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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반전 운동

이라크 파병반대 운동 평가

김승국

한글학회에서 펴낸 {우리말 큰 사전}에 나오는 ‘파병’이란 단어의 뜻풀이를 찾아보니 ‘군대를 파견함’이라고 단순하게 뜻풀이하고 예문에 ‘월남 파병’이라고만 소개되어 있다. {동아 세계 대백과 사전} 등 유명한 백과사전에도 ‘파병’이란 항목 자체가 없다. 백과사전 편집자의 의도를 알 수 없으나, ‘파병’이 앎의 대상이 되지 않거나 ‘파병’을 다루는 걸 꺼려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파병’ 하면 언뜻 떠오르는 ‘베트남 파병’으로 수많은 한국군이 죽고, 한국군에 의해 수많은 베트남 민중이 학살당한 역사적 진실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은 잠재심리가 편집진에 내재해 있었을지 모른다.

‘이라크 파병’을 에워싼 찬반 토론장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나오는 이야기가 베트남 파병이 옳았느냐 글렀느냐의 논쟁이다. 베트남 파병이 현대사의 치욕이라고 생각하는 인사들은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베트남 파병 찬성파가 이라크 파병에 찬동한다.

이처럼 베트남-이라크 파병 반대파는 소위 진보 진영이고, 찬성파는 보수 진영(구체적으로는 냉전 수구 세력)이다. 전자는 주로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 지지파이고 후자는 주로 한나라당 지지파이다. 양자의 이데올로기는 박정희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 미국관, 대북관에서 물과 기름의 관계이다. 이라크 파병은 양자의 세계관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도저히 융합될 수 없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이라크 파병 찬반을 벌이고 있으며 노무현 정부가 그 한가운데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노무현 정부는 파병에 대한 결정권은 가지고 있지만, 파병을 종용하는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파병을 조르는) 미국과 (파병에 반대하는) 시민사회 운동 진영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머물다가 추가 파병을 단행했다. 파병반대 운동 세력이 보기에 ‘줏대 없는 대통령’이다.

화장실 가기 전하고 화장실 갔다 온 다음이 너무 다르다는 이야기는 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한 말 같다. 지난 대선의 후보시절 그는 “미국과 당당한 외교를 펼치겠다.”며 기염을 토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청와대에 입성한 다음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미국의 눈치를 보며 파병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미국 앞에서 당당하게 서고 싶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눈치를 보게 된 경위 속에서 한미관계의 슬픈 현주소를 발견하게 되리라.

Ⅰ. ‘파병’담론의 역사적 의미

어찌 외세의 앞에 서기만 하면 자꾸만 작아지는 지도자가 노무현 대통령뿐이었을까? 해방 이후 역대의 대통령이 미국의 파병 요청에 대하여 국민의 이름으로 “No”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는 근대 역사의 현상만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13세기 후반의 고려 때부터 오늘날까지 무려 7백여년간 다른 민족의 군대와 공동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파병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주1) 조선 왕조는 1467년에 명(明) 나라로부터 여진족을 징벌하기 위한 파병 요청을 받았다. 조선의 조정에서 활발한 찬반논의가 일어났다. 마치 미국으로부터 이라크 파병 요청을 받은 노무현 정권 내의 당정 사이에 찬반논의가 일어난 것처럼. 조선은 明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종속국가이었으므로, 파병을 거부하기가 곤란했다. 그러나 파병을 할 경우 중국 대륙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여진족(여진족이 나중에 청나라를 세움)의 미움을 사게 되어 장차 국익에 손해를 끼치게 될 것이라는 관점에서 신중론(파병 반대에 가까운 신중론)이 들고 일어났다. 15세기 중엽의 파병반대에 가까운 신중론은, 이라크 파병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반기를 든 열린우리당 내의 파병반대 의원들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당시 파병과 관련된 권력 내부의 밀고 당기기(파병찬성 우위 속의 소수파 반대론의 문제 제기)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파병을 전제로 준비 중인 상황에서 鄭孝終이 낸 파병반대 상소(上疏)가 임금님에게 올라간 뒤 파병의 시기를 늦춘다. 열린 우리당의 파병 반대 의원들의 파병 반대 서명(현대판 상소) 등에 영향을 받은 청와대가 파병 시기를 우물쭈물 늦춘 것과 비슷하다. 그 당시 유생들의 파병 반대 상소와 2004년의 이라크 파병반대 운동 단체들의 서명운동을 엇비슷하게 보면 몰역사적인 평가인가?

