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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자본에 의한 폭력

만국의 Precariat여 공모하자!

김승국      
 

1970년대부터 유럽에서 젊은 세대의 불안정 고용․실업이 사회문제로 떠올랐으며 이탈리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에 이탈리아의 20대 청년의 7할이 실업상태라는 보고서가 나온 적이 있다. 당시 이탈리아의 불안정한 상황은, 유럽에서 유일하게(아니 세계에서 유일하게) 1968년의 운동이 ‘아우또노미아(autonomia)’라는 새로운 운동으로 계승되어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는 원인을 낳았다.


아우또노미아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운동은, 노동자 본대(本隊)를 주축으로 삼는 종래의 좌익운동을 넘어 젊은이․실업자, 나아가 주부․외국인 노동자라는 ‘이제까지 변혁의 주체로 낮은 평가를 받아온 세력’을 자본주의 비판의 중요한 동력으로 설정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문제설정이 나중에 하트(Hardt)와 네그리(Negri)에 의해 Multitude(다중․대중)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당시 ‘아우또노미아’의 문제설정을 요약하면, 세계화하는 자본의 지배(Hardt와 Negri의 ‘제국’으로 발전함)가 단순히 생산 노동자만을 착취하는 게 아니라, 학생․실업자․주부 등(산업예비군, 노동조정을 위해 일시적으로 산업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 생산노동력을 지원하는 부불不拂 재생산 노동자)도 성장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착취한다는 것이다. 학생․실업자․주부는 자본의 지배에 의해 착취되는 ‘사회적 노동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에게 임금을!’ ‘실업자에게 임금을!’ ‘가사노동에 임금을!’이라는 자본주의․시장중심주의 비판의 슬로건이 등장한다.


그런데 아우또노미아를 중심으로 한 운동은 사회적인 설득력․사회적인 헤게모니를 잃었다. 그렇다고 이 운동이 모습을 감춘 것은 아니었으며 프레카리아트(Precatriat) 운동으로 부활했다. 이러한 움직임의 전형적인 사례를 이탈리아의 ‘사회 센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회 센터는 1970년대의 운동 속에서 태어났다. 활동가․예술가를 비롯한 다양한 젊은이들이 빈집이나 폐허가 된 공장 터․빌딩을 점거하여 확보한 공간을 여러 운동체의 교류의 장(場)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카페․서점․자유 라디오 방송국으로 사용함과 동시에 콘서트․집회․회의장으로 운용되면서 사회 센터의 역할을 했다. 사회 센터는 정치조직이나 이데올로기에 속박되지 않는 다양성․복수성(複數性)을 지닌 운동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하얀 작업복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회 센터의 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하얀 작업복’ 그룹의 움직임이었다.



1990년대 후반 3~4년 동안 일어났던 유럽의 급진적인 민주주의 운동들 중에서 가장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하얀 작업복(White Overall, Tute bianche)’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활동가 그룹이다. ‘하얀 작업복’은 1990년대 중반에 활동가들이 우리 사회의 의미심장한 변형들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던 곳인 ‘사회 센터들’에서 탄생했다. 이탈리아의 ‘사회 센터’는 1970년대에 대안적인 사회 공간들로 시작하였다. 청년 그룹들은 버려진 건물을 접수하여 그 안에 자신들을 위한 공간, 즉 사회 센터를 만들곤 했다. 때때로 그것은 집단적으로 운영되는 서점, 카페, 라디오 방송국, 강의와 콘서트를 위한 공간 등,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었다. 1980년대에 사회 센터에 속한 젊은이들은 낡은 노동계급의 죽음과 부모 세대의 포드주의적인 공장노동의 종말을 슬퍼하고 애도했으며, 그 비극에다 마약, 고립, 자포자기를 포함한 일종의 자해적인 고통을 뒤섞었다. 모든 지배적인 산업 국가들이 이러한 경험을 겪어 나갔다. 하지만 1970년대에 이탈리아에서 계급투쟁이 각별히 격렬했었던 까닭에 1980년대의 이탈리아 젊은이들이 유독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에 이르러 애도는 끝나고, 사회 센터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경험을 특징지었던 새로운 노동 패러다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포스트 포드주의(Post Fordism; 후기 포드주의)에 전형적인 이동성이 높고 유연하고 불안정한 노동이 그것이다. 옛날 공장 노동자들이 입었던 전통적인 푸른 작업복이 아니라 하얀 작업복이 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했다.


