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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자본에 의한 폭력

미국의 ‘제3항 배제’가 초래한 북한 핵 사태

김승국

2005년 2월 10일에 북한이 핵무기보유 선언(2 ・10 선언)을 함으로써 미국에 도전장을 냈다. 부시 대통령이 피그미로 폄하한 김정일 위원장이 미국과 동일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미국이든 북한이든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절대로 반대하지만, 반대에 앞서 북한이 왜 핵무기 보유 선언을 했는지를 심층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심층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세계만을 이해하는 것으로 부족하다. 무의식의 세계까지 육박하여 북・미간 핵공방의 맥락(Text)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2 ・10 선언 이후 북・미 사이에 벌어진 말싸움(언어전쟁)의 단어에만 집착하면 북・미 핵공방의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말싸움의 잠재심리까지 파고들어야 북・미간의 생사를 건 핵공방을 간파할 수 있다.

북한 쪽 잠재심리를 대변하는 말은 “우리를 국제사회에서 ‘왕따’시키지 말고 생존권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이에 미국(부시 정권)은 “피그미가 이끄는 북한을 철저하게 ‘왕따’시켜 지도에서 없애겠다”는 집단적 무의식을 내보이고 있다.

미국에게 있어서 북한은 ‘왕따’의 대상, 국제사회에서 배제해야 할 제3자, 즉 제3항(項)이다. 북한이라는 제3항을 군사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대북 핵전쟁 기획을 펜타곤이 추진 중이며, 이 기획에 군사적으로 맞선 것이 2 ・10 선언이다. 지구촌의 제3항으로 낙인찍혀 국제적으로 ‘왕따’ 당하는 북한(북한 인민)은, 미국에 대한 한(恨)을 집단적 무의식의 형태로 갖고 있다. 집단 무의식 형태의 한(恨)이 켜켜이 쌓인 끝에 ‘2 ・10 선언을 통한 한풀이’를 함으로써 북・미간 핵공방의 악순환이 가속화되었다. 그런데 북・미간 핵공방의 악순환의 원초적인 책임은 미국 쪽에 있다. 미국의 ‘제3항(북한) 배제’가 북한 핵 사태의 원흉이다.

여기에서 미국의 제3항(북한) 배제, ‘북・미간 적대관계의 집단적 무의식과 관련된 악순환(惡循環)’을 몇 가지 이론적인 작업을 통하여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지라르(Rene Girard)의 희생양・모방 욕망・모방폭력 이론, 아글리에타(Aglietta)의 ‘화폐의 폭력’론, 今村仁司(이마무라 히토시)의 배제(시민사회 구성원 사이에 배제하는 폭력)론, 들뢰즈Deleuze) ・가따리(Guattari)의 앙띠 오이디푸스(L'anti-Oedipe) 에 나오는 ‘욕망・정신분열・전쟁기계’론, 네그리(Negri)의 제국론, 갈퉁(Galtung)의 구조적 폭력・제국주의론, 동양 고전의 전쟁・평화론, 김용운 교수의 原型論, 북한의 주체사상・선군정치・강성대국론을 참고로 미국의 제3항(북한) 배제-‘북・미간 적대관계의 집단적 무의식과 관련된 악순환(惡循環)’을 심층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듯 보인다.

그런데 필자의 능력에 한계가 있으므로, 위의 이론 중 지라르의 희생양・모방 욕망・모방폭력 이론, 아글리에타의 ‘화폐의 폭력’론, 今村仁司의 배제론을 중심으로 미국의 제3항(북한) 배제-‘북・미간 적대관계의 집단적 무의식과 관련된 악순환(惡循環)’과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본다.

1. 지라르의 모방 욕망・희생양・상호폭력 이론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La Violence et le Sacré) 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와 폭력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이디푸스와 라이오스(Laios)가 네거리에서 처음 만날 때는 아버지도 왕도 없었다. 처음에는 주인공의 길을 막는 낯선 자의 위협적인 몸짓만이 있었으며 그 다음에 이 낯선 자를 때리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는 곧 왕위와 왕비를 향한 욕망, 즉 폭력적 대상을 향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폭력적인 것이 아버지와 왕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확인과정이 있다. 달리 말하자면 폭력적인 것의 대상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폭력이다. 라이오스가 아버지이기 때문에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폭력적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왕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폭력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자 왕’이라고 단언할 때, 그가 의미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René Girard {La Violence et le Sacré} (Paris: Éditions Bernard Grasset, 1972) 202∼203쪽>

