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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캠핑 차 타고 달리는 유럽 진보기행

김승국


* 아래의 글과 관련된 동영상이 평화 만들기의 [평화누리 TV]에 실려 있으니 감상하시기 바랍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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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등 5개 단체가 2008년 12월 6~9일 프랑스의 파리에서 공동주최한 파리 포럼(2008 파리 국제정책 포럼)을 마친 12월 9일 밤에 ‘캠핑 차를 타고 달리는 유럽 진보기행’을 시작했다. 그날 밤 11시경에 파리 포럼의 한국쪽 참석자 대부분이 캠핑 차 8대에 나누어 타고 파리 시내를 출발하여 룩셈부르크를 향하여 달렸다. 이로써 유럽 6개국을 캠핑 차를 타고 순회하는 유럽 진보기행이 대단원을 열었다.

 

Ⅰ. 기행 코스

 

이러한 기행의 코스는 아래와 같다;

 

* 12월 9일;
밤 11시 파리 출발, 프랑스의 랭스(Reims)을 거쳐 룩셈부르크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1박.

* 12월 10일;
아침 일찍 룩셈부르크를 출발하여 독일 국경을 넘어 마르크스의 생가가 있는 트리어(Trier)를 경유하여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 도착.

* 12월 11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칼스루에Karlsruhe, 흑림지대를 거쳐)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 도착. 이날 오전중 Solar Info Center, 오후에 프라이부르크 시청, 저녁에 프라이부크 대학(시내 포함) 방문.

* 12월 12일;
아침에 프라이부르크(독일)를 출발하여 스위스의 바젤(Basel)․인터라켄(Interaken)을 거쳐  (융프라우Jungfrau 지역의 거점인) 라우터브룬넨(Lauterbrunnen)계곡의 캠핑장(Jungfrau 캠핑장)에 도착.

* 12월 13일;
아침 일찍 Jungfrau 캠핑장을 출발하여 제네바(스위스)에 도착. 오후에 제네바를 출발하여 프랑스 동부의 중소도시인 안시(Annecy)에 도착.

* 12월 14일;
아침 일찍 안시를 출발하여 디종(Dijon)․퐁텐블로(Fontainebleau)를 거쳐 파리 도착. 파리 시내를 관통하여 파리 북부의 캠핑장에서 잠시 쉰 뒤에 벨기에를 향해 달림.

* 12월 15일;
일부 인사는 (벨기에 가는 도중에) 캠핑차 한 대를 타고 네덜란드의 로테르담Rotterdam으로 가서 12월 15일 낮에 네덜란드 사회당쪽과 간담회를 개최함. 나머지 사람들은 12월 15일 새벽에 독일의 오버하우젠(Oberhausen)에 도착. 오전중 오버하우젠 시내에 있는 독일 좌파당(Die Linke) 사무실을 방문한 뒤 산업 박물관을 견학하고 다시 사무실로 귀환하여 Die Linke쪽 사람들과 오후에 간담회를 가짐. 간담회를 마친 뒤 부퍼탈(Buppertal)로 이동하여 엥겔스 생가․방직 박물관을 저녁에 견학함. 밤에 부퍼탈을 출발하여 파리를 향해 밤새워 달림.

* 12월 16일;
파리 북부의 샤를르 드골 공항 부근의 캠핑장에 새벽에 도착하여 잠시 눈을 붙임. 

 

Ⅱ. 일자별로 설명하는 참가기

 

  1. 12월 10일

 

이처럼 하루에 한 나라를 관통하여 달리는 강행군은 첫날부터 이루어졌다. 12월 9일 심야에 파리를 빠져나간 캠핑차 대열은 차가운 밤 공기를 뚫고 몇시간 내달려 프랑스의 랭스(Reims)에 도착하여 주유한 뒤 룩셈부르크 국경을 넘었다.

룩셈부르크의 이름 모를 고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은 12월 10일 새벽. 기행 참가자 일행은 단 몇시간의 새벽 잠을 즐긴 뒤 아침 일찍 휴게소를 빠져 나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Frankfurt)를 향해 달렸다. 일행중 일부 인사가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독일 좌파당(Die Linke)의 본부쪽과의 간담회 시간에 맞추기 위해 캠핑 차 1대를 몰고 일찌감치 떠났다. 나머지 사람들은 트리어(Trier)를 거쳐 저녁에 프랑크푸르트 교외의 캠핑장(캠핑 차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캠핑장에 머문 일행 중 일부는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구경한다고 외출했고, 나머지는 저녁식사를 하거나 몸을 씻으며 안정을 취했다. 이어 그날 밤 12시경에 캠핑장을 나온 기행단의 캠핑차 대열은 흑림(黑林; 검은 숲; Schwarzwald)지대를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타고 수백 킬로미터를 줄기차게 달렸다. 프라이부트크 시내에 있는 ‘solar info center(태양열 정보 센터)’에 12월 11일 오전 10시까지 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캠핑 차 운전수들이 졸음 운전을 참아가며 밤새 무리한 운전을 했다. 졸음을 내쫓기 위해 운전수들이 무전기를 통해 노래를 하기로 결의하면서 캠핑차 대열은 순식간에 달리는 노래방이 되었다. 동지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각 차량별로 운전수․조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동지애 덕분에,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가까운 고속도로 휴게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참가자들은 휴게소에 세워둔 캠핑 차 안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단 몇시간의 선 잠에서 깨어난 일행은 다시 차를 몰아 12월 11일 오전 10시에 solar info center에 도착했다.

 

  2. 12월 11일; 프라이부르크 방문

 

‘환경의 수도’로 이름난 프라이부르크에 당도하여 맨처음 방문한 곳은 solar info center이다. 이 센터는 ‘친환경적인 태양열․태양광(光)’을 새로운 에너지 원(源)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solar info center 건물에는 Concentrix Solar Gmbh 등의 태양 에너지 관련 기업이 44개나 입주해 있다. 이 센터의 건물 자체가 태양열 집열판으로 둘러져 있으며, 건물 내에서 사용되는 전기의 상당부분을 태양열 발전으로 충당한다. 일조시간이 부족한 독일에서, 태양열․태양광 발전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고 놀랐다. 태양열․태양광에 의한 친환경 에너지(green energy)를 값싸게 얻으려고 안감힘을 쓰는 solar info center에서 생태의 대안을 찾아야할 것이다.

이어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하며 프라이부르크 시청에 가서 ‘프라이부르크 市의 생태도시 기획’을 담당 국장(Walter Aussenhofer 씨)로부터 들었다. 담당 국장이 선보인 영상물을 보면서, 프라이부르크가 ‘환경의 수도’임을 절감했다. 그러면 프라이부르크가 환경의 수도임을 증명하는 자료의 중요부분을 아래에 인용한다.

