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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평화 기행 (1)-아차산

김승국
    
 
{2006 반전평화 한국평화기행단}과 {평화 만들기}가 함께 준비한 아차산 평화기행이 2006년 4월 22일 오후 2시~6시에 이루어졌다. 지난 2월의 일본 평화기행 이후 국내에서 처음 실시되는 평화기행인 탓인지 참가자 숫자가 좀 저조(9명 참가)했으나 의미있는 기행이었다. 박상진 국사편찬 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 안내를 맡았다. (답사 코스: 아차산 입구→ 홍련봉 제2 보루→ 아차산성→ 대성암(大聖庵)→ 제3보루성→ 제4보루성→ 용마산 계곡으로 하산)
 
 
서울 동부지역인 광진구 한강변에 위치한 아차산(해발 285m)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백제 초기의 한성시대에 이 성은 고구려를 맞아 수도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산성을 <삼국사기>에 기록된 아단성지(阿旦城址)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산성은 조선 태조(太祖)가 아단(阿旦)을 아차(阿且)로 고쳐 아차성(阿且城)이라 불렀으며 따로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산성은 해발 200m의 산 정상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축조하여 이른바 테뫼식(鉢卷式 : 원형)에 속하지만 규모가 커서 성안에 작은 계곡도 있어 포곡식(包谷式 : 육각형)으로도 보인다. 성 전체 길이는 1,125m이며, 성벽의 높이는 외부에서 보면 평균10m정도이며, 내부에서 보면 1-2m이다. 동·서·남쪽에 문이 있던 흔적과 물길이 남아있고, 문 앞을 가려 보호하는 곡성이 남아있다. 그 밖에 여러 건물터(A.B.C.D지구)가 남아있는데, 많은 토기와 기와조각이 수습되었다. 성 중심부엔 우물이 남아 있다.

아차산성에는 2가지 슬픈 역사가 전해온다. 하나는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이 고구려에 함락되었을 때 개로왕(蓋鹵王 : 455-475)이 성 아래에서 죽임을 당했으며, 다른 하나는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溫達 : ?-590)장군이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하여 신라군과 싸우다가 이 성 아래에서 전사한 곳으로,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온달샘이 성안에 있다. 당시 독화살에 맞아 전사한 온달의 시신을 관에 담아 장지로 떠나려 하자 관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평강공주가 와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판이 났으니 편히 떠나시구려’하자 관이 움직였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개로왕 21년(475년) 9월 고구려의 장수왕은 3만 대병을 거느리고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 : 풍납토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의 상황을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와 싸우지 않으니 고구려군은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였다.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우므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들 중엔 성문을 열고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개로왕은 측근과 함께 겨우 20기의 말에 나눠 타고 성문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달아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추격당하여 살해되었다.」

이에 앞서 고구려의 첩자인 중 도림(道琳)은 장수왕에게 백제에 첩자로 들어갈 것을 청한다. 백제에 잠입한 도림은 궁성문으로 찾아가서 은근히 자신이 바둑의 고수임을 내세우며, 왕의 곁에 머물며 모시기를 청하였다. 개로왕은 그를 맞아 대국해보고 그가 과연 고수임을 알고 늦게 만난 것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왕의 신임을 얻게 된 도림은 왕을 충동하여 크게 역사를 일으키게 하니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갔고, 국고는 탕진되고 국력은 쇠약해져 갔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도림은 곧 도망하여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그러자 왕은 대로(大虜 : 2품) 제우(齊于)와 장군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에게 3만 대병을 주어 이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군은 백제 수도인 한성(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쳐서 겨우 7일만에 북성(北城)을 함락하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자, 위기를 느낀 개로왕은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곧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거느린 고구려의 추격군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두 장수는 본래 백제인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달아났던 자였다. 말에서 내린 두 장수는 과거 자신이 섬기던 개로왕에게 절 한 후 곧 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 그 죄를 들어 다스린 후 아차성으로 결박하여 보내어 살해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 제25, 백제본기 개로왕조>」

1997년 아차산성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100여점의 토기류와 30여점의 철기류, 100여점의 철제 무기류를 비롯한 수많은 유물들이 나왔는데, 주로 고구
려 계통의 토기들이 보이고 있어 고구려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백제의 옛 도읍지에 있는 아차산성은 누가 쌓았는지에 대해 아직 논란이 있지만 삼국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으로 그 의의가 있다.

