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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통일의 땅 길 열다 (2)

정주영 체육관 개관 기념식에 다녀와서

 
김승국  



10월 6일 ①-서울에서 개성시내 입구까지



2003년 10월 6일 이른 아침. 등산하는 기분으로 배낭을 메고 방북 길에 올랐다. 옛날 같으면 비장한 각오로 방북하거나 철창 행을 각오하고 사선을 넘었을 텐데...내가 이렇게 가벼운 차림으로 방북 길에 오르다니...‘금석지감(今昔之感)’이란 말이 떠올랐다. 민간인 1,100명이 처음으로 뚫을 임진각~개성 길 주변을, 청년 김낙중이 오밤중에 암행(暗行)한 고행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렸다. 김낙중 선생의 고행 길을 내가 백주(白晝)에 배낭을 메고 유유히 건너다니 남북관계에 있어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징후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00명의 통일 인간 떼




아침 8시경 35대의 버스에 분승한 방북단은 자유로를 통해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임진각과 통일 대교를 지나 DMZ 남방 한계선의 입구(남측 분계선)에 있는 도라산 출입국 관리소에 도착한 시각은 9시 40분. 출입국 심사를 마친 일행이 탄 버스 행렬은 100미터 계주 하듯 “웬수(원수)” 같은 분단 철조망에 파열구를 내며 달렸다. 사실 버스들이 시속 10킬로미터 정도로 서행했으나 민간인의 출입을 거부한 DMZ 50년의 통한의 세월을 관통하는 속도는 빛과 같이 빨랐다. 이 빛이 통일의 서광이 되기를 약속이나 하듯 ‘통일 인간 떼 1,100명’과 ‘통일 소 떼 100마리’가 함께 달렸다.


‘통일 물귀신’ 유엔 사령부 때문에 지체



남측 분계선을 출발하자마자 미군이 나와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유엔 사령부(UNC) 관할구역인 DMZ를 민간인들이 제대로 넘어가고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나온 장교인 듯했다. 다른 유엔사 관계자들은 일일이 인원파악을 한 다음 남측 참관단을 올려 보냈다. 통일 땅 길을 처음으로 여는 역사적인 현장에도 어김없이 나타난 유엔사령부는 통일의 물귀신 같았다.


DMZ 내의 경의선 철도‧육로 구역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며 철도‧육로 개설 공사를 한 때 방해했던 유엔사령부(주한미군 사령관‧ 한미 연합 사령관은 유엔 사령관의 모자를 둘러쓰고 있다)의 소행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괘씸한 놈들 같으니라고...이 놈들아! 너희 놈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통일 인간 떼 1,100명은 달린다. 북으로 북으로...“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비 5만원인데...”하는 노래를 부르며...


유엔사령부의 점검(인원파악 등)으로 지체되는 바람에 남측 분계선의 마지막 지점인 통문을 10시 45분이 되어서야 통과했다. 여기에서부터 남북으로 4킬로미터 지대가 DMZ의 핵심인 비무장지대이다. ‘비무장’은 말 뿐이다. 사실은 대인지뢰 등으로 중무장한 비무장 지대이다. 이 지역에 숱하게 뿌려진 대인지뢰를 비웃듯, 맨손(비무장)의 남측 민간인들이 첫 북녘 나들이 중이다. 버스는 산 허리에 꽈리를 튼 남측 GP(관측소)와 한국 전쟁 때 버려진 낡은 증기 기관차를 멀리하고 MDL(중앙 분계선; 4킬로미터 비무장 지대의 중간지점)을 향해 달렸다. 달리는 길 좌우에 남측 인부들과 공병대들이 도로공사에 열중하면서 우리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드디어 중앙 분계선이 나왔다(10시 53분 도착). 도로 한 가운데 세운 50센티미터 높이로 둥글게 쳐 놓은 철조망이 남북을 갈라놓고 있었다. 이렇게 허약한 철조망이 저렇게 철갑 같은 분단 장벽의 보루 역할을 해왔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이 곳 남측의 최북단(여기까지 포장됨)에서 한 걸음만 떼면 북녘 땅이다. 걸어서 한 걸음을 50년 세월을 에돌아 진입하다니 만시지탄(晩時之歎)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중앙 분계선을 넘으니 군데군데 북측의 GP가 보였다. 북쪽의 철책은 남쪽보다 덜 삼엄했다. 삼엄하기보다 좀 엉성해 보였다. 남측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북한이 훨씬 강력한 철책을 세워놓은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북쪽 철책을 보면 이런 믿음은 깨진다.



‘북한 위협론’ 특별히 실감하지 못해



북쪽의 철책이 예상 밖으로 철옹성이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 ‘북한 위협론’이 부풀려 있다고 느꼈다. 필자가 실제로 DMZ 북쪽의 북한 전력(戰力)이나 남쪽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인민군의 방사포를 본 적이 없어서 ‘북한 위협론’의 정당성을 따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북한의 최남단 전략적 요충지인 개성과 개성~평양 고속도로에 군 관련 시설이 거의 눈에 띠지 않는 점 등을 미루어 보건데 ‘북한 위협론’은 과장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秋景의 DMZ에서 ‘북한 위협론’을 특별히 감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졸음이 올 정도의 한가함이 지배했다. 이 곳이 세계 최대의 초긴장 지역이라니... 회오리 바람의 한 가운데는 오히려 조용하다고 하더니 그런 고요함인가? 5027-98 작전 등 북한의 점령계획 세워놓고 호시탐탐 북한을 공격하려는 부시 대통령이 나를 향해 ‘북한 위협 불감증’에 걸렸다고 비난할지 모르나, 나는 DMZ 한 가운데에서 졸음만 올 뿐 ‘악의 축’도 발견하지 못했고, 대단한 북한 위협론도 직감하지 못했다. 냉전 수구 세력들이 한탄하는 ‘안보 불감증’에 걸려서 일까?