 

    1) 환경수도, 생태 도시의 모델 ‘프라이부르크’

 

프라이부르크 시가 ‘환경도시’ ‘환경수도’로 알려진 것은 불과 20~30년 전부터다. 1974년 접경지대인 이곳을 둘러싸고 약 30㎞ 떨어진 독일과 프랑스, 스위스 접경지역에 3개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추진되었다. 이를 반대하기 위한 시민운동을 계기로 녹색당을 비롯하여, 수많은 민간 환경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그린피스(Greenpeace) 등 전세계적인 환경운동과 독일 환경운동의 모체 역할을 했다. 또한 프라이부르크 시의회와 협력하여 도시를 선진적인 환경정책의 전시장으로 만들고,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사고방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프라이부르크 시는 선진적인 환경정책의 철저한 추진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본받을 만하다. 1986년 환경청을 만들어 도시의 환경정책을 종합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에너지 이용과 난방, 대기와 수질관리를 통합하는 환경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80~1991년 기간동안 총 630만 마르크를 투자해 2,480만 마르크의 에너지 절약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환경보전 시책을 철저하게 추진한 결과 1992년 독일 환경보전협회에서 환경도시로 지정하였으며, 자체적으로도 환경도시임을 선언하였다.
프라이부르크 시는 시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물에는 에너지 절약 강제기준을 적용하는 한편, 태양광 발전, 소수력, 열병합 발전을 장려하여 핵발전이나 화력발전에 대한 의존비율을 줄였다. 1995년 프라이부르크 시의회는 기후변화에 대처하여 1992년을 기준으로 2010년까지 온실가스를 25% 감축한다는 목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대중교통 수단 개선을 통해 7%, 태양광 발전․풍력 발전․소수력 발전 등 재생가능 에너지 보급을 통해 14%, 에너지 효율이 높은 열병합 발전설비 보급으로 28%를 줄이고 나머지 51%는 에너지를 절약함으로써 목표를 달성한다는 계획을 확정하고 다양한 정책을 추진중이다.
특히 프라이부르크 시는 태양에너지 활용 확대를 시정의 우선목표로 삼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 태양에너지 전시회(Inter Solar)’가 매년 이 도시에서 개최되며, 중앙역 안에는 태양에너지 정보센터가 설치되어 실시간으로 도시의 태양에너지 이용 현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독일의 유명한 태양 건축가 롤프 디슈(Rolf Dish)가 설계한 회전형 태양건물과 태양광 연립주택 단지가 세워져 태양에너지 자원의 활용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회전형 태양건물인 헬리오트롭(Heliotrop; 태양을 향한다는 뜻의 그리스어)은 외부 지름 11■의 3층 짜리 원통형 나무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프라이부르크 시는 자전거 천국이다. 1970년대 프라이부르크 시는 도심 내 극심한 차량혼잡을 겪은 이후 일부 상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심 내 차량통행 금지와 보행자 전용 공간화를 적극 추진하였으며, 자동차의 수송분담을 줄이기 위해 대중교통 요금을 내리도록 했다. 특히 1991년 프라이부르크 시는 환경보호 카드, 즉 지역승차권(Regiokarte) 제도를 도입하는 데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역승차권 재도의 도입과 함께 프라이부르크 시는 도시 내 차량속도 제한 강화, 주차요금 인상시책을 추진하여 자전거와 노면전차 등 대중교통 수단의 비교우위를 높였다. 현재 프라이부르크 시의 교통분담 구조는 자전거가 차지하는 비중이 30%까지 올라가 시민들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프라이부르크 시의 도시설계에서는 친환경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요소가 인상적이다. 첫째, 프라이부르크 시는 도심 내 보행자전용 공간조성의 모델 도시다. 독일 내 보행자전용 공간조성을 최초로 시도함으로써 독일에서 도심부 보도광장과 보행자 거리를 도입하게 한 계기를 제공했다. 또한 도심의 바닥은 다양한 크기의 돌들이 전통양식으로 모자이크 처리되어 보행자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제공한다. 둘째, 프라이부르크 시는 도심 내 순환수로와 바람의 통로 등 친환경적인 도시설계가 이색적인 도시다. 프라이부르크 시 중심가에 들어서면 고색창연한 옛 건물이 즐비하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도록 설계된 노출수로가 시내 골목길마다 거미줄처럼 설치되어 있다. 강물을 도시 내부로 끌어들여 도시 내 온도조절과 청정환경을 유지하고 있으며, 건축계획을 통제하여 바람의 길을 조성함으로써 도시내 대기정화를 유도하고 있다.
독일 남부의 조그만 도시 프라이부르크가 ‘독일의 환경수도’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1970년대 핵발전소 건설반대 시민운동을 계기로 도시의 환경보호와 도시발전을 위해 시의회 주도의 다양하고 선진적인 환경정책의 철저한 추진과 시민, 지역 기업이 협동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프라이부르크 시가 환경도시로 자리매김하면서 나타난 특성으로는 첫째, 도시환경 정책의 추진에 있어서 지방자치 단체의 중추적인 역할이다. 프라이부르크 시의회는 다양한 환경보호 정책을 결정하고 제도마련, 재원확보, 대중홍보 및 기업․시민 참여 등 일련의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환경보호 정책을 매우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현재의 환경수도 프라이부르크를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둘째, 도시환경 보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체인 시민과 기업체의 환경보호 참여와 인식전환을 유도하기 위해 적극적인 재정지원과 인센티브를 제공하였다. 셋째, 프라이부르크 시는 환경보호 차원을 넘어 지역산업 구조를 환경산업 위주로 전환시킴으로써 환경보호와 지역경제를 연계한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독일의 환경수도, 프라이부르크 시는 수려한 자연경관보다는 프라이부르크 시 자체의 정책적 환경보호 노력에 의해 환경도시로서 이름을 얻게 된 좋은 사례이다.
프라이부르트 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한 도시 파괴, 차량혼잡과 산업사회의 오염, 핵발전소 건설이라는 위기상황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활용하여 독일의 환경수도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현재 프라이부르크 시는 환경수도라는 자부심을 갖고 지구위기 극복과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환경정책의 시범적인 추진을 통해, 지속가능한 도시발전과 도시민의 삶의 질을 제고하고자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차미숙「독일의 환경수도, 프라이부르크」『국토』25호(2003년 3월) 75~80쪽 요약>.

            
* 참고자료;
   ① 김성진「생태도시의 선도 모델 프라이부르크」『환경철학』5집(2006년) 131~152쪽
   ② 오용석「지속가능한 에너지 도시 만들기」『대구 사회비평』14권(2005년 여름) 61~76쪽
   ③ 김해창 지음『환경수도, 프라이부르크에서 배운다』(서울, 이후, 2003)
   ④ 프라이부르크 시의 환경보호국에서 발행하는「SolarRegion Freiburg」의 한글판

 

  3. 12월 12일; 알프스 기행

 

유럽 기행단은 12월 12일 아침 일찍 프라이부르크를 출발하여 스위스의 국경을 통과한 뒤 바젤(Basel)과 인터라켄(Interlaken; 알프스 기행․등산의 거점)을 경유하여 라우터부루넨(Lauterbrunnen)이라는 산악마을에 도착했다. 이윽고 라우터부루넨의 맨끝자락에 있는 ‘융프라우 캠핑장(Camping Jungfrau; www.camping-jungfrau.ch)’에 기행단의 캠핑차 대열이 들어섬으로써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알프스의 산신(山神)이 우리 일행에게 축복을 내린 듯 서설(瑞雪)이 내린 화창한 날씨 덕에, 멋진 알프스 기행을 즐길 수 있었다.  

 

    1) 인터라켄

 

툰 호수(Thunersee)와 부른쯔 호수(Brienzersee) 사이에 있다는 뜻의 라틴어 ‘인터 라쿠스(Inter Lacus)’에서 지명이 유래한 인터라켄은 베르너 오버란트(Berner Oberland; 베른Bern의 건너편 지역)의 중심도시이다. 아이거(Eiger), 묀히(Mönch), 융프라우(Jungfrau) 등 해발 4,000미터 급의 고산에 둘러싸인 이 곳은 해발 567미터의 고산 지대에 위치한 탓에 한여름에도 선선한 날씨를 자랑하고 한 겨울에는 엄청난 눈이 내려 글자 그대로 설국(雪國)으로 대변신한다.<홍연주 등 지음『유럽 100배 즐기기』(서울, 랜덤하우스, 2007) 622쪽>

인터라켄은 수려한 알프스 산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휴양지이다. 빙하계곡에서 흘러내린 에메랄드 색 빙하호수(툰 호수․부른쯔 호수), 등산열차와 케이블카로 연결되어 있는 알프스 산, 푸른 초원지대에서 풀을 뜯는 소 떼, 굉음을 내며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빙하폭포와 시냇물을 마음 껏 볼 수 있는 곳이다. 봄에는 푸릇푸릇한 꽃밭, 여름에는 고산식물, 가을에는 붉은 단풍, 겨울에는 백설 등 계절마다 각기 다른 전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최철호『로맨틱 기차 여행 유럽』(서울, 시공사, 2008) 77쪽>
 
