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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평화경제론

평화가 밥이다: 평화 경제

김승국

Ⅰ. ‘평화는 밥’

2007년 대선의 두 가지 관심사인 ‘평화’와 ‘경제’를 합성한 ‘평화 경제’를 가장 열심히 주창하는 예비주자는 정동영 의원과 심상정 의원이다. 대선 예비후보들 중에서 평화의 감성이 가장 발달된 두 의원의 평화 경제론을 한마디로 줄이면 ‘평화는 밥’이다. 평화라는 밥을 먹으며 잘사는 평화의 길을 모색하자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와 관련된 두 의원의 발언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1. 정동영 의원의 평화 경제론

그는 2004년 7월 1일 통일부 장관 취임사에서 “경제는 평화이고 평화는 곧 경제라고 믿는다.”며 평화 경제론의 말문을 연다. ‘평화체제는 경제와 직결되어 있고(평화의 경제의 선순환)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평화 경제론을 화두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대선 예비주자가 된 정 의원은 ‘평화는 밥’, ‘평화는 돈’으로 압축되는 평화 경제론을 내세우며 평화 대통령을 꿈꾸고 있다. 이와 관련된 발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선의 시대정신은 평화의 문제와 밥과 빵의 문제, 즉 경제 문제이다.”(2006년 12월 12일 국민대에서 열린 ‘북악정치포럼’에서의 발언) “평화가 돈이며 시대정신은 평화와 서민경제에 있다.” (2007년 3월 6일 충북 평화․경제포럼 창립 대회 강연)

그는 ‘평화’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산다. 이른바 ‘평화 경제론’이다. 한반도에서 ‘평화는 돈’이라는 것이다. 전쟁의 반대 상태인 소극적 의미의 평화가 아니다. 경제협력과 군축․감군으로 이어지는 ‘적극적 평화’다. 최대 현안인 사회 양극화 해소와 경제 재도약의 계기도 여기서 찾는다. 개성공단과 같은 ‘평화 경제 특구’를 만들자는 주장도 한다.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할 새로운 시대 비전은 개성공단을 성공시켜 공존하는 평화 경제에 있다.”고 역설한다.(2007년 5월 9일의 청주대 특강)

유럽통합의 견인차 역할을 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처럼 개성공단을 통해 남북한의 경제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을 통해 ‘평화체제’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 보자는 발상이다. 그는 평화와 경제의 선순환을 이끌어 갈 6자회담과 남북 정상회담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한반도 평화체제는 한반도 경제의 욱일승천을 가능하게해 줄 핵심전략이다.” (2007년 3월 25일 평화․경제포럼 전국 출범식에서의 발언) 이처럼 ‘평화가 경제도약을 위한 생산요소’라는 발상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남북한이 개성공단 등을 통해 생산요소를 교환하는 생산관계가 평화를 보장한다는 뜻이다. 생산관계와 평화의 함수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한 남북한의 소통․교통․상호관계․상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 에서 언급하는 ‘교통(Verkehr)’ 개념을 정 의원의 평화 경제론에 적용할 수 있겠다.

어쨌든 그의 평화 성장론(평화를 통한 경제성장론)은, 개발 연대에 속하는 이명박․박근혜 후보와 발상 자체가 다르다. 그는 운하 대통령인 이명박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기 위해 평화 대통령이 되길 희망한다.

그는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선 주자들을 겨냥하여, “운하를 파거나 기차를 배에 실어 (열차) 페리를 하는 것은 과거형 비전”이라고 주장한 뒤 “철조망을 걷어 용광로에 녹여버리고 시베리아, 중국을 지나 독일, 영국으로 가는 것, 아들과 딸에게 세계에서 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미래형 비전”이라고 말했다. (2007년 3월 6일 충북 평화․경제포럼 창립 대회 강연) 그리고 그의 평화 성장론은, 선진평화를 강조하는 손학규 후보와도 다른 인상을 준다. 손학규 후보의 ‘선진’ 속에 개발론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손학규 후보가 아직도 개발 연대의 품 안에 있으므로 그러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2. 심상정 의원의 평화 경제론

민주노동당의 대선주자인 심상정 의원은 2007년 5월 8일에 한반도 평화연속 토론회를 열고 ‘한반도 평화 경제 공동체 구상’을 발표했다. 이 구상은 분단체제를 허무는 데 머물지 않고 새로운 대안사회를 여는 방안이며, ‘평화는 곧 밥이요, 한반도 발전의 동력’이라는 시대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평화가 밥을 준다’는 한반도 평화 경제론은, 심 의원의 ‘세 박자 경제론(국내 서민경제, 한반도 평화 경제, 동아시아 호혜 경제)’의 두 번째 항목에 해당된다.

