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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오키나와의 평화기행 코스

김승국

 

오키나와는 두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는 미군기지가 밀집된 기지 공화국이요, 다른 하나는 해양 휴양지로서의 면모이다. 이 두개의 얼굴은 서로 붙어 있지 않고 따로 존재한다. 해양 휴양지로서의 오키나와를 찾는 관광객은 오키나와가 미군기지 공화국임을 까맣게 잊은채 관광을 즐긴다. 미군기지 공화국인 오키나와를 찾은 진보적인 인사들은 오키나와의 무수한 평화기행 장소를 스쳐지나간다.

오키나와는 스쳐지나갈 곳이 아니다. 오키나와 섬 전체가 전쟁 · 평화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 평화 담론의 보고이다. 평화에 관한 이야기 보따리가 가득한 오키나와에서 평화의 감수성을 높이는 게 중요하지만 무턱대고 다녀서는 안된다. 평화의 이야기 보따리가 몰려 있는 곳을 순서대로 다니는 평화 기행이 바람직하다.

틀에 박힌 평화기행 코스는 없지만, 짧은 여정을 아껴가며 평화기행에 나서려면 몇가지 요령이 필요하다. 최저의 여행비로 최고의 평화 감수성을 얻기 위한 요령을 소개한다.

이틀에 한번 꼴로 저녁에 인천공항을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편을 이용하면, 나하(那覇; 오키나와의 중심도시) 공항에 밤늦게 내리므로 나하 시의 숙소에서 잘 수밖에 없다. 오키나와가 국제적인 관광도시인지라 관광객의 호주머니 사정에 맞는 숙소가 나하 시에 널려있다. 가장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한 숙소에서 하룻밤 신세지는데 4백엔(3,400원)이면 된다. <유스 호스텔이 오히려 비싸다(1,500~3,000엔 정도). 민박은 1,300~3,000엔 정도>

첫날 밤 나하에서 머물 경우 ‘森の家みんみん’에서 4백의 숙박비를 내고 잠을 청하면 된다(한국에서 예약할 경우 다이얼을 001-81-98-882-3195로 돌리면 된다). 두쨋날 오키나와 남부지방을 돌고 이토만(系滿)시에서 잘 경우 ‘系滿靑年の家’에서 6백엔(5,100원)을 지출하면 된다(예약전화 하려면 001-81-98-994-6342순으로 다이얼을 돌리시라..). 세쨋날 나하 시의 ‘森の家みんみん’에서 다시 자고 네쨋날 오키나와의 중부 · 북부 지방을 돌고 ‘名護(나고)靑年の家’에서 6백엔을 내면된다(예약 하려면 001-81-980-52-2076순으로 다이얼을 돌릴 것). 적은 돈으로 오키나와 요리를 즐기려면
http://www.cosmos.ne.jp/RV-OKINAWA/web_notes/web_notes_list.html등의 홈페이지를 접속하여 식당 · 메뉴를 미리 선정하기 바란다.

잠자리와 먹거리의 고민을 해결했으니 이제 어떤 평화기행 코스를 정할 것이냐의 선택만 남았다. 딱이 정해진 평화기행 코스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키나와 남부지방을 둘러본 다음 나하 주변을 답사하고, 중부지방을 거쳐 북부지방을 방문하면 비교적 흡족한 평화기행을 즐 질 수 있다. 이처럼 남부지방 · 나하 주변 · 중부지방 · 북부지방을 4등분하는 평화기행 코스를 안내한다.