지라르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자기가 지향하는 존재를 발견할 때마다 그 추종자는 타인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을 욕망함으로써 그 존재에 도달하려고 애쓴다. 그때마다 그는 상대방의 욕망이라는 폭력을 만난다. 그러자 그는 논리적이지만 지나친 비약으로 폭력 그 자체가 언제나 그를 피하는 그 존재의 가장 확실한 징후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려버린다. 이때부터 폭력과 욕망은 서로에게 묶이게 된다. 욕망 주체는 폭력을 당할 때마다 항상 욕망이 눈뜨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욕망 주체는 이 폭력을 숭배하며 동시에 증오한다. 그는 폭력으로써 폭력을 제압하려고 애쓴다. 다시 말해 욕망 주체는 폭력과 싸운다. 어쩌다가 그가 폭력을 이기고 나면 그 폭력이 누리고 있던 마력은 곧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욕망 주체는 다른 곳에서 더욱 폭력적인 폭력, 진정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을 찾아나서야 한다. 모방 욕망(désir mimétique)은 불순한 전염병과 같은 것이어서, 만일 이것을 멈추기 위한 희생물과 이것이 다시 가동되는 것을 막는 ‘祭儀的 模倣(mimesis rituelle)’이 없다면, 희생위기의 원인인 이것은 공동체 전체를 파괴할 것이다.”<René Girard {La Violence et le Sacré} 207∼208쪽>

지라르에 의하면, 인간 욕망의 모방 대상인 모델이 가까운 동료, 즉 짝패가 될 때, 짝패들 사이에는 극단적인 내적 중개인 짝패의 갈등 속에서 ‘선망과 질투・증오・숨은 원한’ 등의 감정이 생겨나고 이것은 곧 폭력의 씨앗이 된다. 이 폭력은 상호 폭력으로 인류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아주 기본적인 본질적 폭력이다. 특히 개인들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는 무차별 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이어지고, 이렇게 되면 인간의 폭력은 모방 욕망처럼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사회를 유지시켜 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나는데, 바로 이런 의문에 대한 지라르의 천착의 결과가 '폭력과 성스러움'이다. 인간 사회를 유지시켜 올 수 있었던 동인으로 지라르가 찾은 해답이 바로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사회가 무차별적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위기의 책임자로 한 사람을 지목하여 사회의 상호적 폭력을 그에게로 집중시킴으로써 다시 평화를 회복하는 메커니즘이다. 모방적인 상호 폭력을 피하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일종의 방책이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말이다<르네 지라르 지음/김진석 옮김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Je
vois Satan tomber comme l'éclair)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4) 243∼244쪽>.

위의 문장을 북・미간의 핵공방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 주도의 희생양 메커니즘은 미국 사회가 무차별적 위기(미국 자본주의의 위기. 이 위기처방으로 미국의 軍・産・政 복합체가 북한에 대한 전쟁을 기획 중이고 이에 대한 반발로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됨)에 처했을 때 그 위기의 책임자로 북한을 지목하여 상호적 폭력을 북한에게로 집중시킴으로써 제국의 평화(Pax Americana)를 회복하는 메커니즘이다.”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을 국제정치적으로 이처럼 확대해석하면 ‘동북 아시아의 희생양 메커니즘의 한복판에 북한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은 북한을 희생양으로 삼아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한다. 북한 위협론이 미국 주도의 희생양 메커니즘의 압권이다. 북한이라는 희생양이 제국 미국의 평화(Pax Americana)를 가져다주는 구조를 직시하면서 북한의 핵무기보유 선언을 평가해야 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에 물든 부시 정권에게, ‘최악의 불량국가(Rogue State)’인 북한은 사탄(Satan)이다. 부시는 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을, 북한과 치룰 각오로 덤비고 있다. 부시 정권은 북한이라는 사탄을 핵무기로 징벌하고자 하는 대북 핵전쟁을 기획 중이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사탄의 폭력, 즉 대북 핵전쟁 기획에 맞대응하기 위하여 핵무기라는 대
응 폭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북한이라는 사탄과 미국이라는 사탄 사이에 모방폭력(미국의 핵폭탄을 모방한 북한의 핵폭탄)이 발생한다. ‘사탄(북한의 주체사상/주체사상의 핵무기)이 사탄(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미국의 아마겟돈 대북 전쟁을 위한 핵무기)을 물리치는’ 구도에 성공하면, 북한 정권은 (미국이 파놓은) 북한 핵 사태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으나 실패하면 멸망의 나락으
로 빠져들 것이다.

