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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통일의 땅 길 열다 (3)

정주영 체육관 개관 기념식에 다녀와서

 
김승국  

 

10월 6일 ②-개성에서 평양까지

 

남쪽의 정주영 체육관 개관식 참관단을 실은 버스는 어느덧 개성 시내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차창에서 바라본 개성시내, 개성~평양 고속도로, 평양 진입로의 모습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차장에서 어찌 북녘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으랴. 필자는 한 때 남쪽의 통일운동권에서 선풍같이 일어난 ‘북한 알기 운동’의 영향으로 북한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런 책들은 주체사상 등 체제에 관련된 것들이어서 북한에 대한 이해의 ‘원론’만 뇌리에 남아 있다.

그래서 이번 방북 때 필자는 뇌리에 남아 있는 북한 이해의 ‘원론’과 북녘 땅의 현실, 민중(인민)들의 현실 생활과 대조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다시 말하면 김정일 위원장 등 북한의 지도부가 주창하는 ‘원론’과 북한 인민들의 생활현실 사이에 정합성이 있는가? 식량난‧전력난 등은 양자 사이에 길항관계처럼 여겨지는데, 그런 길항관계를 지양하기 위해 북한의 民‧官‧軍‧黨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피상적으로나마 알고자 했다.

헌대 차창을 통해 바라볼수록 심층적인 분석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어 답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 나름의 예리한 눈빛을 총동원하여 개성~평양 길을 취재했다. ‘취재’라고 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취재의 형식을 빌린 현장방문이다.

다른 일행처럼 단순한 평양 나들이로 생각하거나 좀 더 의미를 부여하여 ‘통일의 땅 길을 여는 평화통일 관광’ 정도로 치부하면 끝나는 것을...굳이 원론과 현실을 대조하기 위해 차창을 통해 들어온 모든 事象을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일일이 기록하다보니 골치가 아팠다. 다른 사람들처럼 북녘 땅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될 일을, 굳이 골치 아프게 기록해야하느냐 자문했으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음은 버스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메모한 기록을 다시 정리한 것이며, 차창을 통해 본 느낌에 약간의 논평을 가미한 글이다.

 

1. 개성시내

 

봉동에 비하여 개성시내의 남쪽 진입로 좌측을 흐르는 개울물은 덜 깨끗했다. 개성에서도 생활하수가 약간씩 이 개울로 흘러들어오지 않나 생각했다. 냇물 위에서 헤엄쳐다니는 오리가 환경의 파수꾼 노릇을 하고 있었다.

개성시내에 진입하자마자 봉동의 농촌풍경과 완전히 다른 Sky Line을 보여주었다. 봉동의 농촌은 나지막한 산 아래의 낮은 지붕 그리고 그 보다 더 낮은 논밭이 자아내는 조야한 산수화 풍경을 자아내며 天地人의 조화를 그런대로 이루는 Sky Line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개성시내는 이와 달리 고층 아파트 단지와 2~3층의 살림집(남쪽의 연립주택과 비슷)을 잇는 곡선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가 하면 땅을 향해 가라앉는 Sky Line이었다. 개성의 Sky Line이 송악산을 배경으로 멋지게 그려지고 있다면, 산이 거의 없는 평양은 평야 지대 위에 Sky Line의 장관이 펼쳐졌다. 물론 평양의 Sky Line이 훨씬 야심적이고 현란했다. ‘야심적’이란 북한 사회주의의 개발 노선의 ‘야심’이 아직도 평양의 Sky Line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평양에 비해 덜 현란한 개성시 Sky Line 아래의 거리는 ‘靜中動’의 인상을 주었다.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좀 느리지만 걸음마다의 목표지점이 있는 듯, 걸음의 속도에 비하면 약간 활기찼다. 걸음의 지향점이 거창하게 북한식 사회주의 건설의 매진일수도, 고난의 행군에 종지부를 찍고 선군정치로 나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표현이 너무 거창하다면 일용할 식량을 구하러가는 것일 수도 가족을 만나러 발걸음을 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서울의 시민처럼 자본에 쫓기거나 이윤을 쫓거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허둥대는 걸음은 볼 수 없었다. 식량난 등으로 배를 주리고 있을지 모르나 개성시민들의 느림보 걸음에 여유가 있었다. 고난의 행군을 막 마친 여유의 걸음일까?

