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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일본 서부 지방 탐방기 (2)


김승국


거세된 운동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민중혁명에 성공하지 못한 역사가 운동력의 부족으로 이어지고 있다. 역사의 격동기인 19세기. 일본에서도 농민봉기가 드물게 있었으나 지배계급에 충격을 주지 못했다. 19세기 말 이웃 나라 조선의 농민봉기가 혁명의 의지를 아시아에 전파한 것과 사뭇 다르다.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봉건제의 힘에 눌린 민초들이 저항의 마음을 지녔지만 이불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는데 그쳤다. ‘이불 속의 저항운동’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불 속에서 지배계급을 규탄하므로 지배계급이 민중을 무시했으며, 그 결과 민중운동이 거세되었다.

물론 일본에도 60년대의 안보투쟁 처럼 빛나는 운동의 전통이 있으나, 이 전통을 계승하는데 실패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 민초들의 기질을 들 수 있다. 일본사람들은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르다. 속마음은 지배계급을 규탄하지만 겉마음은 체제에 순응하는 처신이 이불 속의 운동을 낳았으며 운동의 거세로 이어졌다.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른 ‘모호한 의식구조’는, 투쟁의지를 한 군데 모으는데 장애물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거세된 운동의 양태를 설명한다. 민중운동은 일반적으로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드러난다. 운동은 권력과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운동이 권력에 도전하다가 실패할 경우,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거세되기 쉽다. 그 뒤로는 제아무리 구호를 외쳐도 지배계급이 거들떠보지 않는다. 눈치 빠른 언론 역시 거세된 운동을 백안시한다. 일본의 운동권이 대규모의 집회를 해도 신문에 1단 짜리 기사조차 나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의 언론이 운동권의 투쟁을 소상하게 전달하는 데 비하여 일본의 언론은 전혀 다루지 않는다. 비교적 진보적이라는 아사히 신문마저 운동권에 인색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운동권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으니 민초들이 운동권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다. 민초들의 소외감 · 불만 · 저항의식을 대변하는 운동권의 주장이 언론에 보도되어 민초들에게 전달되는 ‘순환’이 잘 이루어져야 하는데...언론에 의해 또 한 차례 거세된 운동권이 자신들의 주장을 민초들에게 전달할 길이 없다.

필자가 만난 일본의 운동가들 대부분은 한국의 운동권을 부러워하며 어떻게 하면 그런 운동을 펼치느냐며 비결을 알려달라고 한다. 필자는 ‘당신들이 이불 속의 운동을 하기 때문에 운동이 안 된다’고 핀잔하듯 대답한다. 거세된 운동을 해보았자 별 볼일 없다고 답변하면 상대방을 무시하는 꼴이 되므로 자제한다. ‘이불 속에서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치는 거세된 운동을 하므로 지배계급이 놀라지 않을 뿐 아니라 신문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으며, 그 때문에 국민들이 운동권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데 어떻게 운동이 되느냐’고 반문하고 싶지만 자제한다.

이불 속에서 방귀 뀌는 일본 운동권의 한계는 단체명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일본의 운동단체 이름에 ‘~을 생각하는 모임’이 많다. 예컨대 ‘평화(환경, 인권 등)를 생각하는 모임’이 아주 많다. 일본의 운동권 사람들은 열심히 생각하며 기록하지만 이를 몸으로 실천하지 못한다. 동네마다 있는 마을 회관 · 공민관 등에 모여 ‘평화(환경, 인권 등)를 생각하는 모임’의 학습회는 열심히 갖지만, 공부한 내용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옥외집회를 열지 않는다.

일본의 운동권처럼 일률적인 행태를 보이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일본인답게 행동양식이 모두 동일하다. 일단 학습회를 열어 ‘~을 생각하는 모임’을 갖고 모두 얇은 노트를 들고 와서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메모한다. 기록의 천재 일본인답게 학습회에 모여 발제자의 발언을 아주 치밀하게 메모한다. ‘~을 생각하는 모임’의 학습회에 가보면, 모범생의 전국대회를 하는 분위기이다. 몸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다소곳이 앉아, 모범생들이 선생님의 판서를 베끼듯 알뜰하게 메모한다. 전국의 모범생들이 모여 전국적인 집회를 하는 분위기가 연출된다. 이런 모범생들이 체제에 감히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을 생각하는 모임’은 ‘이불 속에서 방귀뀌는 연습’을 하는 곳이다. 이불 속에서 방귀를 뀌어보라. 방귀 소리도 크게 들리지 않고 냄새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장외에서 대포 소리를 내며 저항해도 지배계급이 들은 체 하지 않는데, 이불 속에서 방귀만 뀌니...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른 일본인의 기질이 운동가들에도 남아 있는 듯하다. 일본 운동권의 미국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보면, 운동가들의 겉마음과 속마음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미국에 의해 핵무기 세례를 받은 히로시마의 피폭을 주제로 한 반핵평화 국제대회(‘원수폭 금지 세계대회’등)는 미국 성토장이 되어야한다. 부시 정권의 이라크 전쟁 이후 부시 정권을 비난하며 반미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전 세계 운동권의 상식이 되어 있다. 이런 상식이 일본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 일본의 운동판에서 ‘양키 고홈! 미군철수’를 외치면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필자가 몇 년 전 오키나와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집회의 선두에 서서 ‘양키 고홈! 미군철수’를 외치니까 주변의 일본인들이 몸을 움츠리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두려운 존재인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직접투쟁을 상징하는 ‘양키 고홈!’이란 구호를 큰 목소리로 외쳤기 때문이다. 그 것도 부족하며 ‘미군철수’를 덧붙였기 때문에 겁이 난 것이다.

