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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소와 공존하는 저속 사회 '인도'

김승국  

인도 방문기 (1)

2003년 3월 30일 밤 인천공항을 출발한 아시아나 항공기는 7시간 30분의 긴 항해 끝에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 31일 0시 40분에 착륙했다. 착륙시간이 다가오자 다음과 같은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여러분은 세계 종교의 중심지이자 인도 대륙의 중심지인 델리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렇다. 나는 세계 종교의 중심지이자 神들의 나라 인도에 발을 내디뎠다. 나는 앞으로 3주일 동안 ‘神들의 나라’ 인도 탐방 길에 나선다. 그 첫 번째 프로그램으로 6일 동안(3월 30일~4월 5일) 한국의 ‘NGO 활동가 인도 연수단’에 합류하여 여러 곳을 둘러볼 것이다. 그리고 이들 일행과 헤어져 델리로 되돌아 온 다음 필자의 관심사인 인도-파키스탄 분쟁 현장(캐시미르 포함)을 방문하거나 자료 수집에 나설 셈이다.

이 연재물은 필자가 인도사회를 목격하고 느낀 점을 담담하게 일기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정색을 하고 인도 탐방기를 쓸 정도로 인도에 대하여 해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에세이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으며, 겉핥기 식의 보고서 형식이 될 것이다.

인도는 커다란 대륙으로서 오랜 문화․종교적 전통을 지닌 나라이며 信心이 높은 神의 아들․딸들이 사는 곳이어서 ‘인도는 이렇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 인도인 자신도 '인도'에 대한 단적인 규정을 꺼려하는 마당에 이방인 그것도 인도를 처음 방문하는 풋내기가 인도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심층적인 첫인상이 간혹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에 필자 나름의 예지력을 총동원하여 이 글을 써내려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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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시내의 표정

 

우리 NGO 일행은 호텔에 들어가 잠깐 눈을 붙인 뒤 아침 7시에 기상하여 타지마할(Taj Mahal)이 있는 아그라(Agra) 기행에 나섰다. 우리가 머문 호텔이 델리 남쪽에 있고 아그라로 가는 길이 델리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우리를 태운 버스가 부득이 델리의 남부지역에서 델리 시내를 관통하여 북부지역을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출근시간이어서 델리 시민들의 표정과 시가지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버스의 차창에 비추인 델리 시내의 표정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인파, 무질서한 시가지, 어수선한 교통질서, 콩나물 시루 버스, 지독한 매연, 빈민촌, 찌든 가난의 범벅이었다. 델리는 아시아 지역 저개발 국가들의 群像을 집대성한 도시 같았다.

그러나 소가 길거리 한복판을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니는 모습에서 힌두 국가임을 대뜸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일부 시민들이 이른 아침 대변을 보기 위해 물통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인도의 소득이 낮은 서민들이 사는 집에 화장실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대변용 물이 들어 있는 통을 들고 다니며 대변 보기에 적당한 곳을 선정한 뒤 실례한다. 인도 사람들은 화장지를 사용하는 대신 왼손에 물을 묻힌 다음 홍문을 씻어낸다. 왼손은 대변을 닦는데 쓰고 오른 손은 카레는 먹는데 사용한다. 그러므로 인도 사람들은 악수할 때 절대로 왼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도시 주민들을 중심으로 각 가정마다 화장실을 갖추고 화장지를 쓰는 경향이 늘면서 이런 습관은 많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시골에선 여전히 왼손으로 홍문을 씻는 습관이 여전하다고 한다.

길거리엔 바퀴 달린 것이면 모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자가용 승용차, 택시, 버스, 자전거를 이용한 인력거, 3륜차(autorickshaw), 오토바이(스쿠터), 우마차 등 자기 소득에 맞게 준비한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타고 다니는 차를 보면 이내 그 사람의 소득이나 중산층인가 빈민층인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운전자의 옷차림 등이 다르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무질서하게 바퀴 달린 모든 것이 쇄도해도 교통사고가 별로 일어나지 않고 서울에서처럼 차들끼리 뒤엉키지 않는 점이다.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인간적인 교통흐름이 이루어진다. 새치기도 없으며 각자 알아서 자신이 모는 교통수단의 속도를 자율 조종하니 신호등과 도로 표지판이 별로 없어도 크게 부딪치지 않는 교통 공동체를 이룬다.