‘하얀 작업복’의 종착점은 2001년 여름의 제노바 G8 항의시위였다. 그들은 항의시위를 조직하는 중심적인 집단들 중의 하나였고, 이 시위에는 3천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였다. ‘하얀 작업복’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허용되었을 때는 정상회담 장소를 향해 평화적으로 행진했다. 경찰이 최루가스, 곤봉, 실탄으로 공격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으로 저항했다. 시위대들 중의 한 사람인 까를로 줄리아니(Carlo Giuliani)가 경찰에 의해 피살되었다.


제노바 투쟁 이후 ‘하얀 작업복’은 사라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그룹이 다중의 운동 속에서 지도부처럼 행동해야 했던 시간은 지나갔다고 결정했다. 그들은 국제적이고 전 지구적인 정상회담들을 둘러싼 커다란 항의시위들을 조직하는 데 한몫을 담당했었다. 그들은 항의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작업했고, 기기에 정치적인 일관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항의시위들을 방어하고 시위의 공격성이 반생산적인 폭력에서 벗어나 좀 더 창조적인 표현 형식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했었다. ‘하얀 작업복’의 경험에서 가장 가치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노동형태들-네트워크 조직, 공간적 이동성, 시간적 유연성-에 알맞은 형태의 표현을 창조해 냈고, 그 표현을 새로운 전 지구적 권력 체제에 맞선 일관된 정치적 힘으로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정말로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조직화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얀 작업복은 정밀기계․약품공장 등에서 ‘모자․마스크를 쓴 노동 작업복’을 연상케 한다. 푸른 작업복의 조직된 공장 노동자 대신에, 정보산업의 새로운 노동주체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얀 작업복-Precariat



1990년대부터 21세기 벽두에 걸쳐 이루어진 反세계화․反신자유주의 운동의 한 형태가 Precariat 운동이다.


Precariat는, ‘Precarity(불안정성)’과 ‘Proletariat(프롤레타리아트)’를 합성한 조어(造語)로서 ‘불안한 프롤레타리아트’를 뜻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이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예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정규직 노동자가 대다수이어서 임금은 적었으나 생활의 안정성 자체가 파괴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자본이 강요하는 노동의 유연성에 따라 ‘생활 자체가 불안정한 비정규직 프롤레타리아트’가 새로이 양산되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순이 집약된 사회 양극화(10 對 90의 사회로 양분됨)로 90에 해당되는 대다수 민중들의 삶 자체가 불안정해졌다. 이렇게 생활이 불안해진 프롤레타리아트를 Precariat라고 부른다.


신자유주의의 생산양식이 반영된 ‘포스트 포디즘 사회’의 정보․커뮤니케이션․지식산업 우위 속에서 비물질(非物質)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의 시장중심 원리에 의해 생활이 불안정해진 사람들을 총칭하여 Precariat라고 부른다. 더 나아가 고학력이면서 불안정한 지적(知的)인 직업(이러한 직업의 예비군)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포괄된다. 대학의 시간강사(Brain worker)와 같은 고학력 Precariat가 여기에 속한다. 물론 고학력 Precariat의 예비군인 청년 실업자(88만원 세대)도 포함된다.


위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주제를 뽑아낼 수 있겠다;

① 포스트 포디즘의 ‘유연한 노동(flexible labor)에 의한 유연한 착취(flexploitation)’로부터 벗어나 Precariat의 안전을 지키는 것을 ‘유연한 안전(flexsecurity)’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러한 안전을 인간안보(human security)-평화연구의 차원에서 다룬다.

② 신자유주의 자본을 엄호하는 ‘국가권력의 안보(국가안보) 지상주의’에 대항하는 Precariat의 인간안보 확보 투쟁을, ‘불안한 시대의 평화’를 지키려는 활동으로 간주한다.