어쨌든 조선군의 파병을 단행했으며 그 대가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 왜군을 격퇴한다. 그 뒤 조선을 살려 준 명나라에 대한 보은론(報恩論)이 청(淸) 나라 배척운동으로까지 비화하고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와준 미국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이라크에 파병해야 한다는 논리는, 조선시대 명나라에 대한 보은론과 일맥상통한다. 조선 왕조의 보은론이 모화론(慕華論)-숭명배청(崇明排淸)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면, 21세기의 보은론이 모미론(慕美論: 미국을 흠모하는 논리)-숭미배북(崇美排北: 미국을 숭배하되 북한을 배척하는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파병을 요청하는 나라가 명나라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 외세로부터 파병 요청을 받은 뒤에 일어나는 권력 내부의 대응이 예나 지금이나 어쩌면 그렇게 같을까? 파병이라는 국가 대사(大事), 대외정책의 근간을 결정하는 행태가 고금(古今)을 불문하고 닮은꼴인 이 땅의 역사를 직시하면서 이라크 파병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고려 이후 지속되어 온 사대외교(事大外交)의 맥락에서 파병반대 운동을 거론하는 역사적인 천착이 요구된다.

Ⅱ. 파병반대 운동에 대한 침묵을 깨다

역사적으로 보면 외세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파병했음에도 민초들 사이에서 큰 저항이 없었다. 이는 외세에 대한 보은론이 이데올로기化한 데 기인하며, 파병을 강행하는 국가권력을 변혁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데서 비롯된다. 조선왕조의 파병 원리인 모화론은 성리학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가 감히 도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당시 파병을 결정하는 국가권력인 왕정에 도전하려면 천벌(天罰)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베트남전 파병) 당시 재야가 침묵한 사실은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월남 파병과 거의 동시에 진행된 한일회담에 반대했던 야당계 언론, {사상계} 등의 잡지도 월남파병에 대해서는 강도 높은 비판을 하지 않았다. “{사상계}를 끼고 다니지 않는 지성인은 간첩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계}마저 모미 ・숭미론(慕美・崇美論)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사상계} 등은 ‘베트남 파병의 대가를 미국에서 얼마나 확보해야 하느냐’에 관심이 있었을 뿐, 요즘 처럼 파병반대 캠페인을 벌이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의 세계정세가 베트남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상황’(주2)에 대한 당시 재야 지도부의 몰이해, 베트남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인식의 결여에 기인한다.

그리고 베트남 파병이 경제성장을 수반한 종속적 자본주의의 가속화와 반공 ・냉전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한국 사회에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파병반대 운동을 엄두도 내지 못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월남파병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적 경색화(梗塞化) 때문에, 한일회담 반대 운동에서 표출된 민족주의적 요구가 반(反)종속 ・자립화 ・자주화의 요구로 발전되지 못했다. 1960~70년대의 사회운동이 민족(해방운동)적 성격과 민중(해방운동)적 성격이 잠재화된 채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중요 요인이 된 것으로 파악된다. 1960~70년대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직사건(인혁당 사건, 통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남민전 사건)의 공소장이나 해당 조직의 강령에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논리’가 전혀 없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한국 운동권의 침묵은, 그 당시 일본의 반전평화투쟁(안보 투쟁)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한국군의 베트남 1차 파병 동의안이 통과된 1964년 7월 일본에서 베트남 반전투쟁이 한창이었는데, 당사자인 한국의 재야는 침묵을 지켰다. 일본에서는 이미 1959년 11월부터 안보투쟁의 불씨가 뿌려졌다. 안보투쟁은, 1951년에 체결한 미 ・일 안보조약을 개정하려는 미 ・일 집권 세력에 대한 반체제 ・반전평화 운동을 말하며, 최전방에 선 학생운동 세력이 노동자와 함께 투쟁했다. 나중에 ‘전공투(全共鬪)’라는 전국 조직으로 결집된 학생운동 세력은 베트남전 반대 등의 반전평화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일본의 노동운동 역시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 반미 ・반기지 운동, 군수공장에서의 파업을 주도하면서 안보투쟁을 이끌어 갔다. 노동자들의 안보투쟁은 일본 사회당을 결성하는 힘의 원천을 이루었다.

