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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생태평화-생명평화

막힌 곳 뚫어 주세요!

김승국



2009년 5월 16일 서울에 입성한 오체투지(五體投地) 순례단은 ‘서울 순례를 시작하며 드리는 글’에서 “세상이 잔인해지고 인간성이 무너진 이유는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은 말할 것도 없이 국민 전체가 물신이라는 지독한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라며 “생명 자체에 대한 성찰이 없이는 그 어떤 묘수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용산참사’를 떠오르게 하는 이 글은, 현대판 ‘소돔’인 서울에 입성한 오체투지 순례단이 서울 시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소돔은 구약성서 중 창세기에 나오는 지명이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소돔과 그 이웃 성(城)인 고모라는 성적 문란 및 도덕적 퇴폐가 만연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여호와는 당시 소돔에 거주하고 있던 롯에게 의로운 사람 10명만 찾아내면 멸망을 보류하겠다고 선언했으나, 그 10명의 선량한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여 롯이 소돔을 탈출하자마자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 멸망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흔히 '죄악의 도시'를 뜻하는 비유어로 쓰이고 있다.



이 ‘죄악의 도시’ 서울에서, 창세기의 소돔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뉴타운 개발이 한창인 서울이 토건국가의 수도로 탈바꿈하고 있으며, 이는 창세기의 저자도 상상할 수 없었던 현상이다. 청계천 신화에 힘입어 집권한 이명박 대통령이 한반도의 천지인(天地人) 관계를 역변(逆變)시키려는 토건국가의 유령이 전국을 배회하고 있으며, 특히 서울은 이러한 토건국가의 수도로서 뉴타운이라는 토건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 중이다. 뉴타운 개발의 경계지대인 세입자‧땅주인의 셈법‧득실 차이가 이윽고 ‘용산참사’를 낳는 원흉이 되었다.



유황불이 내려 멸망했던 소돔의 주민들도 생각조차 못한 부동산 투기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속에서 용산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땅 1평에 1억원(?)의 보상을 받은 땅 주인(지주)과 망루에 올라가 죽은 세입자의 경계지대는, 분단되어 억울한 이 나라 속의 또 다른 분단지역이다. 토건국가 안의 가진 자(지주)와 가지지 못한 자(세입자)의 분단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잔인해지고 인간성이 무너지고 있으며, 그 이유는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은 말할 것도 없이 국민 전체가 물신이라는 지독한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 자체에 대한 성찰이 없이는 그 어떤 묘수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생명의 차원에서 ‘토건국가의 소돔化(뉴타운 재개발‧한반도 대운하와 같은 역변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소돔처럼 대한민국의 문명이 멸망하는 것)’를 예방하는 길을 찾아야하며, 오체투지 순례단의 글도 이러한 당위에 부응한 듯하다. 그런데 오체투지 순례단의 글에 빠진 문구가 있다. ‘평화’라는 단어이다. 마지막 문단에 “생명평화 자체에 대한 성찰이 없이는 그 어떤 묘수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밝혔으면 훨씬 빛나는 글이 되었을 텐데...



생명평화의 차원에서 이명박 정부의 토건국가化 정책(이 나라를 토건국가로 만들려는 각종의 정책)을 저지하는 운동은, 새로운 평화운동에 해당된다. 현대판 소돔, 부동산 투기판 소돔이 되어가는 서울을 평화로운 도시(평화도시)로 부활시키는 평화운동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 요구에 응하기 위해, 용산참사를 ‘평화’의 시각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용산참사가 평화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항변(?)할 분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평화의 눈으로 본 용산참사 이야기’를 들려주어야할 것 같다.



용산참사의 주제인 빈곤(세입자의 빈곤)은,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 강조하는 구조적 폭력-적극적 평화의 중요 항목이다. 따라서 용산참사 등 뉴타운 재개발로 빚어지는 빈곤의 퇴치는 평화운동의 몫이며, 이 운동은 생활에 즉하는 ‘생활 평화운동’의 새로운 영역이 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생활 평화운동의 영역을 창출하기 위한 운동논리를, 용산참사 중심으로 개발해야한다. 용산참사와 관련된 새로운 평화 담론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러한 요청에 따라 용산참사를 평화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글을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에 연재하고 있다. 용산참사와 평화를 연결시키는 뜻에서 ‘용산참사와 평화’라고 이름붙인 이 연재물의 본론은 ‘활인(活人)정치’이다. 사람 잡는 용산참사와 관련된 토건국가의 정치를 그만두고 사람 살리는(活人)정치를 하라고 이명박 정권에 요구하는 게 이 연재물의 핵심이다.



그런데 핵심에 들어가지 전에 이 연재물은 중단상태에 놓여 있다. 필자의 능력부족으로 ‘용산참사-빈곤타파의 새로운 평화운동 논리-활인 정치’를 연결하는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재한 10편의 글을 통해 10번째 고개를 넘었는데, ‘서울시를 평화도시로 만들기 위한 대안’과 관련된 글을 못 쓰고 있다.



‘서울의 소돔化’로 이어질 뉴타운 재개발의 사람 잡는 설계도, 토건국가의 설계도를 찢어 없애고 ‘평화도시 서울의 설계도’를 마련하는 밑그림을 평화 지향적으로 제시하려고 하는데...필자의 아둔한 머리로는 빛나는 글의 상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연재물의 순서상 ‘평화도시 서울의 설계도’라는 고개를 넘어야 활인 정치의 본령에 들어가는데...초반부터 고전이다. 겨우 10개의 조그만 고개를 넘고 지쳐 나자빠진 필자를 구원해달라고 기도하고 싶다. 아니 지척에 있는 평화운동의 동지들에게 나를 구출해 활인 정치의 영역으로 내 몸을 옮겨달라고 하소연하고 싶다.



이러한 심정으로 여러분들에게 ‘용산참사와 평화’의 연재물이 막힌 곳을 뚫어달라고 앙청한다. “막힌 곳을 뚫어 주세요?!”
(2009.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