 

1. 남부 지방

 

대형 관광버스나 마이크로 버스를 예약하지 않는 단촐한 기행일 경우 버스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나하 시의 버스 터미널에서 이토만(系滿) 버스 터미널행 32번, 89번, 33번, 46번 버스를 탄다(요금 5백엔). 시간 여유가 있는 분은 이토만(남부지방의 주요 도시)에서 캰 미사끼(喜屋武岬; 오키나와 전쟁 때 남쪽으로 내몰린 민중들이 이 절벽에 떨어져 집단자결함) · 히메유리 탑(ひめゆりの塔; 오키나와의 여학생들로 이루어진 간호부대인 ‘히메유리 학도대’가 오키나와 전쟁 때 무고하게 전사한 비극을 되새기는 기념탑) · 히메유리 평화기원 자료관(ひめゆり平和祈念資料館)을 들러 평화기원 공원(平和祈念公園)에 오면 좋다. 오키나와 전쟁의 전적(戰跡)을 둘러보고 싶은 분은 일단 평화기원 공원에 내린 다음 ‘오키나와 전적 국정공원(沖繩戰跡國定公園)’을 각 코스별로 둘러보기 바란다.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일본군 진지, 야전병원(동굴 안의 병원 포함), 오키나와인이 피난간 동굴, 전쟁 희생자의 위령비 · 위령탑 등을 빠짐 없이 보려면 적어도 이틀이 소요될 것이다.

시간 여유가 없는 분은 이토만 버스터미널에서 교쿠센도(玉泉洞)행 82번 버스(한시간에 한번 다님)을 타고 평화기원당(平和祈念堂) 입구(요금 4백엔)에 내리시라.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 평화기원 공원이며, 이 공원 안에 있는 여러 시설을 순회하면 된다. 평화기원 공원 안에는 한국인 위령탑(韓國人慰靈の塔) · 평화기원당 · 평화의 주춧돌(平和の礎; 오키나와 전쟁 때 희생된 오키나와 현민 · 일본 안팎의 모든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주춧돌) · 오키나와현 평화기원 자료관(沖繩縣立平和祈念資料館) · 각종 위령탑 · 오키나와 전몰자 국립묘지 공원 · 여명의 탑(黎明の塔; 오키나와 전쟁 때 자결한 일본군 사령관의 위령탑) · 건아의 탑(健兒の塔; 오키나와 전쟁 때 희생된 생도들의 넋을 기리는 탑)이 있다.

우선 오키나와현 평화기원 자료관 입구에 가서 관광안내 소책자를 받으시라. 이 소책자에 평화기행할 만한 곳이 자세하게 표기되어 있다.

필자가 보기에 맨처음 찾아갈 곳은 한국인 위령탑이다. 이 곳은 오키나와 전쟁 때 ‘일제에 의해 개죽음 당한 조선인 1만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세운 시설이다(주1). 종군 위안부 · 군부(軍夫)로 이 곳까지 끌여와 ‘조센삐’ ‘조센징’ 소리를 들으며 천대받다가 오키나와 전쟁의 희생양이 된 조선인들의 무덤 앞에 묵념을 올리시라...

이어 오키나와 평화기원당을 거쳐 평화의 주춧돌에서 오키나와 전쟁의 희생자 명부를 확인하시라. 평화의 주춧돌 D 구역에 있는 조선인 희생자 명단(2001년 6월 23일 현재 남한쪽 296명, 북한쪽 82명)이 새겨진 비(碑) 앞에서 다시 한번 묵념을 올리시라. ‘평화의 주춧돌’ 앞의 원형광장에서 앞바다를 건네다 보면 ‘마부니의 언덕(摩文仁の丘)’이 보인다. 오키나와 전쟁 때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몰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오키나와 최남단의 이 언덕에 선 오키나와 민초들이 집단적으로 절벽 아래의 바다 속으로 몸을 날려 자결했다. 마부니의 언덕을 향해 ‘그 어떠한 전쟁도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하시라.

그 다음에 오키나와 현 평화기원 자료관(관람료; 3백엔/ 오전 9시~오후 5시 개관/ 매주 월요일 휴관)에 들어가 평화의 감수성을 마음껏 높이는 게 바람직하다. 이 자료관은 오키나와 전쟁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평화교육의 전당이다. 1층에 있는 평화기원홀은 계단식인 231석의 고정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곳에서 평화 관련 강연회 · 영사회 · 연극 등이 펼쳐진다. 어린이 실을 지나면 정보관이 나타난다. 정보관에서 평화에 관한 각종 정보를 볼 수 있다. 많은 도서 잡지를 열람할 수 있으며, AV부스에서 오키나와 전쟁 체험자의 증언과 비디오를 볼 수 있다. 평화학습 교재 등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오키나와 전쟁을 생생하게 재현한 ‘철의 폭풍(鐵の爆風)’ ‘지옥의 전쟁터’ 등을 관람할 수 있다. 

