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화 운동/평화기행

일본 서부지방 탐방기 (11)

  
김승국 기자 


 
 
필자는 2005년 8월 1~9일에 열린 <원수폭(原水爆) 금지 세계대회(World Conference against A & H Bombs)>에 참석한 다음에 규슈 · 야마구찌 지방을 순회하고 8월 15일에 귀국했다. 순회한 도시를 순서대로 열거하면 히로시마~나가사키~구마모토~기타 규슈(北九州) ~야마구찌로서 서부 일본을 둘러본 셈이다. 이 글은 보름 동안 서부 일본을 평화의 감각으로 여행한 평화 여행기이다.

8월 1일 아침 8시 히로시마의 국제여객 터미널에 내린 필자는 노면전차를 타고 히로시마 시청으로 달려갔다. 히로시마시가 국제적인 평화도시가 된 경위, 평화도시 건설의 설계(마스터 플랜)에 관한 자료를 얻기 위해서 이었다. 히로시마 시청의 시민활동 추진과에 들러 평화 도시의 마스터 플랜이 없느냐고 물으니까, 약간 당황한 눈빛으로 시청 안에는 없고 (평화 공원 안에 있는) 평화문화 센터를 찾아가 보라고 한다.

‘히로시마가 평화 도시임을 떠벌이는 시청’ 안에 마스터 플랜이 없다니...황당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히로시마를 평화롭게 부흥한 것은 시민들의 힘이었고 평화운동 단체들이 시민들과 합세하여 히로시마를 반핵평화의 도시로 만들었다고 한다. 평화 NGO의 힘이 주효하여 히로시마가 평화의 도시로 된 것이므로, 시청에 그런 자료가 있을리 만무하다는 설명이었다.

이윽고 8월 2일 오전부터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원수폭 금지 일본 협의회(원수협)가 주최한 국제대회이다. 일본이 1945년 8월 6일 미국의 핵폭탄 세례를 받은지 60주년이 되는 해이어서 해외대표만해도 260명이나 참석하는 초대형 국제대회이었다.

제2차 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의 대가로 피폭을 당하는 비극을 맛보았다. 전쟁의 가해자이었기 때문에, 핵공격을 받는 수난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전쟁의 ‘가해’라는 원인이 누락된 피폭(패전)의 결과만을 주장하면 인식의 형평을 잃게 된다. 일본이 피폭국가로서 ‘No More Hiroshima'를 주장할 때, 전쟁의 가해자 의식을 빠뜨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대회에서도 피해의식이 가해의식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필자를 실망시켰다.

전쟁의 가해자 의식 · 피해자 의식과 관련하여, 한반도도 예외로 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북한 핵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아, 미국이 영변 핵시설의 폭격 등 한반도에서 핵전쟁을 감행한다면 미국이 가해자가 되고 북한이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북한이 남한을 향해 핵무기를 발사한다면 북한이 가해자가 되고 남한은 피해자가 된다. 더우기 한반도에서의 핵전쟁으로 인한 민족 절멸을 생각할 때 민족 전체가 가해자겸 피해자가 된다.

이러한 가해자 · 피해자의 아수라장을 예방하는 것이 한반도에서의 핵전쟁 예방과 연결되어 있으며, 핵전쟁 예방은 우리 민족의 평화적인 생존권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필자는 한반도의 핵전쟁을 예방하는 길을 일본에서 찾기 위하여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에 참석했다.

한반도에서 내정된 핵전쟁의 예방책을 이번 대회에서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핵무기의 참화를 현장에서 보면서 ‘한반도에서 핵전쟁의 기미조차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되며 이를 위해 반핵평화 운동을 열심히 해야 되겠다’는 각오를 했다.

히로시마 · 나가사키의 피폭 현장을 방문한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듯이 피폭의 결과는 무참하다. 악마의 핵무기를 두발이나 투하하여 히로시마 · 나가사키를 쑥대밭으로 만든 참화가 <히로시마 평화 기념 자료관>에 잘 전시되어 있다.
 
