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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캐시미르 분쟁 현장에서

인도 방문기-4월 8일

 
김승국  


공항으로 가는 길

 

캐시미르 지역의 중심도시인 스리나가르(Srinagar)로 가는 비행기(Jet Airways 항공) 출발시각(11시 15분)에 늦지 않기 위해 아침부터 서둘러 여장을 꾸렸다.

아침 9시경 택시를 타고 숙소를 빠져나오자마자 거지가 돈을 달라고 손을 벌인다. 거지 역시 델리 시민들의 출근시간에 맞춰 이른 아침에 돈벌러 나온 모양이다.

택시가 약 20분 달리자 도로공사 현장이 나타났다. 인도에서는 도로공사 노가다 판에 동원된 일용 노동자 중 상당수가 여성이다. 아마 이 여성들도 남성 일용 노동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30루피(750원) 안팎의 일당을 받을 것이다. 억압받는 인도 여성들 중에서도 여성 노동자의 수난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루 종일 죽기 기를 쓰고 일하느니 거지가 되는 게 낳겠다. 그래서 어린 자식을 안고 구걸하는 가난뱅이 여성이 길거리에 많은 가보다. 하긴 필자 같이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데도 공항 가는 길에 잠시 주차한 택시에 매달리며 돈 달라고 졸라대는 불쌍한 여성에게 10루피를 건네주었으니, 하루 종일 구걸 노동(?)을 하다보면 나 같은 사람을 적어도 3명 이상은 만날 것이다. 구걸하는 것이 노동하는 쪽 보다 낳은 나라 인도에서는 삶의 질 이야기 자체가 배부른 수작이다.

거지 보다 못한 여성 노동자의 신세를 생각하다보니 국내 공항에 다다른 줄 몰랐다. 국내 공항은, 김포 공항에 비교하면 한산한 시골역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인도의 모든 공항은 검문검색이 삼엄하다. 인도-파키스탄 분쟁 탓인가? 특히 캐시미르 지방으로 가는 항공편은 더욱 엄격했다. Jet Airways 항공사의 카운터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좌석번호표를 건네주면서 (내가 스리나가르에 가는 외국인임을 알아채고는) 카운터에 스카치테이프로 테두리한 경고문을 읽어보라고 일러주었다. 영어로 빼곡히 적혀 있는 주의 사항을 모두 읽지 못했으나 핸드폰, 나이프는 물론 흡연용 라이터도 기내에 들고 갈 수 없단다. 도대체 라이터로 비행기를 불지를 테러리스트가 있을 수 있나?

 

엄격한 검문‧검색

 

공항 입구에서부터 5차례 정도의 검색을 받는 가운데 세 번째 단계에서 내 배낭을 샅샅이 뒤지더니 필자가 담배 피우려고 가져간 라이터를 빼앗아 갔다. 필자는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공항 구내 버스에 오르기 전에 또 한번 검색을 했다. 이건 검색이라기보다 수색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비행기 트랩에 오르기 전에도 경찰이 입회하면서 선별적인 검색을 하고 있었다. 수색에 준하는 검색을 실시하는 것만 보아도 캐시미르 지역이 얼마나 긴장된 곳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드디어 캐시미르의 중심지인 스리나가르를 향해 떠나는 비행기가 정시에 공항을 이륙했다. 비행기의 창을 통해 내려다 본 델리 부근은 숲이 거의 없는 거대한 평원이었다. 경지 정리된 누르스름한 사각형 농경지 한가운데 장방형 마을들이 點在하고 마을을 이어주는 도로가 제멋대로 거대한 평원을 달리고 있는 ‘변형된 사각형 모자이크 판’ 같았다.

비행기가 델리 북부의 대평원을 약1시간 가량 달리더니 갑자기 노인들 주름살 같은 캐시미르의 눈 덮인 산자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雪山에 넋을 잃은 필자는 창가에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아름다운 정경을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필자는 맨 처음에 히말라야 산맥인줄 알았으나 나중에 들어보니 캐시미르의 남쪽에서부터 인도-파키스탄 경계선으로 이어지는 Pirpanjal 산맥(해발 3~4천 미터급 연봉)이었다. 산중턱의 드넓은 고원지대와 계곡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Pirpnajal 산맥의 설경은 일품이었다.

캐시미르는 북동쪽으로 히말라야 산맥, 남서쪽으로 Pirpanjal 산맥을 끼고 형성된 거대한 계곡('Kashmir Valley'이라고 부름)과 분지, 高山(high land)으로 3분되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히말라야 산맥의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는 차디찬 계곡물이 인더스 강의 최상류를 이루며 캐시미르 땅을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캐시미르 땅은 매우 비옥하여 질 높은 농산물을 지배하여 인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풍족한 농촌경제를 이룩하고 있다.

