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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2) ---역사적인 조건 ⑩


김승국


1. ‘중립외교의  이정표’를 가로막는 차단막


최명길은 호란(정묘호란ㆍ병자호란)의 위기 극복 대안으로 변통(變通)의 논리를 내세움으로써,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이으려 했다.


변통이란 새롭게 전개되는 현실에 맞추어 때로는 명분을 굽혀서라도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명나라의 적인 후금과 겉으로는 화약을 맺고 안으로 군대를 양성하여 앞날을 대비하고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광해군이 추구한 실리외교를 조금 절충하여 ‘친명(親明)’의 관계는 유지하고 ‘和金[후금과의 和親]’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이화, 318)


이렇게 광해군 중립외교를 변용한 최명길의 ‘변통’은 고집불통의 척화파에 의해 단절되었다.


최명길은 청의 진영을 오가며 화의에 앞장섰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온갖 수모를 겪으며 난국을 화의(和議)로 건지려 했다. 그러나 척화파는 심지어 칼을 꼬나들고 면전에서 그를 죽이려 했다. 임금은 척화파를 누르고 주화파인 최명길ㆍ장유 등을 감쌌다. 이런 분란 속에서 최명길은 눈물을 흘리면서 항복문서를 손수 써야 했다. 이때 김상헌이 들어와서 항복문서를 빼앗아 북북 찢어버렸다. 존명(尊明) 의리를 밥처럼 먹고 사는 자들[척화파]과 존명 의리를 잠시 접고 살길을 찾아보자는 자들[주화파], 어느 쪽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방책이겠는가? 끝까지 목숨을 걸고라도 본질을 굽히지 않는 것이 ‘대의명분’이라면, 본질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방법을 바꾸어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 ‘권도(權道)’이다. 최명길의 타협적 노선도 권도였다.(이이화, 320)


최명길의 저작인『지천집(遲川集)』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청음(淸陰; 김상헌)의 척화는 수경(守經) 한 가지였으나 나의 주화는 지경(知經)하여 달권(達權)한 것이다. 나의 마음은 고리같이 둥글어서 돌아갈 줄을 안다.”


‘수경’은 근본을 지킨다는 뜻이지만 ‘지경’과 ‘달권’은 근본을 알지만 적절하게 방편을 쓴다는 것이다. 얼마나 자신의 행동에 신념을 가졌다는 말인가?(이이화, 322)


고리같이 둥글어서 돌아갈 줄 아는 마음으로 적절하게 방편을 쓰는 최명길의 중립외교는,『주역(周易)』의 ‘중(中)-시중(時中)’을 연상케 한다. 모나지 않은 원만한 세상 속의 중립지대를 상징하는 ‘중(中)’은 중립화의 상징적인 단어이다. 주역의 시중정신(時中精神)에 따라 中(중립)의 시(時)ㆍ위(位; 공간)를 찾아 중립화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통해 이 길을 걸었으며, 최명길도 변통하면서 이 길을 걸으려했다. 그런데 이 길의 길목에서 중립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한 세력이 있었다. 바로 척화파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서인 척화파이다. 서인 중에는 최명길과 같은 주화파도 있었으므로, ‘서인 척화파’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서인 척화파’가 광해군~최명길로 이어지는 중립외교의 맥을 끊어놓은 것이다. 중립외교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자리에 ‘척화-척사(斥邪)’의 팻말을 박은 것이다. 이 팻말은, 인조반정~김상헌의 척화(斥和)~효종의 북벌정책~위정척사로 이어지는 ‘사대 모화주의의 이정표’이다. 이 이정표는 광해군의 중립외교~최명길의 주화(主和)~소현세자~실학~개항으로 이어지는 ‘중립외교의 이정표’를 가로막는 차단막이 되었다.


중립(중립외교ㆍ중립화ㆍ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관점에서 광해군 이후의 역사를 평가하면, ‘중립외교의 이정표’와 ‘사대 모화주의의 이정표’가 대립한 결과 후자가 전자의 기를 꺾어 득세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자의 ‘중립(중립외교)’의 기운을 제압한 세력은 서인 척화파이고 그 중심인물은 김상헌ㆍ송시열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김상헌~송시열로 내려온 사대 모화주의가 19세기말의 국제정세에 조응하지 못한 결과 망국(조선왕조의 멸망)의 이정표가 되었다는 점이다.


