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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종교간 대화 마당을 찾아

인도 방문기-4월 11일

 
김승국  


오늘은 금요일이다. 무슬림들에게 금요일은 중요한 날이다. 기독교인들이 주일인 일요일에 모여 예배 보듯이 무슬림들은 금요일날 모스크에 모여 기도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주로 이슬람 사원과 모스크를 찾아다니며 무슬림들이 기도하는 모습과 그들이 종교간 화해(대화)를 어떻게 해왔는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힌두‧무슬림의 종교간 화해 마당

 

첫 번째 찾아간 곳이 Khan Kah-i-Moula(Place of God)이라는 모스크이다. 이 모스크는 힌두-무슬림의 종교간 화해(양 종교의 공존)의 장소로 유명하다.

중세기 초반까지 캐시미르 사람들은 힌두교를 신봉했으나, 중세기 중후반부터 이슬람 세력이 인도에 침입하면서 캐시미르인도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바람이 일어났다. 이 개종운동의 원조인 Hazrat Mir Syed Ali Hamadani라는 이슬람교 성직자가 캐시미르에 들어와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그는 스리나가르에 Khan Kah-i-Moula라는 사원을 건립한 다음 이 사원에서 최초의 평화로운 개종(힌두교에서 이슬람교로의 개종. 무력에 의한 개종이 아님)이 이루어졌다.

평화로운 개종이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이 사원의 한쪽 구석을 힌두교도들이 종교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지금도 이 사원의 강변쪽(옛 힌두사원 건물 유적지)에서 종교의식이 거행되며, 이 종교의식을 무슬림들이 도와준다. 힌두‧무슬림이 종교문제로 싸우다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단된 인도 대륙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종교간 화해 한마당이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이 곳 말고도 캐시미르의 각지에서 힌두와 무슬림의 종교적 화해(대화) 마당이 열리고 있다.

 

“미국놈들 나가라”

 

필자가 이 사원을 의미심장하게 둘러보고 있는데 마을의 꼬마아이들이 필자를 따라다니며 무언가 좋지 않을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안내인 Hussain에게 물었다. Hussain은 나를 미국인으로 오인한 마을 아이들이 미국놈들 나가라며 “America, America, go back...Hooting(야유하는 의성어)...Hooooo(야유하는 의성어)”라고 소리치고 있다고 했다.

어린 아이들이 나를 보고 양키 고홈을 외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곳 무슬림들 사이에 ‘반미’가 얼마나 골수에 사무쳤으면 나 같은 非미국인을 향해 어린 아이들이 "양키 고홈"을 외칠까 생각했다. 미국인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나 서양 사람이면 모두 외세로 간주하고 미국 제국주의 타도를 주장하는 이곳 캐시미르 무슬림들의 반외세-반미 정서를 직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반전반핵 양키 고홈』이란 책을 펴낸 필자를 향해 “양키 고홈”을 외치는 아이러니가 재미있었던 반면, 나도 서양물을 먹어서 그런지 이 아이들이 보기에 양놈같이 보이는 게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Hazrat Mir Syed Ali Hamadani를 나와 스리나가르의 구시가지를 지나갔다. 이 구시가지는 혁명의 거리이다. 1990년 게릴라들이 구시가지를 한 달간 점령하여 해방구를 만든 다음 인도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해방구를 만드는데 구시가지의 한복판에 있는 모스크 Jama Masjid가 큰 역할을 했다. 무슬림의 종교 지도자들이 게릴라측과 연대하여 해방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마치 명동성당이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되었듯이 이 곳에선 Jama Masjid가 독립운동의 성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구시가지를 거쳐 또 한군데 종교간 화해의 터전인 Hazrat Sheikh Hamza Makhdoom 사원(모스크)으로 달렸다. 이 사원은, 옛날 무굴인들이 산 정상에 세운 성채인 Hari Parbat Qilla의 기슭에 우뚝 솟은 채로 있으며 스리나가르 시내를 굽어보고 있었다.

이 이슬람 사원 역시 무슬림들이 힌두‧시크‧자이나‧불교도들과 함께 기도드리는 장소이었다.그리고 이 사원의 바로 아래쪽에 있는 폐허 건물에 도착했을 때 한참 기도 중이었다. 이 사원의 아자한 소리에 때맞춰 스리나가르 시내 전역의 모스크에서 아자한의 합주가 이루어졌다.

이 사원의 밑동에 폐허건물이 한 채 있는데 이 건물 안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무덤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전 세계의 기독교인이 이 곳을 찾아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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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a Masjid 모스크에서

 

무슬림들이 많이 사는 캐시미르의 중심적인 모스크 Jama Masjid를 서둘러 방문했다. 마침 회중 시간이어서 많은 무슬림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Jama Masjid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 중의 하나이며 3백 년 전에 건립되었다. 따라서 이 거대한 모스크를 책임지는 성직자가 캐시미르의 이슬람을 대표하는 뜻으로 Mirwaiz(chief priest)라고 불린다.