 
필자는 <히로시마 평화 기념(記念) 자료관>을 샅샅이 살펴보는 것만으로 부족하여 바로 옆에 있는 <사몰자(死沒者) 추도 평화 기념(祈念)관>을 찾았다. 앞의 자료관이 피폭의 기억을 되살리며 기념하는 곳이라면, 뒤의 시설은 피폭 사몰자의 넋을 기리며 평화의 염(念)을 품는 곳이어서 기능과 목적이 달랐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일본의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이 피폭의 원인이 되어 무고한 아시아 민중이 개죽음을 당했으며, 천황이 주도한 전쟁 때문에 아시아 민중이 몰살 당했다’는 문구가 전무하여 적지 않게 실망했다. 일본이 독일처럼 제2차 대전을 참회하려면 아직 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예산을 투여한 <사몰자 추도 평화 기념관>마저 ‘피폭을 두 번 다시 당하지 않는 평화를 기원할 뿐...일본이 일으킨 제2차 대전(대동아 전쟁)을 두 번 다시 일으키지 않겠다는 평화의지가 배어나오지 않았다. 야스쿠니 신사의 전쟁 사몰자 넋 기리기와 다른 기능을 하는 <사몰자 추도 평화 기념관>이지만, 히로시마 식(式) 평화의 한계는 분명했다.

히로시마 식 평화의 한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돋보인다. 첫째 일본인만 피폭을 당했다는 의식 때문에 조선인(남북한 민중) · 중국인 등의 피폭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둘째, 히로시마가 또 다시 군사도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히로시마 시 근교에 육상 자위대 기지가 있고 구레(吳)기지에 해상 자위대의 함정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으며, 이와쿠니(岩國) 미군 공군기지의 활주로를 새로 만들고 있다.

일본인만 피폭을 당했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일본 정부는 조선 · 중국인에 대한 피폭 치료를 아직도 등한히 하고 있다. 이러한 게으름은 피폭도시 히로시마 주변의 군사기지에 대량파괴 무기를 배치하게 만들었다. ‘구레 · 이와쿠니의 탄약고에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기가 막혔다. 핵으로 망한 히로시마 주변에 다시 핵무기의 유령이 얼씬거리고 있으며 이를 일본 정부가 방치하고 있다는 이중적인 기만을 실감했다.

필자는 8월 5일날 히로시마의 부두에서 배(<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의 주최 측에서 현장방문 용으로 준비한 배)를 타고 구레 기지와 이와쿠니 기지를 바다 위에서 살핀 다음 버스로 이와쿠니 기지의 전모를 확실하게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히로시마의 폭심지에서 동쪽으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역에 육상 자위대 제13여단이 있으며, 13여단이 있는 해안도로를 따라 20킬로미터쯤 달리면 구레 기지(해상 자위대 기지이지만 미군과 함께 사용한다)가 나오고, 폭심지에서 서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이와쿠니 미 공군기지가 나온다. 이렇게 히로시마-구레-이와쿠니를 잇는 3각형의 군사거점이 폭심지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 현장을 보고 숨이 막혔다.

히로시마-구레-이와쿠니의 3각 군사거점은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치룰 때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으며, 이 때문에 미군이 히로시마를 지정하여 핵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대동아 전쟁 때의 히로시마-구레-이와쿠니 3각 거점과 오늘날의 3각 거점이 다른 점은, 최첨단 군사장비로 중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둘러본 히로시마-구레-이와쿠니 3각 거점은 최첨단 무기로 중무장한 요새이었다. 곳곳에 대량파괴 무기로 가득 찬 탄약고 · 군사용 연료 보관 창고가 보였으며, 구레 기지 안에 정박한 각종 전함 · 잠수함의 전력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이었다. 구레항의 조선소에서 (대동아 전쟁 당시 일본전함의 대명사이었던) ‘야마토(大和)’호를 건조했으며, 이를 자랑하기 위해 세운 해군역사 과학관을 찾아오는 일본인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직감했다.

