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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일본 관련(9條會 등)

한-일간의 과거사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길

김승국


경술 국치(國恥) 100년을 맞이한 2010년 8월 29일에 즈음하여 한-일간의 과거사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1. 천황-천황제


  1) 천황제에 의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


1920년에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36년간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갖은 착취를 자행한 배후에 천황-천황제가 있다. 따라서 천황-천황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를 하고 이에 걸맞는 법률적인 조치를 해야한다.


  2) 천황의 전쟁책임


일본 근대 천황제의 전쟁책임은 메이지 천황의 침략까지 포함하여 다뤄야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모든 일본인과 (정한론에 따라 조선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벌인) ‘무장한 천황(메이지⋅다이쇼⋅쇼와 천황)’의 전쟁책임을 ‘상징제 천황(현재의 천황)’이 고백해야 하고, 전쟁책임의 인정과 관련된 조치를 희생자들과 희생당한 나라(남북한)에게 실시해야한다.


일본인들 대부분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명확하게 인정하지 않고, 전전[戰前; 1945년의 패전 이전]의 역사를 기피하면서 전후[戰後; 1945년 패전 이후]의 경제발전을 강하게 긍정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다. 일본인이 전쟁책임에 대한 자각이 약한 것은 천황과 공유하고 있는 공범관계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식이 만연되어 있는 점에 있다.(윤건차, 1990, 298-299)


1989년 1월 일본의 朝日(아사히) 新聞社가 행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전체적으로 천황에게 전쟁책임이 있다고 본 사람이 25%, 없다고 본 사람이 31%, 그 어느 것도 말할 수 없다가 38%였다.(최상용, 1991, 70)


이렇게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한 자각증세가 없는 일본인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헌법 제11조에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統帥)한다.”고 하는 ‘통수권’행사의 문제야말로 전쟁책임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육해군’에 대한 ‘통수권’이 오직 천황만 행사할 수 있는 ‘대권(大權)’이라고 규정한 것은, 대일본 제국 헌법이 반포되기 7년전에 메이지 천황이 내린「군인 칙유(勅諭)」였다. “무릇 병마(兵馬) 대권은 짐(朕)이 통괄하는 것이므로, 세세한 점들은 굳이 신하에게 위임할 사항이 아니다.” 즉, ‘대권’으로서의 ‘통수권’은 헌법 위부에서 먼저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입헌군주’였다는 것만으로 이 ‘통수권’ 행사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다카하시 데쓰야, 2009, 137-138)


이와같이 천황의 전쟁책임이 막중함에도 불구하고 천황을 평화로운 사제(司祭)⋅신관(神官)으로 보는 ‘평화 천황’의 허상이 일본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특히 일본의 우익세력은 ‘대동아 전쟁’을 미화하는 한편 천황의 상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평화 천황’의 허상을 유포하는 가운데 천황의 전쟁책임을 모면하려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


일본은 천황-천황제의 전쟁책임을 인정하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를 하기는커녕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合祀)된 조선인의 명단을 빼달라는 유가족의 애원을 거부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2. 일본의 분단책임


일제의 36년 지배 체제는 분단체제로 이어졌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직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남북한에 진주(進駐)한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한반도의 분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은 한반도의 분단책임을 인정해야한다. 일본이 분단책임을 인정한다면, 분단해소를 위해 노력해야하는데 이를 역행하듯 분단의 고착화에 주력하고 있다. 임진왜란부터 1945년까지 수백년간 조선인을 납치한 일본이, 납치사건(북한이 일본인 몇사람을 납치한 사건. 이 사건에 대한 북한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음)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비열한 짓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3. 남북 분단과 친일파
 

남북분단 자체의 가장 큰 책임은 종주국이었던 일본에 있으며, 미군정을 등에 업고 분단체제를 추진⋅고착화해간 가장 큰 세력도 친일파(=친미파)였다. 일제시대에 천황에 충성을 맹세했던 친일파가 해방과 함께 민족주의자로 가장했으며, 미군정 개시와 함께 또한 친미파로 변모하는 것을 정치적⋅사상적으로는 ‘전향(轉向)’의 문제가 된다. 친일파 즉 친미파가 기득권 옹호를 위해 무엇보다 의지하려고 했던 것이 반공주의이다. 현실적으로 ‘친일’ ‘친미’ ‘반공’은 서로 닮은 형태를 이루고 겹쳐져 한국 현대사를 장식한 보수⋅우익⋅반동의 정치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윤건차, 2009, 79⋅125⋅126)