 

인도의 왕관 ‘캐시미르’

 

인도의 최북단에 자리 잡은 캐시미르는 인도의 왕관이다. 이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무슬림과 힌두 세력이 오랫동안 다퉈왔고 오늘날의 캐시미르 분쟁(인도-파키스탄 분쟁)은 이런 역사적 산물이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독립 직후 힌두-무슬림의 대이동 혼란기에 약 6백만 명의 사망자가 속출했는데 캐시미르 지역에서도 수십만 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져 캐시미르 분쟁의 서막을 열었다. 그 이후 인도-파키스탄 양국이 캐시미르 지역에서 세 차례 전쟁을 치러 세 차례 모두 인도의 승리로 끝났다. 한때 캐시미르의 귀속문제를 담당한 유엔의 미흡한 대처로 캐시미르 문제는 인도-파키스탄 양국 군사당국의 손에 들어갔다.

필자는 5박 6일간(2003년 4월 8일~13일)의 스리나가르 방문을 통해 캐시미르 분쟁의 현장을 목격하고 ‘캐시미르 분쟁을 해소할 평화의 대안을 현지 주민들과 인도 정부가 어떻게 마련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취재할 생각이다. 이미 이러한 뜻을 현지 안내자인 Arjimand Hussain Talib(캐시미르의 지방지 『Greater Kahimir』의 칼럼니스트; 앞으로 그를 ‘Hussain'이라고 부름)을 전달했고 Hussain이 필자의 요구에 맞춰 일정을 짰다. 지난해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이 서울에서 개최한 국제회의에 초청받은 Hussain을 만난 적이 있다.

스리나가르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의 트랩에서 내리자 군인들 10여명이 탑승객을 예의 주시하며 지켜보았다. 이어 공항 건물 입구의 간이 검문소를 거쳐 공항건물로 들어가자 외국인은 따로 등록하라고 했다. 외국인 등록 서류를 기재한 다음 약간 두려운 마음으로 공항 건물을 빠져나왔다. 마침 Hussain이 나를 데리고 다닐 택시를 임대하여 자신의 동료이자 운전수를 대동하고 마중 나와서 적이 마음이 놓였다.

 

스리나가르의 첫인상

 

이어 5군데의 검문소를 지나치면서 스리나가르 시내로 진입했다. Hussain은 나를 택시에 태우자마자 ‘외국인들이 여행하기에 나쁜 조건과 (델리와 달리) 유럽풍의 멋스러움을 간직한 스리나가르의 두 얼굴’을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그가 말하는 악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 시내 곳곳에 진주한 인도군이 총을 차고 행인들을 검문하므로 외국인이 거리를 활보할 조건이 안 된다. ② 호텔이나 상가가 밀집한 도심지역도 무장한 인도군이 버티고 서 있기 때문에 위압감을 받기 쉽다 ③ 스리나가르 시내에서 인도군과 게릴라측의 무력충돌이 자주 발생하므로, 언제 어디에서 외국인이 무력충돌의 피해를 받을지 모른다(재수 없으면 부상을 입거나 죽을 수 있다). ④ 게릴라들이 정치범으로 수감 중인 자신의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외국인을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하여 ‘인도 정부에 외국인과 정치범(게릴라의 동료)을 교환하자’는 흥정거리로 될 가능성이 있다. 외국인 납치 사건이 약 10년, 5년 전, 3년 전에 발생하여 외국인들이 집단적으로 실종된 다음 현재까지 무소식이다. 특히 이라크 전쟁의 주범인 미국인에 대한 증오심이 드높은 캐시미르 지역에서 미국인(이곳 주민들의 반미감정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이나 이스라엘인에 대한 납치 가능성이 높다. 예전에 미국인․이스라엘인이 이 곳에 왔다가 인도군 또는 게릴라들에게 납치당해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아시아인은 납치의 0순위에서 밀려나 있으나 1991년의 걸프전을 비롯한 이라크 전쟁에 참여한 일본 사람도 위험하다.