그가 강조하는 ‘한반도 평화 경제 공동체’는 아래와 같이 3단계에 걸쳐 이루어진다. 제1단계는 한반도에서 정전체제를 상징적으로 종식시키는 종전선언기로서 한반도는 전면적 신뢰회복체제의 위상을 지닌다. 제2단계는 한반도에서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어 바야흐로 한반도에서 안정적인 평화체제의 토대가 형성되는 시기이다. 제3단계는 한반도에서 통일시대로 부를 수 있는 ‘1국가 2체제 2정부 형태의 한반도 평화 경제 공동체’가 결성되는 시기이다.

그는 평화 경제를 뒷받침하는 핵심 인프라이자 서민에게 기본적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으로서 철도, 전력, 통신, 수도, 먹을거리 등 5대 공사 네트워크를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한반도 전역에 걸쳐 동질의 서비스를 갖추고, 가계에 부담을 주지 않는 수준에서 가격을 정해 서민 모두가 보편적으로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한 한반도
호혜 경제협정도 강조한다. 이미 남북한 경협과 관련된 4대 합의가 있으나 모든 부문을 포괄하는 한반도 호혜 경제협정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남북경협을 더욱 확대, 발전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6․15 공동선언 제4항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에 기초해 이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가지 경제협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는 북한 개발을 지원하고 평화 경제 발전을 위한 중장기 전략 수립을 남한이 주도하기 위한 7대 과제, 평화 경제 공동체 추진 전략을 발표하기도 했다.

Ⅱ. ‘밥상 공동체’에서 평화의 밥을 먹자

위와 같이 두 예비후보(정동영․심상정 의원)의 공통점은 ‘평화가 밥’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한 평화 경제론에 있다. 20여 명의 대선 예비주자들 중에서 가장 평화의 감수성이 뛰어난 두 의원이 ‘평화의 밥을 먹는 평화 경제론’을 역설하고 있다. 두 의원의 내공이 쌓인 평화 경제론이 대선 정국을 가로질러 평화의 담론을 확산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지만, 이는 두 의원만의 발명품이 아니다.

이미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평화가 밥’이라는 말씀이 쏟아져 나왔다. ‘평화가 밥’은, 민초들이 ‘등 따습고 배불리 먹으며 격양가를 부르는 상태’가 평화임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북한(김일성 주석)식으로 표현하면, 이밥에 고깃국 먹는 게 평화이다. 현재 이밥을 제대로 못 먹는 북한 인민들이 평화를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이밥은 자유롭게 먹으나 신자유주의로 인한 빈부 차이로 격양가를 부르지 못하는 남한 민중들에게 평화는 먼 이야기이다.

이밥에 고깃국 먹는 게 평화라면 이처럼 쉬운 일이 없을 텐데, 이다지도 어려운가?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밥그릇의 면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사회상을 대변하는 ‘10 대(對) 90의 사회’에서 10의 사람들이 90의 밥그릇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밥그릇 사이의 불평등이 사회의 평화를 망친다. 평화란 곧 평등(밥그릇 사이의 평등)인데 이걸 이룩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90의 사람들과 10의 사람들이 평등하게 밥을 나누어 먹는 밥상 공동체가 잘사는 평화의 길임이 분명한데도, 이게 쉬운 일이 아닌 지점에서 사회의 모순이 쌓이고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90의 민중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항쟁을 준비한다.
동서양의 민중항쟁은 모두 ‘밥그릇을 빼앗긴 비(非)평화-불평등’을 타개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다.

2007년 대선에서도 ‘10 대 90의 신자유주의 사회상’을 극복함으로써 잘사는 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게 최대의 관심사이다. 그래서 ‘평화의 밥을 골고루 먹으며 잘사는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평화 경제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평화 경제론에 더욱 심층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고대부터 지금까지 제기된 ‘밥이 곧 평화’, ‘평화는 밥’ 담론을 소개한다.