평화기원 공원에서 나하 시로 돌아오는 도중에, 다마구스쿠(玉城)村에 있는 아부찌라 가마(系數壕;アブチラガマ), 하에바루(南風原)에 있는 육군병원호(陸軍病院壕)를 관람하면 좋다. 길이 270미터의 동굴인 아부찌라 가마는 본래 일본군의 진지호(陣地壕) · 창고로 사용되었으나,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할 당시 육군병원의 분실로 쓰였다. 지하병원으로 사용된 이 동굴에 일본군 의사 · 간호사 · 히메유리 학도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미군에 의해 전멸 당했다(오키나와 전쟁 이후에 6백여명의 시체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당시 육군병원이 오키나와의 남단으로 철수할 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부상병들이 군의 기밀을 유출할 가능성’을 염려한 군부의 지시에 따라) 청산가리 등의 독약을 마시고 죽으라고 강요를 받은 곳이다(입장료 2백엔/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관람할 수 있음).          
독약 마시기를 강요받은 또 다른 장소가 하에바루(南風原)의 육군병원호이다. 현재 동굴의 흔적만 남아 있지만, 당시 이 지역에 산재했던 병원동굴에 숨어있던 중환자 2천여명을 향해 일본군부는 ‘청산가리를 마시고 죽든지 수류탄을 터뜨려 죽으라’고 강요했다. 이 병원동굴에서 수집한 유골 · 유품이 하에바루 문화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앞에서 설명한 곳을 제대로 보려면 이토만 시에서 하룻밤 묶는 게 좋다. 샅샅이 찾아다니려면 3박 4일의 일정을 잡아야할 것같다.

 

2. 나하 시 부근

 

남부지방을 순회하고 나하 시로 되돌아와 평화기행을 해보자. 일정이 바쁠 경우 나하 시내에 산재된 위령비 · 동굴 · 호(壕) · 일본군의 슈리(首里) 사령부 · 일본군 진지 등의 오키나와 전적(戰跡)을 본 다음, (豊見城 시에 있는) 옛 일본군 해군 사령부의 호(壕)를 찾아가면 된다.

한편 평화기행만 다니면 지겨워지므로, 나하의 명물인 도자기 지구 · ‘국제 거리(國際通リ)’ · ‘평화 거리(平和通リ)’ · 공설 시장 · 슈리 성(城) · 박물관 등을 방문하는 것도 좋다. 국제거리는 낮이나 밤이나 활력이 넘친다. 국제거리는 오키나와 부흥의 상징으로서 ‘기적의 1마일’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미츠코시 백화점 반대편에서 남쪽으로 꺾어지면 평화 거리의 쇼핑 아케이드가 나오는데 남방 아시아 특유의 분위기가 배어나온다. 국제거리가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거리 · 미군이 활보하는 거리라면, 평화 거리는 서민적인 길로서 일본 패전 직후의 암시장이 번성한 곳이다.

평화 거리는, 길거리 예술가들의 활동무대이다. 맹인들이 산신(三線)을 연주하거나, (俺美島에서 건너온 장뇌삼을 팔며) 악기를 연주한다. 평화 거리는, 미 군정 시절의 가난을 극복하며 오키나와인의 정서를 풍성하게 발산했던 곳이다.
 
