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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17) ---역사적인 조건 ⑤

김승국


1. 광해군의 군사적인 중립 정책


  1) 강홍립에 내린 밀지 “觀形向背”


여진의 후금이 만주에서 일으키는 새로운 정세에 면밀하게 대처한 광해군은, 현명한 외교정책을 써서 국제적인 전란에 빠져들어 가는 것을 피하였다. 인조정권과 달리 광해군의 외교노선이 후금의 경계심을 풀고 조선을 비교적 중립적 세력으로 인식하게 했다는 점은 일정한 근거가 있다. 1619년 살이호 전투에 원군을 파견할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에게 밀지를 내려 “상황을 보면서 처신할 것이지 적에게 이동하는 것을 보여주어 먼저 공격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이삼성, 536)


광해군은 명나라의 강력한 요구와 출병에 동조하는 조정 대신들의 압력에 못 이겨 끝내 명나라에 대한 파병을 결정한다. 사면초가에 몰린 끝에 1만 3,000여 명의 원병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임명하였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은밀하게 불러 “정세를 잘 살펴보고 행동을 결정하라(觀形向背)”는 밀지를 내렸다. 또 광해군은 강홍립이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그대는 명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패전으로 군사를 죽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행동지침을 보냈다.(이이화, 203)


광해군이 강홍립에 내린 밀지 ‘觀形向背’는 군사적인 중립정책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제아무리 중립외교를 잘해도 군사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패한다. 군사적인 중립정책이 중립외교의 후방기지 역할을 해야 중립화에 성공한다. 기미책과 자강책을 절묘하게 배합한 광해군의 외교 전략은, ‘觀形向背’의 군사적 중립정책에 힘입어 문무를 겸비(文; 중립외교/ 武; 군사적 중립정책)하는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기미+자강+觀形向背’의 3박자를 갖춘 광해군의 외교안보 전략은 17세기뿐만 아니라, 21세기의 한반도 중립화를 위해 절대로 필요하다.


  2) 모문룡 부대에 대한 대처


광해군의 군사적 중립정책은 모문룡(毛文龍) 부대를 다루는 솜씨에서 빛을 낸다. 모문룡에 대한 광해군의 대책은 절묘했다.


요동 일대가 후금의 수중에 들어가자 많은 명나라 주민들이 조선 땅으로 몰려들었다. 1622년까지 12만 명을 헤아렸다. 그들 중에 모문룡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조선에서 군사를 모아 요동 수복의 구호를 내걸고 조선으로부터 식량과 군수물자를 지원받았다.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는 또 조선이 명나라에 등을 돌리고 후금 쪽으로 기우는 사태를 막으려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도 자임하고 있었다. 모문룡은 한때 의주 건너편에 있는 요동의 진강을 점령하였으나 곧 후금군에 밀려 다시 조선 땅으로 도망쳐왔다. 후금군은 모문룡을 잡으러 평안도 용천까지 침입해 왔다.(이이화, 204)


후금에 대한 기미책을 통해 평화를 유지해왔던 조선에게 모문룡 부대는 화근이었다. 모문룡의 존재 때문에 광해군의 중립외교의 행보가 상당히 제약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모문룡이 명나라 장수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다룰 수도 없었다.


모문룡을 무조건 배척할 수 없었던 광해군이 고심 끝에 생각해낸 대책은 상당히 기발한 것이었다. 모문룡에게 육지에 머물지 말고 섬으로 들어가라고 종용했던 것이다. 모문룡이 섬으로 들어가면 육지에 있을 때보다는 그로 인해 조선이 후금으로부터 받게 될 위협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모문룡이 나중에 철산 앞바다의 가도(枷島)로 들어감으로써 광해군의 계책은 실현되었다.(한명기, 285~286)


후금에 대한 기미책를 훼방한 모문룡을 섬으로 내몬 광해군의 지혜는, 중립외교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발휘된 것이다. 중립외교의 화근 덩어리인 모문룡의 배후에 명나라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솔로몬의 지혜가 요구되었다.


광해군과 같은 최고 정치 지도자의 중립을 위한 솔로몬의 지혜 없이 영세중립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세중립 국가인 스위스ㆍ코스타리카의 경우 광해군과 같이 지혜로운 정치 지도자들이 나서서 중립을 이루었다.