  1. 동양의 담론

평화(平和)는 동양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밥(米)을 사람들(口)에게 균등하게(平) 나누어 준다(和).’는 것을 의미한다. 밥이 공평히 나누어지는 곳에 평화가 있고, 평화가 있는 곳은 밥이 공평히 나누어지는 세상일 것이다. (김대묵, 2006, 80)

이에 주목한 공자․맹자는, 요․순과 같은 성군(聖君)이 백성들에게 평화의 밥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성군 대망론’을 제창했다.

노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의 평화 공동체 안에서 격양가를 부르는 ‘절성기지(絶聖棄智: 성인과 지식을 버림)의 태평성세’를 구가한다. “나라는 작고 백성도 적다(小國寡民). 그러므로 여러 가지 기물이 있으나 쓸 필요가 없고, 백성들은 죽을 때까지 공동체에서 유리되지 않도록 한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으나 탈 곳이 없고, 비록 무기가 있으나 쓸 일이 없다(雖
有甲兵無所陳之). 사람들은 옛날처럼 새끼줄로 의사표시를 하게 했지만, 그들의 음식을 달게 먹고(甘其食), 그들의 옷을 아름답게 입고(美其服) 그들의 거처를 안락하게 여기며(安其居), 법이 아니라 옛 풍속대로 즐거워한다(樂其俗). 이웃 나라는 서로 바라보이고(隣國相望) 개짓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를 듣지만 백성들은 죽을 때까지 지역 공동체를 오고가지 않는다.” ( 老子 80장)

무기가 있으나 쓸 일이 없는 소국과민의 태평세상에서 음식을 달게 먹고 옷을 아름답게 입고 거처를 안락하게 하며 옛 풍속대로 즐거워하는 게 잘사는 평화의 상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는 소규모 지역자치 공동체에서 ‘평화의 밥을 먹자(甘其食)’는 노자의 말씀은,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21세기의 지구촌 공동체에서 평화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민초들이 경청할 만한 명언이다.

전쟁 없는 세상에서 겸애(兼愛)하자고 갈파한 묵자는, ‘천하에 남이란 없다(天下無人)’는 대동(大同)사회에서 ‘평화의 밥’을 골고루 나누어 먹자고 부르짖었다.
부국중리(富國重利)주의자인 관자는 “창고가 실해야 예절을 알고(倉廩實則知禮節)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衣食足則知榮辱).”라고 말했다.(管子 권23)
의식(衣食)이 족해야, 즉 밥을 배불리 먹어야, 예(禮: 종법사회의 평화를 유지하는 기틀)를 안다고 설파한 것이다.

앞에서 춘추전국 시대의 현인들이 ‘평화의 밥을 골고루 먹으며 잘사는 평화’를 언급했지만 시공간적으로 먼 느낌이 든다. 고대 중국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곁의 시공간에서 이러한 담론을 음미하는 게 의미 있다는 판단에 따라 김지하 선생의 ‘밥상 공동체’론을 요약한다.