평화 거리의 첫 번째 큰 사거리에서 좌회전 하여 쇼핑 아케이드를 지나면 쓰보야(壺屋) 도자기 지구가 나온다. 1682년 왕명에 의해 류규 가마가 이곳으로 통합된 이후 도자기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열개가 넘는 전통도기 제조소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이 곳의 도자기 가게에서 오키나와의 인기 높은 도기를 판매한다. 쓰보야 도자기 박물관(입장료 315엔)에 도자기 명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쓰보야 도자기 지구와 국제거리에는 값싼 게스트 하우스가 많다('Dormitory Okinawa'라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룻밤 자는데 1,500엔). 나하 등에서 자주 열리는 축제(祭リ)에 참가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평화 거리의 옛날 파출소가 있던 곳을 꺾어져 들어가면 공설시장(第一牧志公設市場)이 나타난다. 이 공설시장은, 오키나와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돈벌이를 위해 조그만 점포를 차려 억척스럽게 살아온 고난의 현장이다. 그래서 그런지 공설시장 입구의 상점부터 주인이 남성이 아닌 여성인 곳이 많다. 오키나와의 풍물이 가득한 이 시장에는 돼지고기 · 열대생선 · 야채 · 과일 · 건어물 · 다시마 등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좁디 좁은 시장 골목마다 억척스런 오키나와 여성들(아줌마들)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호객한다. 미 군정 시절 미제 물건을 몰래 팔던 암시장이었던 이곳은 이제 관광객들의 ‘식도락 쇼핑’ 장소로 변했다. 오키나와 서민들의 건강미 넘치는 시장 분위기를 통해 오키나와의 냄새를 마음껏 맡을 수 있다.     

나하 관광의 꽃은 슈리성(首里城)공원 산책이다. 류규 왕조의 궁정이었던 류리성은 관람료(8백엔; 연중무휴)를 내고 들어가야 하지만 그 주변의 유적은 무료이다. 슈리성 공원을 모두 둘러보는데 약2시간 걸린다. 슈리성 공원을 거쳐 오키나와 현립 박물관에 가면 좋다(입장료 2백엔; 월요일 휴관). 현립 박물관의 1층에서 오키나와의 역사 · 자연사(自然史) 관련 전시물을 볼 수 있다. 2층에는 민속 전시실 · 미술공예 전시실이 있다.

 

3. 중부 지방

 

오키나와의 중부지방에는 미군기지가 밀집되어 있다. 이 곳의 가장 큰 미군기지로 가데나(嘉手納) 기지 · 후덴마(普天間) 기지를 들 수 있다. 나하 시에서 차를 타고 들어가는 순서대로 기노완(宣野灣)시의 한복판에 있는 후덴마 기지를 먼저 살피는 게 좋다. 기노완 시의 카카즈다카다이(嘉數高台) 공원은 해발 92미터의 낮은 언덕이지만, 그 곳에 올라가면 후덴마 기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곳은 오키나와 전쟁 당시 미군 · 일본군의 격전지이었다. 일본군이 사용했던 토치카도 보존되어 있다. 조선인 희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한 ‘靑丘の塔’이 있다. 이 곳의 전망대는, 오키나와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경승지이다. 밤에 내려다 보이는 야경이 아주 멋있다. 이 공원에 올라가면 수많은 풀벌레들이 방문자를 환영한다.

후덴마 기지의 울타리 곁에 있는 사키마(佐喜眞) 미술관의 옥상에 올라가면 지척에 후덴마 기지가 아주 가까이 보인다. 사키마 미술관은 1994년 佐喜眞道夫 씨가 사재를 쾌척하여 세운 평화 미술관인데, 丸木伊里 · 俊 부부의 ‘오키나와 전쟁의 그림(沖繩戰の圖)’을 상설 전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어 가데나 기지를 보러가자. 평방 20킬로미터의 드넓은 가데나 기지는 서태평양에서 가장 큰 미공군기지로서 두개의 활주로를 갖고 있다. 이 기지를 자유롭게 보려면 가데나쬬(嘉手納町)에 있는 ‘안보의 언덕(安保の丘)’에 올라가면 된다. 나지막한 ‘안보의 언덕’에 올라서면 미군 전투기가 이착륙하는 모습을 지척에서 확인 · 감시(monitor)할 수 있다.