1960년대에 이웃나라 일본에서 반전평화 운동이 만발한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의 재야가 베트남전 파병에 침묵한 후유증은 70년대까지 지속된다. 이 기간 중에 4 ・19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때에도 베트남전 파병 반대 ・반전평화의 깃발을 든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

이러한 오랜 침묵(반전평화 운동의 不在)은 1980년대 들어 기독교 운동권의 평화활동9)과 선진적인 학생 ・사회운동권의 조직적인 반전평화 운동10)에 의해 깨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광주항쟁 당시 미국의 역할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반미운동의 깃발이 올려지기 시작하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부 단체가 반전 ・반핵 ・평화 운동 조직을 내오기 시작한다. 오늘날 파병반대 운동의 사상적 ・조직적인 뿌리는 1990년대 초반의 반전 ・반핵 ・평화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의 파병반대 운동론은,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이 결국 미국의 용병이었음을 깨달은 데에서 비롯된다. ‘한국군이 미국의 용병’이라는 인식의 바탕 위에서 1980년대부터 반미운동이 싹트면서 반전평화 운동과 결합되기 시작한다. ‘한국군은 미국의 국익을 위한 용병’이라는 인식이 1980년대에 선풍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인식은 요즘 들어 약화되었으나 이라크 파병반대 운동의 흐름 속에서 드문 드문 발견된다.(주3) 용병론의 논란과 무관하게 한국사회의 파병반대 운동이 반미운동과 연계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맥락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파병반대 운동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이라크 추가 파병반대의 목소리를 높인 한국 평화 운동의 ‘당돌한 성장(?)’에 찬사를 보내며, 파병반대 운동론을 서술한다.

Ⅲ. 파병반대 운동론

운동론이 없는 운동은 맹목적이라는 관점에서 파병반대 운동론을 먼저 거론한다. 필자는 파병반대 운동론을 <C(Civil…) ・
N(National…) ・P(People’s…)론>으로 집약한 다음, ‘C ・N ・P론’을, 파병반대 운동을 분석하는 방법론으로 채택한다.

운동의 주체가 없는 운동을 상상할 수 없으므로, <이라크 파병반대 비상 국민행동(351개의 시민사회운동 단체가 결합한 파병반대 운동의 구심체: 이하 ‘국민행동’>을 운동의 주체로 설정한다. ‘국민행동’은 C ・N ・P론을 어렵사리 합성하면서 파병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C ・N ・P론 사이의 상호 삼투작용이 이루어져 ‘국민행동’이라는 파병반대 운동의 공동전선이 구축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주체를 더 세분하여 C론(Civil…) 쪽을 ‘C 그룹’, N론((National…) 쪽을 ‘N 그룹’, P론(People’s…) 쪽을 ‘P 그룹’이라고 부른다.

앞의 ‘C ・N ・P론’을 통하여 1980년대의 CNP논쟁(Civil Democratic Revolution-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People’s Democracy론)을 부활시킬 의도는 없다. ‘국민행동’을 비롯한 시민사회 운동권에서 지금도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 CNP논쟁의 목표인 ‘혁명(Revolution)’은 잊힌 꿈이다. 그러나 ‘CNP’의 두 문자 ‘Civil…’, ‘National…’, ‘People’s…’는 아직도 운동 진영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파병반대 운동권에서도 20년 전 CNP 논쟁의 수맥이 ‘Civil…’, ‘National…’, ‘People’s…’의 형태로 흐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에 주목한 필자는 파병반대 운동론과
운동의 주체를 ‘Civil…’, ‘National…’, ‘People’s…’로 3분(分)하는 가운데 운동의 흐름을 서술한다.

