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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일본 서부 지방 탐방기 (1)


김승국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 참석

 

일본의 서부 지방은 임진왜란 때부터 일본의 조선 침략 거점이었으며, 지금도 미 · 일 동맹의 한반도 진출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 전략적 요충지를 샅샅이 탐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히로시마 · 나가사키에서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World Conference against A & H Bombs)>가 열려 이 지역을 탐방할 기회를 얻었다.
필자는 2005년 8월 2~9일의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 기간 중 실내 토론회에 만족하지 않고 히로시마 · 나가사키 주변의 군사기지(구레 · 이와쿠니 · 사세보)를 현장 방문함으로써 미 · 일동맹의 군사적인 움직임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실감했다. 이 대회가 끝난 다음인 8월 9일부터 14일까지 규슈(구마모토 · 후쿠오카) 지방과 야마구찌 지방을 순회하면서 일본의 군사 · 정치 대국화, 미 · 일동맹의 긴밀한 동향을 파악했다.

그럼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의 이모저모를 먼저 기술한다. 올해는 마침 피폭 60주년이 되는 해 즉 60년 전인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된 ‘피폭’을 기념하는 뜻에서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를 개최했다. ‘피폭’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원자폭탄의 폭격을 당했다는 피해자 의식이 상당히 강한 국제대회이어서, 필자는 참가여부를 놓고 망설였다. 물론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원죄를 저지른 측면에서 미국이 가해자이고 일본이 피해자이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 태평양에서 벌인 전쟁의 죄값으로 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점에서 피폭은 ‘가해자 일본에 대한 형벌’에 해당된다.

일본이 아시아 · 태평양에서 저지른 전쟁의 죄가 원인이 되어 피폭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점 , 일본이 가해자이었기 때문에 피해자가 된 점을 망각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피폭 60주년을 맞이한 히로시마 · 나가사키에서 피해자 의식은 넘쳐 흘렀으나 가해자 의식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이 점은, 일본 사회의 보수적인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일본 사회의 보수적인 흐름을 역행하여 반전평화의 기류를 분명히 형성해야할 일본의 운동권 · 평화운동 세력이 푯대를 상실한 채 헤맨다는 점이다. 이번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에서도 ‘일본이 당했다’는 수난자 의식을 드러내는 프로그램이 많은 반면, 일본이 과거에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다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는 프로그램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다만 ‘반핵 국제대회’이어서 미국의 핵정책을 비판하는 발언이 많았기 때문에 수난자 의식 중심의 대회라는 비판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핵무기 사용의 원죄를 씻기는커녕 북한 등에게 ‘사용 가능한 핵무기(벙커 버스터 핵무기 등)’를 퍼부어 핵전쟁을 일으키려는 야심을 버리지 않는 미국이 집중적인 표적으로 되었다.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에 참석한 해외 NGO대표가 260명이므로, 각국 대표의 발언을 정리하기 어렵다. 더구나 일본 국내의 전문가 · 피폭자의 발언까지 합하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언사가 있었기 때문에 대회의 총정리가 불가능하다. 대회를 개막하는 첫날(8월 2일)은 외국 정부 · 의회 대표와 해외 NGO대표가 서로 교대하며 발표하는 '가버넌스(governance) 국제회의’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피폭자의 발언까지 추가되어 <해외 정부+NGO+피폭자>의 3자 연결 형태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3자 연결(연대가 아님) 형식의 국제회의는 보기 드물었으며, 유엔쪽 국제기구와 NGO가 함께하는 '콩고(Congo)'와도 달랐다.

해외 정부 대표는 주로 히로시마 · 나가사키 피폭의 역사적인 상흔을 어루만지려는 뜻에서 ‘다시는 핵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일반론에 그치는 발언을 했다. 해외 NGO 대표들도 각국의 운동 상황과 더불어 왜 핵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발언했다. 피폭자들은 60년 전 그날의 악몽을 되살리며 '절대로 핵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호소를 했다.

그리고 히로시마 · 나가사키에서 열린 <평화 기념 식전>에 참석한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 정부가 핵 없는 세상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뻔뻔스런(?) 발언까지 했다. 이에 비해 히로시마 시장 · 나가사키 시장은 미국의 핵정책을 비판하면서 일본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여 그나마 긴장감이 있었다.

이번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는 피폭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핵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의지의 연장선상에서 열린 평화 대회이다. 피폭 60년을 총정리하고 앞으로 ‘핵 없는 평화세상’을 구가하자는 운동노선을 반영한 국제회의이었다. 그러나 어느 국가가 어느 국가를 향해 핵무기를 발사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회의이었다. 예컨대 미국이 북한을 향해 핵무기를 사용하는 대북 핵전쟁 계획에 대하여 비판하지 않고 그냥 ‘No More Hiroshima, No More War'의 원론만 되뇌이었다.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의 주제어인 ‘피폭 60주년’은 ‘패전 60주년’과 궤를 같이한다. 일본이 1945년 8월 9일 두 번째 핵세례를 받은 6일 뒤인 8월 15일에 항복(패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피폭이 없었으면 항복 선언이 없거나 늦어졌을 것이다. 미국 쪽에서 보면 항복을 유도해낸 피폭이지만, 일본은 피폭 이후 천황제의 고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항복선언을 했다. 이런 아쉬움 때문인지 일본에서는 패전이라는 말 대신에 ‘종전’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패전이 아닌 종전은 또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여운이 담긴 말이어서 매우 주의해야할 문구이다. 일본인들이 모호한 말로 자신들의 본심을 드러내는데 능숙한 점을 감안하면, ‘종전’은 일본 군국주의의 재현을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피해자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평화를 거론하는 분위기가 연출된다면, 군국주의 부활을 꾀하는 일본 지배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제도권의 평화’에 그치기 십상이다.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가 제도권에 편입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의 주요 참석자들이, 8월 6일 히로시마의 평화 기념 식전에 공식적으로 초대받아 고이즈미 총리와 멀지 않은 자리에 앉은 것으로 미루어 제도권과 상대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 같다. 이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평화 기념 식전의 장외에서 목이 터져라고 반전평화-고이즈미 정권 규탄을 주창한 좌파 운동단체의 비제도권과 대비된다.