1889년에 개항한 구레항은 2차 대전 중 동양 최대의 군사 항구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공습을 6차례나 받아 구레 시내가 불바다로 변했다. 그러나 1950년의 한국전쟁에 뛰어든 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구레 · 이와쿠니 기지가 함으로써 히로시마-구레-이와쿠니의 3각 거점이 다시 살아났다. 한국전쟁 때 한국인이 한사람 죽을 때마다 동경의 긴자 거리에 빌딩을 하나씩 세웠다는 ‘전쟁특수’로 일본이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히로시마-구레-이와쿠니의 3각 거점 · 사세보(佐世保) 기지 등 일본 서부지역에 있는 기지들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거의 말하지 않는다. 이 기지들의 주인이 천황의 군대에서 미군 · 자위대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변한 것이 없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거나 일어날 조짐이 보이면 히로시마-구레-이와쿠니의 3각 거점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한반도를 향한 출격거점으로 바뀌는 것도 변함이 없다.

이러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구레항을 출발한 배는 바다 건너편에 있는 이와쿠니를 향해 달렸다. 이와쿠니와 구레는 동일한 히로시마 만(灣) 안에 있는 군사 거점이다. 구레가 히로시마 만의 동쪽에 있는 반면 이와쿠니는 히로시마 만의 서쪽에 있다. 배 안에서 이와쿠니 기지의 새로운 활주로 공사장이 선명하게 보였다. 필자가 4년 전에 이와쿠니 기지를 찾았을 때 바다이었던 곳을 간척하여 새로운 활주로 공사를 하고 있었으며, 공사 진척도는 약60% 정도이었다. 2008년까지 새로운 활주로 공사를 마치면, 이와쿠니 기지는 2,500미터의 활주로 2개를 보유하는 세계 최대의 미 공군기지가 된다.

이와쿠니 기지의 탄약고에 위험도 표시가 1로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핵무기가 보관되어 있으며 핵전쟁에 대비한 공군기지라고 설명하는 안내자의 말을 듣고 등골이 오싹했다. 어떤 나라가 어떤 나라를 상대로 치루는 핵전쟁인가? 혹시 미국의 대북 핵전쟁에 대비한 탄약고가 아닌가?

히로시마-구레-이와쿠니 3각 거점의 중심도시인 히로시마 시내에는 평화의 공원 · 원폭 돔(Dome) 등이 즐비하게 있어서 평화의 도시임을 자랑한다. 그런데 이 평화의 도시 한가운데 있는 히로시마 성(城) 입구에 ‘히로시마 대본영(大本營)’의 터전이 있다. 히로시마 대본영은 일본의 명치천황이 청· 일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1894년 9월 15일부터 1895년 4월 27일까지 체류한 전쟁 사령부이다. 당시 단단한 석조건물이었으나 1945년 8월 6일의 피폭으로 건물이 무너져 주춧돌만 남아 있다.

1894년 당시 한반도는 청 · 일 전쟁의 전쟁터이었으며, 청 · 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조선침략이 그 때부터 본격화되었다는 과거사를 생각하며 히로시마와 조선의 관계를 곱씹었다. 히로시마와 조선의 관계는 군사도시 히로시마의 군수공장 노동자로 징용된 조선 사람들 대다수가 피폭된 사실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1945년 초 히로시마에는 ‘미군이 군수공장을 공습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있었고, 히로시마 시민들을 시골로 피난시키는 명단이 작성되어 있었다. ‘히로시마 시내의 마을 단위로 근교의 시골마을에 주민들을 소개시키는 계획’에 따라, 공습 받으면 정해진 마을의 지정된 집으로 피난하는 명단이 작성되어 있었다. 이 명단에는, 조선인으로 히로시마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누락되어 있었다. 따라서 8월 6일 피폭 당한 다음 일본인들이 지정된 시골마을로 도망칠 때, 조선 사람들이 동행하자고 떼를 썼으나 일본인들이 ‘조센징’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떼어 놓고 줄행랑쳤다. 일본인 · 조선인을 가릴 것 없이 똑같이 피폭 당해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에서도 조선인이 차별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차별을 딛고 히로시마의 재건에 앞장선 조선인 2만여 명이 현재 히로시마에 거주한다. 이들 조선인(조선 국적을 보유한 사람도 있고 한국 국적을 보유한 사람도 있다)은 불고기 음식점 · 파친코 등의 영업에 성공하여 히로시마 속의 조선인 사회를 당당하게 꾸려가고 있다.