1. 이라크 전쟁-파병에 관한 인식의 분화

  1) C론-C 그룹

C 그룹은 평화 운동의 보편적인 가치를 시민운동 차원에서 전개하려고 한다. C 그룹은 이라크인의 평화적인 생존권 ・인도주의 ・인간 안보에 반(反)하는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면서, 평화를 염원하는 세계 시민 ・양심적 시민의 목소리를 담아내려고 노력한다. C 그룹에 속하는 대표적인 단체는 ‘참여연대’,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등으로, 이들은 평소에 시민사회의 인간안보(Civil security / human security) 차원에서 ‘시민(시민사회)의 평화(Civil Peace)’를 창출하려고 한다.

  2) N론-N 그룹

N 그룹은 ‘반전-평화-자주(반미)-통일’의 입장에서 파병반대 운동에 임한다. N 그룹은 ‘반전-평화’에서 C 그룹과 어느 정도 호흡을 같이하지만, ‘자주-통일’에서 C 그룹과 갈라선다. 반전평화 운동과 반미운동을 연결시키려는 N 그룹과, 그냥 평화 운동을 향유하려는 C 그룹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반전평화 운동과 반미운동을 연결시키려는 N 그룹에 대하여, P 그룹의 일부는 ‘반미=반제국주의’ 차원에서 동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P 그룹은 “N 그룹이 민족주의에 따라 반전운동과 반미운동을 연결시키려 한다.”며 경원시한다.

이처럼 자주-통일의 입장에서 반전평화 운동을 수용하는 게 N론의 특징이다. N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이 탈냉전 시대의 세계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가상적으로 상정한 불량국가(악의 축 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 시나리오의 순위다툼에서 이라크가 1순위로 걸려들었다. 다음 차례는 북한이 될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 이처럼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미국 반대-민족통일의 관점에서 반전평화 운동을 생각해야 한다.”

민족의 안보(National security) 차원에서 반전평화 운동에 접근하려는 N 그룹의 대표적인 단체는 ‘민주노동당의 NL파(민족해방파)’, ‘통일연대’, ‘한총련’, ‘실천연대(남북공동선언 실천연대)’, ‘평통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등이다. N 그룹은 평화 운동과 통일운동의 접맥에 큰 관심이 있다. N 그룹 안에서도 미국 반대-연북(북한과의 연대)의 배합을 놓고 약간의 편차가 있다.

  3) P론-P 그룹

이라크 전쟁의 배후에 노동자를 수탈하는 ‘전쟁지향적인 독점자본 / 신자유주의’가 있다는 것이 P론의 핵심이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세계화 시대에 노동자를 착취한 자본가 ・초국적 기업, 금융독점자본, 군수자본이 전쟁체제의 맹주이므로, 이들을 타도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반전평화 운동을 벌이자는 게 P 그룹의 주장이다.

P 그룹이 보기에 노동자(민중)들이 등 따습고 배부른 게 최고의 안보이다. ‘민중안보(People’s Security: 일부 계급 환원론자들은 Proletariat’s security)’를 이룬 민중의 평화(People’s Peace) / 노동자(Proletariat)의 평화(주4)를 구가하기 위한 반전평화 운동을 P 그룹은 역설한다.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과 반제(제국 ‘미국’ 반대)-반전-평화 운동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P 그룹은 N 그룹과 연대해 왔다. P 그룹에는 ‘민주노동당의 PD파(민중 민주주의파)’, ‘민주노총’, ‘노동자의 힘’, ‘사회진보연대’, ‘다함께’ 등이 있으며, 이들 단체 사이의 시각편차는 N 그룹 내의 편차보다 더 두드러진다.