2. 영세중립 원년 이후


1815년의 영세중립 원년 이전에 광해군의 중립외교~최명길의 주화(主和)~소현세자~실학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역사의 주류가 되었다면, 조선 땅도 일찍이 스위스처럼 영세중립 국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통탄스럽게도 영세중립 원년 이전의 인조반정~김상헌의 척화(斥和)~효종의 북벌정책이 역사의 주류가 되는 바람에,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가는커녕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통한의 역사를 잘 정리한 이덕일 박사의 글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이덕일, 2009, 317~341 요약)

정묘ㆍ병자호란은 사실상 인조반정 체제가 자초한 전화(戰禍)로서 반정체제의 시대착오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한 것이었다. 그러나 호란 이후에도 반정체제는 붕괴하기는커녕, 변화와 개방에 대한 모든 요구를 억압하면서 더욱 보수ㆍ반동적인 성격으로 나아갔다. 반정체제는 성리학 사상의 조선적 변형인 소중화(小中華) 사상을 지배이념으로 삼아 다른 모든 사상을 억압했고 이는 인질생활 도중 개방적 현실주의자로 변모한 소현세자를 독살할 정도로, 독존적 행태로 나타났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현실주의자의 죽음이자 개방주의자의 죽음이었고, 이로써 조선은 개방과 현실의 기회를 잃고 더욱 폐쇄적인 사회로 나아갔다.
인조반정 체제는 노론 일당 독재체제로 전환되었다. 이어 순조의 장인 김조순(金祖淳)이 주도하는 세도정치로 이어졌다. 이제 조선은 노론 일당독재에서 노론의 한 일가(一家) 독재로 더욱 전제화된 것이었다.
세도정치 아래 국왕은 명목뿐인 존재에 불과했고,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민중들은 민란으로 노론 일당체제 및 세도정치에 저항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대원군은 과감한 개혁정책들을 단행했으나 왕권 강화라는 수구적 지향점을 지님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대원군의 실각은 고종의 친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고종은 서세동점의 한 가운데 놓인 조선을 이끌어 나갈 만한 비전과 역량을 갖고 있지 못했다. 지배계급의 개혁 실패로 동학으로 대표되는 민중들이 직접 개혁의 장에 나섰으나 지배계급은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여 이를 진압했다. 동학농민 혁명의 실패는 조선의 식민지화에 저항하는 마지막 기운이 무산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고, 그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잇달아 승리함으로써 조선 점령을 확정지었다.
조선의 멸망은 비극이었지만 더 큰 비극은 인조반정 이후 약 300여 년간을 집권해 온 노론이 국망(國亡)에 책임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일제에 협력해 지배층의 지위를 온존했다는 데 있다. 노론 인사 어느 누구도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지배층 중에서는 그나마 야당이었던 소론[주화파의 후예]과 재야 남인들 중 일부만이 독립운동에 나섰다.(이덕일, 2005, 16~20)


일제는 조선 점령 직후인 1910년 10월, 76명에 달하는 한인들에게 이른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했다. 대부분 이씨, 민씨 등 왕족들과 집권 노론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합방공로작으로 일제 강점기에도 귀족의 지위를 누렸다.


일본이 비록 영토를 점령했어도 이들 매국 사대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리 순조롭게 대한제국을 병탄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노론이 대다수인 ‘한일합방 공로작 수여자 명단’은 대한제국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지배구조를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노론은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잠시 동안 정권을 내준 것을 제외하고 조선 멸망 때까지 집권했다. 300년 가까운 기나긴 세월을 집권한 정당의 당인들이 나라 팔아먹는데 앞장선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이런 노론 당파의 일부 후예들이 조선사 편수회에 들어가 식민사관을 형성하면서 역사권력을 독점한다. 이렇게 된 근본원인은 해방 후 수립된 정부 성격이 민족정체성 수립과 거리가 있었던 데 있다. 역사를 퇴행으로 몰아갔던 노론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이 현재까지 한국사의 주류행세를 하는 잘못된 현실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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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이덕일『살아 있는 한국사 (3)』(사울, 휴머니스트, 2003)
* 이덕일『교양 한국사 (3)』(서울, 휴머니스트, 2005)
* 이덕일『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고양, 역사의 아침, 2009)
* 이이화『왕의 나라 신하의 나라』(파주, 김영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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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