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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평화 통신사 기행문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정 명령서


 
김승국    
 
 
조선 통신사가 조선-일본의 평화를 위해 왕복했던 길을 따라가면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간 ‘평화의 실크로드(Peace Silk Road)’를 개척하기 위한 ‘평화 통신사’의 기행이 2008년 10월 30일~11월 5일에 이루어졌다. (『평화 만들기』337호의 「평화 통신사 기행 참가자 모집」을 보면 기행의 목적․일정․방문지를 알 수 있다)

한국에서 16명이 참가한 ‘평화 통신사’는 오사카~교토 부근~조선인 街道(近江八幡~彦根)~나고야에 있는 조선 통신사의 유적을 따라가며, 일본의 평화 세력과 교류했다. 평화 통신사가 방문한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9조의 회(평화헌법 9조의 개악을 저지하기 위해 풀뿌리 평화운동을 전개하는 모임)’와 교류하면서 ‘21세기의 한-일간 평화 실크로드’를 다시 만들자고 다짐했다. 한국의 평화 통신사 일행과 각 지역의 ‘9조의 회’ 회원들이 버스에 동승하거나 ‘조선인 가도(朝鮮人 街道)’를 함께 걷는 가운데, 국경을 뛰어넘는 동지애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평화통신사 기행과 관련하여 두 가지 작업을 할 것이다. 첫 번째는, 평화통신사 여행의 기행문을『평화 만들기』에 ‘평화 통신사 기행문’ 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필자가 평화통신사 기행의 중요장면을 캠코더로 촬영한 것을 동영상으로 편집한 뒤『평화 만들기』의「평화누리 TV」에 올리는 것이다.

두 가지 작업은 서로 연동되어 있는데, ‘평화 통신사 기행문’의 부제와 동일한 제목의 동영상을 『평화 만들기』의「평화누리 TV」에 올릴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 통신사 기행문’을 읽는 독자들이, 동일한 제목으로 『평화 만들기』의「평화누리 TV」에 실린 동영상을 함께 감상하면 더욱 실감이 날 것이다.

그러면 2008년 10월 31일의 첫 번째 평화통신사 기행지로 들른 오사카 城의 천수각(天守閣)에서 있었던 일부터 소개한다; 평화통신사 기행단은 와타나베(渡邊 武) 前 천수각 원장의 안내를 받으며, 천수각의 1층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출정(出征) 명령서 원본’에 대하여 설명을 듣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그러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란 어떠한 인물이며, 그가 조선에서 저지른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대하여 설명한다(『위키백과(http://ko.wikipedia.org)』참조)

 

  1)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 시대의 무장으로 본래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둔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는데, 항상 신발을 들고 노부나가의 뒤를 따라다녔으며, 노부나가는 이러한 그의 충실함을 보고 신임을 하게 되어 크게 중용하였다. 히데요시는 기지와 용병술에 뛰어나 각 지방을 정벌하여 세력 확장에 공을 세워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고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았다.
히데요시는 천하인(天下人)을 자처했으며, 그의 오사카 성에는 늘 오다 노부나가에게서 물려받았다는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네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또 자신의 칼에도 천하포무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그는 1584년에 동부 일본의 큰 세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키고, 1590년에는 천황의 권위를 빌려 마지막 남은 여러 영주와 호족을 정복하여, 죽은 노부나가와 자신의 숙업인 통일을 이룩하여 100년 간에 걸친 센고쿠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였다.

 

  2)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진출에 대한 야망을 꿈꾸며 2년 후 20만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순신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점차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1598년 그가 병으로 후시미 성에서 사망하면서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 간 끌어오던 전쟁은 실패하고 일본군은 총퇴각하였다. 이 전란을 통해 일본은 전공을 과시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귀나 코를 베어가는 등 잔학 행위를 자행하였다. 또 조선의 귀중한 문화재들을 약탈하고 2-3만 명의 도공들을 납치해 이후 도자기 문화 같은 에도시대의 화려한 문화 발전을 이룩하는 터전으로 삼았다.
그가 사망한 후 일본은 도쿠가와 세력과 도요토미 충성세력간의 전쟁인 세키가하라 전투와 토요토미 지지자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졌다. 이로써 도요토미 정권은 2대째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에서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을 말한다. 조일전쟁, 또는 정유재란과 구분하여 제1차 조일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왜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삼포왜란과 같은 이른바 '일본인들의 소요'가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이므로 이러한 명칭은 옳지 않다. 일본은 개전 초반에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중반에 이르면서 조선군과 의병의 강렬한 저항, 명나라의 조선 지원 등에 의해 7년 만에 패배하여 완전한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한편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고 부르며, 두 차례의 전쟁을 각각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 ‘게이초노에키(慶長の役)’라고 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 북조선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대체로 이를 기점으로 조선 시대를 전기와 중기로 구분한다.