중부지방은 미군기지가 밀집된 곳이므로 ‘아메리칸 타운’이 일찍이 발달되었다. 쟈탄쬬(北谷町)의 해안선을 따라 나타나는 ‘함비 타운’은 동남 아시아풍의 상가이다. 이 곳은 예전에 미군 비행장(함비 비행장)이 있던 곳인데, 함비 비행장이 1981년 오키나와에 반환된 뒤 새로운 쇼핑 센터 · 야시장 · 음식점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옛날 미군기지이었던 곳에서 경제적인 번영을 달성했기 때문에 ‘미군기지로 인한 과거의 손실’과 ‘미군기지 없는 현재의 번 영’을 비교 · 평가할 수 있는 곳이다.

이 곳의 주변에 미군기지가 많기 때문에 미군을 상대로 하는 점포가 함비 타운에 많다. 함비 타운과 달리 미국 서해안풍의 ‘아메리칸 빌리지’가 역시 쟈탄쬬에 있다. 이 곳에는 8개의 영화관이 한 건물에 들어 있는 미국식 영화관 ‘미하마 7 plex+1'을 비롯하여 잡화 · 음식점 34곳이 성업중이다. 아메리칸 빌리지 바로 앞의 해변(Sunset Beach)에서 일출일몰을 보면 저절로 탄성이 나올 것이다.

가데나 기지의 북쪽 해안에 있는 요미탄손(讀谷村)은 오키나와 전쟁의 상흔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요미탄손은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펼칠 때 맨처음 진입한 마을인 탓으로 오키나와 전쟁의 희생자가 속출한 곳이다. 미군이 진주한 이튿날(1945.4.2) 요미탄손의 ‘찌비찌리 동굴(チビチリガマ)'에 숨어 있던 주민 140명 중 83명이 집단자결한 사건은 전쟁의 비극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나하에서 28번 버스를 타고 ‘波平’에서 하차하여 10분 정도 걸어가면 찌비지리 동굴에 이른다.

요미탄손 마을의 한가운데 ‘코키리 우리(elephant cage; 미군이 소련 · 중국 · 북한의 통신을 도청하던 곳)'가 보인다. 코키리 우리는 직경 2백미터 · 높이 28미터의 거대한 원형 안테나망인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주민들에게 반환을 앞두고 있다. 나하에서 28번 버스를 타고 ‘大當’이라는 곳에 내려 10분 정도 걸어가면 나타난다. 코키리 우리 부근의 미군 전용 도로를 끼고 조금만 달리면 울퉁불퉁한 활주로(지금은 사용 안함)와 그린베레 훈련장이 나온다. 요미탄손 지역에 오키나와의 도자기 작가 수십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각자의 가마(공방)를 운영하고 있다.

 

4. 북부 지방

 

요미탄손에서 평화기행을 마친 다음 오키나와(沖繩)시에서 하룻밤을 지내도 좋고 그냥 북쪽으로 내달아 나고(名護)시에서 묵어도 좋다. 북부지방의 해안선을 따라 환상적인 해수욕장이 늘어서 있다. 이 해수욕장 바로 곁에 미 해병대의 강습양륙 훈련장이 있다. 북부지방의 한센 기지(Camp Hansen) · 슈와브 기지(Camp Schwab)에는, 한반도 유사시 투입될 미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다. 해발 4~5백미터의 산속, 밀림이 우거진 곳에서 미 해병대가 매일같이 북한군을 죽이는 연습을 한다. 해발 446미터의 伊湯岳 기슭의 히가시손(東村)에 있는 북부 훈련장은, 미 해병대가 북한 인민군을 적으로 상정한 게릴라 훈련을 하는 곳이다.