남북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쪽은 일본만이 아니다. 친미파로 전향한 친일파가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분단체제를 강화했기 때문에 한-일간의 과거사 청산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욱 큰 문제는 친일파가 조선시대의 지배층인 서인(西人)-노론(老論)과 이어진 점(주1)에서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인 청산이 요청된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수립된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에 대한 인적청산을 하지 않아, 노론-친일파가 온존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 상당수는 친미파로 전향하여 한국사회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노론의 모화(慕華)가 친일파의 모일(慕日), 친미파의 모미(慕美)로 바뀌며 숭배(慕)의 대상이 중국(華)~일본(日)~미국(美)으로 바뀌었을 뿐, 외세(종주국)에 사대하는 몸짓은 그대로이다. 그런 몸짓을 하는 몸체의 원조가, 광해군 중립외교의 맥을 끊은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인 서인이다. 서인 중에서도 최명길의 주화론을 꺾은 척화파가 원조중의 원조이다. 다시 말하면 ‘서인 척화파’의 斥和~노론의 慕華~친일파의 慕日~친미파의 慕美로 이어지는 사대주의가 자주적인 외교를 차단하는 역사가 흘러왔고, 분단시대인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다. 이러한 몇 백 년의 ‘반(反) 자주적인 역사’를 어떻게 청산하면서 남북통일을 이룰 것인가?


4. 미일 안보조약-미일 동맹체제


맥아더는 일본 점령을 되도록 저항 없이 수행하기 위해서 히로히토[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책하고 도쿄 재판[전범 재판]에서 문제 삼는 일이 없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했으며, 신헌법[현재의 일본국 헌법]을 히로히토의 이름으로 반포한 것도 그러한 노선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히로히토의 전쟁책임 면책은, 한국전쟁 와중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연동되어 있었던 미일 안보조약 체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던 것이며, 국가로서 일본의 전쟁책임을 애매하게 만드는 동시에 전쟁 상대국과 지역에 대한 전후보상의 문제도 애매하게 만들었던 것이다.(다카하시 데쓰야, 2009, 140-141)


남북분단의 책임을 진 일본은 분단해소를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미일동맹의 강화를 통한 한반도 분단 고착화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이후에 북한 위협론을 빙자한 군사대국화의 길을 걷고 있다.(주2) 북한의 미사일과 핵무기가 일본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북한 위협론을 내세워 일본의 군비확장⋅군사대국화가 진행중이며, 미일 동맹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러한 미일 동맹의 ‘북한 죽이기 전략(북한의 붕괴를 위한 안보전략)’이 한반도 정세를 악화시켜 분단해소⋅통일을 지체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 지배에 대하여 진정으로 사과할 뜻을 갖고 있다면, 한반도 분단체제 강화에 도움을 주는 미일동맹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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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다카하시 데쓰야 엮음, 임성모 옮김『역사인식 논쟁』(서울, 동북아 역사재단, 2009)
* 윤건차 지음, 정도영 옮김『현대 일본의 역사의식』(서울, 한길사, 1990)
* 윤건차 지음, 박진후 외 옮김『교착된 사상의 현대사』(파주, 창비, 2009)
* 이덕일『교양 한국사 (3)』(서울, 휴머니스트, 2005)
* 최상용「천황와 헌법과 자위대」『亞世亞硏究』제85호(1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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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주1) 조선의 멸망은 비극이었지만 더 큰 비극은 인조반정 이후 약 300여 년간을 집권해 온 노론이 국망(國亡)에 책임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일제에 협력해 지배층의 지위를 온존했다는 데 있다. 노론 인사 어느 누구도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다.(이덕일, 2005, 20).
일제는 조선 점령 직후인 1910년 10월, 76명에 달하는 한일들에게 이른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했다. 대부분 이씨,. 민씨 등 왕족들과 집권 노론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합방 공로작으로 일제 시대에도 귀족의 지위를 누렸다.(이덕일, 2005, 323-324)

(주2) 북한 위협론 중심의 안보관 변화가 일본의 군사대국화 경향을 강화시키면서 군국주의로 나아갈 조짐이 보인다. 현재는 군사대국화에서 군국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군국주의 부활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기 현상이 ‘자위대의 자위군에로의 변화’와 맞물려 진행된다면 일본 군대의 성격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요청된다. 자위군이라는 일본 군대의 장래에 대한 예측이 요청된다. 즉 자위군이라는 일본 군대가 천황의 군대(皇軍)로 되돌아갈지 아니면 새로운 군국주의 군대로 변모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본 군대의 장래를 점치기 어렵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천황제이다. 지금은 상징적인 의미의 천황제이지만, 주변 사태로 인한 일본 유사시(미⋅일 동맹의 대북 전쟁/ 북한의 정변 등) 자위군이 천황제와 결합되어 천황의 군대로 탈바꿈할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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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종교인 평화회의(KCPR)과 종교평화 국제사업단(IPCR)이 2010년 8월 24-27일에 서울에서 개최한 세미나(주제;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건립과 국제사회의 역할)에서 필자가 발제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