교통신호가 별로 없는데도 행인들이 아슬아슬하게 각종 교통수단 사이를 요리저리 빠져나가 인명손상이 별로 없는 게 신기하게 보였다. 성질 급한 한국 사람들은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교통체계이다. 더구나 돛대기 시장 같은 도로의 한복판을 소(인도인의 80%가 믿는 힌두교에서는 소를 신성시한다)가 활보하니 가관이었다. 모든 차량의 뒤편에 쓰여 있는 ‘Horn please'라는 권유문에 따라 저리 비키라고 경적을 서로 울리는 바람에 수천 수만의 경적음들이 귀청을 때린다. 인간, 소, 각종 차량이 뒤섞여 갠지스 강 흐르듯 파동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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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근교를 달리며

 

드디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델리 시내를 탈출하여 2차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말이 고속도로이지 한국에 비하면 저속도로이다. 거기에서도 여전히 바퀴 달린 모든 것과 소, 사람이 혼재되어 있다. 아그라까지 3시간 30분을 달리면서 목격한 농촌의 실상을 내 눈에 들어온 순서대로 소개한다.

헐렁한 작업복을 입은 남성들의 소걸음, 인도 여인들이 즐겨 입는 샤리를 걸치고 수확하는 아낙네들, 동굴같이 어두운 점포에서 소품 몇 가지를 팔고 있는 상인들, 과일․잡화를 파는 노점상들(한국처럼 노점상 단속이 없는 듯), 오두막 집의 지붕 아래에서 노닥거리는 주민들, 우물 옆에서 미역 감는 아이들, 짐짝처럼 차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 델리보다 더 유유자적하게 길가에 누워있거나 서 있는 기름진 젖소들(농촌 주민들의 핏기 없는 얼굴과 너무 대조적으로 윤기 나는 소들의 피부), 쓰레기로 뒤범벅 된 마을의 공터, 적벽돌로 엉성하게 지은 농촌주택이 연이어 필자의 눈에 들어온다.

연못의 더러운 물가에서 빨래하는 여인과 지척에 있는 물소, 소똥을 말려(말린 소똥을 연료로 사용하는 자원 순환형 농촌경제의 일단을 볼 수 있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소똥 탑과 소똥 냄새도 빼놓을 수 없다. 소똥의 향기(?)가 코를 자극하면 마을을 지나가는 것이며, 풀냄새가 나면 들판을 달리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을 정도이었다. 아마 차에서 내려 마을에 진입하면 소똥 냄새보다 인도 민중의 땀 냄새가 더욱 강하게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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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 가는 길에서

 

델리라는 거대 도시와 델리 교외의 농촌의 대비해보니 인도 사회를 더욱 역동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아그라까지 3시간 30분 동안 지켜본 델리 근교와 농촌의 겉모습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첫째, 인도에선 사람팔자가 소보다 못하다. 소팔자가 사람팔자보다 낫다. 델리에서 우리 일행이 묵은 호텔을 빠져 나온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지난 도시빈민촌의 정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사람 사는 동네라기보다 개돼지 우리 같은 밀집․대나무 천막이 이 풍진 세상을 한탄하고 있었다. 뭄바이(봄베이)는 이 보다 더 하다니 지옥이 따로 없겠다. 끼니를 거르거나 걱정을 하는 빈민이 30~40%이상 이라고하니 이 나라의 위정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들은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는 듯 견디기 어려운 고난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이 점이 한국과 다른 듯했다.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면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력이 약해져 가난의 대물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이런 의문은 다음날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인 달릿(Dalit) 마을에 갔을 때도 여전했다.

인도에서는 사람이 짐짝처럼 굴러다닌다. 너무 사람 값이 싸다. 델리 시내 공사판의 일용 노동자의 주요 공급원인 불가촉 천민 남성의 하루 일당이 1달러(50루피)이며 여성은 그 절반 정도라니 차라리 개돼지로 사는 게 나은 편이다. 이들 공사장 옆을 지나치는 부유층의 자가용의 가격이 30만 루피라니 인도에서 빈부의 차이가 어느 정도이며 가난한 자의 인생이 어느 정도 똥금인줄 짐작할 수 있다(여기에서 여성들이 남성의 절반 정도의 임금을 받는 현실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문화적 전통 때문인 듯 여성의 노동 대가는 남성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반 토막 인생’이다. 인도에서 여성의 고난에 대해서는 기회가 있는 대로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인도 민중의 노동력이 너무 헐값이다 보니 저개발의 영속화란 대가를 치루는 듯하다.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는 사회를 위한 몸부림이 카스트(Caste) 제도나 종교적 신심에 눌려 있는 듯하다. 하층계급으로 태어난 것도 神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인도 민중의 달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람 몸을 늘어지게 만드는 인도의 더위와 이 더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가난뱅이 聖者(카스트 계급제도를 용인하는 인도 민중의 하나님 같은 마음)를 그냥 지켜보기에는 너무나 안타깝다.