일본에는 ‘양키 고홈!’이란 구호가 없다. ‘양키 고홈!’을 외치면 큰일 난다는 의식 때문일까? 미국을 두려워하는 공미(恐米)의식이 강한 일본인들은 미국 앞에서 ‘양키 고홈!’을 외치는 걸 금기시한다. 대동아 전쟁 때 미국과 한판 붙어 패전한 쓰라린 경험이 공미의식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자고로 힘센 자들 앞에서 쩔쩔매지만 약자는 잔인하게 짓밟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전 세계의 패권을 쥔 미국의 힘을 두려워하므로 이불 속에서도 ‘양키 고홈!’을 외치지 않는다. ‘양키 고홈!’이 없으므로 ‘미군철수’가 없다. 최대의 구호가 ‘미군 나가라!’는 것이다. 점잖하게 ‘나가라!’고 말하면 나갈 미군인가?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는 일본의 운동을 이끌어가는 주력부대가, (전공투 등에서 시민운동가로 변신한) 60 · 70대 노인들이라는 점이다. 운동권 자체가 노인정이다. 그나마 운동권 안에 파벌 싸움이 많아서 힘이 모아지지 않는다. ‘운동권은 파벌 싸움 탓에 망한다’는 푸념을 한국에서도 자주하지만, 파벌 싸움에서 일본은 단연 한국을 압도한다. 일본의 정치판이 파벌간의 이합집산으로 이루어졌는데, 운동권이 이를 모방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운동의 단결력이 약화되면 투쟁력이 모아지지 않으므로 운동에 있어서 파벌 싸움은 금기사항이다.

파벌 싸움이 우심하므로 조그마한 파당을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하며 그 결과 전국적인 전선체를 형성할 수 없다. 필자와 이야기를 나눈 대다수의 일본 운동가들은 한국의 운동권에 전국 단위의 운동체 · 전선체(예전의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등)가 존재함을 부러워한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운동하거나 이불 속에서 방귀 뀌는 운동을 오랫동안 하다보니 단일한 운동전선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운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본인 활동가 개개인은 인생을 걸고 운동을 하지만 운동전선이 없으므로 밑 없는 항아리에 물붓기이다. 일본의 어느 곳을 가도 불철주야 운동을 하는 열혈 활동가가 점점이 박혀 있다. 그러나 그들을 전국적으로 엮는 사령탑이 부재하므로 개인 활동가들의 운동이 빛을 내지 못하고 외로워진다. 필자는 이번에 일본의 서부 지방을 순회하면서 외롭지만 목숨 걸고 운동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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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투하는 일본의 활동가들

 

  1. 나까야마 씨 이야기

 

나까야마 구니오(中山 邦夫) 씨는 규슈의 구마모토 현에서 아주 외롭게 일본 교과서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다. 생활도 어렵지만 자신의 운동을 지역사회가 알아주기 않기 때문에 더욱 외롭다. 동경 등 도회지의 운동가들은 제법 화려하게 보이지만 구마모토 현의 변두리에서 외톨이처럼 운동하는 사람들은 안쓰럽다. 나까야마 씨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대도시의 운동단체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지만, 늘 얼굴을 맞대고 사는 지방에서 운동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일본 봉건제의 버팀목이었던 마을 공동체 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란다.

일본어에 ‘村の八分’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마을에서 따돌림 받는 사람을 지칭한다. 마을에서 모난 행동을 하는 놈을 왕따시켜 마을 공동체에서 견딜 수 없게 만든다. 그러니 천황 · 쇼군 · 봉건영주 · 사무라이가 명령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을 공동체 의식 속에서 고전하는 나까야마 씨는 자기가 ‘村の八分’로 찍혀 있어서 운신의 폭이 매우 좁다고 털어 놓는다.

 

  2. 다나까 씨의 분투

 

다나까(田中信幸) 씨는 나까야마 씨의 동지이다. 다나까 씨는 목에 풀칠을 하면서 악착같이 운동을 한다. 그는 한국에 흔한 프롤레타리아 운동가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 산다는 일본에서 프롤레타리아 운동가가 존재한다는 게 신기하다. 능력 없는 프롤레타리아 운동가인 그가 주책없이 자녀를 셋이나 낳았으니 등골 빠질 일이다. 그래서 등이 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구부정한 작은 몸매에서 그렇게 독하고 매서운 투쟁력이 나오는 것을 보면 경이롭다. 일본인들이 한 곳 · 한 직장 · 한 직업에 매달려 인생의 승부를 건다는 말이 다나까 씨에 딱 어울린다.

그는 돈벌이 하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며 일본 교과서 반대투쟁을 위해 홍길동처럼 뛰어다닌다. 구마모토 현에서 후소샤의 교과서 채택을 완전히 저지하는 데 반드시 성공한 다음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다짐했다.

 

  3. 온 몸으로 투쟁하는 오오 이시 마사루 씨

 

야마구찌 시에서 만난 오오 이시 마사루(大石勝) 씨는 40대의 중증 장해인이다. 그는 증증 장해를 딛고 반전평화운동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그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보다 훨씬 다부진 반전운동을 전개한다. 그의 휠체어에는 ‘일본의 유사입법(군사대국화를 굳히는 법률) 반대’라는 스티커가 왕방울 만큼 크게 붙어 있다. 그는 장해인 운동과 반전평화운동을 병행하기 위해 <야마구찌 장해자 해방 센터>를 1992년에 설립했다. 장해인에게 지급될 복지예산을 줄여 국방비를 늘리는 고이즈미 정권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몸짓을 필자에게 보이며 반전평화의 의지를 온몸으로 전달했다. 그가 휠체어 위에 컴퓨터 올려놓고 몸을 비틀며 자신의 뒤틀린 팔 · 손가락을 가다듬은 뒤 컴퓨터 자판을 겨우 두들기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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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96호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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