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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1) ---역사적인 조건 ⑨

김승국


앞의 글에서 주화ㆍ척화의 논쟁을 해석학적으로 이해하면서 중립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최명길ㆍ김상헌의 和-戰-守 논쟁은 오히려 변증법적이다. 和와 戰은 안티테제(Anti These)인데 어떻게 ‘守(백성의 목숨ㆍ민족의 생명ㆍ임금의 목숨ㆍ사직을 지킴)’라는 Synthese로 수렴할 것인가의 논쟁이어서 변증법적이다. 기본적으로 和를 These로 삼는 최명길과 戰을 These로 삼는 김상헌의 和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두 사람 사이의 이해의 지평이 다르기 때문에 지평 융합(Horizontverschmelzung)하기 힘들다. ‘和(청나라와의 강화)=降(항복)’이라는 김상헌은 ‘戰해야 和의 길이 열린다’는 모순 속에서 守를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최명길은 ‘和=降’의 등식은 성립되지 않고 和를 통해 戰(패전)을 피하는 게 守(백성의 목숨ㆍ민족의 생명ㆍ임금의 목숨ㆍ사직을 지킴)이므로 ‘和=生/ 戰=死’라는 것이다.


1. 김상헌의 말뿐인 척화론


김상헌이 和는 降(항복)이요 싸우는 것(戰)만이 守라고 주장하며 목청을 높이고 있지만 말뿐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점을 간파한 최명길이 임금 앞에서 ‘김상헌은 말로만 척화를 주장하며 싸우자고 한다’고 힐난한다. 이러한 최명길의 비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김상헌은 인조가 삼전도에 나가 청나라 임금을 향하여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리기 이틀 전인 1월 28일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끝까지 싸우자며 척화론을 전개하던 모습과는 너무 동떨어진 비겁한 행동이다. 오히려 청나라와 강화하자는 주화파의 신하들이 삼배구고두례를 마치고 돌아온 임금을 맞이했고, 끝까지 싸우자는 김상헌은 그 자리에 없었다. 말뿐인 척화론의 실체를 보는 듯 한 장면이다.


김상헌은 죽을 때까지 싸우자는 파(척화파)였는데, 정작 스스로는 무기를 잡고 싸우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정권을 잡을 때 국가는 파탄이 난다.(손영식, 72)


김상헌 등의 척화론자들이 “나라의 흥망을 돌아보지 않고 [명에 사대하며] 청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홍문관 관원들 역시 “국가가 망하더라도 [숭명배청하겠다]”를 운운하였다. 국제정치와 외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은 무책임한 망언들에 해당한다. 명분론자들은 별다른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고 대명사대(對明事大)를 위하여 의리 때문에 전쟁을 감수한다는 태도였다. 전란[병자호란] 이후 19세기까지 조선을 이끈 지도적 이념은 김상헌의 척화론ㆍ반청론[청나라 반대론]이었다. 명이 사라진 이후에도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였다. 조선이 청이 지배하는 중국보다 문명국임을 자처하는 소중화주의는 조선후기 집권층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이는 ‘북벌론’(北伐論)의 논리적 토대이기도 했다.(이삼성, 529ㆍ553)