2. 운동 중점의 분화

이라크 전쟁에 대한 C ・N ・P론의 인식상의 분화는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으나 파병반대 운동의 중점이 어떻게 분화해 왔는지를 서술하기란 쉽지 않다. 애써 구분하기 위해 김선일 씨 피살 직후의 긴장된 상황에서 ‘김선일 씨 피살과 파병반대를 연계지은 성명서’를 분석한다.

  1) C 그룹

C 그룹은 평화 운동의 보편성에 입각하여 ‘국가안보 차원의 파병’을 비판하면서 ‘인간안보(시민 개개인의 안전보장), 생명안보 차원의 파병반대 논리를 펼친다.

  2) N 그룹

N 그룹은 평화 운동의 보편성을 인정하지만,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주목한다. N 그룹은, 미국의 북한붕괴 전쟁 위협이 상존하는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의식하면서 ‘반전-평화-자주-통일’의 입장에서 파병반대 운동을 전개한다.

  3) P 그룹

민주노총은 김선일 씨 피살 직후에 “명분도 실리도 없는 전쟁에서 더 이상 노동자[김선일 씨와 같은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냈다. 국가와 자본이 제휴하여 일으킨 이라크 전쟁에 파병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P 그룹의 일부는 N 그룹을 강하게 비판하는 한편 C 그룹의 보편적인 평화론의 그물코가 조밀하지 못한 점에 대하여 자신들의 시각에서 비판하기도 한다.

3. 인식의 한계

그러나 C ・N ・P론 모두 다음과 같은 인식상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① 이라크 민중의 삶에 육박하지 못하는 인식의 한계이다. 전쟁의 정글에 빠진 이라크 민중의 삶을 즉자적으로(an sich) 인
지하는 데 그치고 이를 대자적으로(für sich) 인식한 다음에 이론-실천의 합일을 이루어 내지 못한다.
② 중동지역의 다민족+다종족+다종교 사회구성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종교와 전쟁의 복합체로서의 이라크 전쟁’을
내밀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종교가 전쟁의 요인임을 경험하지 못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실천가들은 ‘종교와 전쟁의 두 담론이 얽히고설켜 있는’ 이라크 전쟁의 구도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이라크 전쟁의 저변에 있는 ‘Ethnicity’를 민족주의적으로 재해석하는 오류를 저지른다(물론 후세인의 바트 黨이 아랍 민족주의의 지파임을 기준
으로 민족주의 담론을 한반도로 끌어올 수는 있지만…). 그리고 이라크 전쟁은 미국 對 이라크 민족의 싸움이 아니
라 ‘미・영 동맹(앵글로 색슨 제국)’ 對 ‘중동의 다민족+다종족+다종교 사회구성체’와의 싸움임을 간과한다.
③ 이라크 게릴라들의 저항(무슬림 근본주의 무장집단의 테러 형식을 빌린 반격)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부족하다. 미국의 국가테러로 나타난 이라크 전쟁과 이에 맞서는 대항 테러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으면 이라크 전쟁을 심층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
④ 파병을 강요하는 미국을 비판하지만, 정치경제학적으로 심층적인 접근을 하지 못한다. 미국의 軍・産 복합체(군 ・산 복
합체 자본), 네오콘(Neo Con: 신보수주의 집단)이 집요하게 파병을 강요하는 지점에 천착하지 못하고 미국이란 공룡에
만 파병반대의 화살을 날린다.

위와 같은 운동론의 분화에도 불구하고 C ・N ・P 그룹은 ‘국민행동’의 기치 아래 자연스럽게 모였다. 그럼 ‘국민행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파병반대 운동의 흐름을 설명한다.

Ⅳ. 파병반대 운동의 흐름

이라크 추가 파병반대 운동의 흐름을 3단계로 분석한다. 각 단계별로 운동의 논리를 서술한 다음에 평가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 작업을 위해 ‘국민행동’의 홈페이지(http://www.antiwar.or.kr/index.php)에 실린 내용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