2. 몬헤, ‘콘트라 부대를 설치하라’는 미국의 압력을 딛고 영세중립 선언


코스타리카의 경우, 모문룡 부대와 비슷한 외인부대를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미국으로부터 받았다. 코스타리카의 이웃나라인 니카라과에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이 주도하는 혁명정부가 등장하자, 미국은 이를 타도하기 위한 ‘콘트라(Contras;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국이 조직한 무장 세력)’를 조직한 뒤 코스타리카를 향해 “콘트라 기지를 세우라!”는 압력을 넣는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혁명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콘트라 부대를 코스타리카 영토 안에 두기 위한 압력이었다.


이미 1948년에 군대를 폐지하여 상비군이 없는 코스타리카에 콘트라 기지(콘트라가 활용할 미군기지)를 세우고 미군부대가 주둔한다는 것은, 중립지향적인 평화헌법이 유린되는 비상사태이었다. 이러한 비상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코스타리카의 몬헤 대통령이 1983년에 영세중립을 선언하면서 미국의 압력을 물리친다. 미국의 압력을 영세중립으로 돌파한 끝에, 비무장 헌법을 수호하면서 중립정책을 펼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3. 조선의 광해군, 코스타리카의 몬헤


코스타리카의 중립 자세를 위협한 콘트라 부대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뒤흔드는 모문룡 부대는 동일한 화근 덩어리였다. 이 화근 덩어리를 코스타리카의 몬헤 대통령과 조선의 광해군이 지혜롭게 제거했다.


그런데 미국의 콘트라 부대 설치 압력을 뿌리치고 영세중립을 선언한 과정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몬헤가 1982년 5월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코스타리카는 심각한 경제위기에 부딪치고 있었다. 대외채무는 26억 달러이었으며 커피 등의 수출 가격도 부진했다. IMF(국제 통화 기금)의 지시에 의한 재정긴축 정책을 앞선 정권과 동일하게 실시할 필요가 있었다. 수도 산호세에는, CIA가 지원하는 ‘콘트라’라고 부르는 민주혁명동맹(ARDE)이 사령부와 방송국을 가지고 있었고 북부에서는 전투 기지를 설치하고 있었다. ARDE는 코스타리카의 영토 안에서 자유롭게 니카라과에 출격하고, 코스타리카로 귀환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은 코스타리카 헌법 제12조의 중대한 위반이다.
몬헤는 대통령 취임 이후 이러한 콘트라의 반(反) 산디니스타 활동을 ‘비밀리에, 억제하고, 주의 깊이 한다면 허가하겠다’는 모호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몬헤 정권은, 반공주의와 중립정책 추구의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미국이 코스타리카에 막대한 원조를 주기 때문에 미국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어서, 콘트라의 코스타리카 영토내의 활동에 특별히 관대했다.
그러나 ‘콘트라의 활동을 용인하는 것은 코스타리카의 전통적인 중립 정책에 모순된다’는 비판이 국내에서 높아졌다. 콘트라의 존재를 둘러싼 좌우의 대립이 격화하고 몇 건의 테러 사건이 일어났으며, 쿠데타 소문까지 나돌았다. 더욱이 콘트라의 폭력사건으로 농민 6명 이상이 살해된 사건이 북부지역에서 1983년 중반에 일어났다. 국민 해방당 안의 좌파는, ‘인민 동맹(좌익 정당)ㆍ노동조합ㆍ일반시민의 콘트라 국외추방 요구’를 배경으로, 중립을 유지하도록 우파의 몬헤에게 압력을 넣었다. 정권 내부의 대립도 격화했다. 그래서 콘트라의 활동에 대한 무언가 강력한 규제가 필요해졌다. 이러한 움직임에 밀려 몬헤 대통령이 1983년 9월 ‘영세적ㆍ적극적ㆍ비무장적인 중립’을 대통령 선언으로 발표했다.<『アジアㆍアフリカ研究』364호(2002 제2호) 39쪽>


광해군이 모문룡 부대를 가도(枷島)로 몰아넣었지만 조선 땅에서 축출하지 못한데 비하여, 몬헤 대통령은 콘트라 부대가 코스타리카 영토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영세중립 선언을 했다. 광해군에 비하여 몬헤 대통령이 더욱 강하게 ‘중립을 위협하는 외인부대’를 배제했다. 중립위협 세력에 대한 저항의 강도에 따라 중립화의 성공여부가 결정됨을 몬헤 대통령이 손수 보여준 것이다. 광해군의 미온적인 중립외교보다 더욱 철저한 거부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코스타리카가 영세중립국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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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이삼성『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파주, 한길사, 2009)
* 이이화『한국사, 나는 이렇게 본다』(서울, 길, 2005)
* 한명기『임진왜란과 한중관계』(서울, 역사비평사, 1999)
*『アジアㆍアフリカ研究』364호(2002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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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