이러한 기로에서 펼쳐지는 한반도의 박빙의 평화는 북한을 희생양으로 삼는 ‘휴전 상태의 평화’이다. 그나마 이 ‘휴전 상태의 평화’가 북・미간 핵공방 속의 모방폭력으로 깨질 위기에 있다. 이러한 위기를 분석하는데, 지라르의 이론 및 지라르의 논리를 더욱 발전시킨 아글리에타의 이론이 유용하다고 본다.

2. 아글리에타의 ‘화폐의 폭력’론

아글리에타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에 지라르의 욕망 이론을 접합시킴으로써, 자본론 의 가치형태론에 폭력이 내재(內在)함을 증명하려고 한다. 아글리에타는 ‘미개사회(신화)에 폭력이 내재(內在)되어 있다’는 지라르의 이론을 근대 시민사회에 끌어들여 내재적 폭력(內在的 暴力)을 설명한다.

<그림 3> 지라르의 ‘욕망의 3각형’(생략)

아글리에타는, ‘주체-대상-경쟁상대’라는 지라르의 욕망의 3각형 <그림3>은 ‘오이디푸스的 3각형’ <‘오이디푸스(욕망 주체)-어머니(욕망 대상)-아버지(경쟁 상대)의 3각형’으로 대체될 수 있다>에 근거하여 마르크스의 가치형태론과 폭력의 관련성을 이끌어낸다<김승국 「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숭실대 박사학위 논문, 1996) 44∼45쪽>.


예컨대 두 개의 상품이 교환될 경우 일방(一方)의 상품이 동시에 화폐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A-B가 거래될 경우 B는 A의 등가물(等價物)이지만 이 등가물은 A의 ‘가치(價値)’를 측정해주기 때문에, B는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화폐형식을 이미 떠맡게 되어버린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A-B의 2항관계(二項關係)는 동시에 3항관계(三項關係)임이 분명해진다(B는, 하나의 상품이면서 화폐이기도 한 点에서 두 개의 상품형식과 화폐형식을 아우르는 3항관계이다)<今村仁司 批判への意志(東京, 勁草書房, 1989) 143쪽>.

이를 자본론 의 가치형태론에 도입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의 상품형태-가치형태 전개의 제1형태에서 ‘x량의 상품A=y량의 상품 B’는 2항(대립)관계이다. 그러나 이 2항관계는 3항관계를 숨기고 있다. 왜냐하면 등가형태(等價形態)의 위치에 있는 B상품은, 교환되는 物인 한 2항대립의 일항이지만, 등가형태를 갖고 A를 척도하는 원초적인 화폐형식이기 때문이다. A에 대하여, B는 제2항이면서 제3항이다<今村仁司 지음 {排除の構造}(東京: 靑土社, 1989), 130쪽>. 이렇게 2항관계에서 제3항이 배제되는 구조를 자본론 의 가치형태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자본론 은, 근대사회에 내장된 제3항 배제효과를 사태에 卽하여 파헤쳐 보인 저작이며<今村仁司 지음 {排除の構造} 126쪽>. 자본론 모두(冒頭)의 상품・화폐론 혹은 가치형태론에 제3항 배제효과가 不在的 現前(“2항관계가 3항관계를 숨기고 있다”)으로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 화폐형식이라는 제3항(un troisième terme)은, ‘지라르의 욕망의 3각형’에서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라이오스(犧牲者)에 해당된다.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에게 폭력을 행사했듯이(이러한 부자간의 싸움은 시민사회의 경쟁・투쟁과 원리상 동일하다), 자본주의사회(근대 시민사회)에서 화폐형태-화폐(자본)이라는 제3항이 폭력을 행사한다<김승국 「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숭실대 박사학위 논문, 1996) 47∼48쪽>.

그런데 희생물을 살해하려는 위기의 절정에서 폭력이 모든 욕망의 수단이자 동시에 주체이며 대상이다. 바로 이 때문에 희생물이 없다면 그리고 위기 후에 이 폭력이 문화질서로 변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회질서는 불가능해진다. 희생양은 상호적 폭력에서 공동체적 평화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그 이행을 확실하게 하고 이행 그것 자체가 된다. 오이디푸
스는 이제 평화의 초석이 된 것이다<김 현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 (서울: 나남, 1987) 49쪽>.

