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국
2003년 3월 19일 밤,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부인 로라 여사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미 “후세인과 두 아들이 48시간 이내에 망명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 요구를 거부하면 공격하겠다는 최후통첩을 이라크에 보낸 상태이었다. 3월 19일 밤은 최후통첩의 기한이 임박한 시각이었다.
기한인 밤 8시가 지나자 부시 대통령이 식사를 하고 있는 방의 전화기가 울렸다. 대통령의 측근인 알든 카드 수석 보좌관의 전화였다: “후세인이 이라크를 떠났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이제 예정대로 전쟁에 돌입할 수밖에… 후세인의 망명 거부는 전쟁을 의미했다. 이미 미군 전투기가 바그다드 상공을 향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저녁식사 이전에 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3월 19일은 부시 대통령이 2년여 백악관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길고 숨 막히는 날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이른 아침부터 전쟁 지도(指導)회의를 소집했다. 체이니 부통령, 럼스펠드 국방부 장관, 파웰 국무장관, 라이스 국가 안전보장 보좌관, 테넷 CIA 장관, 마이야즈 통합참모 본부장 등이 모였다. 이라크 공격을 지휘하는 토미 프랑크스 중앙군 사령관 등은, 중동의 카타르 전선 본부에서 비디오 회의에 참여했다.
회의 때 이례적인 긴장감이 감돌았다. 몇 분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핀이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회의에 참가한 고관 중 한 사람이 {New York Times} 기자에게 들려준 회고담은 긴장을 더해 준다.
이라크 전쟁은 상대방(후세인 정권)의 공격을 받아 응수하는 전쟁이 아니다. 부시 정권이 선택한 전쟁이다. 미군 전사자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신속하게 승리해야 하는 등 부시 정권의 운명이 걸린 전쟁, 미국의 미래가 걸린 전쟁이다. 그래서 회의 참석자 모두가 대통령의 전쟁 개시 결정의 엄중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탓인지 최종단계에서 전쟁개시에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드디어 파웰 국무장관이 손을 뻗어 부시 대통령의 손을 만졌다. 결단을 재촉하는 몸짓이었다. 대통령은 드디어 작전의 실행을 명령했다. 텔레비전 화상의 저쪽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작전의 실행을 명령받은) 프랑크스 사령관이 경례했다. 오전 8시였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날 부시가 소집한 첫 회의가 끝났다.
* 출처=[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23호(2004.3.22)
당초 예정된 작전은, 이라크 전역(全域)에 정밀유도폭탄을 일제히 뿌려 이라크 지도부를 마비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는 국방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전략가인 해런 울만 박사가 정리한 ‘충격과 공포’이론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울만 박사는, 걸프전 이후 미군의 새로운 전략을 생각해 냈다. 압도적인 전력(戰力)을 집중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이 전투를 포기하게 하는 심리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이 작전이 변경되었다.
이날(2003년 3월 19일) 오후가 되자, 이라크 정권 안에서 암약해 온 스파이로부터 귀중한 정보가 날아 들어왔다. 이 정보에 의하면, 후세인 대통령이 이날 밤에 바그다드 시의 남부에 있는 방공호로 몸을 숨긴다는 것이다. 테넷 CIA 장관은 곧장 국방성으로 달려가, 럼스펠드 국방장관 ・마이야스 통합참모 본부장과 협의에 들어갔다. 거의 같은 시간에 현지의 CIA로부터 연락을 받은 프랑크스 중앙군 사령관은, 대통령으로부터의 공격명령에 대비하여 F117 스텔스 전투기 2기를 띄워 공중에 대기시켜 놓았다.
19일 오후 3시부터 백악관에 럼스펠드, 마이야스, 테넷 등 3명이 모였다. 라이스 보좌관과 카트 수석 보좌관도 참가했다. 부시 대통령 앞에서 ‘후세인 개인을 노린 공격으로 작전을 바꿀까 말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모임이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위해 주도한 두번째 회의이다.