    1) 김지하의 저서에 나오는 ‘밥상 공동체’
      ① 밥
최해월 선생은 “밥 한 그릇이 만고의 진리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여공․한 며느리․한 부엌데기 여성에 의해서 그리고 수없는 남성 농민들에 의하여 벌판에서․논에서․밭에서, 그 암흑 속에서, 굶주림과 천대 속에서, 힘겨운 노동에 의해서 생산되어 만들어진 <밥>-밥은 한울님의 기본 사업인 <일>, 즉 생명활동 그 자체이며 그 생명활동의 결과요 결정이므로, 곧 영구불변한․영원불멸한 <도>(道) 그 자체라는 말이올시다. <진리>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53쪽) 한울님의 그리고 생명의 활동은 일, 밥 그리고 일의 <창조적인 순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울님과 생명의 활동은 <일-밥-일>의 창조적 순환
입니다. 밥은 물질적인 밥인 동시에 정신적인 밥, 정신의 밥입니다. 영의 밥입니다. 그래서 밥을 우리는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밥은 바로 통일을 의미하는 생명입니다. 생명 곧 통일이며, 생명 곧 밥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나는 밥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즉, 하늘의 밥이요, 그날그날의 민중들이 고되게 노동해서 거두어서 먹는, 그
래서 다시 일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그 밥인 것입니다.(60∼61쪽) 그러면 밥은 어떻게 생산하는가? 밥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혼자서 생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협동적으로 생산하며 공동체적으로 생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생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소비에 있어서도, 그것의 수렴, 먹는 활동, 식사에 있어서도 밥은 여럿이 먹는 것, 공동체적으로 먹는 것입니다. 밥은 ‘밥상’에서 먹는 법입니다. ‘밥상’이라 하는 것은 여럿이서 둘러앉아 먹는 공동체 생활을 말합니다. 따라서 ‘밥상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73쪽) 식사와 노동, 노동과 식사에 있어서 공히 밥상 공동체 또는 노동 공동체(두레)에서 나타남과 같이 밥은 공동체적으로 생산하고 공동체적으로 그것을 수렴해서 나누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사에 있어서도 설위(設位) 과정 전체가, 즉 위패를 놓고 거기에 멧밥을 뜨고 차리고 인사하고 음복하는 일체의 과정과 그 뒤에 나누는 과정, 나누어 먹는 과정이 또한 공동체적입니다. 식사와 제사를 아우르는 밥을 통해서 우리가 인식하는,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생명운동, 생명의 회복과 생명의 본성을 인식하는 생명운동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도 공동체 운동이며 새로운 공동체 건설운동인 것입니다. “혼자서 밥을 먹으면 밥맛이 없다.”는 말의 뜻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밥맛이 없는 이유는 바로 ‘독점’ 때문입니다. 독점자들과 소유욕이 강한 자들, 제국들, 대제국들, 오늘날에 있어서 서구 블록이-이와 같이 식사와 제사를 분리시켜 이원적으로 인식하게 하며 거기서 확보된 틈을 통해서 생명의 밥을 약탈․독점하고 그것을 혼자 처먹어 온 그 결과로, 오늘날 서구나 동구의 온갖 형태의 모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위 한마디로 “살맛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배는 부른데, 살맛이 안 난다.” 또는 “먹을 것은 많은데, 살맛이 안 난다.”…이 ‘살맛’이라는 것이 곧 ‘밥맛’입니다. 왜냐하면 밥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밥맛이 없다는 것이 살맛이 없다는 것이고 살맛 안 난다는 것이 밥맛 안 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식사와 제사는 분리해서 보고…거기서 만들어진 틈을 통해서 생명을 약탈하여 혼자서 독점하는 그러한 ‘구조(이 구조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제3세계임)’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제3세계의 민중운동과 공업사회에서 일고 있는 반전․반핵…평화운동은 결국은 하나의 문제로서…밥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통해서만 하나로 아우러질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밥맛’을 제대로 보게 될 것이고 ‘살맛’을, 생명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73∼75쪽)

위의 문구에서 보다시피 ‘독점자들의 독점 때문에 살맛이 안 난다. 배는 부른데 살맛이 안 난다. 먹을 것은 많은데, 살맛이 안 난다’는 상황은 현재의 한국 사회를 빼어 닮았다. 신자유주의의 10 대 90의 사회에서 10에 해당되는 독점자들이 독점하기 때문에 살맛이 안 나는 국민들이 태반이다.

외형적인 경제성장에 힘입어 국민들의 배는 부른데 살맛이 안 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먹을 것이 많은데도 살맛이 안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이유를 밝히며 대안을 세워야 잘사는 평화의 길이 열린 텐데, 2007년 대선의 예비후보들 가운데 이 정도까지 육박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신자유주의-한미 FTA체제에서 소외받는 90의 민중들이 헛배 불러 살맛이 안 나는 현상을 타파하는 게 잘사는 평화의 지름길, 한국 사회가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런데도 이 길로 국민을 안내하는 예비주자가 눈에 띠지 않는 대선이 살맛을 잃게 한다.

  2. 서양의 담론

‘평화가 밥’은 동양식 어법이며, 이의 서양식 어법은 ‘평화는 빵’이다. 이 ‘평화는 빵’ 어법이 가장 많이 나오는 경전이 성서이다. 성서의 곳곳에, 하나님 나라에서 평화의 밥을 먹는 밥상 공동체 이야기가 나온다. 성서의 ‘하나님 나라와 밥상 공동체’ 담론을, 박재순 교수의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 공동체 를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밥상 공동체 운동이다. 예수의 밥상 공동체 운동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나타난 아래와 같은 예수 사건들을 새로운 눈으로 해석해야 한다.