* 시간여유가 없어서 인터라켄 시내를 둘러보지 못한 게 유감이지만, 두 개의 호수 사이에 끼어 있는 인터라켄을 버스의 차창을 통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2) 라우터브루넨

 

‘울려 퍼지는 샘’이라는 뜻의 라우터브루넨은 해발 797미터의 U자형 협곡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산악마을이다. 300~500미터에 달하는 절벽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지형적인 탓인지 정상에서 흘러내린 빙하는 거친 절벽을 따라 수많은 골짜기와 폭포 등으로 흘러내려 절경을 이룬다. 그 중에서 슈타우프바흐(Staubbach) 폭포는 라우터브루넨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럽에서 제2의 낙차를 자랑한다.(『유럽 100배 즐기기』630쪽)

마을 전체가 가파른 빙하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70개 이상의 폭포와 강이 있어 라우터(큰 소리)브루넨(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슈타우프바흐 폭포는 이 마을의 랜드마크로 케티와 워즈워스는 이 폭포를 보고 감동적인 시까지 지었다고 한다.(『로맨틱 기차 여행 유럽』93쪽)

* 우리 일행이 머문 융프라우 캠핑장의 지척에서 슈타우프바흐 폭포를 볼 수 있었는데, 유감스럽게 겨울철의 결빙 때문에 얼음물이 떨어지는 장면만 볼 수 있었다.
 
라우터브루넨은 아이거․묀히․융프라우 등 베르너 오버란트의 주봉(主峰)을 오르는 출발점이므로, 이곳에서 케이블 카․산악철도를 타면 융프라우 바로 밑 해발 3,454미터에 위치한 융프라우 요흐(Jungfraujoch) 전망대나 쉴트호른(Schilthorn) 전망대에 갈 수 있다.

해발 2,967미터의 쉴트호른은 영화 『007-여왕 폐하』에도 등장한 전망대로, 베르너 오버란트의 3대 봉우리(아이거․묀히․융프라우) 뿐만 아니라 브라이트호른(Breithorn; 해발 3,782미터의 봉우리)에서 블륌리스 알프로 이어지는 200여 개의 봉우리가 펼쳐내는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특히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융프라우의 웅장한 규모에 감탄하게 된다. 융프라우요흐의 스핑크스 전망대에서 볼 때와는 정반대 방향이므로 알프스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셈이다, 노을질 무렵에 가야 멋진 전망을 즐길 수 있다.

* 그런데 우리 일행의 일정상 쉴트호른까지 오르지 못하고 중간지점인 뮈렌(Mürren) 마을까지만 오르게 되어서 퍽 서운했다.

뮈렌은 라우터브루넨의 U자형 계곡이 잘 보이는 해발 1,639미터의 작은 마을. 전기자동차와 마차만 다니는 청정지역이다. 가장 서쪽에 있으며 지대가 높아 베르너 오버란트의 3대 봉우리가 한눈에 보인다.

뮈렌은 베르너 오버란트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다. 라우터브루넨 계곡에 우뚝 솟은 낭떠러지 위에 자리잡고 있는 뮈렌은 휘발유 차량 금지 구역으로 아름다운 공기와 알프스의 아늑한 분위기가 감돈다. 비탈진 초원에 촘촘히 들어서 있는 샬레(통나무 집)와 빙하계곡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서인지 경관이 참 멋있다.(『로맨틱 기차 여행 유럽』94~95쪽)
 
* 해발 797미터의 라우터브루넨에서 해발 1,639미터의 뮈렌 마을까지 케이블 카․산악철도를 이용하여 20여분만에 올라갔다. 라우터브루넨 역에서 케이블 카를 타고 그뤼취알프(Grütschalp) 역까지 간 뒤에, 그뤼취알프 역에서 산악철도로 갈아타고 (Winteregg 역을 경유하여) 뮈렌 역에 도착했다. 그뤼취알프 역까지 케이블 카가, 주위의 눈덮인 침엽수림대를 쏜살같이 수직상승하는 바람에 스릴 만점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어 그뤼취알프 역에서 출발한 산악철도가 침엽수림대를 미끄러지듯 달리며 올라가는 쾌감을 느꼈다.

* 뮈렌 마을은 알프스의 전형적인 산악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베르너 오버란트의 3대 봉우리(아이거․묀히․융프라우)가 더욱 가깝게 보여 등반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했다. 필자가 젊은 시절 등산광이었는데, 그 당시 난공불락의 아이거 북벽을 암벽등반한 기록을 밤새워 읽은 기억이 새롭게 떠올랐다. 

 

  4. 12월 13일

 

    1) 제네바

 

이날 새벽에 눈을 떠 캠핑차에서 나오자마자 알프스 산 위에 걸친 새벽별이 유난히 찬란하게 비추었다. 알프스 산의 청량한 공기 때문에 그 찬란함이 더했을 것이다. 평생 한번 올까말까한 알프스 산 속의 캠핑장에서 겨울밤을 지낸 추억을 오랫동안 간직하리라. 캠핑장 부근의 U자형 협곡도 어제 낮에 본 것과는 달리 심원함을 더했다.
한국에 남겨놓은 인연, 평화 관련 일거리가 없다면 여기에서 몇 년 지내며 신선놀음을 하고픈 마음이 꿀떡같다.
캠핑차로 되돌아가 침낭 안에서 이러저러한 상념에 젖은채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뜨니 아침 밥을 먹으란다. 아침 밥을 서둘러 먹은 뒤 서둘러 캠핑장을 출발해야한다는 전언이 도착했다. 그런데 융프라우 캠핑장을 빠져나오는데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캠핑장의 도로가 얼어붙어 캠핑차의 발목을 잡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이윽고 캠핑차 대열은 라우터부르넨을 아쉽게 작별하고 인터라켄을 지나 제네바로 향했다. 북-미간 제네바 합의서의 산실인 ‘제네바 주재 북한 대표부’ 인근을 찾아가 한반도 평화통일의 현장학습을 하기 위해서이다. 북-미간에 끊임없는 샅바싸움을 한 역사적인 현장에서 평화통일의 이정표를 다시 새겨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여기에 북한 대표부 건물 바로 앞의 레만호까지 구경할 수 있게 되어 제네바까지 먼길 재촉한 보람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제네바 주재 북한 대표부 부근에 갔으나 ‘북한 대표부’라는 간판이 있는 건물은 찾지 못하고, ‘북한 대표부’로 추정되는 건물(국내외의 언론매체에 자주 나오는 건물 사진을 보고 추정)만 멀리서 확인했을 뿐이어서 좀 싱거웠다. 그 건물도 높은 담으로 에워싸여 있어서 내부는 전혀 볼 수 없고 지붕만 보일 뿐이었다. ‘1994년 당시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 이 건물의 베란다에서 레만호를 바라보며 북한․미국 외교관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생각하며 캠핑차에 다시 올라 프랑스의 안시(Annecy)로 내달렸다.

 

    2)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로 유명한 안시는 고풍스러운 중소도시로서, 한국의 중소도시의 미래상이기도 했다. 난개발의 상흔이 가중되는 한국의 중소도시가 생태․관광․문화 도시로 거듭나려면 안시에서 배울 점이 많겠다.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안시의 지방자치, 시정(문화․관광 행정), 시민사회, 문화-지역-경제의 관련 등에 관하여 대안을 모색하는 취재를 심층적으로 할 필요가 있겠다. 그러나 국내에 이러한 필요성을 만족시켜줄만한 자료가 거의 없어서, 관광 관련 책자 등을 중심으로 안시에 관하여 설명하는게 아쉽다.
다음은 안시에 관한 문헌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먼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과 관련된 자료를 제시한 뒤 관광지로서의 안시를 소개한다.