 

평화 NGO가 없는 분쟁지역

 

이런 악조건은 그런대로 견딜만하나 ‘스리나가르에는 평화 전문 NGO가 없다’는 설명이 나를 낙담케 했다. 캐시미르같은 분쟁지역에 평화 운동단체 없다니 말이 되느냐며 Hussain에게 항의조로 말했더니, 그는 길 건너에 널려 있는 인도군 벙커를 가리키며 저들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보이는 벙커 속의 인도군들은 총구를 시민을 향하여 겨누고 있어서 살벌함을 느꼈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의 비상계엄이 연상되었다. 한 마디로 스리나가르는 계엄중이다. 캐시미르를 점령한 인도군이 스리나가르에서 계엄통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일행을 태운 택시를 겨누고 있는 수많은 인도군, 벙커, 진압용 장갑차, 저격병이 숨어 있는 옥상, 병영, 감시 망루, 콘크리트 방벽, 아름다운 산 정상의 군 통신용 안테나, 군 지휘본부, 인도 정부 보안군 건물 등이 계엄통치를 증명한다,

인구 110만이 사는 스리나가르는, 캐시미르인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곳임과 동시에 캐시미르인의 자존심을 짓밟고 있는 인도군(1947년 분리 독립 이후 진주)의 전략적 요충지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모순을 해소하려는 독립운동(인도에 점령된 캐시미르는 물론 파키스탄이 차지한 캐시미르 전체가 인도․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여 캐시미르인에 의한 새로운 정치․경제․생활 영역을 건설해야한다는 운동) 게릴라들의 활동 역시 스리나가르 주변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인도군의 계엄통치

 

Hussain의 설명에 따르면 60만 명의 인도군이 남쪽 캐시미르 지역을 점령하고 있고 북쪽 캐시미르 지역에도 파키스탄 군 수십만 명이 주둔하고 있다. 60만 명의 인도군은 캐시미르의 경계선(인도-파키스탄 국경선)을 중심으로 파키스탄 군과 대치하는 한편 캐시미르의 독립을 주장하며 무장투쟁하는 게릴라들과 전투를 벌이는 2중의 부담을 안고 있다.

게릴라(경우에 따라서는 인도군)에 의해 납치될 후보군의 0순위에서 아시아인은 배제된다는 설명을 듣고 내가 미국인이 아닌 사실 때문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 나라에서 온 외국인을 서양 놈들로 착각한 아이들이 때때로 돌멩이를 던지는 사례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다행이 내 코가 납작한 편이어서 서양 놈들로 보이지 않겠지만 서양 자본주의 물을 많이 먹은 나의 거동이 이곳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 가능성을 나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번 현장조사를 위해 구입한 테두리가 큰 등산용 모자를 써 보니 파키스탄 사람(무슬림)같이 보이기도 하고 남미 사람같이 보이기도 하여 한편으로 걱정되었다. 그런 모자를 쓴 나의 모습을 본 이곳 사람들이 무슬림 형제처럼 보아주면 다행이지만 어디 서양물 먹은 히스패닉 系‧ 유색 미국인으로 보면 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겁이 났다. 특히 그 모자를 쓴 나를 본 NGO 연수단 일행 중 한 사람이 ‘테러리스트 같다는’ 평가를 내린 바가 있어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

요즈음 외국인 관광객이 거의 없다. 스리나가르에 봄이 막 시작되는 계절이어서 관광 비수기인데다 이라크 전쟁으로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어짐. 그래서 필자는 스리나가르 주민의 99%를 차지하는 무슬림의 바다 속에서 홀로 유영하는 느낌이었으니 이곳 주민들과 인도군 또는 시내에서 암약할지 모를 게릴라의 눈에 얼마나 잘 띄겠는가. 그것도 필자가 그들 눈에 테러리스트로 비추인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스리나가르 시민들보다 서양물을 많이 먹은 나를 미국인으로 착각한 게릴라가 나를 납치 대상으로 여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살맛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스리나가르의 멋진 풍광은 계엄하의 이 풍진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청량제’이었다. 스리나가르의 명물인 Dal Lake(이 밖에 많은 호수가 주변에 많이 있다)와 이 호수 위에 떠 있는 또 하나의 명물인 선상 주택(이 곳 사람들은 이 선상주택을 ‘Houseboat’라고 부르며 관광객을 재우는 숙소로도 이용한다)이 눈에 띄었다. Hussain은 나를 Dal Lake 초입의 호텔 ‘Akbar'로 안내했다. 아랍어 ’Akbar'는 ‘위대하다’는 뜻이란다. ‘알라神은 위대하다(Allah Akbar)’고 할 때 자주 쓰는 단어이다. 무슬림인 이 호텔의 사장이 좋아하는 단어인 듯 여겨졌다. 그런데 왠지 이 호텔의 ‘Akbar'란 간판이 왜소하게 느껴졌다. ’캐시미르인이 떠받드는 알라신은 위대하지만 인도군의 계엄통치를 받고 있는 캐시미르는 위대하지 않다’는 느낌 때문이다.