위기의 절정에서 ‘우연히 불꽃’이 튀어 상호적 폭력(la violence réciproque) 혹은 폭력적 상호성(la réciprocité violente)을 지우고 평화를 세운다. 우연의 불꽃에 의해 희생물이 되는 것이 속죄양이다. 속죄양은 공동체를 화해시킨다. 오이디푸스 왕을 계속 예로 들자면, 오이디푸스는 페스트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래서 그를 추방했더니 페스트가 사라진다. 희생자의 악(惡)한 면은 그가 죽은 뒤에, 혹은 추방된 뒤에 생겨난 선(善)한 면을 더욱 강화시킨다. 오이디푸스는 처음에는 악하나(maléfique) 다음에는 선하다(bénéfique). 희생양은 혼란에서 질서로 이행하는 것의 상징이 아니라, 이행 그 자체이다. 상호적 폭력에서 一人에 대한 萬人의 폭력으로의 이행이 바로 모든 문화의 기원이다. 그것은 희생적 위기에 일어난다<김 현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 (서울: 나남, 1987) 46~47쪽>.

역설적으로 ‘(상호적) 폭력이 창출하는 평화’ ・‘좋은 폭력으로 나쁜 폭력을 막는 평화’의 창조적인 국면이 조성된다. 그러므로 창조적이며(創造的 暴力) 사회 보호적인 제의적 폭력(祭儀的 暴力)의 악순환은, 상호적이며(相互的 暴力) 전면적으로 파괴적인 폭력의 악순환을 대체하게 된다<김승국 「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숭실대 박사학위 논문, 1996) 49쪽>.

아글리에타의 화폐이론에 의하면, 화폐는 시스템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교환관계를 조직한다. 화폐는 숫자(數字)에 법의 힘을 부여한다. 화폐는 단일성・통일성을 나타내는 형태이다. 화폐는 교환자들의 관계 속으로 뛰어들어 ‘경쟁에 의한 적대관계’를 조정하는 ‘제3항’이다. 교환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승인욕망’으로부터 배제되기 때문에 화폐가 제3항이 된다. 화폐로 평가된 가치 체계를 통하여 숫자(數字)가 보편적으로 개재(介在)되고, 이 개재에 의하여 모방의 적대관계는 소유욕망으로 된다. 여기에서 사적소유(私的所有)가 발생한다. 사적소유란, 타인의 활동의 성과를 숫자(數字)의 형식으로 전유(專有)하려는 욕망이다. 각각의 사람들은 타자가 보유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하여,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포기한다. 즉 싸게 구입하여 비싸게 팔아넘김으로써 취득적 폭력이 일상화된다. 화폐의 발생과정은, 취득적 폭력을 사적소유의 완전히 다른 현실로 이끈다. 화폐는 物의 취득욕구를 가치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지만, 화폐 자체는 가치가 아니다. 화폐는, 사회적 승인을 얻기 위하여 상품과 동일한 자격으로 판매되거나 구입되는 것이 아니다. 화폐의 정통성은, 만장일치의
취득적 폭력이 가져온 과실이다<アグリエッタ・オルレアン 지음/井上泰夫・齊藤日出治 옮김 {貨幣の暴力}(東京: 法政大學出版局, 1992) (Michel Aglietta-André Orléan La Violence de la monnai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82)) 47∼48쪽>

언뜻 보기에 비폭력적이고 평화로운 시민적 관계에도 근원적으로 제3항 배제라는 사회형성 폭력의 각인이 찍혀 있다. 이 각인을 한 몸에 지닌 것이 화폐이다. 결국 화폐는 자본제 생산양식(구조)의 주요한 담당자인 자본으로 변환(Metamorphose)된다<김승국 「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숭실대 박사학위 논문, 1996) 64쪽>.

근대의 자본은 화폐에 결정(結晶)된 제3항 배제를 전반화(全般化)한다. 바꿔 말하자면 자본이란 전반화한 경제적 희생양(bouc émissaire, scapegoat)이며, 전반화한 제3항 배제운동이다<今村仁司 {排除の構造}(東京, 靑土社, 1989) 119쪽>. 근대 시민사회의 역사적 특이성은, 제3항 배제효과를 시공간적으로 특정화・국소화(局所化)하지 않고 오히려 전반화하여 인간 전체・자연 전체를 제3항 배제효과의 권내(圈內)에 포섭하는 데 있다<今村仁司 {排除の構造} 168쪽>. 근대 시민사회가 제3항화 폭력(물리적인지 아닌지를 물을 것 없이)을 사회관계의 그물코의 구석구석까지 삼투시키며 ‘전반화’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앞에서 자본이 경제적인 ‘bouc émissaire’라고 언급했는데, ‘émissaire’라는 단어 속에 이미 ‘배제’의 뜻이 깃들어 있으므로 ‘제3항 배제의 운동체’로서의 자본이 다시금 상정된다. 그러므로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轉化)’를 제3항 배제의 논리에 따라 표현하면, 이는 ‘배제된 제3항으로서의 화폐’에서 ‘전반화한 제3항으로서의 자본’으로의 전화이다<今村仁司 {排除の構造} 151쪽>. 화폐가 자본으로 전화하고 자본이 제3항 배제의 논리를 내재화하여 자립할 때, 자본의 논리를 통하여 제3항 배제의 논리가 사회 전체에 관철된다. 화폐가 자본으로 변환됨에 따라 ‘화폐의 폭력’도 ‘자본의 폭력’으로 전
환(Verwandlung)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 자본주의사회만큼 제3항 배제의 폭력을 구석구석까지 전파하는 사회는 없다. 이런 측면에서 근대 자본주의사회는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사회이다<김승국 「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숭실대 박사학위 논문, 1996) 65쪽>.

