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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Dalit의 고난

인도 방문기-4월 2일


 
김승국  

 

Dalit 슬럼가

 

첸나이에서 첫날 밤을 보내고 아침 밥을 서둘러 먹은 다음 첸나이 시내의 Dalit 슬럼가(빈민촌)로 직행했다.

약 3킬로미터의 썩은 계곡물을 따라 오두막 집을 지어놓고 사는 Dalit 빈민들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대나무 껍질로 만든 집 안의 시멘트 바닥 위에 누워서 잔다. 방 한 칸에 한 가족이 우거하고 있으며 살림이라곤 간단한 취사도구에 옷가지 정도. 집의 벽에 낡아빠진 영화배우 사진이 붙여 있는 집이 많다. 그래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 우선적으로 텔레비전을 사는 듯 TV세트가 있는 집이 간혹 눈에 띈다. 텔레비전 매체가 이들의 고한 삶을 위로해주는 수단인지, 삶의 고난을 망각케 하는 마취제인지 알 수 없었으나 TV의 영상매체는 이들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더 여유가 있는 집은 오디오를 갖춘 경우도 있다.

이 마을을 이끄는 지도자는 Dalit 운동의 선구자이며 인도의 첫 내각의 법무장관이었던 Ambedkar의 후계자이다. 그의 설명을 들으니 계급적인 도시빈민 운동보다는 제도 개선에 치우치는 느낌을 받았다. 인도 정부는 이들을 버린지 오래이며 사회단체 등의 도움을 약간 받는다.

이 마을에 사는 Dalit 빈민 5천여 명(1천 가구)은 주로 일용잡부로 일하며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남자의 하루 일당이 50루피(1,250원)이고 여자는 10~30루피라고 하니 내외간이 벌어도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을 정도란다. 이곳에는 모기 등이 옮기는 전염병이 많고 수인성 질환으로 사망하는 주민들도 많다고. 옛날에 정부에서 지워준 초등학교가 마을 부근에 있는데 잘 관리가 안 된다. 화장실도 없어서 썩은 계곡물이나 길 옆에서 실례한다. 그런데 우기에 폭우가 쏟아지면 계곡의 썩은 물이 집안을 덮칠 것이고 마을이 온통 물바다가 되어 그나마 의지했던 삶의 터전을 잃을 것이다. 이들을 도와주는 NGO도 거의 없다고. 첸나이에만 이런 빈민촌이 1,500개가 있다니 인도에선 빈곤해소가 가장 큰 문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들은 Dalit 출신의 정치지도자가 나와 자신들을 이끌어주길 바랐다. 자신들도 정치적인 힘을 가져야한다고 이 마을의 지도자가 역설했다. 첸나이 시내에만 40만 명의 Dalit들이 살고 있다고 하지만 경제력이 없는 이들이 정치 세력화하여 힘을 가질지 의심스러웠다.

뭄바이(봄베이)에 가면 더 험악한 빈민촌이 즐비하다고 한다. 인도가 현재 저개발국가인데도 이렇게 많은 빈민촌이 있다. 만약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지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농촌인력이 도시로 몰려와 빈민가를 기웃거릴 텐데, 그때의 슬럼가는 어떤 모습을 띨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Dalit 염전 노동자의 투쟁

 

오후에 우리 NGO 일행은 첸나이의 남쪽에 있는 폰티체리(Ponticherry)로 가서 하룻밤 잔 다음 오로빌(Auroville) 생태공동체를 방문할 계획이다.

프랑스인들이 폰티체리를 중심으로 인도 남부에 식민지를 개발했으며 그런 탓인지 지금도 폰티체리에서는 맛있는 포도주를 생산한다고 한다.

폰티체리로 가는 도중 Dalit 사람들이 일하는 염전을 거쳐 Dalit 마을 Cheyur로 들어갔다. 천일염이 산더미처럼 쌓인 거대한 염전에서 Dalit 노동자 1만 명이 일당 50루피(여성은 30루피)로 연명해왔다고. 그런데 최근 인도 정부가 Dalit의 생활근거지인 염전 부근에 화력 발전소 건설을 강행하는 바람에 Dalit마을에 검은 그림자가 닥쳤다. 화력발전소가 세워지면 염전에 끌어들일 바닷물이 고갈되기 때문에 염전은 자동적으로 폐업해야한다.

그래서 Dalit 주민들이 똘똘 뭉쳐 정부를 상대로 발전소 반대 데모를 하고 소송을 제기했더니 기공식을 중단했다고 한다. 이런 운동을 주도하는 씩씩한 노인은 Dalit 출신으로 선생으로 봉직하다가 퇴직하고 Dalit 계몽운동을 하는 지도자이다. 우리를 안내하는 인도인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인도의 어느 마을에 가도 그 곳의 터줏대감(지도자)을 통하지 않고는 마을에 접근할 수 없다고 한다.

 

‘춤판’ 벌어진 Dalit 정착촌

 

염전에서 잠시 정차한 일행은 Dalit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Dalit 사람들이 거주하는 큰 마을의 시장을 지나 막바지에 이른 길에 Dalit 정착촌이 나타났다. 약 2백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에 차를 세우자마자, 마을 사람들은 우리 일행이 신기한 듯 하나둘씩 모여들어 큰 대오를 이루었다. 우리들은 Dalit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신기했고 Dalit 사람들은 우리들을 신기하게 생각하며 ‘신기한 상견례’를 나눴다.

마을은 비교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마을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응집력으로 보이고 있었다. 오늘은 마침 젊은 여성들의 귀걸이 구멍을 뚫어주는 날(일종의 통과의례)이어서 통과의례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외계인(한국의 NGO 일행)이 왔으니 모두 모이라는 신호인 듯 마을의 확성기가 울렸다. 대낮에 확성기 소리를 듣고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 일행 주변에 운집했다. 그런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동네 청년 몇 명이 마을 축제 때 쓰는 악기를 들고 나와 북을 두들기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 악기 소리에 신바람이 난 우리 일행 중 젊은이들과 동네사람들이 어우러져 한판 춤판이 벌어졌다. 자본주의 세상 한국 사회를 개혁하려고 몸부림치는 NGO 사람들과 Dalit의 ‘상생의 춤판’은 국경‧피부색의 차이를 망각하게 했다.

이 춤판에 끼어든 동네 사람들의 해맑은 웃음에서 이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실감했다. ‘너무나 꾀죄죄한 움막집에서 살면서 얼마나 불행할까’ 생각했던 필자의 생각이 한갓 동정심 어린 관념임이 증명되었다. 세계에서 최고로 잘사는 뉴욕의 상류층보다 최빈국 인도 민중들의 행복지수가 더 높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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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舊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12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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