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27) --- 지정학적인 조건 ①

김승국


1. 스위스의 지정학적인 조건


스위스의 지형은 2개의 습곡(褶曲) 산맥(알프스 산맥ㆍ쥬라 산맥), 이 두 산맥 끼어있는 구릉지대인 ‘미텔란트(Mittel Land)’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중앙 알프스를 수원(水源)으로 하는 주요 하천이 유럽과 연결되어 있다. 스위스는 산협(山峽)으로 둘러싸인 전략적ㆍ지정학적인 거점이기 때문에, 로마제국에 편입된 이후 스위스의 요충지대에 대한 인근 국가들의 침공ㆍ지배를 받았다.(浦野起央, 77~78)


스위스는 프랑스, 독일, 이태리와 같은 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다. 스위스 지역이 역사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신성 로마제국 시대부터인데, 스위스 칸톤(canton; 스위스 산악지대에 있었던 공동체 형태의 자치지구)들이 교류의 중심지였던 지중해와 서유럽을 이어주는 중요한 산악 통로인 ‘생 고타르 고개(Saint Gotthard Pass)’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동 스위스를 거점으로 삼은 합스부르크가(家)는 1200년 무렵 중요 교역로인 생 고타르 고개를 지배하에 두려고 하였다. 각 신성로마 황제도 이태리 경영을 위하여 이 고개에 주목하고 있었다.(박후건, 37~38)


이와 같은 대외적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스위스의 3개주(州)가 1315년에 동맹을 서약했으며, 1352년에 8개주의 동맹으로 확대되었다. 이어 내부대립과 대외간섭을 극복하면서 1513년에 13개주의 동맹으로 발전했다. 그 뒤 종교전쟁에 휩쓸렸으나 불편부당한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교훈을 되새기면서 1674년에 외교의 기본정책으로서 무장중립을 선언했다. 이어 1815년의 빈 체제에서 스위스의 영세중립이 국제법상 승인되었다.(浦野起央, 78)


그리고 16세기의 유럽에 프로테스탄트 개혁(The Reformation)의 열풍이 불어 닥치는데 지리적으로 유럽 중심부에 위치한 스위스는 이 개혁의 중심지가 된다, 구 스위스 연합은 로마 가톨릭 구교와 프로테스탄트의 신교로 분리되었다. 구교ㆍ신교 사이에서 대립한 주들 사이에 1529~1531년에 내전이 일어났지만,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사이며 개혁의 주동자였던 울리취 츠빙글리(Ulrich Zwingli)가 전투에서 죽으면서 내전은 일단락 지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스위스 내 신ㆍ구 양파의 분열과 대립은 스위스 중립정책의 또 다른 동기가 되었다. 30년 전쟁(1618~48년) 때에도 구 연합을 와해로 몰고 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중립을 지키게 된다.
스위스 구 연합은 유럽의 30년 전쟁 동안 오히려 번영을 구가한다. 각 세력은 전쟁을 유리하게 전개시키기 위하여 용맹스럽고 믿음직한 구 스위스 연합 용병들을 앞다투어 고용하였다. 또한 그 어느 누구도 유럽 중심부에 위치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스위스가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위스가 중립으로 남아 있어 주기를 원했다.
당시 유럽 주요 세력들이 스위스에게 사실상의 중립을 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유럽 중심부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에 위치해 있고 강력하고 용맹스러운 군대를 가지고 있는 구 스위스 연합이 구교와 신교세력 중 어느 한쪽에 가담하면 세력의 균형이 깨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박후건, 2007, 42-43)


이처럼 스위스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지정학적인 조건이 중립화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전략적 요충이 오히려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불러일으키는 악조건이 되기도 했다. 스위스가 신성 로마제국의 침략을 받고 합스부르크가(家)의 거점이 된 점이 이를 증명한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스위스의 지정학적 조건이 중립화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고 강대국의 침략을 받는 악조건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살리고 악조건을 지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정치집단의 존재 여부가 중립화의 관건이다. 스위스의 경우 그러한 능력을 지닌 정치집단이 등장하여 영세중립을 이루어냈지만, 조선의 경우 중립외교를 시도한 광해군의 축출이후 그러한 능력을 지닌 정치집단이 나타나지 않아 중립화의 길을 걸을 수 없었다. 중립화는커녕 외세에 의한 식민지(일제 침략), 외세를 끌어들인 전쟁(한국전쟁)에 이은 분단시대를 맞이했다.