3. 今村仁司의 배제론

위의 아글리에타의 이론을 잘 집약한 학자가 今村仁司이다. 今村仁司에 의하면, 근대 국민국가는 한편으로 대등한 인간끼리의 관계를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그 대등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대등하지 않은 인간군을 분류하는 장치가 되어가기도 한다. 즉 동일화 가능한 인간은 받아들이지만, 동일화하기 힘든 인간은 배제한다는 것이다<今村仁司 지음/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서울, 민음사, 1999) 184쪽>.

위의 논리를 북미간의 갈등에 조금 무리하게 적용한다면, ‘근대 국민국가의 연장선상에 있는 미국(부시 정권)이 동일화하기 힘든(동화시키기 힘든) 인간집단인 북한(북한 인민, 북한 사회, 북한 체제)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인종주의에 물든 부시 정권은 ‘어떤 인간이 받아들여질(acceptable) 수 있는지 어떤 인간이 그렇지 않은지 하는 갖가지 인간 집단의 분류를 한다. 그 작업이 근대국가의 연장선상에 있는 미국의 작용이기도 한다.’

이 배제의 측면만을 강조하자면, 국민국가는 아주 미시적인 세부에까지 구분을 적용시키는 분류 장치이기도 하다. 실로 다양한 인간의 동일화 비동일화의 분류 기준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다양한 인종 개념을 환상적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인종이라는 것은 본래 현실적인 근거가 아무것도 없다. 인종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이라는 것의 존재가 믿어져 왔다. 허구로서의 ‘인종’을 중심으로 차별이 생겨나는데, 차별의 근원은 다름 아닌 국민국가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는 것이다. 동일화의 논리 없이는 근대국가가 있을 수 없었지만, 거꾸로 비동일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가 성립되기도 했다. 그때에 동일화할 수 없는 것에 관한 갖가지 분류 도식이 의식적이든 아니든 작용하여 동일 집단에 대해서 비동일적인 것을 ‘인종’이라는 형태로 환상적으로 만들어온 것이 아닐까. 국민국가를 만들면 당장에 내부적인 분류 장치가 작용하므로 인종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국민(nation)의 이면에 언제나 인종이라는 관념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국민과 인종(race)은 언제나 쌍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今村仁司 지음/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184~185쪽 참조>.

부시 정권이 북한을 배제하는 근간에 북한 위협론이라는 이데올로기 장치가 있다. 북한이라는 인종집단이 미국을 위협하니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화・동화될 수 없는 북한에 관한 갖가지 분류 도식이 작용한 끝에, 미국과 동일한 집단(앵글로 색슨/친미 동맹)에 대하여 비동일적인 북한 사람들을 ‘불량국가의 인종’으로 (환상적으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북한에 대한 경제적인 분류도식 중의 하나가 대북 경제제재의 도식이다. 불량국가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를 통해 이라크 어린이 수십만 명을 죽였듯이, 최악의 불량국가인 북한 인종을 굶겨 죽여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유도하기 위해 경제제제의 도식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적인 국민국가를 유지하려면 불량국가를 가려내어 배제하는 ‘내부적인 분류 장치’가 필요하므로 인종(북한 인종)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 국민(nation)’의 이면에서 언제나 ‘북한 인종’이라는 관념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과 인종(race)은 언제나 쌍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인종에 대해 실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국가라는 것의 환상적인 성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한 사람의 빈말일 따름이다. 최근의 프랑스에서도 ‘프랑스인을 위한 프랑스’라고 하는 역시 철저하게 환상주의적인 발상의 우익적인 움직임이 있는데, 그것은 근대 국민국가의 논리 그 자체이다. 예컨대 흑인도 있고 아랍인도 있고… 하는 식으로 갖가지 인종 분류를 만들어, 알제리인은 받아들일 수 있다든지 터키인은 받아들일 수 없다든지, 하는 그런 환상적 관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이 지배민족 측에 있으면, 피지배 민족 측도 자신들에게 강요된 인종의 개념으로 자기들 자신을 파악해간다. 거기서 지배 측과 피지배 측 사이의 환상게임과 같은 것이 이루어진다. 그러한 환상에 빠져서 인종간 전쟁과 같은 지극히 환상적인 전쟁을 도처에서 계속하고 있다. 나치즘도 그랬었고, 소련이나 유고의 해체 과정에서도 민족이라든가 인종이라고 하는 환상에 끌려 다니는 별의별 게임이 앞으로도 행해져 갈 것이다<今村仁司 지음/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186쪽>.

