 4년(1626년)의 기록에 의하면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국의 인구는 전전(戰前)의 6분의 1 내지 7분의 1로 감소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숫자는 정확한 통계라고 할 수는 없으며 또 인구의 감소가 전부 사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로써 당시의 참상은 추측된다. 광해군 3년(1611년)의 호조(戶曹) 판서 황신(黃愼)의 상계(上啓)에 의하면 전쟁전의 170만 8천여 결(結)에서 54만 1천여 결(結)로 전적(田籍)에 등록된 토지의 결수(結數)가 감소되었다고 한다. 인조 12년(1634년)의 실기(實記)에 의하면 당년(當年)의 전적결수(田籍結數)는 89만 5,489결이었으나 그 중 기전결수(起田結數; 경작하고 있는 토지)는 불과 54만 860결이었다.”(조기준,  193~194)


선조ㆍ인조처럼 중립외교를 멀리하고 모화 사대주의에 빠진 임금이 전쟁(임진왜란ㆍ정묘호란ㆍ병자호란)을 유발하여 막대한 인구가 사망ㆍ감소(7분의 1로 줄어듦)하고 농사짓는 토지의 면적이 170만 8천결(임진왜란 이전의 면적)에서 54만 860결로 급감했다. 만약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아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지속되었다면 후금에 의한 정묘ㆍ병자호란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경지면적도 임진왜란 이전인 170만 8천결을 웃돌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금 'A(광해군 정부)'의 ‘중립정책-사회적 평화-평화경제의 3박자’가 증명되고, ‘B(인조 정부)’의 ‘사대 모화주의 정책-사회적 비평화-비(非)평화 경제의 3박자’가 확인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조선의 후기 역사는, 중립외교 정권인 A가 몰락하고 사대 모화주의 정권(서인ㆍ노론 정권)인 B가 3백년간 지속되다가 조선왕조의 멸망(망국)을 맞이한다. 망국에 이은 일제 36년 식민지의 사대주의 유산이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어 분단체제가 강화된 결과 중립외교ㆍ중립정책이 숨 쉴 공간이 사라졌다.


이렇게 중립외교ㆍ중립정책(A)이 숨 쉴 공간이 사라진 ‘B의 3백년 지속~일제 지배~분단의 과정’을, 중립-사회적 평화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중립의 가치와 동떨어진 B(인조반정 이후의 사대 모화주의 정권, 즉 서인ㆍ노론 정권)의 3백년 역사 속에서 발생한 사회적 비평화를 설명하고, 사회적 비평화의 담지자인 민중들이 B의 학정에 저항하면서 민란ㆍ농민전쟁을 일으킨 과정을 기술한다. 동학 농민전쟁을 진압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으나, 또 다른 외세인 미국ㆍ소련ㆍ중국이 한국전쟁 때 개입하는 바람에 한반도가 분단되어 A의 ‘중립정책-사회적 평화-평화경제의 3박자’를 이룰 수 없게 된 맥락을 살펴본다.


2. B에 의한 사회적 비평화


B 즉 인조반정 이후의 사대 모화주의 정권인 서인ㆍ노론 정권이 3백년간 지배하면서 발생한 사회적 비평화를 설명한다. ‘사회적 비평화’란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으므로, 20 대(對) 80의 사회 속에서 일어난 ‘구조적 폭력’(주2)이라고 풀이하면 좋을 것 같다. 21세기 신자유주의 사회의 대명사인 ‘20 대 80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폭력이 한국 사회의 최대의 화두이다. 그런데 이러한 화두는 신자유주의 이전인 조선 후기에서도 발견된다. 서인ㆍ노론 정권과 관련이 있는 20%의 지배계급이 80%의 피지배계급을 통치하면서 숫한 구조적 폭력이 발생했다. 농업 중심의 20 대 80사회에서 발생한 구조적 폭력의 양상과 구조적 폭력이 민란ㆍ농민전쟁으로 이어진 배경을 다음의 글에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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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1) 제3세계 국가의 난개발(maldevelopment)-개발독재로 인한 민중들의 평화상실(peacelessness)을 ‘비평화’라고 부를 수 있다. 비평화는 제3세계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선진국의 주변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도 비평화의 삶을 살고 있다.
(주2) 종래에는 평화란 전쟁‧ 분쟁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아와 같이 평화를 상실한 상태(peacelessness)가 있다. 여기에서 평화를 ‘폭력의 부재’라고 보자. 이때의 폭력이란 ‘잠재적인 실현성(the potential)과 현실(the actual), 또는 달성되어 얻을 수 있는 것과 현실의 상태의 격차가 생기는 원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폭력은 행위자가 존재하는 직접적-인위적인 폭력(personal violence)과 행위자가 부재하는 간접적-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으로 대별할 수 있다. 구조적 폭력이란 경제‧ 정치(권력)‧ 사회적인 격차나 차별이며 생존기회의 불평등을 포괄한다. 이러한 구조적 폭력을 포함하는 평화(구조적인 폭력을 지양하는 적극적 평화)‧ 폭력 개념은 요한 갈퉁(Johan Galtung)에 의해 제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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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조기준『한국 경제사』(서울, 일신사,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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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