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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통일의 땅 길 열다 (10)

정주영 체육관 개관식에 다녀와서

 
김승국
 


2003년 10월 8일 ③-묘향산 호텔에서

 

우리 일행은 묘향산 국제친선 전람관의 구경을 마친 다음 점심 식사를 위해 묘향산 호텔의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에서는 여러 가지 묘향산 토속음식을 내놓았다. 그중에서 묘향산 계곡에서 잡은 송어를 재료로 만든 요리가 일품이었다.

 

한사코 팁을 주다

 

식사도중 술 한잔이 들어가자 약간 취기가 오른 사람들이 조금씩 객기 부리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필자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던 어떤 분이 약간 객기를 부리듯 식당 종업원을 부르더니 ‘음식이 매우 맛이 있다’고 겉치레로 칭찬하면서 팁(?)을 손아귀에 반강제로 안겨주었다. 20대 초반의 여성 종업원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한사코 팁을 거부하다가 기어코 받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보니 그런 돈(팁)을 처음 받는가 보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상당한 돈을 팁으로 받았다. 아마 그녀가 귀가하여 그 돈을 가족에게 펼쳐보면 가족들이 놀라며 팁을 준 남쪽 사람에게 묘한 경외심을 가질 것이다.

 

팁의 마술

 

그런데 여기에서부터 팁의 마술이 시작된다. 그녀가 팁으로 받은 달러의 마술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팁의 마술 이야기를 남쪽 사회에서부터 풀어보자. 남쪽 사회에서 성과급으로서 팁을 주는 것은 상식이며 교양이자 예의이다. 그러나 팁 문화가 극성을 부리면 팁과 뇌물의 경계가 사라진다. 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팁을 빙자한 돈을 주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 때는 팁이 아니라 촌지(寸志)로 둔갑한 요물이 된다.

촌지라는 요상한 돈이, 받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든다. 촌지가 급행료 역할을 하게 된다. 관청 등에서 더디게 이루어질 일도 촌지라는 기름칠을 하면 금방 이루어져, 돈을 준 사람이 특혜를 받게 된다. 촌지가 사람(의 마음)을 사는 구조가 형성된다. ‘가랑비에 옷 졌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처음에는 조금씩 촌지를 받다가 나중에는 관행으로 굳어져 일종의 ‘촌지문화’가 뇌물 수수 관계를 위장하는 형태로 형성된다.

 

팁과 촌지

 

이런 장황한 설명을 하는 이유는, 필자도 한두 번 ‘촌지 아닌 촌지’를 받고 마음이 변하여 상대방에게 약간의 서비스를 제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촌지는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봉투를 준 사람에게 약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첫 번 째의 대응이지만, 갈수록 촌지에 익숙해진다(촌지를 준 사람은 바로 이것을 노린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촌지를 줄 때가 되었는데도 주지 않으면 ‘때가 되었는데 왜 주지 않나’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런 심리 상태가 좀 지나면 ‘이 녀석이 나를 뭐로 보나....’ 생각하며 촌지를 주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서운한 감정(이게 지나치면 괘씸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 눈치 빠른 사람은 이런 감정이 생기기 이전에 헤아려 촌지를 다시 갖다 준다. 이것이 좋게 말해서 ‘촌지문화의 소통’이다. 촌지문화의 소통 속에서 ‘촌지가 뇌물로 둔갑하는 마술’이 벌어진다. 이런 마술은 남쪽 사회의 음지를 움직이는 윤활유이다.

 

연변 사회 망친 졸부들의 팁 공세

 

이 윤활유가 북녘 땅에 쏟아질 경우 북쪽 사람들의 심성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촌지 문화의 마술이 북녘 사회에 집단적으로 들어갔을 때 '私有(私的 所有)를 돌 보듯하던 북녘사회'에 미칠 파장이 어느 정도나 될까?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제일이다’는 'money(자본) 제일주의’는 자본주의만의 이야기로 끝날까? 사회주의권에도 아프리카의 저개발 사회에서도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라는 변칙적인 定式이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돈이 사람을 속이고 사람을 망치는 이야기는 자본주의만의 이야기가 아닌 듯하다. 중국 동포들이 소꿉장난하듯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연변 땅을 어지럽힌 언저리에, ‘남녘땅의 졸부 행각’이 있었다. 연변에서 돈 자랑을 하던 남한의 어느 졸부는 연변의 동포 눈앞에 돈 뭉치를 보이며 ‘내 앞에서 무릎을 꿇면 이 돈을 팁으로 주겠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 팁 뭉치 앞에서 사회주의 인민의 자존심이 구겨졌을 것이다.