미국의 북한 붕괴를 위한 군사작전명 5027-98은, 미국의 북한 해체과정에 나타내는 코드(code)이다. 미국의 북한해체 과정에서 민족이라든가 인종이라고 하는 환상에 끌려 다니는 별의별 게임이 앞으로 행해질 것이다. 미국의 북한 붕괴를 위한 별의별 게임을 예시하면 대북전쟁 모의훈련(simulation), 대북전쟁 계획(작전 계획 5030, 작전 계획 5029, 작전 계획5055), 대북 전쟁에 대비한 실동훈련으로서 한미 합동훈련(독수리훈련 등), 북한의 핵무기 체계를 포위하는 각종 장치(미사일 방어망인 MD 개발・배치), 북한 감시를 위한 정찰활동(군사위성, DMZ 부근의 공중 정찰 등), 북한 감시・포위・붕괴를 위한 남한의 최첨단 군비확장을 유도 등이 있다.

배제의 장치라는 것은 국내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외 쪽에서 격렬하게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국주의나 식민지주의 같은 것은 내부에 있던 배제 장치의 외부화와 같은 측면이 있다. 가령 국민국가가 건전하게 (물론 ‘건전’이라는 말도 검토해봐야 하지만) 작용했다 하더라도, 국가의 ‘건전한’ 장치 그 자체가 방대한 병리현상의 뿌리 그 자체에 다름 아니라고 하는,
어쩔 수 없는 변증법적 구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今村仁司 지음/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187쪽>.

북한을 배제하는 배제 장치가 미국의 국내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외 쪽에서 격렬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는 내부에 있던 배제 장치의 외부화에 해당된다. 미국 국내에 있던 인종주의라는 배제 장치가 외부화하여 대외 정책으로 드러난 것 중 하나가 ‘북한 인종 배제로서의 북한 붕괴 시나리오’이다. 미국이라는 국민국가의 구성원인 개별적인 미국 시민이 건전하게 생각하더라도, 국가의 ‘건전한’ 장치가 방대한 병리현상<북한 등의 타자(불량국가)를 괴롭혀 미국의 국익을 증진시키려는 병리현상>의 뿌리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건전하다’고 선전하는 미국의 건국 신화가 인디언 착취・점령에 이은 대외 침략전쟁과 북한침략 전쟁계획으로 이어지는 ‘국가(미국) 자체의 병리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건전한’ 퓨리턴 정신이 앵글로 색슨(미・영 동맹) 주도의 이라크전쟁으로 왜곡된 ‘국가(미국) 자체의 병리현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국민국가라는 것이 건전한 형태로 성립되고 거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두가 다 평등한 그런 국가라고 하더라도, 그 평등성은 실은 어디까지나 동질적 평등의 관념이며, 대단히 강한 타자 배제의 원리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제가끔 독자적인 방식으로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국민국가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위에서 꽃피는 민족주의의 문제까지 생각해보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적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는 테제가 나온다. 서구, 미국, 일본 할 것 없이 민족주의는 항상 인종차별적이지 않을 수 없다

9 ・11 사태 이후 미국이라는 국민국가 위에서 꽃피는 미국형 민족주의가 호전적인 민족주의로 전환된 과정은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적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 9 ・11 테러 이후 성조기를 휘날리며 ‘Amazing Grace'를 열창한 미국형 민족주의가 타자(非기독교문명, 즉 이슬람문명, 중국문명, 북한의 주체사상)의 배제・섬멸로 나아간 흐름 속에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적
구조가 내장되어 있다.

차별과 배제의 구조를 내포한 근대의 국민국가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가능성(자유, 권리 등의 이상적 이념)을 스스로의 손으로 해체해버린다. 민족주의라는 것을 사상사적인 각도에서 다시 보면, 철학에서 말하는 ‘동일성론’이라는 것이 된다. 요컨대 아이덴티티(identity)의 문제이다. 동일성의 논리에는 대단히 위험한 구석이 있다고 끊임없이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
다. 민족주의의 문제도 뒤집어보면 인종차별 문제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종문제와 민족주의를 따로따로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근대의 정치 구조 안에 있는 배제의 구조를 통찰하는 것으로부터 문제에 접근하는 실마리가 얻어질 것이다<今村仁司 지음/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189쪽>.