 

      ①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프랑스에서는 문화와 지역과 경제의 결합은 이미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칸 영화제, 아비뇽 연극제, 앙굴렘 만화 피스티벌,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등은 문화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세계적인 성공모델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축제가 조금만 지방도시를 국제적인 명성의 도시로 만드는 데 기여한 사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파리가 아닌 지방 소도시에서 열리는 문화행사로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문화의 민주화와 문화의 산업화가 결합한 문화의 지방분권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예들 중에서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주목하고자 한다.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5공화국 초기에 자리 잡은 대표적인 지역문화 행사이다. 최근 들어 이루어진 영상제작 기술의 발달은 애니메이션 분야의 비약적인 발달을 가져왔다. 애니메이션 영화의 성공은 부수적으로 캐릭터, 팬시상품, 게임, 광고 등 인근 산업으로 확산된다. 프랑스의 경우, 칸 영화제,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과 앙굴렘 만화 페스티벌 등은 병합효과가 큰 산업의 육성이라는 차원에서 5공화국 들어서 신설, 혹은 강화되어온 행사이다.
프랑스 애니메이션은 창의성과 작품성의 측면에서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이는 기획과 제작 과정에서의 전문가들의 노력, 정부 당국의 지원, 일반 국민과 제작사의 노력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생겨난 것이다.
프랑스 애니메이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문화의 지방화와 산업화의 차원에서 꾸준하게 발전해 온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다. 현재 안시는 프랑스 애니메이션 뿐만 아니라 세계 애니메이션 예술과 산업을 선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개최하기 전의 안시는 자그마한 시골 관광도시에 불과했다.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안시는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도시규모나 지정학적인 위치상 오늘날과 같은 국제행사를 개최하기에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안시는 이러한 조건을 극복하려는 지역사회의 노력과 정부의 지원을 통해 지역적인 관광자원을 잘 활용하여 환경친화적인 문화산업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 과정은 지역차원의 문화산업이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을 필요로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1997년부터 격년제 행사가 아닌 연례행사로 바뀌게 된다. 행사기간 중에는 전 세계로부터 애니메이션 기획자들과 제작자들이 몰려들 뿐만 아니라 수십만의 관광객들이 다녀간다. 안시 시당국은 이들이 창출하는 경제효과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통한 지역 이미지 향상의 효과를 누리고 있다. 이 페스티벌은 현재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으며, 크로아티나의 자그레브, 캐나다의 오타와, 일본의 히로시마, 중국의 상하이 등 세계 도처에서 유사한 성격의 행사 개최에 밑거름이 된다. 우리나라 춘천의 애니타운 페스티벌 또한 안시의 사례를 모델로 하고 있다.

 

      ② 관광지로서의 안시

 

오트 사부아(Haute Savoir)의 주도인 안시는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스위스풍 도시다. 15세기 이후부터 1860년까지 사부아 왕국의 중심역할을 맡았고 종교 박해를 피해 스위스를 떠난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이 이주해 오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1412년과 1448년 두 차례의 대화재로 잿더미가 된 안시는 사보아의 첫 번째 공작인 아메데 8세에 의해 정비되었다. 1950년대에 프랑스 정부가 안시의 주요 건물을 역사적 건축물로 지정하면서 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휴양지로 각광받게 되었다.
천혜의 조건도 매우 좋아 바다처럼 드넓은 안시 호수와 그 위로 비쳐지는 웅장한 알프스, 집집마다 내걸린 아름다운 꽃의 향연이 주는 감동 때문에 한번 안시를 방문한 사람은 또 다시 찾게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안시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구시가이다. 잔디가 깔려 있는 넓은 산책로 Champs de mars를 시작으로 연인이 함께 건너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사랑의 다리, 시청사와 옛 감옥(Palais de L'ile), 안시성 등을 차례로 둘러본다. 안시호에서 보트나 유람선을 타고 안시호 주변의 아름다운 마을들을 방문해 보자.<『유럽 100배 즐기기』(‘07-08 개정판) 774쪽>

배 모양으로 지어진 빨레 드 릴(Palais de L'ile) 주변으로 그림 같은 운하가 펼쳐져 있다. 운하 북쪽의 노트르담 성당(Eglise Notre Dame), 생 삐에르 대성당(Cathédrale Saint Pierre) 주변은 구시가지의 중심으로 시장과 쇼핑가가 형성되어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반면 남쪽의 언덕길은 고급 주택가와 공원이 있어 고즈넉하고 평온한 것이 특징이다. 호수는 시내 동쪽에 펼쳐져 있다.<『Hello 유럽』(김영사, 2004) 300~301쪽>

스위스 국경에 가까운 도시로, 분위기도 프랑스보다는 스위스의 느낌을 더 많이 지닌 곳이다. 백조가 노니는 호수의 수면에 알프스의 산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은 스위스의 한 마을에 온 듯한 착각을 안겨준다. 도시를 관통하는 운하 가까이에는 스위스인 장 자크 루소(Rousseau)가 살았던 집도 있다. 프랑스에 있으면서도 스위스의 느낌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세계를 가다「프랑스」』(랜덤하우스 중앙, 2006) 417쪽>

 

  5. 12월 14일

 

이날 아침 일찍 안시를 출발하여 독일의 오버하우젠(Oberhausen)까지 1,000㎞를 주행했다. 하루 종일 캠핑차 안에서 지내면서 1,000㎞를 달린 끝에 12월 15일 새벽에 독일의 오버하우젠 역 부근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안시~프랑스 중부지방~파리~벨기에~오버하우젠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6. 12월 15일

 

일부 인사는 (벨기에 가는 도중에) 캠핑차 한 대를 타고 네덜란드의 로테르담(Rotterdam)으로 가서 12월 15일 낮에 네덜란드 사회당쪽과 간담회를 개최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12월 15일 오전중 오버하우젠 시내에 있는 독일 좌파당인 ‘Die Linke’의 사무실을 방문한 뒤 산업 박물관(을 견학하고 다시 사무실로 귀환하여 Die Linke쪽 사람들과 오후에 간담회를 가졌다. 간담회를 마친 뒤 부퍼탈(Buppertal)로 이동하여 엥겔스 생가․방직 박물관을 저녁에 견학했다. 밤에 부퍼탈을 출발하여 밤새워 달린 끝에 파리로 귀환했다.

 

    1) ‘Die Linke’의 오버하우젠 지구당 사무실 방문

 

 Die Linke 오버하우젠 지구당 사무실은 오버하우젠의 시내(평화 광장) 부근에 있는 조그마한 사무실이었다. 당 사무실이라기 보다 운동단체 사무실같이 보였다. 독일 진보정당의 지역구(지역의 진보정당)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를 관찰하는데 아주 적절한 방문이었다.