      ① 죄인들과의 밥상 교제(마가복음 2장 19절)
예수는 수탈과 압제의 현장에서 죄인들과 밥상 공동체를 이뤘다. 예수가 자신을 ‘잔칫집 신랑’으로 비유한 것은 예수운동의 두드러진 특징이 잔치를 벌이는 것, 즉 밥상 공동체 운동이었음을 말해 준다.

      ② 오병이어(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사건(마가복음 6장 41∼44절)
예수는 굶주린 군중들에게 밥을 나누어 주는 나눔의 기적을 일으켰다. 예수가 민중들과 함께 밥을 나누어 먹은 이야기는 당시 상류 귀족들의 잔치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이 나눔의 공동체에서 나누면 나눌수록 사랑과 유대는 깊어지고 삶이 풍성해진다.

      ③ 부자와 밥상 공동체 운동(마가복음 10장 17∼22절)
예수는 항상 부자들에게 재물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도록 촉구한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밥상 공동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④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죽음은 대속적인 죽음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죽음은 밥상 공동체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예수의 몸은 함께 나누어 먹는 밥이며, 예수의 피는 함께 나누어 마시는 포도주다. 예수의 존재 자체가 밥상 공동체(운동)로 육화(肉化)된 것을 의미한다.

      ⑤ 하나님의 해방운동
밥상 공동체 운동은 단순히 밥을 함께 먹는 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중심에서 해방되어 참된 화해의 공동체를 이루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거부하는 반민주적인 사회체제․특권층에 저항하는 민중해방운동이기도 하다. 이 운동은 민중의 사회적․역사적 주체성을 회복하는 운동이며, 억압하고 수탈하는 사회체제를 근원적으로 혁신하는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 운동이다.

박재순 교수가 보기에 ‘인간이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존재라면 인간 공동체는 어쩔 수 없이 밥상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밥을 나누어 먹는 곳이 하느님 나라요 밥을 독점하는 곳이 지옥이다. 인간은 밥을 독점함으로써 하느님을 떠났고 밥을 나눔으로써 하나님께 돌아간다. 밥을 독점함으로써 타락한 인간 역사는 밥을 나눔으로써 구원된다.’(박재순, 1990, 143)

Ⅲ. ‘밥상 공동체’의 해체와 민중항쟁

‘평화가 밥’은 매우 평범한 어법이지만 그 속에 격렬함이 내재해 있다. 동서고금의 민중항쟁은 밥상 공동체가 해체되었을 때 일어났다. 지배계급이 백성들에게 평화의 밥을 주지 않아 밥상 공동체가 무너졌을 때, 민중들은 항쟁의 맹아를 키우기 시작한다. 중국의 크고 작은 항쟁은 농민들의 밥상 공동체가 유린되면서 일어났다. 러시아 혁명도 예외가 아니다. 1917
년 혁명 당시 평화의 밥이 그리운 러시아 민중들은 “빵을 달라! 평화를 달라!”고 절규했다.

  1. 러시아 혁명

러시아 혁명의 압도적인 구호는 평화와 빵이었다. 혁명 당시 대중들은 평화․빵․토지를 원했지만 짜르 체제는 아무것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혁명의 봉화를 올린 1917년 4월 3일, 사람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차역에 모였다. 레닌은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는 군중들 앞으로 당당히 나아갔다. “이제 빵과 평화를 위하여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가 갖도록 합시다. 모든 토지를 국가의 소유로 만듭시다! 무엇보다 이 지긋지긋한 제국주의 전쟁을 끝냅시다!” 사람들의 환호가 더욱 커져 갔다. 파업을 주도한 노동자들의 머리 위에는 “짜르를 타도하라!” “전쟁을 그만해라!” “빵을 달라!”는 표어가 쓰인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임금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모든 토지는 농민에게, 모든 공장은 노동자에게”라고 외쳤다.

한편 병사들은 탈영이라는 방식으로 평화 문제를 해결했다. 1천 마일에 이른 전방에서는 수백만의 병사들이 파도처럼 술렁거렸다. 그들은 “평화! 평화!”를 외치는 대표 수백 명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길모퉁이에서 수많은 병사 연설자들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부가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병사들은 참호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2. 밥상 공동체와 한반도 분단

밥상 공동체가 깨져 민중항쟁이 일어난 사례를 멀리 러시아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바로 조선 땅에서 평화의 밥을 달라고 절규한 민초들의 항쟁이 터졌으며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 후기의 민란이 한반도 분단의 원류를 형성한 것이다.

