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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통일의 땅 길 열다 (6)

정주영 체육관 개관식에 다녀와서

 
김승국  

 

10월 7일 ②-을밀대‧ 개선문‧ 만경대

 

2003년 10월 7일 아침. 가을정취가 물씬 풍기는 을밀대에서 바라본 평양의 경치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었다. 약간 옅은 안개에 휩싸인 능라도. 능라도 안의 5.1 경기장. 보통강 물길을 가르는 섬 안의 고즈녁한 나무숲. 숲 속의 나뭇잎들이 가을바람에 살랑살랑 춤추는 모습. 모란봉 밑의 산사. 이런 정경이 모란봉을 끼고돌면서 펼쳐졌다. 저 멀리 평양 시내의 낮은 봉오리를 배경으로 한 빌딩群의 sky line이 모란봉 한 곳을 향해 줄을 서는 듯했다.

을밀대 주변은 공원으로 잘 가꾸어져 있었고, 몫이 좋은 곳을 차지한 화가들이 옹기종기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공원의 한 편에서 학생들의 야외수업이 한창이었다. 소풍 나들이 온 어린이들이 색동 저고리를 자랑하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도련님, 공주님같이 차려입은 한 무리의 유치원 아이들이 야외수업하러 올라왔다. 옷 매무새와 가방이 상당히 화려했다(이런 아이들을 보고 당 간부의 자녀들이라고 언론들이 추정하는 게 아닐까?)

우리 일행은 깜찍한 아이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었다. 북쪽 사람들 모두 사진 찍자는 제의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개선문에서

 

을밀대를 실컷 감상한 다음 개선문으로 향했다. 해설 강사의 설명에 의하면 개선문은 조선 광복의 업적을 기리고 김일성 주석 70년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단다. 개선문은 주체사상탑과 동시에 건립되었다. 화강석 1만 5천 톤을 재료로 사용했으며 70개의 진달래 꽃으로 수놓았다. 그리고 백두산에서 항일운동을 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백두산을 형상한 그림을 새겨 놓았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평양의 교외에 있는 만경대쪽으로 달려갔다. 만경대 가는 길은 아주 널찍했다. 길가의 1층 상점은 닫혀 있는지 열려 있는지 알 수 없는 곳이 많았고, 낮인데도 커튼이 드리워진 곳도 있었다. 궤도 차량의 승객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버스는 광복거리, 광복 백화점, 평양 대극장, 만경대 놀이터를 지나갔다. 만경대에 다가오자 승화강변의 낚시꾼들이 태연하게 고기를 낚고 있었다. 만경대 입구의 마을에서는 살림집들을 집단적으로 짓고 있었다. 북쪽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집 짓는 걸 보고, 필자의 중고등학교 시절 전교생이 줄줄이 돌을 나르던 광경이 떠올랐다.


 
만경대 단상

 

드디어 말로만 듣던 만경대에 도착했다. 여러 무리의 북한 인민들이 성지 순례하듯 만경대의 단체참관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경대 입구에서 안내원이 마이크를 들고 설명했다. 안내원은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가냘픈 몸매의 여성이었다. 어쩌면 그 옛날 우리들의 엄마들이 가장 즐겨 입던 조선 여인의 복장을 빼어 닮았는지...돌아가신 필자의 모친이 환생한 줄 알았다.

만경대의 안내원은 하루에도 수백 번 똑같은 내용을 말할 텐데 너무나 진지하게 설명했다. 안내원의 말을 모두 옮길 수 없으나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김일성 주석은 1912년 봄 이곳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총대 가문의 혈통을 지닌 김일성 주석이 14살에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 이 집을 나선지 20년만인 1945년 10월 14일 이 고향집을 다시 찾았다. 1972년 4월 이 곳을 다시 찾은 김일성 주석은 ‘이 혁명의 초가집을 원상대로 보존하라’고 지시했다. 이 곳은 혁명적 군인 가문의 요람이요 혁명의 요람이다. 혁명‧ 애국심의 학교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곳을 태양의 성지로 빛내려한다.’

안내원의 설명대로 이 곳에서 '만경대 가문의 통치술'이 나왔다. 1945년 해방 이후 지금까지 기질이 강한 북쪽 인민들을 다스린(?) 만경대 가문의 통치술을 연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3개월 만에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투덜댄 것을 생각하면 더욱 연구의 가치가 있을 성 싶었다.
3개월의 232배를 대물림하면서 만경대 가문이 통치한 비결은 무엇일까? 나름대로 북한 인민의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낸 비결은 무엇일까? 이걸 이해해야 북한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까?

최근의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58년간 끄떡없이 인민을 지도해온 비결을 알아야 북쪽 사회에 대한 진짜 내재적 접근이 가능하리라. 지난 10여 년간의 기아 속에서도 (약간의 탈북자를 제외하고는) 인민의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게 한 비결을 알아야 북쪽 사회를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남쪽에서 10년 동안 심각한 기아상태가 지속되었다면 10회 이상의 크고 작은 폭동(난리?)이 일어났을 것이다. 지독한 식량난 속에서도 폭동은커녕 북쪽의 인민들이 서로 품앗이하며 고난의 행군을 성공리에 마친 데에서 만경대 가문의 통치술을 찾아야할 것 같다.

이렇게 북쪽 특유의 '만경대 가문의 통치술'을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선군정치(총대의 혁명사상)에 접근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안내원이 말하듯이 만경대는 총대가문 혈통의 원조이므로, 이곳 만경대가 바로 선군정치의 요람인 셈이다.

필자는 평화 활동가로서 ‘군비축소’를 지론으로 삼고 있다. 물론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군비축소가 이루어져야하며, 미국과 북한 모두 핵무기 개발을 포기해야한다. 이는 당위일 뿐, 기아 속에서도 미국의 전쟁위협-북한정권 붕괴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비확장형 선군정치’를 펼치고 있는 북측의 현실을 직시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군비확장형 선군정치를 위해 경제난 해결에 쓰일 국고를 국방비로 충당하다 보니 경제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악순환이 북녘 땅에서 지속되고 있으며, 이러한 악순환을 대변하는 것이 북한 핵문제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북한 핵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 선군정치를 제대로 이해해야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선군정치가 한반도에 평화를 선물할 것인지 전쟁을 초래할 것인지’를 판가름하기 어려워 선군정치를 책으로 이해하는 걸 단념한 상태이다. 그래서 양각도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들른 호텔내의 서점에 진열된 책 중에서 선군정치에 관한 소책자에 눈도장을 찍어두었다. 이번 방북 기간 중 북녘사회를 직관적으로 접근하는 연습을 하려고 마음 먹으면서도, 북한 핵문제의 열쇠를 쥔 ‘선군정치’에 대한 이해의 폭을 현장에서 넓힐 念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오늘 만경대를 참관하면서 만경대 가문의 통치술에 대한 분석의 필요성을 느끼는 한편 만경대 가문의 총대 혈통이 선군정치의 원조임에 생각이 미치자, 그동안 풀지 못한 ‘머릿속의 숙제’가 조금은 풀릴 기미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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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舊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12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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