* 출처=[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24호(2004.3.29)
후세인 대통령 개인을 노리고 전쟁을 개시하는 것은 모험적인 작전이었다. 후세인의 신상에 대하여 잘못된 정보를 믿고 전쟁을 벌일 경우 그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후세인과 관계 없는 시설을 공격했을 경우, “무고한 이라크 시민을 죽였다.”는 이라크측의 선전공세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사실이 어찌 되었든지 이라크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선전전(宣傳戰)으로 나올 것이다. 따라서 이런 여러 가지 우려 사항을 백악관에서 논의하는 바람에 부시는 2003년 3월 19일 하루 종일 분주했다.
프랑크스 중부 사령부의 사령관의 보고에 의하면, 폭격기가 되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 시간은 (3월 19일) 오전 7시 15분이었다. 선포포고를 향한 마지막 논의가 늘어져 논의의 마감시간이 재깍재깍 다가왔다. 부시 대통령이 ‘렛스 고(let’s go)’의 결단을 내린 것은, 폭격기가 되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 3분 전이었다.
3월 19일 저녁 8시 로라 부인과 식사를 하던 부시 대통령은, 이미 두 차례의 고비를 넘겼다. 밤 9시 30분. 폭탄이 바그다드의 방공호에 작렬했다. 10시 15분.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의 집무실에서 나와 텔레비전 앞에 서서 미국 국민과 전 세계를 향해 다음과 같이 개전을 선언했다: “미국 국민 여러분! 지금 이 시각에 미군과 동맹군이 군사작전의 초기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이라크를 무장해제시켜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키고 세계를 중대한 위험으로부터 지켜 내기 위해서입니다. 동맹군은 나의 명령에 따라 군사적으로 중요한 목표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사담 후세인의 공격능력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개전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폭넓게 일치단결한 작전이 앞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35개국 이상의 나라들이 중요
한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협력내용은, 해군기지나 비행장의 사용, 정보나 후방지원의 제공부터 전투부대의 파견까지 다양합니다. 이 동맹에 참가한 각국은 의무를 지고 공동방위에 참가하는 명예를 나누어 갖기로 선택했습니다.”
* 출처=[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25호(2004.4.5)
2003년 3월 19일 밤,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부인 로라 여사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미 “후세인과 두 아들이 48시간 이내에 망명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 요구를 거부하면 공격하겠다는 최후통첩을 이라크에 보낸 상태이었다. 3월 19일 밤은 최후통첩의 기한이 임박한 시각이었다.
기한인 밤 8시가 지나자 부시 대통령이 식사를 하고 있는 방의 전화기가 울렸다. 대통령의 측근인 알든 카드 수석 보좌관의 전화였다: “후세인이 이라크를 떠났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이제 예정대로 전쟁에 돌입할 수밖에… 후세인의 망명 거부는 전쟁을 의미했다. 이미 미군 전투기가 바그다드 상공을 향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저녁식사 이전에 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3월 19일은 부시 대통령이 2년여 백악관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길고 숨 막히는 날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이른 아침부터 전쟁 지도(指導)회의를 소집했다. 체이니 부통령, 럼스펠드 국방부 장관, 파웰 국무장관, 라이스 국가 안전보장 보좌관, 테넷 CIA 장관, 마이야즈 통합참모 본부장 등이 모였다. 이라크 공격을 지휘하는 토미 프랑크스 중앙군 사령관 등은, 중동의 카타르 전선 본부에서 비디오 회의에 참여했다.
회의 때 이례적인 긴장감이 감돌았다. 몇 분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핀이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회의에 참가한 고관 중 한 사람이 {New York Times} 기자에게 들려준 회고담은 긴장을 더해 준다.
이라크 전쟁은 상대방(후세인 정권)의 공격을 받아 응수하는 전쟁이 아니다. 부시 정권이 선택한 전쟁이다. 미군 전사자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신속하게 승리해야 하는 등 부시 정권의 운명이 걸린 전쟁, 미국의 미래가 걸린 전쟁이다. 그래서 회의 참석자 모두가 대통령의 전쟁 개시 결정의 엄중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탓인지 최종단계에서 전쟁개시에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드디어 파웰 국무장관이 손을 뻗어 부시 대통령의 손을 만졌다. 결단을 재촉하는 몸짓이었다. 대통령은 드디어 작전의 실행을 명령했다. 텔레비전 화상의 저쪽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작전의 실행을 명령받은) 프랑크스 사령관이 경례했다. 오전 8시였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날 부시가 소집한 첫 회의가 끝났다.