기념 식전 도중에 자리를 빠져 나온 필자는 장외에서 시위한 좌파단체 구성원들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보고, 제도권과 비제도권 사이의 문턱이 높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들 좌파운동권은 한국의 좌파 운동권과 달리 일본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식들이다. 이들은 소수파로 전락하여 8월 6일 평화 기념 식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시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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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에서 버림 받은 ‘좌파 운동권’

 

8월 6일 오전 9시경 평화 기념 식전 부근의 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좌파 운동가들의 모습을 사진 찍을 때 참으로 민망했다. 몇 명 안 되는 노(老)투사들의 지친 모습도 그러하거니와 자신들보다 더 많은 숫자의 기동경찰에 에워싸여 자신들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무더운 여름인데도) 헬멧을 쓰고 있거나 두건을 둘러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동가들이 긴 수건 · 두건을 둘러쓰는 것은 한국에서도 예전에는 드물지 않은 사례이었으나, 헬멧을 쓰는 경우는 없었다.

필자가 14년 전 맨 처음 히로시마의 반핵국제대회에 참석하여 거리시위 할 때, 헬멧을 쓰고 등 뒤에 배낭을 멘 대열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혹시 전기 공사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짓을 하지 않나 생각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었다; “60년대 전공투(일본의 안보투쟁을 이끌었던 학생운동 조직)의 유니폼으로 헬멧을 쓰고 배낭을 메고 시위하며, 배낭 속에는 도끼 · 철봉 등의 살벌한 시위 도구가 들어 있다고...”

이러한 희한한 대답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 곧 이어 ‘전공투 계열의 학생운동권 끼리 무력(쇠파이프, 철봉 등)을 사용하는 파벌 싸움이 동경 시내에서 벌이진 끝에 살인 사건(적대적인 파벌 소속의 운동권 학생을 살인함)이 일어났으며, 이런 사건에 진절머리를 낸 국민들이 전공투 운동을 배척한 결과 일본 운동권이 패망했다’는 해설이 곁들여졌다.

그 살인 사건 이후 일부 운동가들이 지하로 잠적했는데 가장 과격한 쪽이 적군파이고, 적군파보다 덜 과격한 쪽이 대학 학생회를 접수(?)하여 ‘革(혁명) 마르(마르크스)파’ ‘해방파’ 등의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革 마르파’ ‘해방파’ 계열의 학생운동권은 지하운동을 펼치지 않으며 공개적인 운동을 한다. 다만 ‘革 마르파’ ‘해방파’를 원격조정하는 세력이 지하에 숨어 있을 뿐이다. 소문에 의하면, 60년대 학생운동을 경험한 사람들 중 기업에 들어가 회사 생활하는 사람들 가운데, ‘革 마르파’ ‘해방파’ 등을 위하여 뒷돈을 대주는 자가 있다고 한다.

8월 6일 평화 기념 식전 부근에서 필자가 목격한 사람들은 해방파의 투사이며, 일부 참가자가 헬멧을 쓰거나 두건을 두르고 있었다. 이들 중 노동조합 소속임을 드러내는 복장을 한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일본의 좌파 운동권에 대하여 필자가 깊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필자가 1993~1996년 일본의 명치(메이지)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지내면서 대학구내를 자주 출입한 경험 때문에 ‘해방파’에 대하여 약간 알고 있다. 명치대는 ‘해방파’의 거점 대학으로 알려져 있는데, 필자가 귀국하기 직전에 명치대 학생운동권 주변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으며, 필자로부터 한글을 배운 사회인중 한명도 이 사건과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 사건의 윤곽은 다음과 같다; ‘운동과 관련된 노선 · 조직 싸움과 관련하여 적대적인 파벌의 구성원을 살해했는데, 살해 당한 측에서 보복에 나선 결과 귀가하던 상대방 조직원의 발목을 절단(죽이려 했으나 실수하여 발목 절단?)했다.

필자가 한글을 가르친 사회인중 한명도 이 사건과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는데, 그 사람은 평소에 얌전하고 말수도 적어서 나를 또 한번 놀라게 했다. 도대체 일본 사람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일본 운동권을 통해서 다시금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의 경우 일본 운동권 못지않은 논쟁(NLPDR 논쟁)이 있었으나 살인에까지 이른 적은 없었다. 제아무리 노선이 달라도 동일한 운동선상에 있는 동지 아닌가?

이제까지 비극적인 이야기를 했으니까 희극적인 일을 하나 소개한다. 앞에서 설명한 ‘革 마르파’ ‘해방파’ 등의 좌파운동권 일부는 아직도 무장봉기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무장봉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황거(천황이 사는 곳)를 향해 자신들이 만든 사제폭탄을 쏘아 올리는 경쟁을 파벌끼리 한다고 한다. 상대방 파 보다 멀리 사제폭탄을 날려 보낸 쪽이 승리의 환호성을 올리며 자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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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95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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