남한 땅의 졸부들이 뿌려댄 팁은 결국 ‘노르마(Norma; 할당된 일거리)의 대가’로 생활비를 충당해오던 연변 조선족 사람들의 가치관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팁을 정확하게 받아낼 수 있는 술집, 노래 방, 매춘업소 주변에서 맴돌면 한달 생활비를 너끈하게 벌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서서히 연변 땅에 형성되었을 게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연변의 조선족 사회는 중국식 사회주의 윤리로부터 이탈하여 사회주의 공통체가 파괴되고 자본주의 쓰레기 문화가 유입되어 사람들의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시작했다.

아마 연변 사람들도 묘향산 호텔 식당의 여종업원처럼 처음엔 한사코 돈(팁) 받기를 거부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남쪽 사람들이 물밀 듯이 들어와 뿌려대는 돈의 마술에 걸려들어 지금의 연변 사회는 도덕공황 상태가 되었다. 이런 일이 북녘 땅의 지척인 연변에서 일어났는데도, ‘북한이 남쪽사회의 ‘팁→촌지→뇌물→부정부패→도덕적 타락’의 악순환(팁의 마술)에서 예외지대일 것‘이라고 우길 수 있나?

 

북한은 예외지대일까?

 

북한이 이미 예외지대가 아님을 증명하는 여러 이야기들이 나돌고 있다. 남쪽 사람들이 방북 티켓을 따내기 위해 뿌리는 급행료(?)는 팁․ 촌지를 주는 습성과 무관한가? 그리고 그런 돈을 받는 북쪽의 경우 외화벌이라는 미명 아래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돈은 비공식적으로 허가난 촌지이다. 북쪽 관료 사회의 허가를 받아 공식화되었기 때문에 ‘허가 난’ 촌지일 뿐, 돈을 주는 남쪽 사람의 입장에서는 일이 잘되라고 기름칠하는 촌지이다. 이 촌지가 남북관계의 증진을 위해 쓰이고 있으므로 ‘퍼주기’에 해당되지 않아 퍽 다행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위로의 말씀일 뿐이다.

북쪽 사람들이 지금은 ‘촌지의 마력’에 깊숙이 빠져드는지 모르고 받을지 모르나, 촌지의 상호관계가 자신들의 입지를 압박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 압박은 특히 개인에게 다가올 가능성이 있다. 팁이나 촌지는 개인이 받기 때문이다. 私有가 제도화된 남쪽 사회에서 받은 팁이나 촌지는 사유물이므로 도덕적 심판만 받으면 된다. 그런데 私有가 원칙적으로 금지된 북녘 땅에 앞으로 수많은 관광객이 들락거리며 팁을 뿌리고 다닐 텐데 그런 ‘사유물로서의 팁’을 어떻게 주체하려고 하는지...

 

북쪽 사람들도 욕구를 지닌 인간

 

황석영 선생의 방북 첫 소감은 ‘북녘 땅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이었다. 이는, 북녘 사람들도 남쪽 사람들과 비슷한 삶의 행태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황석영 선생의 의도에서 좀 빗나갈지 모르나, 북쪽 사람들도 남쪽 사람들과 비슷한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북쪽 사람들이라고 해서 소비욕구․ 돈 욕심이 없겠는가?

