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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자주와 평화의 명제

인도 방문기-4월 10일

김승국  

 

어제 스리나가르 시내의 공원에서 게릴라가 설치한 지뢰가 폭파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오늘은 그 지뢰폭파 현장부터 방문했다. 큰 길 옆에 있는 공원 입구 부근의 문과 토담벼락이 폭파된 상태이었다. 아마 인도군의 차량 통행을 저지하기 위해 원격조정 지뢰를 터뜨린 것 같다.

안내인 Hussain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공원 주변 전체에 인도군과 게릴라가 매설한 지뢰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인도군과 게릴라가 스리나가르 부근의 야산 등에 경쟁적으로 지뢰를 매설하기 때문에 지뢰 피해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계엄군이 진주한 캐시미르 대학

 

지뢰폭파 현장을 떠나 캐시미르 대학에 갔다. 2천명의 학생이 재학중인 이 대학은 Pirpanjal 산맥의 설봉(雪峰)이 건네다 보이는 멋진 풍광을 지니고 있다. 이 대학 구내에는 ‘Nasee Mbagh Tree Garden’이라는 유명한 숲 공원이 있다. 17세기에 캐시미르를 지배한 무갈 제국의 임금 Jehangir가 캐시미르를 상징하는 나무인 Chinar를 집단 조림했다. 이 Chinar 나무 숲은 스리나가르 시민들의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여름철에 각종 꽃이 만발하면 환상적이라고 한다.

필자는 Chinar 숲 공원을 에돌아 캐시미르 대학 구내를 둘러보았다. 예전에 캐시미르 대학에서 학생운동이 꽃을 피워 교내 시위도 잦았는데 가혹한 탄압의 결과로 지금은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인도 국가권력의 가혹한 탄압을 증명이라도 하듯 교내에 진주한 무장 인도군‧인도 경찰은 공포심을 자아냈다. 3백 명 이상의 군경(軍警)이 학생‧교수‧교직원을 감시한다. 삼엄한 감시망 때문인 듯 학생운동이 약화되었고(감시망을 피해 지하운동을 하던 일부 학생운동 출신들이 게릴라가 되었다), 교수‧학생들의 사상‧집회‧표현의 자유가 크게 제약되어 있다. 정치학과가 있으나 인도‧인도군에 의해 점령당한 캐시미르의 현실을 가르칠 수 없어서 총론만 가르친다. 체제 지향적인 학문만 허용되던 한국의 유신체제, 전두환 체제가 생각났다. 그래도 한국의 군사 파시즘은 대학에 군대를 주둔하는 것은 삼갔는데 캐시미르는 사뭇 달랐다.

여기의 인도군은 한국의 유신독재 시절에 대학에 쳐들어온 군대보다 더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대학 교정 안에 있는 벙커 속에서 기관단총를 매만지는 병사가 눈에 띄었고, 집총한 인도군이 대학 출입자를 일일이 검문하고 있었다. 이 대학에서 계엄령 아래에 있는 캐시미르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도의 군사주의가 이 대학에 깊숙하게 침투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대학이 이 정도로 군사 당국의 감시를 받으니 캐시미르 시민의 일상생활은 오죽할까 생각해보았다. 이런 숨 막히는 상황에서 캐시미르의 시민사회에서 공론(公論)의 장(場)이 형성될 리 만무하다.

그런 탓인지 NGO라는 말이 생소하며, 더구나 ‘평화’ ‘평화운동’이란 화두로 시민들에게 말을 건네면 두려움마져 갖는다. 캐시미르의 경계선을 에워싼 인도군과 파키스탄군의 대립구도 속에서 인도군과 게릴라의 대립전선이 한켠에서 형성되는 군사적 대립만이 존재하는 이 곳에 ‘평화라는 담론’ 자체가 형성될 여유가 없었다. 시민사회(시민들 사이)에서 ‘평화’의 담론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캐시미르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은 더욱 난망할 것으로 판단된다.

‘평화’의 담론의 부재는 캐시미르 대학의 도서관에서도 나타났다. 필자가 캐시미르 대학 도서관을 찾아 캐시미르에서 평화의 대안을 모색하는 서적‧논문‧논문집이 있느냐고 사서에게 문의하니까 전혀 없다고 한다. 캐시미르 대학에서 캐시미르 사태의 본질을 다룬 문헌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오후에 이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들을 만나고 안 사실이지만, 캐시미르 사태에 관한 심도 있는 글을 쓸 수 없는 정치‧군사적인 환경 때문에 캐시미르 사태를 제일 잘 아는 이 대학의 교수들도 침묵을 지킨다고 한다. 제아무리 침묵을 지킨다 해도 캐시미르 전문 논문집 한권이 없는 캐시미르 지식인 사회의 무력증의 책임을 교수들도 지어야하지 않을까?