* 출처=[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23호(2004.3.22)
당초 예정된 작전은, 이라크 전역(全域)에 정밀유도폭탄을 일제히 뿌려 이라크 지도부를 마비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는 국방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전략가인 해런 울만 박사가 정리한 ‘충격과 공포’이론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울만 박사는, 걸프전 이후 미군의 새로운 전략을 생각해 냈다. 압도적인 전력(戰力)을 집중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이 전투를 포기하게 하는 심리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이 작전이 변경되었다.
이날(2003년 3월 19일) 오후가 되자, 이라크 정권 안에서 암약해 온 스파이로부터 귀중한 정보가 날아 들어왔다. 이 정보에 의하면, 후세인 대통령이 이날 밤에 바그다드 시의 남부에 있는 방공호로 몸을 숨긴다는 것이다. 테넷 CIA 장관은 곧장 국방성으로 달려가, 럼스펠드 국방장관 ・마이야스 통합참모 본부장과 협의에 들어갔다. 거의 같은 시간에 현지의 CIA로부터 연락을 받은 프랑크스 중앙군 사령관은, 대통령으로부터의 공격명령에 대비하여 F117 스텔스 전투기 2기를 띄워 공중에 대기시켜 놓았다.
19일 오후 3시부터 백악관에 럼스펠드, 마이야스, 테넷 등 3명이 모였다. 라이스 보좌관과 카트 수석 보좌관도 참가했다. 부시 대통령 앞에서 ‘후세인 개인을 노린 공격으로 작전을 바꿀까 말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모임이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위해 주도한 두번째 회의이다.
* 출처=[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24호(2004.3.29)
후세인 대통령 개인을 노리고 전쟁을 개시하는 것은 모험적인 작전이었다. 후세인의 신상에 대하여 잘못된 정보를 믿고 전쟁을 벌일 경우 그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후세인과 관계 없는 시설을 공격했을 경우, “무고한 이라크 시민을 죽였다.”는 이라크측의 선전공세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사실이 어찌 되었든지 이라크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선전전(宣傳戰)으로 나올 것이다. 따라서 이런 여러 가지 우려 사항을 백악관에서 논의하는 바람에 부시는 2003년 3월 19일 하루 종일 분주했다.
프랑크스 중부 사령부의 사령관의 보고에 의하면, 폭격기가 되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 시간은 (3월 19일) 오전 7시 15분이었다. 선포포고를 향한 마지막 논의가 늘어져 논의의 마감시간이 재깍재깍 다가왔다. 부시 대통령이 ‘렛스 고(let’s go)’의 결단을 내린 것은, 폭격기가 되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 3분 전이었다.
3월 19일 저녁 8시 로라 부인과 식사를 하던 부시 대통령은, 이미 두 차례의 고비를 넘겼다. 밤 9시 30분. 폭탄이 바그다드의 방공호에 작렬했다. 10시 15분.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의 집무실에서 나와 텔레비전 앞에 서서 미국 국민과 전 세계를 향해 다음과 같이 개전을 선언했다: “미국 국민 여러분! 지금 이 시각에 미군과 동맹군이 군사작전의 초기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이라크를 무장해제시켜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키고 세계를 중대한 위험으로부터 지켜 내기 위해서입니다. 동맹군은 나의 명령에 따라 군사적으로 중요한 목표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사담 후세인의 공격능력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개전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폭넓게 일치단결한 작전이 앞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35개국 이상의 나라들이 중요
한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협력내용은, 해군기지나 비행장의 사용, 정보나 후방지원의 제공부터 전투부대의 파견까지 다양합니다. 이 동맹에 참가한 각국은 의무를 지고 공동방위에 참가하는 명예를 나누어 갖기로 선택했습니다.”
* 출처=[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25호(20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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