한반도 분단은 (국제)정치적으로 1945년 해방 이후에서 비롯되었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민생고(民生苦)로 말미암은 19세기의 민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의 학정, 지배계급의 가렴주구․ 토지수탈로 밥상 공동체를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민(民)의 저항이 민란으로 폭발하고 이 민란이 이어져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했다. 갑오농민전쟁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터지면서 외세가 한반도 문제에 개입했으며, 그 결과 한반도는 국제 대리전의 전쟁터로 전락한다. 19세기의 민란, 신미양요→갑오 농민전쟁, 청일전쟁, 민비시해 사건→아관파천→러일전쟁, 을사보호조약, 의병전쟁→한일 합병조약, 일제(日帝)지배, 일제의 패망과 민족해방, 미군정, 한국전쟁, 정전, 분단체제로 이어져 오는 가운데 민초들의 평화로운 삶은 아예 불가능했다. 민(民)이 잘사는 길을 모색할 겨를이 없었다. 평화의 밥을 먹을 수 없는 민(民)의 유랑․삶의 분단, 생활세계의 분단이 밥상 공동체의 해체로 이어져 사회․경제적 분단이 가중되었다. 19세기 이후의 사회․경제적 분단이 1945년 이후의 (국제)정치적 분단과 어우러져 한반도 분단의 원류를 이룬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부터 비롯된 사회․경제적 분단(및 이로 말미암은 민중의 밥상 공동체 해체)을 거론하지 않는 한반도 분단론은 단견에 그친다. 민생고로 인한 밥상 공동체 해체가 사회․경제적 분단을 낳은 조선 후기의 민중생활사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3. 밥상 공동체와 신자유주의

21세기의 사회․경제적 분단을 잉태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세계화(Globalization)를 동반하므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고 부르는 게 적절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국가를 정복하기보다 시장을 정복한다. 식민지 시대의 영토정복이 아닌 부(富)의 소유권을 탈취하는 데 관심이 있다.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정복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이어져
인간성 말살․인간 공동체의 파괴를 예고한다. 인간의 밥상 공동체, 인간이 자연과 함께 잘살며 향유할 수 있는 평화 공동체를 위협한다. 이렇게 밥상-평화 공동체의 위기를 부르는 신자유주의를 방치하면 할수록 잘사는 평화가 깃들지 않는다.

    1) 빈곤

신자유주의가 초래하는 대량 실업․불완전(불안전) 고용․사회적 배제․남녀 불문의 초과 착취․아동 착취는 ‘빈곤의 세계화’를 부채질한다.

거대한 자산을 지닌 특권층 집단이 있는 한편 불안전 고용자․실업자․사회적으로 배제된 자들의 무리가 존재하는 이중구조의 격차사회에서 빈곤은 하나의 규범이 된다. 빈곤을 규범으로 삼는 신자유주의는 (노동의 유연성에 입각한) ‘유연한 자본주의(flexible Capitalism)’ 아래에서 진행된다. 자본가에게 구조조정․ 해고의 자유가 보장되는 ‘유연한 자본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노동자들을 내쫓는 자유’를 만끽한다. 이 바람에 내쫓긴 자의 밥그릇 면적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밥그릇이 줄어들 위기에 빠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밥줄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2007년의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등)은, 신
자유주의에 맞서 밥그릇․밥줄․밥상 공동체를 지키려는 생존권 싸움이다.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과 노동 유연성(노동 유연화)은 노동시장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어 실업․비정규직 증가 등 노동의 불안정화를 초래한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빼앗기고 생활기반(밥상 공동체)이 붕괴된 수많은 사람들의 빈곤이 가중되고 있다. 이 시대의 빈곤은 과거와는 다른 빈곤이다. 과거에는 빈곤이 나태․무절제․게으름․ 낭비․방탕 등 개인의 탓으로 여겨졌으나, 새로운(新) 빈곤은 저임금․실업 등 사회적인 원인이 내재한 체제의 문제이며 구조적인 문제이다. 사회 안전망(밥상 공동체의 연계망)의 미흡이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빈곤을 방치하게 된다. 신빈곤은 또 이혼율․자살률의 급증을 유발하여 가정 공동체(가정의 밥상 공동체) 해체, 사회 공동체의 통합 저해라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빈곤의 여성화(여성들의 빈곤) 또한 심각하다. 더 유연한 노동을 찾는 자본의 속성에 따라 여성들의 빈곤이 가중되고 있다. 유연한 자본주의는 여성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신의 축적구조를 완성시킨다. 자본가들은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보다 순종적이고 덜 조직적이며 결혼․임신 등으로 지속적인 노동이 어려운 약점을 악용하여 마음 놓고 해고한다. 여성 노동은 남성 노동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여 수준 낮은 여성 임금이 정당화된다.

