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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평화 통신사 기행문 (2)

'朝鮮人 街道'를 따라

 

김승국

    

2008년 10월 30일~11월 5일에 이루어진 ‘평화 통신사 기행’의 주요한 목적은 (조선 통신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조선인 가도(朝鮮人 街道)를 따라 가며 한-일 간 ‘평화의 실크로드’를 개척하는데 있었다.

이와 같은 목적에 따라 2008년 11월 1일부터, 조선인 가도를 일본의 9조회 회원들과 함께 탐방했다. 한국의 평화 통신사 기행단과 오사카 지역의 ‘9조의 회’ 회원들이 동승한 버스가 11월 1일 오전 10시 30분경에 本願寺八幡別院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이 지역의 9조의 회 회원들과 상견례를 한 뒤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八幡(하치만) 옛 시가지(舊 市街地)의 조선인 가도를 함께 걸었다.

이어 11월 1일 오후에 彦根(히코네)에 도착한 버스 동승자들(한국 평화통신사 일행+오사카 지역의 9조의 회 회원들)은, 히코네 지역의 ‘9조의 회’ 회원들과 함께 히코네의 조선인 가도를 탐방했다. 이 밖에 조선인 가도에서 좀 떨어져 있지만 조선 통신사과 관련이 있는 高月町(다카 쓰끼 죠)의 觀音마을(觀音像을 모신 불교 마을)과 雨森芳洲庵(조선 통신사 일행을 위해 통역을 했던 일본인 芳洲의 기념관)도 방문했다.

이처럼 한국 평화 통신사 일행과 (조선인 가도가 있는 지역의) 9조의 회 회원들이, 조선 통신사가 지나갔던 길을 함께 걸으며 21세기의 한-일간 평화의 실크로드를 개척한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그럼 조선인 가도가 무엇인지부터 살핀 다음에 조선인 가도를 탐방한 순서대로 기행문을 싣는다. 물론 ‘평화 통신사 기행문 2’의 부제와 동일한 제목(朝鮮人 街道를 따라)의 동영상을 『평화 만들기』의「평화누리 TV」에 올린다. ‘평화 통신사 기행문 2’를 읽는 독자들은, 동일한 제목으로『평화 만들기』의「평화누리 TV」에 실린 동영상을 함께 감상하면 더욱 실감이 날 것이다.

 

1. 조선인 가도

 

조선인 가도는, 사가 현(滋賀県)에 있었던 근세의 샛길이다. 이 길을 朝鮮人道, 京街道(교토로 가는 길), 京道, 八幡道(하치만으로 가는 길), 唐人街道라고 부르며 거리는 41㎞이다. 조선인 가도는 나까센도(中山道)에서 갈라져 41㎞를 달리다가 다시 나까센도에 합류한다. 갈라지는 지점은 사가 현의 野洲市에 있는 行畑이며, 八幡(하치만)・安土・彦根(히코네)을 경유하여 사가 현 히코네 시의 鳥居本에서 다시 中山道에 합류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세끼가 하라(関ヶ原) 전투(1600년 ‘세끼가 하라’에서 벌어진 大捷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실권을 장악함)에서 승리한 뒤 조선인 가도를 통해 개선(凱旋)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의 다른 쇼군(將軍)들은 이 길을 이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오직 조선통신사만 이 길을 이용했기 때문에 ‘조선인 가도(朝鮮人街道)’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뒤 오랫동안 일본사람들조차 조선인 가도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히코네의 고등학교(東高校)학생들이 1990~1991년에 구석구석 탐문한 끝에 조선인 가도의 지도를 완성한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인구(人口)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조선 통신사가 이 길(조선인 가도)을 10회 이용하여 에도(江戶; 옛 일본의 수도/ 현재의 도쿄)까지 갔다. 조선 통신사가 조선인 가도를 지나며 휴식한 곳은 本願寺八幡別院이며 잠을 잔 곳은 히코네(彦根)에 있는 쇼안지(宗安寺)이다. 쇼안지에는 지금도 ‘조선시대 고관(高官)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그러면 한국 평화 통신사 일행과 일본인(오사카 9조의 회 회원들+조선인 가도 주변의 9조의 회 회원들)이 함께 들른 조선인 가도의 이모저모를 탐방의 순서대로 설명한다.