 

계급사회 인도

 

둘째, 神들의 나라 인도가 계급사회라는 점이다. 힌두교도이든 무슬림이든 神과 더불어 살지 않는 사람은 인도에서는 이방인이다. 이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종교(종교를 배경으로 한 철학․문화)라는 정신세계이지 정치․경제력은 뒷전이다. 그래서 그런지 정치가 개판인데도 인내력을 갖고 지켜본다. 종교라는 귀의처가 있으니까 한국 사람들처럼 정치권을 향하여 콩나 와라 팥 나와라 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이 살판 난 듯 부정부패에 빠져 간디가 물려준 국민회의(INC)는 집권여당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나?

그리고 노동력에 대한 대가가 너무 헐값이어서 노동 대가 제대로 받기 운동(노동운동 등)이 활발해야할 텐데 한국만큼 철저하지 않은 것 같다. 핏기 없이 구릿빛으로 그을은 인도 민중의 처참한 나상(裸像)은, 지배계급에 의해 완전히 벗겨진 삶을 엿보이게 한다.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는 인도 민중에게 觀照하는 삶을 강요(?)하는 힌두 문화의 계급성은 비판받을 여지가 많다.

힌두문화는 수많은 카스트(계급)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Karma(業報)에 따라 브라만(승려 계급; 정신적으로 지도하는 최상류 계급), 크샤트리야(브라만을 호위하는 있는 무사․관료 계급), 바아샤(브라만과 크샤트리야에게 경제력을 제공하는 상인계급)․수드라(위의 3계급을 먹여 살리면서도 천시 당하는 계급) 및 이 4계급에도 끼지 못하는 불가촉 천민(제5계급)으로 나뉘어 자신의 잠재력과 무관하게 ‘계급의 숙명화(宿命化)’가 아직도 지배적인 곳에서 계급투쟁․사회변혁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간디의 비폭력 운동이 성공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神들이 숭앙되고 있는 인도가 가장 계급적인 곳이라는 점이다. 神이 진정코 인간사에 개입한다면 계급차별을 없애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에 역행하듯 계급차별을 인정하는 종교가 힌두교라니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도사회에 대한 깊은 고찰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소걸음에 맞춘 인도의 시간

 

셋째. 인도의 시간은 한국의 시간과 다르다는 점이다. 한국은 秒 단위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정치경제학적으로 말하면 자본가들이 짜놓은 시간(테일러 시스템의 공정에 따른 시간)표에 따라가야 먹고살 수 있는 사회이다. 이것도 오프라인의 경우에 그러할 뿐 온라인 세계로 들어가면 한국은 ‘bit 사회’이다. 그러므로 이 ‘bit 사회’에서 소걸음(牛步)을 걸으면 영원히 탈락한다. 자본․권력의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속도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도사회는 한국 사회의 숨 가쁜 속도전을 우습게 알 듯 모든 시간이 소걸음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인도인의 步幅, 돈 벌이 속도, 삶의 리듬, 경제․사회적 순환의 속력은 소걸음을 향해 하향 조정되어 있다. 하향 조정되어 있는 만큼 자본주의가 덜 발달하여 경제가 저개발 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여기에서 심각한 질문은 한국 같은 고속사회에서 개미 쳇바퀴 돌 듯 살아야하는가 아니면 인도처럼 소걸음에 맞춰 청빈한 삶을 누려야하는 가이다. 물질은 풍부해도 상대적으로 정신이 가난한 한국형 삶을 선택할 것인가, 물질이 부족해도 상대적으로 정신이 풍요로운 인도형 삶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자본주의 속도전에 신물 난 한국 사람들이 인도에 반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명상하는 소걸음 인도’의 모습일 것이다. 아마 인도사회에 심층적으로 접근해 갈수록 ‘神들과 함께 명상하는 低速 인도’의 매력을 만끽할 것이다. 그래서 인도는 우리에게 實存의 문제를 안겨준다. 소똥 냄새 맡아 가며 저속으로 사는 인도인의 삶이, 돈 냄새에 마취되어 고속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의 삶보다 더 나을지 모른다.

 

관조하는 삶

 

소걸음에 맞춰 살면 자기 인생을 더욱 깊이 성찰하고 관조하는 삶을 즐길 수 있겠다. 인도도인처럼 명상하는 삶을 누릴 수 있겠다. 소걸음에 맞춰 살다보면 더욱 자연친화적인 삶을 영유할 수 있겠다. 소똥과 더불어 사는 이 곳 사람들처럼.

연대기적인 시간(chronos) 개념이 별로 없는 인도 곳곳에서 몸놀림이 느린 인도인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느긋하게 밀을 베는 모습. 일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노동자세. 대낮에 늘어지게 낮잠 자는 인력거꾼. 길 모퉁이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졸고 있는 부랑인들. 느린 걸음으로 출근하는 관청가의 공무원들. 이들의 머리를 내리 쬐는 태양과 함께 해시계가 멈춘 듯하다.