③ 유연한 노동에 임하는 남성 비정규직의 남성성(男性性; flexible masculinity)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Precariat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바, 이와 짝을 이루는 여성 Precariat를 젠더(gender)의 개념으로 분석할 수 있다.


한국판 Precariat ‘88만원 세대’


Precariat(불안한 시대의 평화 담지자)의 한국판은 ‘88만원 세대’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연한 비물질 노동을 강요받는 Precariat로 전락한 끝에 88만원의 급여를 받으며(88만원의 급여도 받지 못하는 청년 실업자들은 하얀 작업복을 입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열악한 Precariat’이다)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이들 신세대의 인간안보를 평화연구의 과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주로 젊은 층의 불안정한 노동상황을 표현하는 ‘precariat’는 2003년 이탈리아에서 회자되기 시작된 뒤 스페인으로 건너가면서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마드리드의 거리를 배회하는 Precariat를 ‘Precarias a la Deriva(표류하는 프레카리아트)’라고 부르며, 프랑스판 Precariat가 ‘Intermittents(앙떼르미땅)’이다.


2004년 2월 29일부터 이탈리아의 각지에 등장한 聖 Precario 운동[불안정한 노동자의 생활을 수호하는 성인(聖人) 모시기 운동; 자학적으로 Precariat를 성인으로 떠받드는 '가톨릭의 패러디']은 Precariat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聖 Precario’라는 성인(聖人)의 형상(대개 기도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수퍼마켓․서점(베네치아에서는 영화 축제 현장) 등에 붙여놓고 퍼포먼스(performance)를 하면서 기도함으로써, 자신들의 불안정한 노동상황을 호소했다. 희화적인 퍼포먼스를 벌이는가하면 세계화․시장중심주의에 대항하는 운동, 예컨대 ‘Chain worker(편의점․마트mart․주유소 등에서 일하는 서비스 산업의 일용 노동자)’의 권리/ 대학 시간강사의 불안정한 지식 노동자(Brain worker)의 권리/ 정보분석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 외국인 차별반대 운동, 생태 운동, 페미니즘 운동, 반전평화운동 등의 다양한 운동과 제휴하게 되었다.



Precariat에게 임금을!



Precariat 운동을 통해, Hardt와 Negri가 말하는 Multitude의 실체가 드러난다. 불안정한 노동에 종사하는 Multitude를 Precariat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Precariat의 확대는, 통치계급에게도 중대한 과제를 안겨준다.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빈곤층의 확대는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며 체제의 위기를 낳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지배계급들이 이를 예방하기 위해 감시체제를 강화하면서 ‘관리 사회’ ‘감시 국가’가 탄생한다.


그러면 비인간적인 감시국가의 자본지배를 인간적인 것으로 전환해야하는데, 이를 위해 불안정한 노동에 대한 생활보장을 쟁취해야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Precariat에게 임금을!’이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투쟁을 공동모의(공모; 共謀)하는 게 바람직하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는 명령 대신에 ‘만국의 Precariat여 공모하자!’는 호소가 중요하다.


‘Precariat에게 임금을 주어야한다’고 요구하는 Precariat 운동은, 과거의 (적敵을 단순화․일원화一元化하고 이에 대항한 아군도 균질한 것으로 보아 군사조직처럼 집중․통제를 한) 좌익운동과 손을 끊는 ‘작풍(作風)’에서 비롯되었다. 이 운동은, 적에게 일격을 가해 단숨에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우직하고 단순한 권력관․정치관’에서 벗어나 삶의 정치(biopolitics)-사람 살리는 정치[活人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 옛날의 좌익도 우익도 아니면서, ‘자본의 난폭한 질주를 제어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을 개척하고 이를 위한 새로운 주체를 내세우기 위한 운동이 Precariat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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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IMPACTION』151호(2006.4) 10~43쪽
* Middlesex Decalration of Europe’s Precariat(http://www.globalproject.info/art-2351.html
*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지음, 조정환 외 옮김『다중』(서울, 세종서적, 2008) 318~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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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352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