그럼 Die Linke 오버하우젠 지구당 사무실의 분위기는 [평화 누리 TV]에 실릴 동영상을 보면 되므로, ‘Die Linke’ 중앙당에 관한 자료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① 연합뉴스 기사

 

* 독일 좌파당 위상강화
 
독일 ‘좌파당(Die Linke)’이 지난해와 올해 실시된 서독 지역 3개 주의회 선거에서 모두 의석저지선을 넘는 지지율을 얻어 주의회에 진출함으로써 독일 정치 지형에서 좌파당의 부상이 주목되고 있다.
좌파당은 지난해 5월 브레멘 주의회 선거에서 8.6%의 지지를 얻어 서독 지역 주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한 데 이어 또 다시 지난 27일 실시된 헤센주 및 니더작센 주의회 선거에서 의석저지선을 넘는 지지율을 얻었다. 이에 따라 좌파당은 서독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전국 정당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좌파당은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과, 사민당의 우경화에 반발해 탈당한 사민당 내 좌파와 노동계가 연대해 창설한 ‘선거대안(WASG)’이 정통 좌파 세력의 결집을 목표로 통합한 정당이다.
대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민당이 기민-기사당 연합에 끌려다니면서 좌파 정당으로서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상황에서 좌파당은 선명한 좌파 노선을 표방하면서 노동자 계층을 끌어들이고 있다. 특히 대연정 정부의 시장 지향적인 개혁 정책으로 복지 혜택이 줄어든 노동자들을 향해 분배 정의와 사회적 약자 보호를 약속하고 있는 좌파당은 동독 지역 뿐 아니라 서독 지역에서도 지지 기반을 넓혀가고 있다.
좌파당은 2005년 총선에서 8.7%의 지지를 얻어 자민당에 이어 일약 제2 야당으로 부상했다. 이후 실시된 동독 지역 주의회 선거에서 좌파당은 돌풍을 일으키며 세력을 확장했다. 좌파당은 브란덴부르크 주(주의회 선거 득표율 28.0%), 튀링엔 주(26.1%), 작센 안할트 주(24.1%) 선거에서 제2당을 차지했다.
또한 2009년 총선에 대비한 정당별 지지도 조사에서 좌파당은 기민-기사당 연합과 사민당에 이어 제 3당을 차지할 것으로 나타났다.(2008.1.31)

* 서독지역 4개주 주의회 진출

독일 정치권에서 ‘좌파당(Die Linke)’의 돌풍이 몰아치고 있다. 2008년 1월 27일에 실시된 헤센 및 니더작센 주의회 선거에서 좌파당이 의석 저지선(5%)을 넘는 지지율을 얻은 데 이어 1월 24일에 실시된 함부르크 주의회 선거에서도 6.5%의 지지율을 얻어 주의회에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좌파당은 지난해 5월 브레멘 주의회 선거에서 8.6%의 지지를 얻어 서독 지역 주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한 데 이어 올해 실시된 3개 주의회 선거에서 잇따라 의석저지선을 넘는 지지율을 얻음으로써 전국 정당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좌파당은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과, 사민당의 우경화에 반발해 탈당한 사민당 내 좌파와 노동계가 연대해 창설한 ‘선거대안(WASG)’이 정통 좌파 세력의 결집을 목표로 통합한 정당이다.
대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민당이 기민-기사당 연합에 끌려다니면서 좌파 정당으로서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상황에서 좌파당은 선명한 좌파 노선을 표방하면서 노동자 계층을 끌어들이고 있다. 특히 대연정 정부의 시장 지향적인 개혁 정책으로 복지 혜택이 줄어든 노동자들을 향해 분배 정의와 사회적 약자 보호를 약속하고 있는 좌파당은 동독 지역 뿐 아니라 서독 지역에서도 지지 기반을 넓혀가고 있다.
좌파당이 서독 지역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구 동독 공산당과 연결된 좌파당에 대한 서독 지역 주민의 거부감이 거의 사라지고 좌파당이 독일 좌파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좌파당은 분배 정의를 강력하게 요구함으로써 사회복지 혜택 축소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노동자 계층에 진정한 좌파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좌파당은 서독 지역 주의회에 진출한 데서 더 나아가 연정에 참여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2008.2.25)

 

      ② Die Linke의 강령 분석

 

좌파당은 슈뢰더 적-녹 연정의 개혁정책, 이른바 신중도 노선으로 더욱 어려움에 처한 계층을 대변하기 위해 분산되어 있던 동서독 지역의 좌파 지향의 정치세력이 통합되어 창설된 전국 정당이다.

슈뢰더의 신자유주의 경도된 신중도 노선에 실망한 당원들은 사민당을 떠나 대안 정치세력으로 ‘선거대안 노동과 사회적 정의(WASG, Wahlalternative Arbeit und soziale Gerechtigkeit)’에 합류했고, 사민당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라퐁텐을 지도자로 내세웠다. 이후 WASG는 2005년 연방의회 선거에 구 동독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민주사회당(PDS)과 함께 ‘좌파.민사당(die Linke.PDS)’이라는 선거연합을 구성하여 8.7%의 지지를 얻었다. 2007년 6월 16일 WASG와 PDS는 하나의 정당, 즉 좌파당(die Linke)로 통합되었다.

2007년 6월 16일 좌파당(Die Linke) 창당대회에서 승인 절차를 거쳐 「강령 초석(Programmatische Eckpunkte)」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좌파당은 서언에서 “독일에서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그리고 환경친화적이고 평화정책 지향적인 좌파”를 지향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구좌파’와 ‘신좌파’를 구분하고 있는 이들의 세계관과 정세 분석은 사민당의 입장과 확연히 다르다. 부유한 독일에서 부의 불균등 배분을 제일 먼저 지적하고 있는 좌파당은 이러한 현상이 고도로 응집된 자본의 힘과 정치의 변질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회적 균열은 (경제 세계화 시대에) 국제 금융시장의 우위와 사회보장 원칙에 기반하여 조율되었던 자본주의에서 시장 근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정치로 변질된 것에서 기인한다. 방목된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대안은 연대의 강화와 사회적 민주적 변화에 있다. 사민당과 동일하게 민주적 사회주의를 정치적 좌파가 지향해야 할 목표로 표방하나, 구성 요소와 기본 가치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설명은 완전히 다르다. ”자유와 사회적 안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상호 조건적이다. 평등 없는 자유는 단지 부자들만의 자유이다. 민주적 사회주의의 목표는 변환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시장경제 질서의 온존 하에 정치 개입 하에 부분적인 조율을 강조하는 사민당의 입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가치를 보다 비중있게 수용하고,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지적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간함 사항인 소유권 문제와 관련하여 좌파당은 “다양한 소유형태의 유지 속에서 사유화와 독점화의 확산 대신에 효율적이고 민주적인 경제를 위한 토대”를 구축하고,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와 지배관계를 극복하고자”함을 선언하고 있다.
경제보다는 정치의 우위를 분명하게 강조하는 좌파당은 전략적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방향 전환을 부각시키면서, 기존의 정치경제 질서와 확연히 다른 ‘세계’의 구축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하는 좌파당의 입장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보다 많은 자유의 이름으로 등장한 신자유주의 세력은 보다 작은 국가를 강요하고, 사회보장 국가를 강압적인 경쟁국가의 방향으로 해체시켜 나가고 있다. 이는 노동조합과 민주적인 다른 조직들과 사회운동 세력을 약화시키려 한다. 신자유주의는 시장 아래 모든 삶의 영역을 사유화와 탈규제 그리고 굴복의 정치로 내몰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보는 좌파당은 국제금융 기금과 초국적 기업 그리고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초국적 기구들에 엄청한 힘이 집중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는 민주주의적인 통제가 불가능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때문에 민주주의의 실체는 공허해져 가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흐름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고 또한 가능하다는 것을 좌파당은 「강령 초석」에서 강조하고 있다.

 ‘Die Linke’의 오버하우젠 지구당은 중앙당의 「강령 초석」에 따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좌파정당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Die Linke’의 오버하우젠 지구당은 내년 7월에 있을 선거에서 10%의 지지율을 확보(현재는 6%)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관한 상황은 [평화누리 TV}에 실린 동영상을 참고하면 알 수 있다.

 

    2) ‘뒤스 부르크-노르트 경관 공원’에서

 

12월 15일 아침에 견학한 ‘Die Linke’의 오버하우젠 지구당 사무실을 나온 유럽 진보기행단 일행은 오버하우젠의 인근 도시 뒤스부르크(Duisburg)에 있는 ‘뒤스 부르크-노르트 경관 공원(Duisburg-Nord Landschaftspark)’을 견학했다.

Duisburg-Nord 경관 공원은 2백만㎡ 규모의 새로운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소중히 생각하여 조심스럽게 다루어 계획하였다. 공원 중심은 현재 사용하지 않는 티센(Thyssen) 제철공장이며, 유럽 진보기행단이 이 낡은 제철공장의 꼭대기까지 올라가 Duisburg-Nord 경관 공원의 전모를 살펴보았다.