북한 차별・배제의 구조를 내포한 ‘자유(부시 대통령이 2005년의 일반교서를 발표할 때 ‘자유’를 수십 번 역설함)’가, 미국 스스로 만들어낸 가능성(자유, 권리 등의 이상적 이념)을 해체해버렸다. 부시 대통령이 강조하는 자유는 북한 붕괴의 자유, 불량국가를 착취하는 자유, 미국의 국익을 위해 타자(다른 나라)를 유린하는 자유, 미국의 패권을 위해 다른 인종을 억압하는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가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을 스스로 해체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차별・배제의 구조는 동일성의 논리를 동반한다. 즉 미국 제국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국가를 불량국가로 낙인찍어 배제하는 동일성 논리를 수반한다. 이런 동일성 논리는 전통적으로 제국주의 국가의 동화(同化) 논리이며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이데올로기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제국 미국에 절대로 동화하지 않는 북한을 절대로 배제・섬멸・붕괴시키는 게 필연이다.

배제는 부정적 도덕 현상으로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인간의 존재에 뿌리박은 사태이다. 배제와 차별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한 피할 수 없는 형태로 누구나가 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배제와 차별의 근원은 사실상 각자의 의도에 상관없이 언제나 그리고 이미 ‘사회와 집단 속에서 산다’고 하는 현실 안에 있다.

사람들이 집단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원 사실은 결코 평화적이 아니다. 그것은 원초적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개인이 <실제로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타자가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원리상 배제하며, 또한 타자가 <실제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폭력적으로 배제할 가능성이 있다.

자기보존의 힘인 현존재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자리를 비워라!’라고 부르짖는 힘이다. 자리를 비우는 힘은 특정한 공간을 폭력적으로 열어 젖히고 구획선을 긋는 일이다. 자기 존재의 유지와 보존은 끊임없는 구획선을 무한히 그어 나가는 일이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이와 같은 원초적 폭력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다.

현존재의 원초적 폭력은 개체의 존재 공간을 폭력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개체의 존재 지속을 방해하는 다른 개체를 배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적 현존재의 경우 한쪽의 보존과 지속은 다른 한쪽의 보존과 지속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현존재는 ‘타자’의 현존재를 배제한다. ‘타자’가 ‘나’의 자기보존에 있어서 방해물이 되는 한, ‘타자’에 대한 투쟁은 불가피해진다<今村仁司 지음/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191~194쪽 요약>.

‘나(제국 미국)’의 현존재는 ‘타자(북한)’의 현존재를 배제한다. ‘타자(북한)’가 ‘나(제국 미국)’의 자기보존에 있어서 방해물이 되는 한, ‘타자(북한)’에 대한 투쟁은 불가피해진다. 북한이 미국의 국익에 방해물이 되는 한, 북한이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장악에 장애물이 되는 한, 북한에 대한 투쟁, 즉 북한 붕괴를 위한 전쟁,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보기에 ‘대북 아마겟돈 聖戰(holy war)’은 불가피해진다. 여기에서 제국 미국・미국 자본주의의 원초적 폭력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원초적 폭력에서 북미간의 상호 적대 현상이 발생한다.

상호 적대 현상은 개인들 사이의 전쟁 상태에서 비롯된다.(주1) 규칙이 없을 때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어떤 경우에도 전쟁 상태가 나타난다. 국제관계는 사실상 언제라도 전쟁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북미간의 전쟁 상태를 분석할 수 있다.

(그런데) 상호 적대 상태가 영속적일 수는 없다. 적대 상태가 해소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밖에 없다. 하나는 공멸로 끝나는 경우이다. 원리상 이 사태는 있을 수 있으며 그러한 역사적 사례도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또 하나는 적대 상태를 만들고 있는 폭력의 압력, 배제의 힘을 어딘가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해 공멸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사실상 이 길이 선택되고 있다<今村仁司 지음/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197쪽>.

제국 미국이 갖고 있는 배제의 힘을 어딘가 다른 곳, 즉 불량국가들을 향하게 해 자본주의 세계의 공멸을 방지한다. 배제의 힘을 북한 쪽으로 쏟아 대북 전쟁을 기획함으로써 미국 자본주의의 위기탈출을 도모하고 있는 구도를 생각하면서 아래의 글을 읽어보자.