 

NGO 활동가와의 만남

 

점심도 거른 채 이 곳에선 즐겨 쓰지 않는 ‘NGO’의 활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만나러 갔다. 상록수 운동처럼 시민계몽운동을 하는 Owais Aziz Masoo(26세)와 인터뷰했다. 그는 Balgalore 대학재학 시절에 개발한 계몽운동 모델을 자기 고향인 이 곳에서 적용해보고 있다고 말했다. 사무실에는 다양한 주제의 책들이 수북이 쌓여있었으며 이 책들을 주민들이 빌려간다고. 그리고 13명 정도의 함께하는 이들과 더불어 토론 모임을 갖고 1년에 3~4회 세미나를 개최한다고 한다. 그도 평화운동에 관심을 갖고 이라크 전쟁 반대를 위한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받아서 필자가 거리에서 반전시위를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까 그런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다고 대답했다.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인도 정부‧인도군은 물론 게릴라측도 원하지 않고, 거리에서 반전평화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총맞아 죽지 않으면 체포되어 고문당하다가 특수 정보기관원에 의해 살해될 수도 있다고. 죽음을 각오하고 거리시위를 해야 한다니 이런 세상이 있나 싶었다. 간첩으로 오인 받아 특수 정보기관에 의해 고문 당하던 중 죽은 컴퓨터 엔지니어의 초상집을 방문했을 때의 인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하나의 의문점이 생겼다. 인도 정부‧인도군 당국이 반전 평화 거리시위를 반대하는 이유는 알만한데 게릴라측이 꺼려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이유를 묻자 그가 까닭을 설명해주었다. 무장 독립운동을 최우선으로 삼는 게릴라들은 ‘평화’를 독립 이후의 과제로 상정한다는 것. 게릴라들에게 평화는 차선인 것이다. 비폭력 평화투쟁의 일환으로 전개되는 거리시위로는 캐시미르 사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는 게 게릴라들의 지론이다. 하긴 한국의 운동권도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가두 무장 봉기투쟁을 거론했으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15년 전 군사파시즘이 횡행하던 시절에 비폭력 평화운동은 명함을 꺼낼 수 조차 없었다.

이렇게 ‘평화’ ‘평화 운동’의 담론은 시대상황, 해당 사회의 정세에 따라 우선순위‧완급이 다름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군사적 수단에 의한 평화의 대안이 거론되지 않는 캐시미르 사회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갈등해소(conflict resolution)를 통한 평화 만들기(peace making)'이 캐시미르에선 전혀 불가능하냐고 그에게 역질문했더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 지역에는 거의 없으나 한번 생각해보겠노라‘고 답변했다. 무장 독립운동이 아닌 정치적 해결을 추구하는 정당형태의 운동단체도 있고, 자신처럼 NGO 방식의 평화운동에 대한 호응(대학의 학생운동권에서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함)이 있으나 커다란 정치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다.

 

평화와 자주

 

Owais Aziz Masoo와의 대화에서 필자는 매우 중요한 화두를 발견했다. 캐시미르에 있어서 평화와 독립의 관계이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평화와 자주이다. 한국에서는 두 여중생의 사망을 계기로 들불처럼 번진 촛불시위를 통해 ‘(미국으로부터의) 자주 없이 평화가 없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평화와 자주'가 한국에서 유행하는 운동 슬로건이 되었다. 자주 즉 외세(미국)로부터의 자주적인 독립이 없는 한 한반도에 평화통일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명제를 한국민들은 두 여중생 사망 사건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캐시미르 민중들 역시 오랫동안의 투쟁을 통해 자주 즉 외세(인도군)로부터의 자주적인 독립이 없는 한 캐시미르에 평화가 도래하지 않음을 깨닫고 우선적으로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을게 아닐까 생각했다.

한반도와 캐시미르의 정세는 다르지만 ‘외세로부터의 자주와 평화가 相通되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캐시미르는 무장 독립운동을 우선시하므로 평화운동이 뒷전에 밀려 있으나, 캐시미르 민중들에게 평화는 귀중한 가치이다. 필자가 만난 이 곳 주민들은 한결같이 “우리는 평화를 염원한다고”말했다. 평화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경건하게 믿는 무슬림답게 평화를 갈망한다는 말이다. 이들은 캐시미르의 독립이 평화를 내오는 첩경이므로 무장독립 투쟁을 지지하지만 (인도군, 게릴라를 가릴 것 없이 빠져있는) 군사주의에는 신물을 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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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미르에 있어서 자치-독립-평화의 관계

 

어쨌든 캐시미르에서 ‘평화’는 관심을 끌지 못하는 주제이다. ‘캐시미르의 자치(자치를 주장하는 친정부적인 지역 정당)’나 ‘캐시미르의 독립(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게릴라와 정치적인 운동을 통해 독립을 하려고 운동을 전개하는 APHC로 양분됨)’이 주요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굳이 ‘평화’라는 단어를 붙인다면 ‘자치를 통한 평화’ ‘독립을 통한 평화’중 어느 노선을 선택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므로 평화운동이 캐시미르에서는 설 땅이 협소하다.