히로시마에 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하다 보니 나가사끼 · 구마모토 · 기타 규슈 · 야마구찌를 방문한 소감을 다룰 지면이 제약되는 것 같다.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수폭 금지 2005 세계대회>를 마친 해외 정부 · NGO 대표 일행은 버스 6대에 나누어 타고 나가사키를 향해 달렸다. 1945년 8월 9일에 피폭 당한 나가사키는 히로시마 보다 더 뜨거운 핵세례를 받았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우라늄 탄인데 비하여 나가사키에 떨어진 것은 수소폭탄이다. 수소폭탄은 원자폭탄 보다 살상위력이 크다. 히로시마의 경우 평야에 핵폭탄이 떨어졌기 때문에 사망자가 비교적 적었던데 비하여 나가사키는 산 속에 파묻힌 시내에 수소폭탄이 떨어져 혹심한 핵세례를 받았다. 나가사키 시내가 완전히 잿더미로 돌변한 것이다.

8월 7일부터 나가사키 시민회관에서 열린 <원수폭 금지 2005 세계대회> 역시 하루 종일 실내에서 토론회가 지속되기 때문에 지겨웠다. 그래서 8월 8일 주최 측에서 준비한 사세보 기지 현장방문팀에 합류했다. 히로시마 만의 조용한 바닷가 마을을 버스로 돌고 돌아 2시간 달리니 사세보 기지가 나타났다.

사세보는 히로시마 보다 한반도에 더욱 가까운 나가사키 현에 위치해 있다. 미군이 괌 · 오키나와와 연결하여 한반도 · 중국으로 출격하는 전략적인 기지가 사세보에 있다. 미국의 대북 전쟁계획의 최첨단 · 최전방 기지인 셈이다. 북한과 전쟁을 치루기 위해 임전태세를 갖춘 허브 기지가 사세보 해군기지이다.

현장방문팀은 사세보 해군기지를 면밀하게 관찰하기 위하여 해발 364미터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사세보 해군기지는, 천혜의 리아스식 해안마다 각종 전쟁시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요새이었다. 사세보 기지가 있는 사세보 만은 엄청나게 넓은 곳이었는데, 이 만 전체에 걸쳐 각종 전쟁장비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서 전쟁 박물관을 뺨치는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4각형의 거대한 도크 안에 정박해 있는 4만 톤의 에섹스 강습양륙함과 이지스함 2척이 눈에 띠었다.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4척의 이지스함 중 절반을 이곳 사세보에 배치할 정도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가 사세보이다. 사세보에 정박한 이지스함은,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그것을 요격하여 떨어뜨리는 미사일 방어 구상(MD)을 구현하는 최첨단 전함이다. 필자가 배를 타고 이지스함 바로 옆을 지나갔는데, 이지스함은 철갑을 두른 요새 바로 그것이었다. 배 전체가 최첨단 전자 군사장비로 꽉차여 있었다. 이러한 이지스함은 (대북전쟁을 수행하는) 미군과 함께 공동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일본이 또 다시 한반도에 상륙하기 위한 연습을 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북한과의 전쟁에 대비한 미 · 일 동맹군의 공동행동은 구마모토 · 기타 규슈 · 야마구찌의 자위대 기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모두 일본의 평화헌법을 파괴하고 있었다. ‘일본의 평화헌법을 파괴하는 미 · 일 동맹과 한 · 미 동맹이 만나는 지점을 없애는 평화운동이 한반도와 아시아의 평화를 보장한다’는 확신을 다시금 다지면서 귀국했다.
---------
*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205호에 실려 있다.

'평화 운동 > 평화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생의 인도기행 (2)  (0) 2009.06.01
야생의 인도 기행 (1)  (1) 2009.06.01
일본 서부 지방 탐방기 (10)  (1) 2009.05.31
일본 서부 지방 탐방기 (9)  (0) 2009.05.31
히로시마 · 나가사끼의 명물 음식  (1) 2009.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