느린 걸음의 개성시민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빨리 지나가는 우리 일행의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고층 아파트에 거주하는 시민들도 창문을 열고 환영해주었다. 아파트 창문 끝의 저 손과 나의 손이 마주치는 순간 우린 서로 웃었다. 그래 통일의 그날을 기약하며 웃자.

고층 아파트의 베란다마다 꽃 화분이 놓여있어서 도색되지 않은 아파트 벽의 황량함에 생기를 돌게 했다. 간혹 정장 차림의 멋진 숙녀도 지나갔다.

개성시내에서 평양행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늘어선 고적대들이 남녘 손님들을 환영하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환영 팡파르를 뒤로한 채 버스는 개성~평양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2.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성~평양 고속도로는 시멘트로 포장한 왕복 4차선 도로이다. 남쪽의 고속도로가 차만 다니는데 비하여 이 곳의 고속도로에는 사람도 다닐 수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은 거의 없었다. 평양까지 약 2시간 30분 달리는 중에 약 20대의 차량이 달리는 것을 목격했다. 20대의 차량중 절반 가량은 군용차량이었다.

남쪽의 고속도로는 주말의 경우 너무나 차가 많이 밀려 저속도로가 되는데 비하여 북쪽의 고속도로엔 적막감이 들 정도이었다. 북쪽 사회는, 남쪽처럼 대량생산 체제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재빨리 대량유통할 필요가 없는 사회인가? 아니면 사회주의 상품의 유통을 통한 경제발전을 위해 건설한 고속도로가, 소련 붕괴 이후 상품 생산-유통 체계의 정체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속도로가 너무 한산하여 도로 주변 군데군데에 ‘자주, 친선, 평화’의 구호를 새긴 선전물들이 외롭게 느껴졌다.

‘개풍郡’이라고 쓰인 도로 표지판을 지나자 민둥산 아래의 농촌 들녘이 나타났다. 산이 헐벗은 정도에 따라 까까머리 수도승 같은 산, 절간의 行者처럼 약간 머리털이 난 듯한 산, 군인들의 짧은 스포츠형 머리 같은 산이 보였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에 비례해서 나무가 우겨져 있었다. 이는 에너지난을 겪은 북녘의 주민들이 추운 겨울을 이기기 위해 가까이 있는 산에서부터 벌채를 했다는 추측을 낳게 한다. 산의 7부 능선까지 밭을 개간하라는 주체농법(김일성 주석의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교시?)까지 겹쳐 민둥산이 속출했다는 분석도 있다.

민둥산 바로 밑에 옥수수가 조밀하게 심어진 밭, 바로 그 밑에 다락 논, 바로 그 밑 평야지대에 경지 정리된 논이 전개되었다. 이런 다단계의 농지이용은 주체농법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런데 산에 나무가 없으므로 우기에 비가 많이 내리면, 산사태가 발생하거나 토사가 순식간에 옥수수 밭, 다락 논으로 쏟아져 내려와 평야지대의 논밭을 뭉게버린다. 이 바람에 식량생산의 급감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1990년대 중반에 장대 같은 빗줄기가 북녘의 민둥산을 덮쳐 논밭이 초토화되고 이 때문에 식량난이 생겼다는 슬픈 이야기를, 고속도로 주변의 헐벗은 산야에서 다시 듣는 듯했다. 이런 인재(人災)를 극복하기 위해 10년여 전부터 조림한 산에는 무릎 높이의 관목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제법 속도를 내며 달리는 버스가 예성강 물줄기 위에 가로 놓인 다리를 지났다. “예성강 푸른물에...”로 시작되는 유행가가 생각났다.