 

대성암 대웅전

 

조선조 말엽 고승 전령(展翎 : ?-1826) 스님이 한때 이곳 범굴사(梵窟寺 :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 大聖庵)에 머물며 이 절을 확장시키기도 하였다. 그 후 서기 1921년(불기 2465년) 안보광(安寶光) 화상이 관음기도(觀音祈禱) 후에 서몽(瑞夢)을 받고, 이곳 절터를 찾아왔다고 한다. 스님은 석굴과 범굴사(梵窟寺)라는 암각자(巖刻字)를 확인 후에 폐허가 된 절터를 인수하여 법당(法堂)과 요사(寮舍)를 재창건하고, 관음대성(觀音大聖)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여 사명(寺名)을 대성암(大聖庵)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이후 1936년엔 중성전을, 1942년엔 극락전을 각각재건하였다.
법당 뒤편에 있는 암천정(巖天井)에는 암혈(巖穴)이 있는데, 의상대사가 주석시 쌀이 나와서 공양미(供養米)로 섰다는 전설이 있다. 그 아래 돌확엔 우물이 있는데 절의 용수로 쓴다. 1950년 한국동란엔 9.28 서울 수복시 아군의 포화로 전파된 것을 재건하였고, 그 후 1978년부터 81년까지 대웅전(大雄殿)과 요사를 비롯해 삼성각(三聖閣)과 범종각(梵鐘閣)을 재신축하였다.

 

아차산 보루성

 

아차산 일대 보루군은 출토유물이나 축성방법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며, 고구려가 5세기 후반에 한강 유역을 진압한 후 551년에 신라와 백제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하기까지의 역사를 밝혀줄 수 있는 유적이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은 아차산보루, 용마산보루, 시루봉보루, 수락산보루, 망우산보루 등 17여개의 보루로 이루어진 유적으로 그 중 일부를 제외한 10여개의 보루가 고구려의 보루로 추청된다.

아차산일대 보루군은 중랑천과 아차산, 용마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여기에 존재하는 10여개의 보루는 현재 남한 내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고구려 관련유적으로서 발굴 등을 통해 고구려 군사시설의 면모가 규명되고 있으며, 백제나 신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료가 부족하여 그동안 연구 활동이 부진했던 고구려 관련 고고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중 홍련봉(紅蓮峰) 제2보루(구의동 산 10-1)는 규모가 1506㎡에 달하는데, 2004년 4월 28일부터 2005년 7월 28일 사이에 고려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해 1차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2차 발굴 잡업을 앞두고 있다. 발굴 작업을 통해 보루성의 구조가 확인되었으며, 현재는 작업이 중단된 상태이다.
아차산 제3보루 역시 고려대학교 고고환경연구소에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연차적으로 발굴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현재 건물 유구가 드러난 상태이다.

제4보루는 1997년과 98년 사이에 서울대학교 박물관과 인물학 연구소 주도로 진행된 2차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작업으로 많은 수의 고구려 관계 토기류와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중 토기류로는 합(盒), 접시류, 병, 시루, 동이, 구절판(九折坂), 연통(煙筒) 등이 있고, 철기류로는 삽날, 쇠스랑 철촉, 등자(鐙子), 도끼와 갑옷의 복발과 소찰(小札)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 유물 중 주목되는 것은 복발(覆鉢)이다. 복발은 정수리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투구의 맨 윗부분이다. 그동안 남북한을 통틀어 고구려의 투구가 한번도 출토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 유물의 출토는 고구려 무구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건물의 구조를 밝힐 수 있는 유구도 드러났는데, 유구는 성벽과 치, 온돌, 물을 저장했던 저수시설,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토기 중에는 ‘後部都○兄(후부도○형)’ ‘支都兄(지도형)’ ‘冉牟兄(염모형)’, 등의 관직명이 확인되었다. 특히 군사들의 식기 중 ‘後部都(후부도)’란 명문이 새겨진 것은 지휘관급 것이고, ‘木(목)’자가 새겨진 것은 사병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벽(城壁)

 

성벽은 유적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데, 산정상에 위치한 까닭에 많이 훼손되었다. 유적은 285.8m의 아차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으로부터 북쪽으로 70m가량 평탄면을 이루고 있다. 평탄면의 동서쪽은 대략 15미터 가량 그 주변은 급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평탄면의 동서 폭은 대체로 15미터 가량 되고, 그 주변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섭벽은 이 평탄면에서 직선거리로 5~7미터 바깥쪽에 쌓여 있으며, 한강쪽ㅇ니 바라보이는 동쪽부분은 비교적 많은 부분이 남아 있으나 용마산쪽의 서쪽부분은 거의 훼손된 상태이다.

고구려 보루성은 삼국시대 특히 고구려 국경지대 요새의 구조와 성격, 국경방위체계, 군 편제 등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서 고구려의 남하과정, 한강유역에서의 대치와 관리방식,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과 발전과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자료제공; 박상진 위원/ 정리; 김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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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229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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