Duisburg-Nord 경관 공원은, 폐허가 될 위기에 처한 탄광과 제철소를 보전한채로 주변지역까지 포함한 광할한 지역을 ‘문화-생태-관광 지역’으로 탈바꿈하여 경관 공원이라고 이름 붙인 곳으로 루르 지방 곳곳에 산재해 있다.  한국의 탄광도시 태백시가 카지노로 전락한 반면 독일의 탄광지역이 문화-생태-관광 도시로 거듭났다. 이렇게 거듭나게 한 발상이 바로 ‘진보’이며 진보의 발상이다. 유럽 진보기행단이 이러한 진보의 발상을 현지에서 터득하기 위해, 고물이 된 티센(Thyssen) 제철공장의 맨꼭대기까지 올라가 Duisburg-Nord 경관 공원을 둘러본 것이다. 그럼 옛 탄광․제철소를 살려 문화-생태-관광 지역으로 탈바꿈한 발상을 설명한 문헌을 아래에 소개한다;      

독일의 대표적인 공업지대인 루르 지방은 한국의 태백․정선 지역과 같이 한때 독일 최대의 탄전지대였다. 20세기 중후반까지 석탄과 철강석을 생산하여 세계 공업을 주름잡았던 루르 지방은 세계적인 제철공업 지대로 독일 산업혁명의 중심지이며, 제2차 세계대전을 가능하게 했던 독일 전차의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석탄산업의 쇠퇴와 함께 녹슬어가던 폐광산과 제철소는 철거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초부터 이러한 폐광산과 제철소들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예전과 같이 철강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건축미를 자랑하는 녹색․생태 도시로 변모하여 지역문화의 중심이 된 것이다.
독일 루르 지방은 독일 북서부의 노르트라인-베시트팔렌 주의 일부인 17개 탄광도시로 면적은 우리의 경기도와 비슷하다. 이 지역은 유럽 최대의 광공업 지대로 200년 전부터 탄광과 철광산이 개발되면서 독일의 산업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70년대부터는 석탄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석탄산업이 서서히 사양화되어 80년대 이후 문을 닫은 탄광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중화학 공업(탄광, 철광, 제철소 등)은 이 지역을 거의 황폐화시켰고 이 지역을 흐르던 엠셔(Emcher) 강은 공장폐수로 오염되어 있었다. 그러나 폐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지 40여년이 지난 지금, 루르 지방의 예전 모습으로 완전히 복구되지는 않았지만 과거의 심각한 환경파괴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도시로 변모하였다. 루르지방 녹화를 위한 주정부와 주민들의 노력으로 오늘의 루르 지방을 죽음의 검은 도시에서 생명의 녹색․생태도시로 만들게 되었다.
먼저 루르지방의 대표적인 탄광도시 중 인구 20만의 뒤스부르크르를 들 수 있다. 이 지역은 19세기 초반부터 석탄과 철광을 생산해온 크루프와 티센이라고 하는 철강회사가 라인강과 루르강이 만나는 이 곳 뒤스부르크 지역에 대규모의 제철소와 탄광회사를 건설하면서 탄광도시의 역사를 갖게 된다.
이 곳은 한때 독일산업을 주도하였던 곳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석탄산업의 쇠퇴와 함께 80년대 초부터 문을 닫기 시작한 탄광과 제철소가 늘어났고, 그 결과 광부들은 실업자가 되어 술집과 직업 재교육장을 전전긍긍해야 했다. 뒤스부트크에 위치한 대부분의 광산들이 폐광 후 발전의 방향을 잃었으나, 폐광지역 활성화 계획에 의거 모두 녹색․생태도시로 거듭나면서 지금은 지역 문화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름으로 루르지방의 중앙에 위치한 에센(Essen)시에는 산업문화 유산으로 Zollverein Ⅻ라는 광산이 있다. 이 광산을 현재 루르지방의 역사적인 기념물로서 한 몫을 하고 있는데 내외부가 모두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전되어 있다. 건물 내부 중 과거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곳은 산업문화 박물관으로 쓰이고 현대적으로 꾸민 곳은 전시회를 여는 갤러리와 서점, 레스토랑 등으로 쓰이고 있다.
에센시 중심지에는 일부 옛 공업시설을 리모델링하여 활용하고 있는 에센 문화극장이 있다. 에센시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극장은 100년 전통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롭 철강공장을 리모델링한 역사적으로 기념비적인 곳으로 1,770석의 객석을 구비하고 있다. 에센 주민들은 물론 주변도시 주민들은 저녁 8시부터 시작하는 뮤지컬을 보기 위해 이른 저녁을 먹고 이곳을 찾는다. 1994년 극장으로 개조하면서 기둥 양쪽과 천정을 가로지르는 공장의 철골구조물을 그대로 부분 개조하여 활용함으로써 과거 공업도시에서 문화산업 도시로의 변모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루르 지방에 위치한 또 다른 탄광지역으로 인구 15만 명의 복흠(Bochum)시가 있다. 루르 지방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복흠시는 세계 최대의 석탄 박물관을 보유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오고 있다.
탄광 시설물들은 산업 폐기물로 전락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위기의 상태에서 오늘날 문화의 중심지와 녹색․생태도시로 탈바꿈시킨 것은 바로 1979년에 설립된 국제 건축전(International Bauaustellung, IBA)의 역할이 컸다.
IBA는 탄광지역이면서 중화학공업 지역이었던 루르 지방의 활성화를 위해 1970년대에 루르 지방인 뒤스부르크와 도르트문트에 이르는 엠셔강을 따라 17개 도시의 면적 800㎢를 대상으로 리모델링을 추진하였는데 당시 리모델링을 위한 프로젝트의 이름이 바로 엠셔파크 플랜이었다. 엠셔파크 플랜은 엠셔 지역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공원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독일의 엠셔강은 우리나라의 중량천이나 안양천보다 작은 강으로 라인강의 지류이며 루르강과 리페강 사이에 있다. 엠셔강을 따라 위치하고 있는 에센, 오버하우젠, 도르트문트, 뒤스부르크, 복흠, 켈젠키르헨 등의 도시가 모두 엠셔파크 플랜의 퍼즐 조각이다. 엠셔 파크는 사실 이들 17개 도시의 환경회복 프로젝트의 이름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공원의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송낙헌「독일 탄광지역 루르지방 발전과 시사점」『강원광장』71호(2006.7/8) 77-82쪽>

루르 지방을 문화와 함께 묶어준 공로는 아무래도 엠셔파크 국제 건축박람회에 돌아가야 할 것이다. 1990년도에 이미 루르지방은 ‘가능성이 있는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던바, 당시에 10개년 계획으로 수립된 이 국제건축박람회(IBA)는 기존 공업지역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과거의 광산, 제철소, 거대한 휴한지가 혁신적인 건축문화와 주목할 만한 예술적 개입으로 유례없이 문화에 의한 변화를 보여주는 현장으로 변모했다.
http://www.paradisegroup.co.kr/kor/cyber/magazine/?m=view&IdxNo=1726&PBSC=pb054