평양까지 156킬로미터가 남았다는 도로 표지판을 지나 왼쪽편 농촌의 3층 연립주택(공동주택)이 보이고 그 부근의 경작지에서 집단적으로 농사짓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산 기슭에서 수확이 끝난 밭에서 쭉정이를 채취하는 아낙네의 고단한(?) 모습과 초췌한 옷을 입은 농부도 보였다. 옷의 때깔과 무관하게 남녘이나 북녘 따질 것 없이 농민들의 삶이 팍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성강을 에돌아 형성된 시가지의 산꼭대기에 서 있는 “내 나라는 인민의 낙원”이라는 커다란 구호 간판이 마을을 위압하는 듯했다. 인민의 낙원인지 아닌지는 인민에게 물어보아야할 사항이지만, 구호 간판 아래의 사람들은 고달픈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그들이 고달프다고 해서 그들의 행복지수가 낮지 않을 수도 있다. 히말라야 산맥 기슭의 라다크(Ladakh) 사람들의 삶이 고달프지만 가장 행복한 자연친화적인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필자는 올 봄에 인도 남부의 불가촉 천민 ‘달릿(Dalit)'이 모여사는 마을을 들렀는데, 그 곳 주민들이 인간 이하의 경제생활을 하면서도 행복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를 보고 ’GNP와 행복지수는 반비례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GNP가 수십배 높다는 서울 시민들과 북녘 동포들의 행복지수를 비교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돈으로 땜질하는 서울 시민의 행복지수는 높을지언정 체제가 주는 행복감은 상당히 낮을 것이다. 특히 정치체제는 스트레스 자체이니까 마이너스(-) 행복 즉 행복의 퇴행일 테다. 그런데 만약 북녘 주민들이 ’GNP는 낮아도 체제가 주는 행복감이 높으면 살만하다‘고 느낀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이런 행복감의 상대성을 체험하지 않은 채 북녘 주민들이 불행하다는 생각은 예단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발상의 저변에까지 이르러야 북녘 동포의 생활세계에 육박하는 가운데 북녘 인민사회에 대한 ’직관적 접근‘이 가능하리라.

이러한 상대적인 비교평가의 가설과 달리, 차창을 통해 본 북녘 주민들의 생활은 허리가 휠 정도이었다. 어쨌든 민초들의 경제적 행복감을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관성적으로 ‘내 나라는 인민의 낙원’이라는 선전간판을 내건 것은 경솔해 보였다.

평양이 112킬로미터 남았다는 도로 표지판을 조금 지나 ‘수곡 휴게소’에 정차했다. 남쪽의 고속도로 휴게소의 북적거림이 있을리 없는 쉼터이었다. 우리 일행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임시 매장을 잔뜩 차려놓았다. 남측 참관단에게 첫 쇼핑의 기회를 준 것이다. 매점마다 어여쁜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 판매원들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물건파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계산하는 속도도 빨랐고 물건을 선전하는 품도 세련되었다.

20분 가량의 휴식을 마치고 버스 행렬이 다시 움직였다. 한참 달리는데 한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고 들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으나 목가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오히려 필자의 어린 시절에 ‘가난의 평등’을 공유한 주민들이 소달구지를 끌고 시골길을 가로지르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구릉지대를 지나 연기 안 나는 공장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숲이 제법 우거진 산야가 나타났다. 공장이 보인다는 것은 수도권에 다가가고 있다는 증표이다.

 

3. 평양 진입로

 

필자 옆에 동승한 참관단 일행은 ‘평양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서부터 주민들의 옷차림이나 주변 풍경에 약간의 윤기가 흐르는 것 같다’는 평가를 내렸다. 어떤 시각에서 그런 평가를 내리는지 묻지 않았으나 크게 부정하기도 어려울 성 싶었다. 그러나 필자는 다른 각도에서 평양의 진입로 풍경에 토를 달았다. 규모가 큰 공장이 덩그러이 있을 뿐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점에 의문 부호를 붙였다.