DMZ 북단(북쪽에서 보면 남방 한계선)에 있는 북측 출입국 관리소를 향해 달리는 야산 위를 백로가 날아다닌다. 남북 분단선을 그어 놓고 같은 민족끼리 오도가도 못하는 ‘머저리 인간들’을 비웃듯 백로는 DMZ 상공을 자유비행하고 있었다. 백로 보다 못한 인간들이 철조망을 켜켜이 쳐 둘러놓은 다음 서로 삿대질해대는 꼴을 연출한 게 아닌가?



‘악의 축’ 북한의 통과의례가 너무나 싱거워



이윽고 송악산이 내다보이는 북측 출입국 관리소가 나타났다(11시 7분 도착). 서울에서 달려온 ‘통일 Caravan 버스’ 35대는 여기에서 서울로 되돌아간다. 비포장 도로 한 가운데의 백색 선(시골 학교 운동회의 400미터 계주 출발선에 그려진 삐틀빼틀한 백색 선 같다)이 출입국 관리의 선이고 그 도로위에 책상 몇 개를 놓고 노상 점검을 하고 있었다.


미국 같이 평화로운 나라(?)의 공항 출입국 심사대에서 여자들의 팬티, 브레이지어까지 뒤지는 경우가 있다는데, 미국이 가장 위험한 나라로 낙인찍은 ‘악의 축’국가인 북한 땅에 들어가기 위해 출입국 심사를 받는데, 시골 극장의 입구에서 입장권을 대충 보고 무사통과하듯 한다니....오히려 당황했다. 부시나 국내의 반공주의자들이 생각하듯 붉은 뿔이 난 붉은 악마들이 드라큘라 같은 이빨을 갈며 입국심사를 해야 할 텐데....어인 일인가. 남측 도라산의 출입국 신고소보다 간편한 심사를 한다니....‘악의 축’ 국가 북한의 통과의례가 너무나 싱거워서 오히려 재미 없었다. 부시가 말하듯 드라큘라 같아야할 북측의 관리들(출입국 심사원)은 얼굴의 3분의 1을 덮을 정도로 큰 안경을 쓰고 연신 담배를 꼴아 물고 있었다. 옛날 어렸을 적에 호랑이 잡아먹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시골 할아버지들이 곰방대 담뱃대를 물고 있듯이...단 그들이 입은 옷에 걸쳐 있는 김일성 주석‧ 김정일 위원장 휘장(배지)만이 이런 느낌을 가시게 했다.



노동자 탄압의 수괴인 정주영이 통일의 위대한 업적 남겨?



출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인 참관단들 사이에서 ‘정주영 선생의 소 떼 방북이, 인간 떼 방북으로 이어진 업적’을 찬양(?)하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민주노총의 간부들이 들으면 놀랄 이야기이다. 노동자 탄압의 수괴인 정주영이란 늙은 자본가가 통일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니....이러한 자본(자본가)의 움직임(계급 문제)과 민족통일의 움직임(민족 문제)의 쌍곡선을, 방북 현장에서 여러 번 감지했다(이에 관한 필자의 견해는 북한의 경제에 관한 이야기에 묻어나올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북측 노상 출입국 관리소 옆에 있는 레미콘 공장은 남쪽에서 지어준 듯한 인상을 주었다. 여기까지 현대재벌의 손길이 뻗쳐있다니...돈(자본)의 위력은 대단했다. 레미콘 공장 건너편의 북측 첫 민간 마을에 들어선 낡은 기와지붕 집 들 사이로 주민들과 새까만 얼굴의 북한 병사들이 섞여 다니고 있었다. 민둥산 아래의 텃밭에서는 북녘 농민들(남쪽처럼 민통선 지역의 농민들?)이 채소밭을 가꾸고 있었다.


필자가 국내외 여행중 가장 간단한 출입국 심사를 받은 뒤 북측이 준비한 버스(일본제 중고 버스이었으나 남쪽 버스 못지않은 수준의 버스. 매연이 심한 게 흠이었다)에 올라타고 개성시를 행해 달려갔다.



연도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



개성행 비포장 도로의 연도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코스모스가 꽃송이를 흔들며 남녘의 통일 전령사들을 환영하는 듯했다. 남측 대성동 마을의 태극기보다 더 높이 인공기를 내건 북측 마을(남측에서 ‘선전 마을’로 부르는 마을)이 버스 차장의 저 건너편에 보였다. 이 마을을 뒤로 한 채 버스는 개성 시내로 진입했다.


개성의 진입로(개성시의 남쪽 교외 지대)에 있는 봉동은 최전방 군사 지역이지만 국방색 일색은 아닌 듯했다. 비포장 도로인지라 먼지 속에서 보인 농촌 마을은 여느 북쪽 마을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길가를 천천히 걷는 괴나리봇짐 꾼(괴나리봇짐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쌀? 강냉이? 아이들 때때옷? 사탕?), 2~3층의 도색하지 않은 낡은 아파트, 맑은 계곡, 경원선 철길, 손 흔들어 주는 아이들, 자전거에 뒤짐을 가득 싣고 끙끙대는 주민들이 보였다. 주민들의 왕래가 잦은 곳(광장)에는 반드시 ‘위대한 김정일 동지 만세’등의 구호가 눈에 띄었다. 이를 목격한 서방의 언론들은 '구호로 먹고사는 북한 인민들의 몰골'을 화보에 담곤 했다. 식량난 속의 구호를 냉소적으로 볼 것인지, '고난의 행군'을 고무하는 '인민 통합(남측의 용어로는 국민통합)'의 문구로 볼 것인지 자문자답하는 가운데, 버스는 개성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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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舊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12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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