 

Pattan 마을을 찾아서

 

Akbar 호텔이 여장을 풀자마자 호텔 종업원이 외국인 등록계(숙박계)를 쓰라고 했다. 공항에서 외국인 등록을 한지 1시간도 안되어 또 쓰라니 짜증이 났다. 숙박계는 형식상의 서류이며, 투숙객의 안전을 위해 인도군(현지 경찰)쪽에 제출하는 것이니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켰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마치 10년 전 한국에서 강원도 전방 사단에 복무하는 군인을 면회하러 갔을 때 묵는 숙소에서 자신의 신분을 모두 기록하며 숙박계를 쓴 느낌이 재현되었기 때문이었다.

숙박계를 쓰니 오후 2시가 다 되었다. 필자는 여독을 달랠 틈도 없이 스리나가르에서 서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Pattan 마을을 찾아가기로 했다.

Pattan 마을을 향해 스리나가르 시내를 빠져나오는 중 캐시미르 분쟁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곳 주민들의 고통을 한눈에 목격할 수 있었다. 인도군이 지나가는 시민을 무차별하게 검문하는 장면, 지나가는 릭샤․자전거․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심문하듯 검문하는 모습, 인도군이 시민을 구타하는 장면, 게릴라들의 공격을 자주 받는 부대의 높은 담벼락․높은 망루(망루에 걸쳐진 자동 연발총), 1947년 파키스탄 군이 침입한 곳에 세워진 거대한 병영, 이들 인도군을 상대로 시내에서 벌어지는 게릴라들의 전투 현장, 스리나가르 시민들이 인도군을 향해 이를 갈며 집집마다 무기를 은익해두고 있다는 비장함, 전 인도군의 30%가 캐시미르에 진주하고 있다는 이야기 등은 군사주의에 찌들어 있는 캐시미르의 슬픔을 대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군사주의의 가장 큰 희생자는 여성과 아이들이며 제3세계 지역일수록 군사주의에 의한 빈곤의 강요가 뒤따른다. 캐시미르에서 군사주의에 의한 여성․아동의 피해를 조사할 여유는 없었으나, 인도군에 의한 계엄통치로 인한 경제개발 낙후로 수많은 빈민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계엄통치가 가장 심한 스리나가르의 도심을 벗어나자 캐시미르의 (비교적 풍요로운) 농촌 마을이 나타났다. 이들 농촌은 3~4천미터 급의 설산에서 녹아내리는 캐시미르 계곡물로 농사를 지어서 그런지 질 좋은 농산물을 내다 팔아 높은 소득을 얻고 있다. 농경지도 기름지고 3층 건물의 번듯한 유럽풍의 농가들이 설산을 배경으로 늘어서 있어서 스위스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 관광 안내책자에서 캐시미르(1947년 분리독립 이전의 캐시미르를 언급)를 ‘인도의 스위스’라고 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겉으로 보면 인도의 스위스로 여길 만큼 멋진 캐시미르의 농촌도 계엄통치의 그늘 아래에서 신음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바로 필자가 찾아가고 있는 Pattan 마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Pattan 마을은 스리나가르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오지이다. 이 오지 마을 Pattan에서 왼쪽으로 꺾어지는 소로를 따라 계곡 쪽으로 약 5킬로미터 달리니 Andregam촌(村)이 나타났다. Andregam촌에서 얼마 전에 인도군과 게릴라의 총격전이 벌어진 결과 민가에 은신한 게릴라 3명이 전사하고 이곳 주민 3명이 죽고 게릴라를 숨겨준 주민의 집이 전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캐시미르의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게릴라를 농민들이 숨겨줄 정도이면 무장 독립운동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가 상당한 듯하다. 마치 한국의 해방 전후사에 지리산에서 활약한 빨치산에 대한 상념을 떨칠 수 없었다.

필자는 지금 사건 현장 즉 전소된 농민의 집을 찾아가고 있다. 雪山아래의 고지대에 흐드러지게 핀 사과밭을 사이에 두고 인간들이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비극의 현장을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마침 필자가 찾아간 대낮에 인도군과 게릴라 측이 서로 무장한 채 총을 겨누고 있었다. Andregam촌은 사실상 게릴라가 장악한 지역이어서 낮에 인도군이 공세적인 작전을 펼치며 게릴라를 진압하려고 덤비곤 한다. 오늘도 예외 없이 그런 작전이 진행중인 시각,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시각에 필자를 실은 승용차가 작전 지역의 한복판을 달렸다. 지금 귀국해서 생각하니 스릴 있는 것같이 느껴지지만 그날은 사지(死地)속을 헤매며 Andregam촌의 파괴된 민가를 향해 달린 것이다.