그런데 프로젝트 추진과정에서 제일 골치 아픈 것이 산업 쓰레기의 무덤들이었다. 거대한 제련소와 제철소는 한때 독일 국력의 깃발이자 자존심의 상징이었으나, 중공업의 쇠퇴와 함께 환경파괴의 주범으로 몰리면서 녹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IBA는 거대한 철골 구조물들을 과연 철거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재활용해야 할지의 사이에서 고민하였고 마침내 이 산업 쓰레기들을 모두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래서 1989년부터 10년간 그들은 폐광과 제련소 그리고 고철더미와 폐탄 언덕을 그대로 재활용한다는 원칙하에서 모두 공원의 개념 안으로 끌어 들였다. 즉 인간의 삶과 문화의 흔적으로 포용한 것이다.
IBA는 엠셔파크를 다시 일곱 개의 공원지역으로 나눠서 크고 작은 수술을 감행하였다. 세부적인 프로젝트는 120여개가 추진되었고 10년간의 노력 끝에 엠셔파크는 마침내 환경친화적인 생활공간으로 거듭났고 문화적인 녹시생태 공간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뒤스부르크 마이더리히 제철소는 과거 코크스를 만들었던 곳에서 공연장으로 변모되었고 주말이면 디스코텍으로 이용되고 있다. 저탄장은 암벽 등반 연습장으로 또 가스저장 탱크는 잠수 훈련장으로 쓰이고 있으며, 석탄 자재창고는 정리하여 주기적인 행사의 하나인 패션쇼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야간에는 제철공장 전체에 조명을 밝혀 산업의 바벨탑이 퇴락한 운명을 보여주는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마침내 과거 루르의 탄광지역은 더 이상 주민들로부터 외면 당하는 그러한 폐광지역이 아니라 환경친화적인 생활공간으로 주민들이 찾아오는 지역문화의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엠셔파크 프로젝트는 다음 3가지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루르 지방의 지역경제 효과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석탄소비의 감소로 주민들이 떠나는 폐광지역을 환경친화적인 생활공간으로, 또한 지역문화의 중심으로 발전시켜 세계적인 녹지생태 도시 사례가 되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고 이로 인해 지역경제 효과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는 폐광지역[한국의 태백 지역] 경제활성화를 위해 건설한 카지노가 현지 주민의 낮은 고용률, 지역경제의 미미한 효과와 비교해 볼때 부러운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둘째, 폐광 시설물의 보존과 활용이다. 폐광 시설물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각종 문화 및 여가 공간으로 조성하여 옛 폐광지역이 지역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요컨대 폐광지역 내 시설물을 카페나 패션쇼 장소로 활용하거나 또는 거대한 제련소를 생태체험 장소로 활용하는 등 역사적 자원에 대한 적절한 활용과 가치 창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교훈은 우리[한국]의 탄광지역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원을 잘 보관하고 활용하면 가치화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탄광 시설물의 유네스코 지정과 세계적인 관리이다. 에센시에는 광산지역의 유명한 잔재로 Hutte가 있고 과거 철강회사의 시설을 그대로 보존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1994년 유네스코 문화자산으로 지정된 Hutte는 19~20세기의 산업문명의 현장을 본래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하여 산업문화의 대성당으로 불리운다. <송낙헌, 위의 글『강원광장』(71호) 83쪽>
* 참고자료; ① 박태윤『환경친화적 지역개발 제도의 구축방안』(한국환경기술 개발원, 1996) 64~73쪽. ② 사순옥「유럽연합(EU)의 문화수도 구상과 독일의 도시」『독일문학』제95집(2005.9) 178~179쪽.

이처럼 생태․문화의 가치를 높인 루르 지방의 도시들은 일종의 창조도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조도시는 ‘인간이 자유롭게 창조적 활동을 함으로써, 문화와 산업의 창조성이 풍부하며, 동시에 탈대량생산의 혁신적이고 유연한 도시경제 시스템을 갖춘 도시’이다. 이 창조도시는 ‘21세기에 인류가 직면한 전지구적인 환경문제와 부분적인 지역사회의 과제에 대하여, 창조적으로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창조의 장‘이 풍부한 도시’이기도 한다. <佐佐木雅幸 지음, 정원창 옮김『창조하는 도시』(서울, 소화, 2004) 53쪽>

대표적인 창조도시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일본의 가나자와이며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도 환경문화 창조도시이다.

보존과 복원으로 주목받는 곳은 볼로냐의 중심부인 북서부에 위치난 옛 담배공장 터에 출현한 문학과 비주얼 아트 및 연극을 위한 ‘창조공간’이다. 이곳에는 공장 이외에도, 오래된 운하 및 항구, 소금저장고, 옛 빵제조 등의 근대산업 유산이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시 폭격으로 피해를 입어, 개수공사를 하여 과거의 건축양식으로의 복원이 진행중이다.
일본이 가나자와 시의 경우 낡은 방적공장의 벽돌로 된 창고를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시민이 자유롭게 예술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획기적인 참여형 문화 시설인 ‘시민예술촌’으로 바꾸었다. <佐佐木雅幸 지음, 정원창 옮김『창조하는 도시』92․117쪽> 

 

    3) 엥겔스 생가․방직 박물관 방문

 

      ① 엥겔스 생가(Engels-Haus)

 

12월 15일 오후에 오버하우젠을 떠난 유럽 진보기행단은 엥겔스 생가와 방직 박물관이 있는 부퍼탈(Buppertal)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엥겔스의 고향인 부퍼탈의 옛 지명은 바르멘(Barmen)으로 마르크스가 태어난 트리어(Trier)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엥겔스가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부퍼탈의 생가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엥겔스 자료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방직 박물관은 엥겔스 생가 바로 뒷편에 있다. 엥겔스의 평전 중에서 부퍼탈의 생가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하여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오늘날은 엘버펠트(Elberfeld)와 통합되어 부퍼탈(Wuppertal)시로 불리고 있는 부퍼의 계곡(Tal der Wupper). 그곳에 있는 바르멘도 라인 지방에 속했다. 1820년 11월 28일에 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유로운 시민 의식이 싹트던 바르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엥겔스는 몇 대째 섬유 공업을 이끌어 온 유서 깊은 가문의 후손이었다. 트리어에 교회 첨탑이 있다면 바르멘에는 쉴 새 없이 내뿜는 공장 굴뚝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부퍼 계곡은 명실상부한 독일 신흥 공업의 중심지였다. 1830년대 바르멘과 엘버펠트에는 200여 개의 크고 작은 공장들이 가동중이었는데, 특히 직조업․염색업․방적업 공장들이 많았다. 실크나 포플린을 생산하고 면화를 가공하는 바르멘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독일의 맨체스터(Manchester)’라고 불렀다.
그런 바르멘 시의 구역 하나를 엥겔스가가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바르멘 부르흐(Brucher) 구(Rotte)에는 그 당시 부잣집에서나 볼 수 있는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엥겔스가의 훌륭한 저택과 창고가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한 켠에는 엥겔스가 소유의 공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지친 몸을 누이는 비좁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가문의 명성에 걸맞게 프리드리히의 아버지는 네 아들과 네 딸을 종교적이며 금욕적인 사람이 되도록 교육시켰다.
엥겔스는 조용하고 신중한 학생이었지만, 결코 방 구석에만 죽치고 있는 식은 아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운동하는 것을 즐겼고, 승마를 배웠으며, 학교 친구들이나 형제들과 도시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다.
도시 주변 산책은 아직 민감한 사춘기 시절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가 본 도시 주변의 광경은 이제까지 그가 알던 세상과는 완전히 딴판인, 너무나 모순적인 세상이었다. 그곳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 대신 직조공․염색공․표백공 등과 같이, 어엿한 기술과 일터를 가지고 있는 공장 노동자들조차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비참한 생활이 있을 뿐이었다. 뚜렷한 기술이 없는 날품팔이꾼의 생활은 상상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했다. 종종 집도 없는 거지들이 싸구려 술을 마시며 현실을 잊으려 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푼돈을 받고 하루 종일 공장에서 혹사당하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쉴 시간도 주지 않고 하루 종일 아이들을 부려먹는 공장주들의 대부분은 교회 등에서 대우 받으며 거들먹거리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위선적인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도 간신히 먹고 살 수만 있는 몇 푼의 임금을 던져 주고는 악착스럽게 일하도록 강요했다. 엥겔스는 도시가 가진 모순적인 모습에 분개했다. 이때 엥겔스의 뇌리에 새겨진 인상은 평생 동안 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삶의 지표가 되어 주었다.
장남을 유능한 기업가로 만들어 자신의 사업을 물려주려 했던 엥겔스의 아버지는 1838년 아들을 브레멘으로 보내, 자신의 사업상 친구 하인리히 로이폴트(Heinrich Leupold)의 회사에서 회사 경영에 관한 나머지 것들을 배우게 했다.
브레멘은 당시 약5만 명의 인구가 사는 엄청난 규모의 무역항이었으며, 브러메하벤(Bremerhaven)과 함께 독일 연맹에서 최고로 꼽히는 이민 항구였다. 브레멘으 시민 계급은 다른 지역에 비해 자유주의 이념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를 반영이라도 하듯 브레멘의 서점에는 진보적 신문과 책들이 많이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이념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덕분에 브레멘 사람들 사이에는 반봉건적․개혁적인 성향이 점점 더 폭넓게 확산되었다. 혁명적 민주주의의 대변자 하인리히 하이네와 루드비히 뵈르네 등 ‘청년 독일파’(Jungen Deutschland)로 불리던 자유주의적 문학가와 저널리스트들이 그런 성향의 글들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엥겔스는 다른 사람이 쓴 시를 읽는 것만큼이나 직접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다. 브레멘에서도 가끔 시를 쓰곤 했지만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보다는 사회 현상이나 문제점에 대해 비판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새롭게 꽃을 피웠다. 18세라는 어린 나이게 이미 사회 비판적인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 그는 진보적 저널리스트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가 첫 번째로 발표한 사회 비판적인 글은『텔레그라프 퓌어 도이칠란트』(Telegraph für Deutschland)에 실린「부퍼탈 통신」(Briefe aus dem Wuppertal)이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고향 부퍼탈의 비참한 상황을 폭로하면서, 공장주들의 위선과 유산(有産) 계급의 비인간성을 고발했다.  