이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빨리 빨리 일을 해치워야 직성이 풀린다. 고속 인터넷도 답답한 듯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한다. 내가 머물고 있는 델리의 중급호텔 로비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약 10년 전 한국에서 모뎀을 사용할 때처럼) 화면이 너무 늦게 바람에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화가 풀린 다음 ‘나도 한국의 bit 사회의 노예가 되었음’을 인도에서 다시 깨달았다. 인터넷 화면이 늦게 뜬다고 인생이 바뀔 리 없는데 내가 왜 그동안 ‘bit 사회를 위해 발을 동동 굴리며 살아 왔는지’ 재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악착같이 돈벌려고 덤비는 사람들 투성이이다. 여기에 와서 보니 촌음을 다퉈가며 살아가는 서울 시민과, 완행기차를 타고 인생여행을 떠난 델리 시민들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너무나 각박하게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한편으로 불쌍해보였다.

 

‘빨리 빨리 인생’의 덧없음

 

한국과 인도 두 나라를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으나 ‘빨리 빨리 인생’의 덧없음․조루증이 인도에서 더욱 돋보였다. 인도인들처럼 ‘소똥의 리싸이클(소똥을 연료 이용함으로써 나무를 벌목하지 않아 자연친화적인 환경을 유지함)’을 즐길 한국인은 거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지금까지의 소감은, 내가 탄 버스가 고속도로를 시속 50킬로미터를 달리는 가운데 체감한 것일 뿐이다. 만약 내가 인도인처럼 소걸음에 맞춰 지낸다면 더욱 다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인생의 속도와 행복 지수의 상관관계는, 한국인 모두의 숙제이다. 인도의 수도인 델리에서는 관조(명상)하는 삶을 누릴 수 있는데, 서울에서는 그런 삶을 흉내 내지도 못하는 게 문제이다. 그게 인도와 한국의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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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의 사랑탑

 

우리 일행은 태운 버스는 이윽고 무굴 제국의 샤자한 황제의 구슬픈 사랑 이야기가 담긴 타지 마할에 도착했다. 타지 마할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하차하여 인력거를 타고 가니 타지 마할의 유백색 대리석 건물이 더욱 찬란하게 보였다. 사랑 이야기를 시리도록 듣고자 하는 이들이 타지 마할 주변을 배회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서 눈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내가 ‘bit 사회 한국’에서 생존경쟁에 시달리다 보니 눈물이 메마른 탓인가? 우리 NGO 일행 중의 여성들도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지독한 마음을 지닌 한국 여인들이여 타지 마할 앞에서 눈물을 흘리소서...

안내인으로부터 타지 마할의 유래를 들었다. 16세에 결혼한 왕비 몽타즈 마할(‘궁전의 달빛’이란 뜻)은 14명의 자녀를 낳은 다음 1629년에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뜬다. ‘궁전의 달빛’을 잃어버린 샤자한 황제는 황후의 보석 무덤을 안치하기 위한 거대한 대리석 건물 ‘타지 마할’을 23년간 축조한다. 인근 4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대리석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한 여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수많은 민중의 고혈을 짜낸 잔인한 국가 토목공사이었다. 샤자한 황제는 자기가 죽으면 그녀 곁에서 영면하기 위해 타지 마할과 똑같은 모습의 검정 색 대리석 건물을 세우려했으나 뜻하지 않은 아들의 배반으로 아그라 성에 유폐 당한다.

온통 황토 빛을 띤 아그라 城은 타지 마할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황제 내외의 거처 겸 집무실이다. 아그라 성에서 천하를 호령하던 샤자한 황제는 자신이 황제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城 안에서 최고로 호화로운) 방에 갇혀 권력 무상․인생 무상을 몇 년간 절감하다가 죽는다. 그가 갇힌 방은 타지 마할이 너무나 잘 보이는 곳이었으니 그가 매일같이 눈만 뜨면 타지 마할을 바라다보며 절망에 절망을 거듭한 끝에 일찍 세상을 뜨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해보았다. 자신이 마누라를 위해 쌓은 사랑탑 ‘타지 마할’이 지척에 보이는 곳, 자신이 황후를 위해 특별히 마려한 방에서 유폐당한 신세타령이 그의 죽음을 재촉했을 듯하다. 샤자한 황제를 그 방에 유폐한 아들의 지아비 감금효과가 2중 3중으로 높았을 터이니, 권력 싸움에 눈이 먼 불효자식의 이야기 한 토막이 아그라 성과 타지 마할 사이를 전설같이 울려 퍼졌다.

필자는 타지 마할과 아그라 성을 바라보면서 제국의 영광과 무상함을 동시에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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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舊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12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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