 

2. 조선인 가도를 따라 탐방한 곳

 

  1) 하치만(近江八幡)市의 本願寺八幡別院

 

이곳에서 조선 통신사의 정사(正使)․부사(副使)가 휴식을 취하며 점심식사를 했다. 일본인들이 조선 통신사 일행에게 일필휘지(一筆揮之)를 간청하면 응하기도 했다. 부사(副使)가 써준 붓글씨가 ‘副使の書’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정사․부사를 제외한 조선통신사의 수행원들은 직급에 따라 주변의 사찰에서 점심식사를 했다(中官은 正榮寺에서, 下官은 蓮照寺에서, 通詞는 桔梗屋庄太郞 堺屋權兵衛 등에서, 兩長老伴僧은 寶積寺 등에서, 宗對馬守는 正福寺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2) 近江 상인의 거리

 

本願寺八幡別院를 출발하여 10여분 정도 조선인 가도를 따라 걸어가니, 近江 상인들이 활약했던 (하치만 지역의) 옛 시가지가 나타났다. 이 거리에는 에도 시대의 초기에 해외 무역업을 했던 西村太郞右衛門邸跡과 西川利右衛門邸 등이 있다.

近江 상인의 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카인 秀次가 세운 八幡城의 성하(城下)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한때 일본을 대표하는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3) 八幡堀

 

八幡堀은 八幡城을 축성할 때 판 內堀이며, 양쪽 끝이 琵琶湖(일본 최대의 호수)로 연결된다. 八幡堀은 운하․포구로 이용되었다.

 

  4) 日牟禮八幡宮

 

日牟禮八幡宮은 헤안(平安)시대에 세워진 신사로서, 秀次가 八幡城을 축조할 때 산 중턱에 있던 上八幡社를 현재의 위치에 있는 下八幡社로 통합했다.

 

  5) 宗安寺(쇼안지)

 

宗安寺는, 조선 통신사 중 가장 직위가 높은 三使․高官들의 숙소이다. 宗安寺가 있는 히코네(彦根) 지역의 영주, 히코네 城 아랫마을 사람들이 三使․高官을 극진하게 모시며 다이묘(大名; 최상급의 영주) 이상의 대접을 했다.

三使․高官을 제외한 통신사 일행은 宗安寺 부근의 사찰을 숙소로 이용했다(中官은 大信寺, 下官은 明性寺, 官人荷物 책임자는 蓮華寺, 長老는 江國寺 등, 通詞는 願通寺 등, 對馬守本陣은 林吉兵衛에 머물렀다)

 

  6) 宗安寺의 조선 고관 초상화

 

조선 통신사의 三使․高官이 잠을 잤던 방에 오래전부터 조선시대 고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조선시대의 임금이냐, 고관이냐, 통신사의 최고 책임자냐를 놓고 여러 가지 설(說)이 있다고 한다.

  7) 高月町(다까 쓰끼 죠) 觀音마을 역사자료관

 

사가(滋賀)현 伊香郡 高月町 雨森(아메모리)은, 조선 통신사를 위해 통역을 했던 이 지역(近江)의 유학자인 ‘호슈(芳洲)’의 고향이다. 이 마을(高月町)의 주민들(115戶, 520명이 거주함) 대다수는 불교신자로서 (국보급 관음보살 像을 모신) 觀音마을 역사 자료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 역사 자료관의 2층에 雨森芳洲(아메모리 호슈)와 관련된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8) 雨森芳洲(아메모리 호슈)의 자료관

 

1668년 사가(滋賀)현 伊香郡 高月町 雨森에서 태어난 芳洲는 17살 때 에도(江戶)로 유학 가서 유학(儒學)을 공부했다. 그 뒤 대마도로 부임한 芳洲는 나가사키에서 중국어를, 부산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는 1711년과 1719년의 두 차례에 걸쳐 조선 통신사의 통역을 맡아 에도(江戶)까지 왕복했다.

한-일간의 우호를 강조한 그의 저서『交隣提醒』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진실하게 교류하며 誠信을 지키면, 조선 사람이 일본인을 속이지 않을 것이며 일본인도 조선인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 진실을 갖고 교류하는 게 誠信 외교이다.”

에도 시대의 국제인 이었던 芳洲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가(生家)가 있는 雨森에 <동아시아 교류의 집 ‘雨森芳洲庵’>이 1984년에 세워졌다. 芳洲의 기념관인 芳洲庵을 중심으로 한-일간의 국제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芳洲 축제’에 참석한 지역 주민들이 민족의상을 입고 조선 통신사를 흉내 내는 거리행진을 벌인다.

* 참고자료; 門脇正人『「朝鮮人街道」をゆく』(彦根市, サンライズ出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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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342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