나고 시의 모토부 항구(本部港)에서 배를 타고 30분 달리면 이에지마(伊江島)에 도착한다. 이에지마는, 오키나와의 걸출한 비폭력평화 운동가인 아하곤 쇼우코우(阿波根昌鴻) 씨가 활동했던 곳이다. 아하곤 씨가 세운 반전평화 자료관 ‘ヌチドゥタカラの家’에서 그의 비폭력평화 사상을 이해하기 바란다. ‘ヌチドゥタカラの家’을 찾아가려면 미리 예약해야한다(입장료 3백엔). ヌチドゥタカラの家에는, 아하곤 씨가 수집한 오키나와 전쟁 중의 생활용품 · 유품 · 미군 총탄 · 전쟁 기록(사진 포함) 등이 전시되어 있다. 시간이 나면 오키나와 전쟁 때 희생된 이에지마 섬 주민 · 군인 3,500명의 넋을 기린 ‘방혼(芳魂)의 탑’을 찾아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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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박정희 정권이 한국인 위령탑을 서둘러 세운 이유에 관하여 『연합뉴스』(2006.3.30)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오키나와(沖繩) 침투를 기도하는 북괴의 책동을 완전 봉쇄하기 위해 아국이 먼저 가능한 지역에 한국인 위령탑을 건설해야 한다.”

외교통상부가 30일 일반에 공개한 ‘오키나와 한국인 위령탑’ 관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정부는 1970년대 중반 오키나와에 조총련보다 먼저 2차대전 당시 현지에서 희생된 한국인을 위한 위령탑을 건설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친 것으로 나타났다.
1974년 초 당시 김동조(金東祚) 외무장관은 주일 대사관에 “북괴가 오키나와에 2차대전 당시 징용.징병으로 희생된 한국인에 대한 위령탑 건설을 기도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긴급 지시한다.
김 장관은 “희생된 망령들을 위로하고 북괴에 기선을 제(압)하여 북괴의 오키나와 침투여지와 구실을 없애고자 한다”며 위령탑 건립 목적을 분명히 했다.
조총련은 이보다 훨씬 앞서 1972년 8월 ‘오키나와 조선인 강제연행 학살진상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하는 한편, 위령탑 건립을 위해 모금을 추진중이라는 얘기가 나돌던 상황이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외무부는 “조총련의 위령탑 건립기도는 필히 저지돼야 한다”며 주일 대사관을 통해 조총련의 위령탑 건립 추진상황을 은밀히 알아볼 것을 지시했다.
주일대사관은 양구섭 참사관을 오키나와 현지에 급파, 현장실사 보고서를 올리도록 했고 조총련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실사보고를 토대로 토지매입, 건축허가 등 ‘은밀한’ 행보를 계속했다.
1974년 4월 중순 한국과 일본의 민간 무용단이 한국 정부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오키나와에 위령탑 건립을 추진중이라는 보도가 나자 조총련은 “2차대전 당시 희생자는 조선인이지 한국인이 아니다”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외무부는 1974년 6월 13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위령탑 건립 계획’ 보고를 올리고 일본 도쿄에 ’위령탑 건립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을 재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박 전 대통령도 결재란에 사인과 함께 “즉각 지원조치할 것”이라는 ‘특별지시’까지 가필해 위령탑 건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부터 관계부처 실무자회의가 개최되고 비문작성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위령탑 조기건립을 위한 범 정부차원의 총력전이 전개됐다.
또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재일 민단이 자율적으로 위령탑 건립을 추진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추진위 위원장에 당시 윤달용 민단 중앙본부 단장이 임명됐다.
이와 함께 위령탑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 신문광고를 통해 전국 각도에서 화강암과 옥석 수집 캠페인을 전개, 이를 통해 모은 돌을 배편으로 오키나와로 직접 수송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1975년 4월 9일 오키나와 남단 마부니(摩文仁)에 602평 규모의 위령탑 건립을 위한 기공식이 개최됐고 5개월만인 같은해 9월 3일 정부대표로 당시 고재필 보건사회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위령탑 제막식이 엄숙히 거행됐다.
조총련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며 은밀히 위령탑 건설을 추진해온 당시 정부와 주일대사관의 목표가 성취되는 ‘희열의’ 순간이었다.
위령탑 건설과정에서 주일대사관측은 조총련의 위령탑 파손행위를 우려, 일본 경찰당국에 특별 경비를 요청하는 등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조총련측은 위령탑 기공식 직후 ‘일조 국교정상화 오키나와 현민회의’의 이름으로 한국인 위령탑 건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 선수를 빼앗긴데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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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235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