문제는 비정규직의 79%가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여성의 빈곤화가 심해지는 것은 여성 비정규직이 많기 때문이다. 여성 노동자의 퇴출로 이어지는 노동 유연화 전략의 산물이 여성의 빈곤화이다. 남성 가장의 실업으로 소득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소득을 보완하기 위해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되는 사례가 많다. 이들 중 상당수의 여성이 직접 가구주가 되는 경우도 많다. 빈곤한 여성 가구주(여성 가구주가 남성 가구주보다 4배가량 더 빈곤하다)가 더 이상 경제력을 뒷받침하지 못할 경우 가족 해체․가정 붕괴․가정의 밥상 공동체 붕괴를 가져온다.

그리고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근로빈곤(working poor)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빈곤을 대변한다.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전통적인 구(舊)빈곤층과 달리 ‘일을 하는데도 가난한 근로빈곤층’이 확대되고 있다. 근로 빈곤층의 이웃사촌인 비정규직이 전체 근로자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임금․소득격차 심화-차별은 직장 내의 통합과 사회통합을 해치는 심각한 문제이다. 직장 공동체가 개별적 경쟁관계로 대체되는 현상, 고용불안 스트레스로 인한 소속감의 약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분절화 심화, 직장 구성원 사이의 이질성 확대로 이어지면서 직장 공동체(직장의 밥상 공동체)의 결속력을 약화시킨다.

    2) 양극화

1997년의 외환위기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극복한 끝에 극심한 양극화를 낳았다. 10의 가진 자와 90의 가지지 못한 자로 사회가 양극화되면서 시민사회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그나마 유지되어 오던 한국 사회의 공동체(밥상 공동체를 중심으로 훈훈한 인정이 넘치는 사회)가, 양극화로 인하여 붕괴 일보 직전에 있다. 인간미 넘치는 공동체 윤리와 역행되는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이데올로기․성공신화<아침형 인간=부지런함(스피드)=성공이라는 공식,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가 밥상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

    3) 한미 FTA

FTA(자유무역협정, Free Trade Agreement)는 무역자유화, 투자․서비스의 자유화, 각종 무역규범․경제정책, 더 나아가 사회․정치 영역의 조화와 조율을 추구하는 포괄적․다면적인 경제통합협정으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신자유주의를 추진하기 위한 정책 수단으로 FTA를 활용한다. 철저한 시장 개방․민영화․정부 개입 축소를 요구하는 FTA가 미국의 희망사항이다.

신자유주의적 성격이 강한 ‘포괄적인 FTA’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약소국에 대하여 불공정한 관계 설정을 요구하는 ‘강자의 보호주의’로서 ‘비대칭적 신자유주의 모델’을 따른다. 이 모델이 한미 FTA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비대칭성이 농업 분야에 집중되고 있다. 세계 제1위의 농업생산력을 과시하는 미국의 값싼 농산물이 식량 자급률 25%의 한국에 물밀듯이 들어오면 한국의 농업은 결정적으로 붕괴한다. 한국의 농산물 중에서 미국과 관세 없이 경쟁해서 살아남을 품목이 없으므로, 농촌의 몰락으로 이어지고(농촌이 몰락하면 생존하기 위해 도시로 유입된 농민들은 도시의 하층민을 형성하여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지역경제․ 지역공동체의 붕괴를 동반할 것이다. 농촌의 몰락․지역 공동체의 붕괴는 ‘신토불이(身土不二)의 밥상 공동체’가 무너지는 사태로 연결될 것이다.

농업의 측면에서 볼 때, 한미 FTA는 식량안보를 미국에 상납하는 협정이다. 식량이 곧 주권이고 농업이 생명임을 망각한 참여정부는 농업의 다원적 가치(농업의 식량안보의 가치, 환경적 가치, 인류문화를 지탱해 온 가치, 온 생명을 유지해 온 생명가치)를 너무나 쉽게 포기한다. 단순히 포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전자 조작 식품․대규모의 농약 살포 식품․광우병 쇠고기(광우병의 병원균이 들어 있을 개연성이 있는 쇠고기)를 미국으로부터 들여옴으로써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데 앞장선다. 광우병 쇠고기를 미리 먹어 미친 듯이(?) 광우병을 수입하려고 한다. 광우병 발생 국가인 미국의 쇠고기가 한국인의 밥상에 다시 올라 밥상 공동체를 결정적으로 위협한다.