2. 송시열의 등장


김상헌 등의 척화론자에 송시열이 포함된다. 김상헌ㆍ송시열 등의 서인이 병자호란 이후 줄곧 조선정치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끊은 것이 결정적이다. 병자호란을 유발하고도 책임을 지지 않은 서인 집단이 주도한 인조반정은, 중립외교의 전승을 막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에서 완벽한 참패를 한 정권, 국가를 멸망의 위기에 몰아넣은 정권, 그러나 후금의 명나라 정복전략 때문에, 후금에 의해서 일부러 다시 심어진 정권-이것이 바로 서인 정권이었다. 어떻게 보아도 그런 정권은 물러났어야 했다. 전쟁의 참패 때문이라도, 혹은 후금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국가의 기강과 민족자존을 위해서라도 그 정권은 물러났어야 하며, 나아가 처벌을 받았어야 했다.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을 때, 집안이면 집안, 나라면 나라, 꼭 망하게 되어 있다.
바로 이 상황에서 송시열이 등장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송시열이 젊어서 효종의 스승이었고, 그 우연한 인연 때문에 그렇게 큰 정치가가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런 우연은 우연에 불과하다. 송시열이 뛰어난 점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그것에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뒤 인조와 서인 정권에 가장 시급하게 필요했던 것-정권의 정당성, 명분이었다. 국가를 멸망에 몰아넣은 자들, 전쟁에 완벽하게 패배한 자들-그들이 다시 집권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패배에 대한 책임은 전혀 지지 않으면서 왜 다시 집권해야 하는가?
그러나 후금은 참패한 서인 정권의 인사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고스란히 그대로 정권을 잡게 해 줬다. [서인 정권이] 무능하기 때문에, 다시는 후금에 대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정권을 넘겨 준 것이다-이것은 치욕에 해당된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보고, 전율할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이 바로 송시열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탁월한 정치가였다. 물러나야 할 세력, 심판받아야 할 세력인 서인이 집권한다는 것, 그것의 정당성 부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권을 잡아야 하는가?
송시열은 그것을 소중화(小中華) 이론으로 제시한다. 효종은 북벌 이론으로 제시한다. 이 두 이론은 손바닥과 손등에 해당된다. 패배했기 때문에 설욕해야 한다-이 북벌론은 단순하다. 게다가 전쟁 참패의 책임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설욕은 꼭 진 자가 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한 번 진 것으로, 실력이 형편없는 것으로 드러난 자들이 다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문제가 크다.
소중화론-이것은 좀 고차원적이다. 조선을 문명국가로 규정하고, 문명 수호 작업을 말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십자군 전쟁, 종교 전쟁의 분위기가 될 것이다.(손영식, 75~76)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파탄 낸 인조반정을 통해 집권한 서인이 전쟁을 일으키고도 재집권함으로써 중립외교 추진 세력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조반정은 중립외교 세력 대(對) 사대주의 세력의 대결에서 후자, 즉 서인 집단이 승리한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의 불행이 광해군에 그치지 않고 소현세자에게도 적용되면서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1636년 12월의 병자호란으로 인질이 되어 심양에 연행된 지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1612~45)는 현명하고 국제정세에 밝아서 광해군의 중립외교의 맥을 이어갈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인조와 서인 정권은 소현세자를 질시하고 있었다. 청의 구왕(九王)과 너무 가까운 사이가 되어 돌아온 소현세자가 다음 왕위 계승자가 되어서는 자기네 서인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소현세자는 앞서 서인들에게 밀려난 15대 광해군과 같이 당쟁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거세되고 만다. 이와 같이 명청(明淸) 교체기에 친명파와 친청파가 국론을 크게 두 편으로 갈아놓고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친청; 광해군-主和--소현세자 ---- 실학 ---개항
친명; 인조---斥和-봉림대군(효종)-위정척사 -의병


다시 말해서 17,8세기의 조선왕조가 갈 길은 친청이냐 친명이냐의 두 길밖에 없었는데 조선은 친청의 길을 택하지 않고 친명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실리를 버리고 의리를 택한 것이다. 이(利)보다 의(義)가 더 중요하다는 의리론에 입각한 대외정책이었다.(박성수,  377~378)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나라인 명에 대한 의(義)를 중시하는 대외정책이 서인 정권에 의해 지속되었고,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광해군 축출ㆍ소현세자의 정치적 살해가 일어나면서 중립외교 추진세력-주화파가 거세된다. 거세된 자리 위에서 실학파(북학파)가 사대 모화주의를 비판했으나 대명사대(對明事大)의 대외정책을 폐기하는데 까지 이르지 못한 채 조선 말기의 개항이라는 정치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끝에 일제의 식민지가 된다. 또한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한 일제 지배의 유산이 분단체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간 것이, 오늘날 영세중립 정책을 구사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분단시대의 우리들이, 청나라와 타협하여 실리를 얻으려던 광해군을 버리고 죽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 청과 대립하는 인조의 정책을 따르고 있는지 모른다. 또 최명길을 버리고 김상헌을 따르고 있는지 모른다.(박성수,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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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박성수『조선시대 왕과 신하들』(서울, 삼영사, 2009)
* 손영식『조선의 역사와 철학의 모험』(울산, 울산대학교 출판부, 2005)
* 이삼성『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파주, 한길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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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