 

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정 명령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출정을 명령한 문서들을 설명한다. 이 조선 출정 명령서의 원본이 천수각에 보존되어 있다. 천수각측은 이날 한국 평화통신사 일행을 위해 특별히 원본을 공개했다(천수각을 찾는 외국 관광객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인들이 이 원본을 직접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 원본을 보여주기 위해 천수각측과 교섭한 와타나베 선생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필자는, 임진왜란을 주도한 히데요시가 살았던 천수각에서 조선출정 명령서의 원본을 본 순간 ‘역사의 전율’을 느꼈다. 역사책에서만 읽던 임진왜란의 출정 명령서 원본을 직접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인지 캠코더로 촬영하는 도중에 필자의 손이 떨리기도 했다.

그러면 마음을 가라앉혀 조선 출정 명령서의 원본을 살펴보자. 조선 출정 명령서의 원본이 워낙 길쭉하게 진열되어 있어서 캠코더로 한꺼번에 촬영하지 못했다. 캠코더가 촬영한 순서대로 원본의 이름 등을 기술한다.(원본의 이름을 「 」안에 넣었다).

 

1) 「朝鮮在陣諸將連署誓紙」(文祿 2년; 1593년) 2월 27일자;
서울에서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군(쇼군)들의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 장군들끼리 서로 앞장서서 전공을 세우겠다며 다투는 바람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래서 히데요시가 조정하여 균열을 봉합한 뒤 다이묘(大名)들의 서명을 받았다.

2) 「豊臣秀吉朱印狀」(文祿 2년; 1593년) 極月 24일자 關白宛;
나고야에 있던 히데요시가 교토에 있던 秀次에게 군량미를 회송해가라고 지시한 문서. '關白'은 천황의 후계자를 뜻하는 단어로서, 자신이 은퇴해도 영향력이 지속된다는 것을 나타냄.

3) 「豊臣秀吉朱印狀」(慶長 2년; 1597년) 2월 21일자 羽柴筑前中納言宛;
정유재란에 참전한 장군들 특히 기요마사 장군과 고니시 장군이 서로 선두에 나서며 전공을 세우겠다고 싸우자, 이틀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선두에 서라고 명령한 문서.

4) 「朝鮮の役陳立書」(慶長 2년; 1597년) 2월 21일자;
조선을 향해 출전한 군사 12,000명의 진용을 표로 나타냄, 1진, 2진, 3진...別로 단장 이름, 역할, 임무를 부여함.

5) 「熊谷內藏允等三名連署狀」(慶長 2년; 1597년) 8월 21일자, 鍋嶋信濃守宛;
조선 땅에서 일본군이 벤 조선인의 코를 수집한 보고서. "1597년 10월 1일 하루동안 金溝郡과 金提郡에서 3,369개의 코를 베었다"고 쓰여 있다.
코를 많이 벨수록 전공이 높아지기 때문에 조선인의 코를 베어 젓을 담은 뒤 히데요시가 있는 사령부로 보내 전공을 자랑했다. 교토에 있는 '코 무덤(耳塚)'은 임진왜란 때 젓 담은 조선인들의 코를 묻은 무덤이다.

6) 「垣見和泉守等三名連署狀」(慶長 2년; 1597년) 10월 1일자, 鍋嶋信濃守宛;
규슈지방 사가 현(縣) 다이묘의 전공 보고서.

7) 「豊臣秀吉朱印狀」(慶長 2년; 1597년) 11월 29일자, 鍋嶋信濃守宛;
조선의 細工人(도자기 기술자)․縫官(바느질 기술자)를 납치해오라고 히데요시가 지시한 문서.
 
* 참고 문헌; 大阪城天守閣 編『秀吉と桃山文化』(大阪, 大阪城天守閣特別事業委員會,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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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341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