전형적인 무슬림 농촌의 후미진 곳에 들어가니 ‘인도군이 불태운 집을 개축하는’ 공사현장이 나타났다. 집주인 Ali Mohammad Bhat(58세)는 인도군과 게릴라간의 접전이 있던 날의 상황을 필자에게 소상하게 전하며, 인도군이 쏜 총탄알이 박힌 담벼락을 가리켰다. 그는 자기 집을 불태운 인도군의 보상은커녕 사과 한 마디 없는 인도 정부 측을 성토했다. 옆에 모인 주민들의 표정이나 말투로 보아 이 곳 주민들은 이미 인도 정부‧인도군에 등을 돌렸으며 심정적으로 게릴라를 지원하고 있는 듯했다. 한마디로 이 곳은 게릴라의 해방구인 셈이다. 여러 게릴라 단체들이 분산하여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대개는 파키스탄 쪽과 간접적으로 연계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이 연계망을 끊기 위해 인도군이 상주하고 있다. 게릴라들의 숫자가 한 때 2만 명이었으나 인도군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현재 5천명으로 약화됐다고 한다. 이 게릴라들은 시원한 여름엔 스리나가르 부근의 캐시미르 계곡에서 활동하다가 겨울이 닥쳐오면 남쪽지방의 잠무(Jammu) 부근의 산악지대로 옮긴다. 게릴라들의 활동자금은 파키스탄 쪽에서도 나오고 캐시미르 주민들 사이에서도 나온다. 하긴 주민들이 집집마다 은밀하게 총을 숨겨두고 최후의 순간 인도군에 총구를 돌릴 각오를 하고 있다니, 게릴라가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이다.

Andregam촌에 오래 머무는 게 위험한 짓 같아서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와 스리나가르로 귀환했다. 스리나가르 시내에 진입한 우리 일행은(필자, 운전수, 가이드) 환상적인 Dal Lake를 지나 Srinagar Botanical Garden에 들러 요기를 했다. 아주 멋진 정원 뒤편의 산중턱에 무굴 제국 황제의 하계 궁전이 보였다. 현재 이 아름다운 궁전을 점거한 인도군이 궁전 부근 산악지대 곳곳에 대인지뢰를 매설했다고 한다. 이곳 하계궁전에서 Dal Lake 호수를 내다보고 吟風弄月했던 무굴 제국의 옛 영예가 대인지뢰 밭 속에 파묻혀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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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 감정 드높은 주민들과 정치 방담

 

숙소인 Akbar 호텔로 돌아와보니 이웃 주민 Mohd Hkan Bhat(52세), 호텔 종업원 Feroze Shiekh, 호텔 주인 등이 이라크 전쟁 소식이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뉴스를 듣고 있었다. 이라크 전쟁의 전황을 들은 이들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필자에게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을 걸었다. 필자가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는 답변을 하자 안심이 된 듯, 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정치 방담이 이루어졌다.

모두 무슬림인 이들 주민들의 미국에 대한 반감은 엄청나게 강했다. 이 동네의 국제소식통인 Mohd Hkan Bhat은 후세인 독재도 약간 비판했지만 결정적으로 미국이 악독하다고 역설했다.

이들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의견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이 반테러 전쟁을 벌인다며 이라크 공격에 나섰으나 미국 때문에 테러리스트가 양산된다. 미국이 필요하면 탈레반을 지원하고 미국이 필요하면 탈레반을 타도했다. 마찬가지로 미국이 필요할 때 후세인을 지원하여 이란과 8년 전쟁을 벌였고, 이제 와서 후세인을 헌신짝처럼 버리면서 후세인 정권을 공략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 자신이 테러이며, 미국은 무기 장사 비즈니스로 재미보고 있다. 미국은 유엔의 기능을 마비시켰으며, 유엔 사찰단을 통해 이라크를 무기 사찰함으로써 사실상 무장해제 시킨 다음 침공하는 비열한 짓을 벌이고 있다. 이번 이라크 전쟁은 후세인의 전쟁이 아니라 원유 전쟁이며, 후세인이 제거되었다고 하여 미국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수많은 이라크 민중을 학살했다. 미국이 인권타령을 잘 하는 데 그건 백인만을 위한 인권이다.

이들의 미국 비판 강도는 더해갔다. Mohd Khan Bhat는 후세인 보다 빈 라덴을 높이 평가했다. 후세인은 정권유지를 위해 살인을 했으나, 빈 라덴을 사우디의 재벌가문 출신이면서 도 돈 욕심 없이 정의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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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舊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12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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