  1) 제1차 세계대전ㆍ제2차 세계대전의 고비를 잘 넘겨


스위스는 오랫동안 중립의 전통을 지켜왔는데, 제1차 세계대전 때 스위스의 독일어권과 프랑스어권 사이에 내부 동요를 보여 분열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 때 ‘연대에 의한 평화’를 추구한 스위스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제한적 중립의 입장을 인정받았다(런던 선언). 그런데 국제연맹이 집단 안전보장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스위스는 1938년 4월에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중립을 재확인했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스위스는 중립을 유지하면서 앙리 기장(Henri Guisan) 장군의 ‘보루 계획[스위스의 산악지형을 보루로 삼아 국토를 방어하는 전략]’에 의한 민중의 철저한 항전 태세가 스위스의 무장중립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스위스는 주변 강대국인 독일ㆍ프랑스ㆍ이태리 문화권에 모두 속해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이지만 스위스의 국민의식은 ‘스위스人’을 표방한다. 각각의 언어[독일어ㆍ프랑스어ㆍ이태리어]로 기록된 문학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스타일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의식과 행동이 스위스의 자립성을 가능케 한다.
[독일ㆍ프랑스ㆍ이태리 민족이 균형을 이루는] 스위스의 독특한 민족형성은, ‘민족의 확대라는 지정학적인 팽창국가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유럽통합을 에워싼 우여곡절 속에서도 독자적인 선택이 가능하게 되었다.(浦野起央, 2006, 77-78)   
 

스위스는 독일ㆍ프랑스ㆍ이태리에 의해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민족ㆍ언어 지도’가 독일ㆍ프랑스ㆍ이태리로 3분되어 있다. 이러한 다민족ㆍ다언어의 스위스에서 정치ㆍ사회적 통합력이 발휘되지 못하면 민족분규ㆍ언어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며, 스위스를 에워싼  독일ㆍ프랑스ㆍ이태리가 개입하여 영세중립의 틀을 깰 가능성이 있다. 지정학적인 조건에 따르는 민족ㆍ언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면 영세중립이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면서 국민통합을 이루어내면 영세중립을 견지할 수 있다. 스위스는 후자의 길을 걸어왔으며, 지정학적인 요소와 민족적인 균형을 활용하여 영세중립의 모범국가로 발전해왔다.


2. 조선 정부의 선택


유럽의 근대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30년 전쟁(1618~48년) 때 중립을 지키며 번영을 구가한 스위스. 동양 근세사의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한 ‘明(명나라)ㆍ淸(청나라) 교체기’에, 중립외교의 선구자인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1623년에 발생)이 일어난 조선. 거의 동일한 시기에 동서양에서 일어난 전쟁(유럽의 30년 전쟁, 중국의 明ㆍ淸간 전쟁) 속에서 스위스는 중립의 길을 다졌는데, 조선은 광해군이 이끄는 중립의 길을 중단하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집단에 의해 사대 모화주의(事大 慕華主義)의 길로 선회했다.


당시 유럽의 국제정세와 동양의 국제정세의 차이점이 있으므로 ‘중립의 길을 다진 스위스와 조선을 비교하는 게 무리이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明ㆍ淸 교체기’라는 동일한 동양의 국제정세 변환 속에서 조선 정부와 일본 정부가 어떠한 대응을 했는지 살펴보면, 반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다.


이미 밝혔듯이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 정부는 사대 모화주의(事大 慕華主義)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일본은 조선 정부와 달리 ‘화이변태(華夷變態)’의 전략을 구사했다.


17세기 후반에 남명(南明)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유학자 하야시 슌사이(林春齊)는 자신이 편찬한『華夷變態』(1674)의 서문에서 “이것은 화(華)가 이(夷)에 의해 대체되는 사태이다(是華變於夷態也)...만약 夷가 華에 대신하는 사태가 된다면, 비록 남의 나라 일이기는 하지만 이 어찌 상쾌한 일이 아니겠는가?”고 기술했다.


명나라의 멸망을 상쾌하게 받아들여 ‘화이변태(華夷變態)’의 변신을 한 일본. 華(명나라)ㆍ夷(청나라)의 지배체계가 뒤바뀐 현실을 일본처럼 인정하지 않고, 멸망한 명나라를 끝까지 숭배하며 ‘숭명배청(崇明排淸)’을 외친 조선. 어느 쪽이 현명한가?   
------------
<인용 자료>
* 박후건『중립화 노선과 한반도의 미래』(서울, 선인, 2007)
* 浦野起央『地政學と國際戰略』(東京, 三和書籍, 2006)
----------
*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