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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통일의 땅 길 열다 (12)

정주영 체육관 개관식에 다녀와서

  
김승국


 2003년 10월 9일-귀환 길


오늘은 서울로 되돌아가는 날. 아침 8시 30분 양각도 호텔 전 직원이 도열하며 남쪽 일행을 환송했다. 북쪽 밴드 단이 ‘우리 다시 만나요’라는 노래를 연주하는 가운데 버스가 호텔을 떠나 평양 시내로 진입했다.
우리들은 평양-개성간 고속도로에 진입한 버스에 동승한 북측 안내원과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석별의 정을 달랬다. 서로 헤어지기 섭섭했던지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북측 여성 안내원을 향해 ‘나중에 통일되면 서로 사돈지간을 맺자’고 제의했다.

역시 돌아갈 때도 수곡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쇼핑을 했다. 지난번 평양에 들어올 때 보다 훨씬 짜임새 있는 간이 노상 상가를 꾸몄다. 남측 일행의 호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을 은근히 빼앗으려는 상술이 가상했다. 심지어 수십 년 된 구렁이 술을 독아지 채 들고 나와 남쪽 술꾼들을 호객했다.

 

개성의 거리에서

 

드디어 개성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쩐지 개성의 시민들이 평양 시민보다 더 꾀죄죄해보였다.

우리 일행은 개성의 왕건 왕릉을 향해 달려갔다. 왕건 왕릉은 1992년 5월에 개건했다고 한다. 고려가 조선의 첫 번째 통일 국가이므로 북쪽 당국이 신경을 많이 쓰는 듯했다. 왕건 왕릉의 가장 빛나는 유물은 왕건 화상이었다. 왕건의 32대 후손이 오랫동안 가보로 보존해오던 왕건 화상을 기증했다고 한다. 개성엔 지금도 왕씨 들이 많이 산다고...
그런데 왕건 화상을 보던 남쪽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남쪽 TV 사극에 나오는 왕건(최수종 役)과 왕건 화상의 얼굴이 너무 다르다”고 말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었다.

1994년 1월 31일 왕릉을 재건했는데 왕릉 앞에 ‘전라도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라’는 훈유석이 있어서 영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좁은 땅 덩어리에서 지역감정의 역사가 1,200년 이상이나 된다니...그러니 통일이 안 되고 분단이 지속되지...통일이 안 되는 내재적 요인도 따져 보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선죽교 다리에 핏자국 없다

 

이어 선죽교로 달렸다. 정몽준이 피 흘린 자욱이 선죽교 다리 돌에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는 낭설이었다. 1780년대 선죽교 다리를 중건할 때 주민들이 정몽준의 충절을 기리는 마음으로 ‘피 흘리는 듯한 무늬가 들어 있는 커다란 화강석 하나를 다리 돌로 사용했을 뿐 실제로 피가 묻어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선죽교를 둘러본 다음 고려 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으로 가는 도중 폐허가 된 개성 방직공장 건물은 북쪽의 공장들 대부분이 개점휴업임을 대변하는 듯했다.

고려 박물관은 성균관에 세워졌다. 1천여 점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다는데 보존 상태는 허술했다. 이 박물관의 뒤편에 버티고 있는 송악산은 남쪽의 도라산 전망대 건너편에서 우뚝 솟은 산이 아닌가? 이 송악산이 첫 통일 국가인 고려의 수도 개성이 내려다보았듯이, 21세기 벽두의 ‘통일 Corea’를 다시 굽어보길 비는 마음으로 고려 박물관을 빠져 나와 개성의 남단으로 달렸다. 이윽고 북측의 버스가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북측의 출입국 관리소에 당도했다.

우리는 4일전 넘어온 길을 역순(逆順)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이제 꿈만 같았던 방북 여정을 마무리하고 ‘현실 세계가 펼쳐지는 서울’로 되돌아가야한다. 분단은 현실이고 통일은 꿈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꿈을 규정하므로 내 몸뚱이도 그 현실에 적응해야 하리라...

DMZ 위의 도로를 종주한 버스가 남쪽 출입국 관리소에 도착함으로써 방북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남쪽 출입국 관리소의 두꺼운 철책선이 4일 동안 잠깐 열렸다가 닫힌 것이다. 나는 언젠가 또 다시 DMZ의 땅 길을 뚫고 방북하리라 마음먹고 서울로 귀가했다. 3박 4일간 통일의 땅 길을 연 남쪽 일행은 분단의 원점으로 재귀(再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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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舊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12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