이번에 현대아산에서 나누어준 북한 안내 책자에 보면 평양과 남포 지역에 공장이 많다고 소개되어 있다. 평양의 어느 곳에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개성에서 평양에 진입하는 고속도로 주변에 작고 큰 공장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그런데 필자의 눈에 들어온 모든 공장의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았다. 미루어 짐작컨대 북한의 산업시설 전반의 가동률이 상당히 낮거나 일부 공장의 가동이 중단된 상태가 아닌가 추정한다. 수도권인데도 산업용 전기를 보내는 송전시설(고압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에너지 문제의 심각성과 더불어 산업기반(인프라)이 상당히 낙후되어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는 길 곳곳에 낫(농업,농민)과 망치(공업,노동자)의 연대를 형상한 선전그림이 많이 나타났는데, 노동자의 망치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는 가운데 낫을 든 농민들이 외로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듯했다. 북한은 본래 공업사회이다. 농업 역시 공업사회를 받쳐주기 위한 자립 농업이었는데, 공업 생산성이 떨어지다 보니 낫의 예리함(농업 생산성)도 둔화된 듯하다. 필자가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들의 일하는 현장을 지켜보지 않아서 공업의 생산성을 말할 수 없으나, 농업 생산성에 관한 感은 가질 수 있었다. 들녘에서 가을걷이하는 농부들이 거의 맨손으로 나락을 베거나 작은 땅 뙤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농부들이 매달려 집단농사 짓는 방식으로 생산성을 얼마나 높일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필자가 경제학자가 아니므로 이런 추단은 빗나갈 수 있다. 겉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특히 들녘 한가운데 많이 서 있는 ‘1950년대의 투쟁정신으로 가을걷이 전투에로’와 같이 노동의욕을 고취시키는 선전으로 생산성이 높아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이런 구호는 항일 혁명정신으로 생산관계를 높이자는 뜻이 담긴 것일 텐데, 그런 구호를 보고 농민들이 투쟁정신으로 악착같이 일할지 어떨지 궁금했다.

이러한 궁금함은 평양시내의 집단노동 현장 여러 곳을 본 다음에도 풀리지 않았다. 북녘의 집단노동 방식이, 남쪽의 새마을 운동과 무엇이 다른가? 새마을 운동은 관주도로 이루어졌는데, 노력 봉사를 요구하는 인상이 강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았다. 또 겉치레가 많아서 투입(input)에 비해 산출(output)이 적다는 비판을 받았다. 북쪽에서는 이에 비해 실속 있는 집단 노동을 할 것으로 믿었으나 먼발치로 내다본 집단노동 모습에서 새마을 운동의 인상이 잘 지워지지 않았다.

 

4. 양각도 호텔로

 

마치 경제 전문가인 냥 북한의 경제를 걱정하다보니 버스가 평양에 다가온 줄도 몰랐다. 평양 교외의 좀더 기름진 텃밭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남부여대(男負女戴) 행렬이 끊기자마자 초고층 아파트群이 필자를 엄습했다. 평양 남부의 살림집 지대로 들어선 것이다. 방금 지켜본 男負女戴 행렬과 초고층 아파트 행렬이 머리 속에서 조화롭게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삽시간에 男負女戴의 그림이 초고층 아파트로 바뀌다니……. 이 것도 평양의 단면인가? 아니면 북한식 ‘도농(都農) 격차’인가?

아파트 촌 안에도 구호탑이 여전히 서 있었다. 아파트 주민들은, 갑자기 수십 대의 버스가 지나가는 걸 보고 놀란 듯 지켜보다가 남쪽 손님인 줄 이내 알고 얼떨결에 손을 흔들어댔다.
버스는 3대 헌장 탑을 지나 양각도 호텔 쪽으로 질주했다. 노면 전차의 거북이 운행이 정겨웠다. ‘추대 경축’이라고 쓰인 사각형 선전물이 가로수에 걸려 있었다. 9월초(9.9절)에 김정일 위원장을 지도자로 재추대한 것을 경축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버스는 어느 덧 대동강 위에 걸친 다리 위를 달리고 있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니 북한이 나포한 미국의 첩보함정 ‘프에블로 호’가 대동강 가에 석고대죄(席藁待罪)하듯 정박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서 깊은 대동강변에 떠 있는 프에블로 호는, 제국 ‘미국’의 정보전 실상을 여실히 폭로하고 있었다.

남쪽 참관단 일행은 드디어 북녘 사람들이 ‘조선의 심장’ 이라 부르는 평양에 발을 디뎠다. 버스는 대동강변의 최고급 호텔 ‘양각도 호텔’에 우리 일행을 풀어놓았다. 필자가 배정 받은 양각도 호텔 34층 6호실의 창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주체사상탑이 두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평양에서 난 생 첫날밤을, 주체사상탑이 가까이 건네다 보이는 호텔방에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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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舊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12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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