북쪽 사람들이 아직은 ‘건전하게 보이는 약간의 돈 욕심’이 있다고 하자. 그런 돈 욕심이 주체 사상․ 사회주의의 도덕성에 눌려 있으면 북한 지도부에게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않고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경향이 북녘 사람들에게 강해지고 있을 때, 남쪽 사람들의 팁(촌지)이 쏟아져 들어온다면 (이에 대비하지 못한 연변이 그러했듯이) 북한 사회가 감당해 낼 수 있겠는가?
묘향산 호텔의 식당에서 팁을 주고받는 손가락 사이를 바라보며 이런 의문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모기장 뚫는(?) 팁‧촌지의 실바람

 

북쪽 당국이 ‘자본주의 문화의 쓰레기를 걸러내기 위한 모기장을 쳐 놓고 개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데 송사리 같은 팁이 촌지로 변한 다음 북녘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하며 ‘자본주의 소비문화를 동경하게 만드는 실바람’을, 모기장이 모두 막아낼지 의문이자 걱정이다(북측 ‘모기장’론의 방어력․억지력에 대한 의문). 이런 의문 때문에, 이처럼 산만한 ‘우려의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남쪽 사람들의 돈 씀씀이

 

우리 일행 중 중소기업 사장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의 돈 씀씀이는 이런 우려를 하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양각도 호텔의 맨 꼭대기에 있는 식당 겸 ‘라운지 바’에서 중소기업 사장단들이 마시고 먹은 하룻밤 술값이 호텔의 전체 수입보다 많았을 것이다. 어떤 중소기업 사장은 방북하는 날 아침에 허겁지겁 책상 서랍을 열어 지갑에 꾸겨 놓은 돈 50만 엔을 잃어버렸는데, 이를 발견한 양각도 호텔의 여종업원이 돌려줘 다시 찾았다. 고마움을 느낀 이 사장님이 고마움의 표시로 여종업원에게 (북쪽 사람에게는) 뭉텅이 돈을 ‘사례금 형식의 팁’으로 주었을 게 틀림 없는 일...물론 그 여종업원은 묘향산 호텔 식당의 여종업원처럼 처음엔 거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벼운 욕심이라도 생긴다면 두 번째부터는 덜 부끄럽게 팁을 받을 것이고, 세 번째부터는 스스럼 없이 팁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북녘사회를 좀먹을 촌지인 줄 모른 채....

 

“북한 사람들이 돈 맛을 알게 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팁을 받은 북녘 사람에 관하여 주로 이야기 했다. 그러면 우리 일행 중 북녘 사람들에게 팁을 건네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지난 밤 양각도 호텔의 라운지 바에서 밤새도록 고급 술을 마신 탓인지 이틑날 아침에도 술찌기미 냄새가 입에서 진동하는 어느 사장은 “북한 사람들이 돈 맛을 알게 해야 한다. 그들의 경쟁심리를 키워야한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는 실제로 북한 사람들이 돈 맛을 알게 하려고 지난 밤 라운지 바에서 팁을 주었을 것이다. ‘팁(성과급)을 받기 위해 경쟁하며 일하라. 경쟁심리를 키워 자본주의를 배워라’는 뜻으로 팁을 주었을 것이다. 그 사장의 팁에는 자본주의의 돈 맛을 알게 하는 독이 묻어 있으며, 자본주의 경쟁을 부추겨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을 유발하는 독이 묻어 있다. 이 독을 받아 마시는 북녘 동포들이 그래도 ‘북측 당국의 모기장론’을 추종한다면 다행이다(북녘 동포 자신이 모기장론을 추종하는 것과 무관하게 남쪽 사람들이 주는 팁‧촌지․뇌물의 파괴력, 졸부 여행객들의 과잉 소비력이 모기장을 뚫고도 남을지 모른다).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은 북녘사람들이 늘어날 경우 ‘북한에서 자본주의의 연착륙’을 바라는 부시 정권․남한의 냉전 수구 세력이 보기에 아름다운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만약 이 독을 받아 마시는 사람들의 숫자가, 방북하는 남녘 사람들의 숫자에 비례해서 늘어나거나, 독의 독성이 갈수록 강해지거나, 그 독에 대한 북녘 사회의 항체가 줄어든다면, ‘북녘 땅이 제2의 연변이 되는 날’이 앞당겨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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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舊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12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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