물론 아직 어린 엥겔스가 자본주의적 착취의 현상과 문제점을 뿌리까지 완전히 파헤치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그는 격렬한 고발을 통해 노동자의 운명에 대한 깊은 책임감을 보여 주었다.
익명으로 출판된 엥겔스의 기사는 부퍼탈에서 ‘엄청난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신문은 순식간에 다 팔렸고, 부르주아적 신문들은 엥겔스의 고발이 근거없는 비난에 지나지 않다고 매도하면서 공장주들의 악행을 두둔했다. 그러나 엥겔스는 자신의 주장 중 진실이 아닌 부분을 지적하라고 거침 없이 반박했다. <하인리히 겜코브 지음, 김대웅 옮김『맑스 엥겔스 평전』(서울, 시아출판사, 2003) 34~67쪽 요약>

 

      ② 방직 박물관

 

시간 여유가 없어서 엥겔스 생가를 대강 대강 견학한 유럽 진보기행단이 다음 차례로 간 곳이 방직 박물관이다. 방직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Museum für Frühindustrialisierung’으로서, 초기 산업화 박물관이다. 즉 자본주의 초기의 산업화를 주제로 한 박물관이다. 자본주의 초기의 산업화는 주로 방적․방직공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영국의 맨체스터와 독일의 부퍼탈과 같은 공업도시에 있는 방직공장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러 전시물중에서 방직공장의 아동노동 착취에 관한 것이 가장 인상적이어서, 엥겔스가 저술한『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Die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의 아동 노동에 관한 부분을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 공장제도의 초기부터 어린이들이 고용되었는데, 처음에는 기계의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기계는 거의 전적으로 어린이들에 의해서만 다루어졌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구빈원으로부터 모집되어 공장주에게 수 년 동안 도제로서 고용된다. 그들은 숙식 뿐 아니라 옷도 공통으로 사용하며 완전히 그들 주인의 노예와 다름 없다.
* 노동자 계급의 어린이, 특히 공장 노동자의 어린이의 높은 사망률은 그들이 유년시절에 보내는 유해한 생활환경을 증명하고 있다.
* 공장 노동자의 9살짜리 어린이 한 명은 빈곤과 궁핍, 부적합한 옷과 건강에 해로운 주택 들 춥고 습기찬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 공장주들은 보통 8~9세이 어린이들을 고용하고 있다. 그러나 드문 경우긴 하지만 5살 짜리 어린이도 고용하고 있으며, 종종 6~7세의 어린이도 고용하고 있다. 노동시간은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14~16시간에 이른다. 공장주들은 감독자가 이런이를 매질하고 학대하는 것을 허용하며 실제로 자신이 그렇게 하기도 한다.
* 공장주들은 괘씸한 야간 노동제도를 도입했다. 2교대로 고용된 각각의 노동자만으로도 전체 공장을 가동시킬 수 있을 만한 수이다. 한 조는 낮에 12시간을, 나머지 한 조는 밤에 12시간을 일해야 한다. 이것이 어린이들의 체격에 미칠 영향은 말할 필요도 없고 젊은이나 성인의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35,000명의 환자를 보았지만 리즈에 오기 전에는 대퇴골 하부가 그렇게 굽어져 있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그것이 구루병(곱사등)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병원에 있는 많은 환자들이 보통 구루병에 걸리지 않는 8~14세의 어린이들이며 그 병은 어린이들이 공장에 나가기 싲가한 후에 처음 발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그 병은 과로에 기인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그들은 모두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이었고 과로한 노동 때문에 안짱다리가 되었다.
* 한 소년은 2층에 올라갈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다리가 굽었고, 한 소녀는 등과 엉덩이가 아주 보기 흉한 상태였다. 이외에도 과도한 노동 때문에 여타의 불구자가 생겨났는데, 그중에는 평발이 있다.
* 불구자들은 조금도 쉬지 않고 서 있었기 때문에 척추와 엉덩이, 다리에 무리한 하중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 대체로 공장의 공기는 습하면서도 더운 편인데 보통 필요 이상으로 무덥다. 통풍이 잘 되지 않을 때는 공기가 더럽고 답답하며 산소가 부족하기 일쑤다. 더욱이 공기는 먼지와 윤활유 냄새로 꽉 차 있으며 이 냄새는 거의 모든 곳에 배어 썩은 냄새를 풍긴다.
* 소년들은 공장에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유년시절의 장밋빛 젊음을 상실해 버리고 다른 소년들보다 더 창백하고 야위게 된다.
* 어린이들의 외모가 너무 창백하고 성격들이 훨씬 침울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어린이들은 나이에 비해 키가 아주 작았다. 무수히 많은 연주창과 폐병, 장간악의 질병,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는 노동자들을 만났는데...
* 맨체스터의 공장에서 일하는 모든 소년․소녀들은 의기소침하고 창백한 얼굴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보통 젊은이의 표정의 변화나 생동감, 즐거움이라고는 전혀 없다.
* 공장노동 때문에 젊은 노동자들의 성장이 억제되고 있다는 사실...
* 멘체스터의 노동자들은 곧 피그미족과 같이 될 것이다.
* 그들이 생활하고 노동하는 상황적 조건 때문에 일찍 늙어 버린다. 대부분은 40세가 되면 노동하기에 부적합하게 되고 소수의 사람만이 45세까지 계속 공장에 다니며 50세까지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의 신체 발달이 지체되어 가슴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거나 전혀 발달하지 않는다. 생리는 17세 내지 18세에 처음 나타나고 때때로 20세에야 나타나며 거의 없는 경우도 있다...생리가 불규칙한 경우가 매우 빈번하며 엄청난 고통과 수많은 질병 특히 빈혈을 수반한다.
* 어린이들은 집에 가기에 너무 피곤해서 건조실의 양모 속에 숨어 자기도 한다. 그러나 곧 감독의 채찍에 의해 공장에서 내쫓긴다. 집에 돌아온 어린이들은 매일 너무나 피곤해서 입맛이 없고 졸리기 때문에 저녁식사를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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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355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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