2005년 12월 1일의 제3차 수입분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잔류물질 검사를 실시한 결과, 국내 잔류 허용기준인 5pg(피코 그램. 1조 분의 1그램을 말한다. 10억 분의 1g인 나노 그램보다 1,000배나 작다)을 웃도는 6.1pg의 다이옥신이 검출됐다. 다이옥신은 수영장 다섯 개의 물에 고작 한 컵 정도를 부은 농도로도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으며, 청산가리보다 1만 배나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는 물질이다. 또한 다이옥신 1g으로 몸무게가 50kg인 사람 2만 명을 죽일 수 있는 최악의 오염물질이다. 다이옥신은 가장 강력한 발암물질로 신체 내에 축적되면, 불임, 출생 장애, 기형, 발육 장애 등 심각한 생식계 장애와 발달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 또한 간장․신장의 파손, 당뇨, 갑상선 질환, 피부병, 기형아, 유전자 이상, 성격이상, 정서 불안 등을 일으키거나, 고환 크기의 감소, 당 조절 능력의 변화, 자궁내막증, 정자 수 감소, 남성 호르몬 감소 등이 올 수 있다.(농민과 사회 , 2006년 겨울호, 135쪽)

광우병 위험물질은 소의 뇌와 척수 등 신경조직에 고농도로 축적되어 있으며, 소뼈에 들어 있는 골수를 통해서도 광우병과 인간 광우병이 전염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소뼈가 들어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못 들여와 안달 난(?) 바나나 관료(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바나나처럼, 얼굴이 노란 한국인이지만 하얀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노란 피부 흰 가면의 관료’)들은 국민의 밥상 공동체를 위협하는 공적(公敵) 제1호이다.

이들 공적 제1호들은 유전자 변형 농산물(GMO)에 둔감하다. 이들은 ‘GMO의 표시의무화가 무역장벽이라며 이의 폐지를 요구하는 미국 측의 기(氣)’를 꺾기는커녕 한미 FTA의 독기(毒氣)를 국민들에게 전염시키고 있다. GMO는 국민의 식품 안정성․건강을 크게 해치고 생태계 교란․환경파괴 문제를 야기하는 공포의 농산물이다. GMO가 국민들의 밥상에 공포를 주는 ‘먹을거리의 위기’를 예고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팔짱을 끼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빠져든 정부가 ‘신자유주의적인 한미 FTA’에 저항할리 만무하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밥상 공동체는 해체 일보 직전에 있다.

Ⅳ. 끝맺는 말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에서 밥상 공동체를 도저히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밥상 공동체를 이루며 잘사는 평화’를 위한 사회변혁이 절실하다. 한국 사회에서, (러시아 혁명 때처럼 빵과 평화를 달라는 직접적인 봉기의 수준은 아니지만) 민초들의 심리적 봉기가 일어날 기미가 보인다. 심리적 봉기의 기미를 억제하는 사회적 잠금장치가 풀리면 변혁의 물결이 일어날지 모른다. 제2의 6월 항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1987년 6월 항쟁에 이은 노동자 대투쟁이 재현될지 모른다. 6월 항쟁이 낳은 ‘87년 체제’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수용한 신자유주의 체제(97년 체제)를 변혁하는 ‘2007년 체제’의 맹아가 이번 대선에서 엿보이는데, 이 맹아는 정작 ‘평화의 밥’ 안에 있다. ‘평화의 밥을 골고루 먹으며 잘사는 평화체제’ 속에 2007년 체제의 변혁이 내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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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김대묵 「예수의 밥상공동체에 나타난 공동체 영성 모색」(성공회대 석사 논문, 2006)
* 김지하 {밥} (칠곡, 분도출판사, 1984)
* 박재순 {예수운동과 밥상 공동체} (서울, 천지, 1988)
* 박재순 {민중신학과 씨알사상} (서울, 천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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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289호에 실린 필자의 글「잘사는 평화 (3) 」(2007.8.22)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