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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야생의 인도 기행 (16)


김승국


델리 행 특급열차 안에서-2


 
2004년 1월 21일 심야. 라즈다니 열차는 델리를 향해 맹진하고 있다. 칠흑 같은 밤을 뚫고 달리므로 어디쯤 달리는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다. 델리까지 가는 도중에 단 2개의 역에서만 정차한다고 하니 ‘하염없이 달리는’ 느낌이다.

이윽고 덜커덩거리며 달리는 열차 바퀴 소리를 자장가 삼아 침대에 몸을 뉘었다. 열차가 흔들리는 대로 누워있는 온몸이 진동하는 바람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선잠을 몇 시간이나 잦을까? 눈을 떠보니 어슴푸레한 미명이었다. 칠흑 같은 밤은 도둑같이 사라지고 새벽의 희미한 빛이 인도의 평원에 비추이고 있다.

1월 22일 아침 7시. 기상을 알리는 차내 방송과 함께 힌두 음악이 흘러나왔다. 곧장 인도차를 마시라며 열차 종업원이 다기(茶器)를 돌리고 있다. 밤새 침대 위에서 시달린 탓인지 머리가 멍멍하데...인도차 한잔을 마시니 정신이 약간 맑아진다.
 
광활한 녹색평원, 점점이 키 큰 나무들이 들어찬, 그렇지만 약간 황량한 들녘을 달리는 이른 아침의 열차 안에서 인도차를 마시며 힌두 음악을 듣는 고즈녘한 희열(bliss). 인도 대륙의 서쪽 한 귀퉁이를 횡단하며 얻는 이 희열. 이 희열은, 아트만(atman)과 브라만(brahman)이 조화를 이루는 희열에 범접한 것인가?

이런 희열을 흉내 내려는 찰나에 ‘아트만-브라만의 조화를 깨는 비참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델리를 두 시간 남겨둔 철길 옆에 피난민 같은 생활을 하는 홈리스 군(群)이 나타났다. 그들에게는 아트만이니 브라만이니 하는 소리조차 공염불이다.
이 농촌 홈리스들의 생활은 겉보기에 도시의 홈리스보다 훨씬 비참하다. 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홈리스 마을은 식사중이다. 모닥불 위에 조그만 냄비 하나를 올려놓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 아침밥을 나누어 먹고 있다. 빵 한 조각을 여러 식구들이 나누어 먹는 ‘초(超) 빈곤상’을 눈뜨고 볼 수 없다. 추측컨대 농토가 없는 일용 농업 노동자(그것도 비정규 농업 노동자)인 듯하다. 아침밥을 먹으면서도 오늘은 어디 가서 밥벌이를 할까 궁리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들 농민들이 기름진 식사를 한 것 같지 않은데도 신진대사는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듯, 식후에 대변보러 나오는 농민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인도에는 변변한 화장실이 거의 없기 때문에, 도시나 농촌 가릴 것 없이 대소변을 들판이나 길거리에서 본다.

아침 8시가 되니까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대변보러 나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그런데 법칙처럼 엉덩이를 열차 쪽으로 내보이며 대변을 보는 장면이 자주 나타났다. 반대방향 즉 성기를 열차쪽으로 돌리면 국부가 노출되므로, 한결같이 엉덩이가 열차 쪽으로 향하고 있다. 마치 열병식 하듯 엉덩이를 까고 있다. 남녀 불문하고...

야윌 대로 야윈 농민들의 엉덩이 열병식에, 인도 농촌의 슬픈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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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36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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