앞에서 거론한 자치-독립-평화의 관계를 현지 실정에 맞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현재의 법률체제 아래에서 평화를 위한 연대활동을 전개할 시민적 권리가 없다. 그래도 이러한 운동을 하겠다면 지하운동을 하던지 불법 단체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②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게릴라‧APHC측은 ‘독립 없는 평화’를 민족적 수치로 여긴다.
③ 만일 어떤 NGO나 평화 활동가가 인도군에 의한 (캐시미르 밖으로) 추방조치를 운 좋게 모면하더라도, 정체불명의 사람들에 의해 살해될 가능성이 있다.
④ 그러므로 평화를 위한 직접행동이 캐시미르에서는 없다. 오직 실내에서 간접적인 평화활동(무슬림들이 모스크 안에 모여서 이라크 전쟁 반대 모임을 갖는 것을 포함) 만이 있을 뿐이다.
⑤ 캐시미르 사람들은 ‘정의가 없는 평화 행동(peace activism without justice)’은 민족을 배반하는 것으로 여긴다.
⑥ 평화 활동가를 자처하는 사람은 인도 정보기관의 끄나풀일 가능성이 있다고 이 곳 사람들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⑦ 캐시미르 사람들이 평화활동가를 환영하지 않기 때문에 평화운동이 인기가 없다.
⑧ 어떤 유형의 평화활동이 있더라도 그 활동이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거나(언론매체에서 평화활동을 전혀 보도하지 않음) 비밀로 되기 때문에 캐시미르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⑨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평화적인 길(peaceful ways to achieve independence), '평화의 증진(평화의 구축)’, ‘정치적으로 현상유지를 하는 길(political status quo)'을 상정할 수 있다.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평화적인 길’을 선호하는 캐시미르 사람들은, ‘평화의 구축(Eatablishment of peace)=정치적인 현상유지’로 인식한다. 대중들이 이런 인식체계를 갖는 이유가 있다. 인도 정부가 캐시미르에서 손을 떼거나 캐시미르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은 채 ‘평화의 구축’ 개념을 장려하려고 하기 때문에 대중들이 ‘평화’라는 담론을 기피한다.
일부 캐시미르 사람들은 ‘평화’에 적대적이기 조차하다.

캐시미르에 있어서 자치-독립-평화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했지만, '평화 만들기의 모델(model of peacemaking)'을 들을 수 없는 캐시미르의 상황이 매우 답답하게 받아들여졌다. 한반도의 경우 남북한 정부차원에서 6.15 공동선언을 통한 ‘평화통일의 모델 만들기(국가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점을 모색한다)’ 노력이 있지 않은가? 이런 측면에서 캐시미르에서 평화는 요원하다고 느꼈다. 가는 곳마다 눈에 띠는 계엄군(인도군)의 철통같은 감시와 이에 맞서는 게릴라의 무장투쟁이 격화되는 한 평화는 먼 나라 이야기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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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미르 대학 정치학 교수들과의 방담

 

때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캐시미르 대학으로 갔다. 어렵사리 찾은 정치학과 건물 2층의 교수 연구실이 닫혀 있어서 인터뷰가 내정된 Baba 교수(정치학과 소속)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Baba 교수를 만날 길을 찾기 위해 이 건물의 1층에 있는 방을 노크했다. 방문을 열어보니 정치학과 교수 2명과 Hindustan Times 기자가 잡담하고 있었다. 필자가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했더니 이들은 꽤 관심을 가지며 이야기하자는 눈치를 보였다. 그래서 우연히 캐시미르 대학 교수, 기자와 즉석 방담이 이루어졌다.

필자가 ‘캐시미르와 한반도 사이에 닮은 점이 많다’고 말하자, 교수 2명은 일부 내용에 동의하면서도 캐시미르 사회에 내재적으로 접근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즉 캐시미르의 역사 등에 대하여 풍부한 사전지식이 있어야하며, 우선 문헌을 통해 심층적으로 접근해야한다고 말했다.