1947년 분리독립 당시의 Mirwaiz이었던 Moulana Farooq가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하다가 인도 당국에 의해 1991년 살해되었다. 1991년 인도에 저항하는 봉기가 Jama Masjid를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이 봉기가 진압된 다음 Jama Masjid 책임자인 Moulana Farooq가 살해된 것이다.

1994년 게릴라, APHC, Awami Action Committee, Al-Umar Mujahideen 등의 굵직한 독립운동 단체들의 전략회의가 이 모스크에서 열렸는데 이를 알아챈 인도군이 이 모스크를 포위했다. 인도군의 모스크 포위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에 밀린 인도군이 12일 만에 포위망을 해제함으로써 일부 게릴라가 목숨을 보전한 채 도망쳐 나왔다.

지금은 Moulana Farooq의 아들인 Moulana Omar Farooq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Mirwaiz 역할을 하고 있다. Moulana Omar Farooq는 정치적 독립운동 연맹체인 APHC를 창립한 다음 1996년까지 의장으로 활약(현재는 APHC의 국제연대 책임자)하는 등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한창인 요즘 30대 후반의 종교 지도자인 Moulana Omar Farooq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스크에 운집해 있었으며 필자 역시 그의 강론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그의 강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미국의 승리로 마감되는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무슬림의 단결이 매우 중요하다. 무슬림이 단결해야 미국의 횡포를 막을 수 있고 캐시미르 분쟁도 해소할 수 있다’는 것. 강론에서 모나는 발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인 설교이었다.

강론을 듣던 중 우연하게 캐시미르 지역에서 대학 교수로 지내는 Muhammad Ashraf(55)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도 오늘 Moulana Omar Farooq의 결단어린 설교를 들기 위해 일부러 모스크로 나온 듯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악행을 저질렀지만 후세인의 독재체제에도 책임이 있다. 후세인과 같은 독재체제가 아랍 각국에 횡행하기 때문에 미국이 개입할 여지를 마련해준다. 캐시미르에서 수백 명의 젊은이를 학살한 인도군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미국의 다음 차례 공격대상지가 한반도일텐데 미국놈들은 어디를 가도 말썽을 일으킨다.”

이 교수 역시 필자를 소개할 때 들은 ‘평화 활동가’란 말이 마음에 걸리는 듯 처음에는 말문을 여는 것을 꺼려했다. 캐시미르의 지식인들이 평화운동에 대한 심리적인 저항감이 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 곳에선 아직도 ‘평화’가 신기루같이 느껴졌다. 평화가 절실한 이 곳에 평화 NGO가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평화운동의 무풍지대인 캐시미르에 언제 평화의 훈풍이 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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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 단체를 찾아

 

캐시미르에 평화 NGO는 없으나 환경 NGO 단체가 NGO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환경 NGO라도 찾아가서 평화 이야기를 할 셈으로 'Hope'라는 단체의 사무실로 갔다. 이 곳에서 'Hope'의 의장 Zahoor A Wani, 부의장 Saquib N Qadri를 만났다. 예의상 환경문제를 화두로 꺼내며 환경 평화의 사안 중 하나인 대인지뢰로 인한 환경파괴, 군대에 의한 자연파괴(인도군과 게릴라의 군사작전으로 캐시미르의 삼림 40%가 훼손되었음. 軍이 자연파괴의 주범임)에 대한 운동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Dal Lake 호수의 수질오염 해소 등 미세(Micro level)담론은 다루지만 거대(Macro level)담론에 해당되는 운동은 하지 않는다며 군대에 의한 환경파괴 운동에 소홀한 것을 변명했다. 그들은 인도 정부, 인도군 체제에 저항하는 거대 담론 중심의 운동을 하다가는 목숨을 보전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환경운동같이 말랑말랑한 운동만이 NGO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인도군에 도전하거나 인도군의 무장해제를 감히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럼 누군가 인도군과 파키스탄 군의 대결, 인도군과 게릴라의 대치상태를 중단하라고 주장해야 인도-파키스탄의 분쟁이 종식될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더니 준비된 해답이 없는 듯 침묵으로 대응했다. 그래서 필자가 ‘시민들이 단결하여 캐시미르에서의 갈등을 해소하는 결의를 하고 인도군과 게릴라의 동시 무장해제를 선언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더니 꿈같은 이야기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오히려 캐시미르의 경제난, 젊은이들의 취업난 해소가 시민사회를 평화롭게 만든다는 말을 하면서 필자의 공세적인 질문을 피해갔다. 그래서 필자가 Micro level의 환경운동도 결국 캐시미르 분쟁의 모순을 척결하려는 Macro level의 운동 없이는 장애물에 봉착할 것이라고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동의하는 수준은 ‘정의 없이 평화 없다(Peace without justice)’는 말 정도이었다. 필자는 이 말을 ‘부정의한 인도군의 계엄령체제의 모순을 지양하지 않고는 평화가 깃들지 않는다’는 쪽으로 확대해석하려 했으나, 무리함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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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舊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12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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