필자가 화제를 바꿔 당신들은 정치학과 교수로서 무엇을 가르치느냐고 물으니까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정치학의 총론과 세계 각 지역의 정치 상황만을 가르친다고 대답했다. 캐시미르의 심각한 상황에 대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치느냐고 되물었더니 낙담하는 표정으로 캐시미르의 상황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단다. 교수로서 정치적 견해를 밝힐 자유가 없고 자신의 견해를 밝힐 공간이 없기 때문에 남의 나라 정치이야기나 가르친다고 자조 섞인 답변을 했다. 자신들이 캐시미르 상황에 대해 제일 잘 알면서도 논문 한편 제대로 쓸 수 없으며 그 바람에 캐시미르가 아닌 다른 지역의 교수들이 캐시미르 사태의 대가 행세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두 교수가 (현실 참여의 길이 막혔다고 자포자기하는) 한심한 지식인이란 느낌을 받았다. 유신독재에 침묵한 한국의 70년대의 지식인 사회와 캐시미르 대학의 분위기가 비슷하지 않나 생각했다. 암울했던 유신독재 시절의 침묵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에서 당신들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지만 떨쳐 일어나 독재정권에 저항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 반론에 대하여 두 교수는 ‘그래도 당신들은 자신의 나라가 있으니까 나라가 잘 되기 위해 싸웠지만 우리들은 인도를 위해 자유투쟁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파키스탄을 지지할 수도 없는 샌드위치 같은 신세’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들의 솔직한 신세타령에 동정심이 생겼다. 동정심이 생기는 한편 이 지역에서 최상의 보수를 받는 대학교수로서 사회의 발전을 위한 직무유기를 질타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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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묘지에서

 

캐시미르 정치학과 교수들과의 예기치 않은 방담을 마친 다음 대학 정문을 빠져나와 순교자 묘지에 갔다. 약 2백구 정도가 묻혀있는 이 순교자 묘지는 APHC가 국유지에 세웠다. 여기에 묻혀있는 사람들은 주로 독립운동(정치적 독립운동, 게릴라 무장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교한 이들이다. 1992년에 독립운동을 위해 대중을 동원하다가 인도군에 살해된 이슬람교 지도자의 무덤이 가장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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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와 만나볼까?

 

돌아오는 길에 차 속에서 Hussain이 게릴라와 만나보면 어떻겠느냐고 필자에게 물었다. 필자가 원하면 게릴라와의 인터뷰를 주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기는 캐시미르 지역신문 논설위원이니 게릴라도 알고 지내고 정치인도 알고 지낸다고 설명했다.

전혀 예상치 않는 Hussain의 제의를 듣고 “게릴라가 있는 산 속에 들어가지 않고 스리나가르 시내에서 만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더니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인터뷰가 성사되면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인터뷰에 따른 위험도(인도군이 득실대는 스리나가르 시내에서 버젓이 게릴라와 인터뷰하는 위험)‧인터뷰의 효용성(내가 신문기자라면 특종을 위해 무리한 인터뷰를 하겠지만 유네스코 연구원으로 여기에 왔기 때문에 목적에도 어긋나고 인터뷰를 해보았자 별로 효용성이 없다)을 저울질 한 끝에 게릴라와의 만남을 포기했다.

또 하나 포기한 이유는 외국인을 납치하는 등 인명을 가볍게 여기는 게릴라의 행태(한국의 빨치산은 그렇지 않았다)‧ 반전 평화 거리 시위나 평화활동을 꺼려하는 게릴라들의 노선이 탐탁치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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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함락 소식을 듣고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이라크 전쟁 소식을 물었더니 바그다드가 함락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후세인 정권의 붕괴 소식을 이 곳 캐시미르 분쟁 지역에서 듣고 이중 삼중으로 착잡했다. 캐시미르의 엄혹한 상황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차에 미국의 이라크 전쟁 승리 소식,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의 화살이 북한을 향할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다.

이라크 다음의 과녁인 북한에서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의 무력 앞에서 이라크처럼 당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호텔의 로비에 있는 텔레비전을 통해 미‧영 연합군의 무소불위의 화력, 이 화력에 속수무책인 이라크 군, 수많은 무고한 이라크 민중이 전쟁 피해를 입는 장면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거칠 게 없는 미국이 북한을 향해 맹진할 것이라는 예감이 한반도에서의 전쟁 공포감을 자아냈다. 이 공포감으로 침통한 표정을 지었는지 옆에 앉아 있던 이 동네의 국제 소식통 Mohd Hkan Bhat가 필자를 보고 “안색이 안 좋은 듯한데 어디 아픈 데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의 앞에서 침통한 표정을 짓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자세를 가다듬고 그에게 “이라크 다음 차례의 과녁은 어디가 될 것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뚱딴지 같이 시리아라고 대답했다. 중동권에서 이라크 다음의 과녁은 이란이라는 필자의 평소 지론을 빗나갔지만, 뚱딴지 같은 대답이 흥미로워서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바그다드에 그렇게 많았던 이라크의 지도부‧군대의 상당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수수께끼(mystery)라고 설명하며, 이들 중 상당수는 후세인 체제의 재건을 약속하며 시리아로 줄행랑을 쳤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시리아를 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필자는 시리아에 대한 미국의 무력공격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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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舊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12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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