상호 배제의 힘을 복수의 인간군 안에서 어떻게 처리할지가 질서 형성의 문제로 된다. 즉 질서라든가 규칙은 그리고 일반적으로 권력은, 이러한 폭력적인 힘이 대결하는 자리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질서 형성의 경우 인간은 어떤 기묘한 태도를 취해왔다. 인간은 상호 배제의 폭력을 임의의 타인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자신들에게 향하고 있던 폭력을 회피한다. 임의의 누군가에게(그 누군가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아무튼 누군가 한 사람을 향해 집단적 폭력이 집중될 때, 질서 형성을 위한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용하기 시작한다.<今村仁司 지음/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197쪽>

유대 사회의 상호 배제의 폭력을 예수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유대인들에 향하고 있던 로마제국의 폭력을 회피했다. 예수라는 희생양에게 폭력을 집중시킴으로써 유대사회의 질서를 확립했다는 것이다(이런 구도를 재빨리 알아챈 빌라도 총독이 예수의 십자가형을 내린다).

이와 같은 논의는, 지라르의 모방 욕망・희생양・상호 폭력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예수라는 희생양을 통해 로마제국(로마제국의 유대사회 지배)의 질서를 확립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존재했듯이, 북한이라는 희생양을 통해 제국 미국의 동북아 질서 확립을 시도하는 듯하다. 예수를 죽인 폭력의 모방폭력을 제국 미국이 북한을 향해 퍼붓고 있는 듯하다.

앞의 ‘지라르의 모방 욕망・희생양・상호 폭력 이론’이라는 장(章)에서 기술했듯이, 미국 주도의 희생양 메커니즘은 미국 사회가 무차별적 위기(미국 자본주의의 위기. 이 위기처방으로 미국의 軍・産・政 복합체가 북한에 대한 전쟁을 기획 중이고 이에 대한 반발로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됨)에 처했을 때 그 위기의 책임자로 북한을 지목하여 상호적 폭력을 북한에게로 집중시킴으로써 제국의 평화(Pax Americana)를 회복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런 측면에서 동북아시아의 희생양 메커니즘의 한복판에 북한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은 북한을 희생양으로 삼아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한다. 북한 위협론은 미국 주도의 희생양 메커니즘의 압권이다. 북한이라는 희생양이 제국 미국의 평화(Pax Americana)를 가져다주는 구조를 직시하면서 북한의 핵무기보유 선언을 평가해야 한다.

한마디로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 문명의 타자(제3항)인 북한을 향해 집단적인 (제국의) 폭력을 집중시키려한다. 이로써 제국의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들겠다는 것이 부시 정권의 전략이다.

질서 있는 세계란 무차별의 상태(이것은 대개의 경우 상호 폭력의 상태이며, 무차별한 폭력 전염의 상태이다) 안에 구획선을 그어서 저쪽과 이쪽을 구별 짓는 것이다. 최초의 구획선은 임의의 타자를 묶어내서 그 임의의 타자를 배제할 공간을 설정하는 것이다. 배제된 희생자의 공간이 창출되는 것과 배제되는 자를 뺀 나머지 전원 사이에 차별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
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차별화라고 하는 질서 체계는 임의의 타자(‘우리’와는 다른 제3항)에 대한 배제적 폭력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제3항 배제가 사회관계의 문법(질서의 규칙) 형성을 움직인다는 것은 그러한 사태를 가리킨다<今村仁司 지음/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197~198쪽>.

부시 정권이 제국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지구촌 안에 구획선을 그어서 저쪽(북한 등의 불량국가・테러집단)과 이쪽(미국 등 서방)을 구별 짓는 것이다. 9 ・11 사태 이후 부시 대통령이 미국의 반테러전쟁에 줄서기를 각국에 요구하면서 이쪽(反테러 전선)에 서면 ‘선(善)의 우방’에 속하고, 저쪽에 서면 테러집단에 속한다고 윽박질렀다.

이렇게 차별화하는 미국 제국의 질서 체계는 임의의 타자, 즉 ‘우리(미국)’와는 다른 제3항(북한 등의 불량국가)에 대한 배제적 폭력 없이 존립할 수 없다. 제3항(북한) 배제가, 제국 내 사회관계의 문법(질서의 규칙) 형성을 움직인다.

아글리에타가 말하듯이, 비폭력적이고 평화로운 시민적 관계에도 근원적으로 제3항 배제라는 사회형성 폭력의 각인이 찍혀 있다. 이 각인을 한 몸에 지닌 것이 화폐이다. 결국 화폐는 자본제 생산양식(구조)의 주요한 담당자인 자본으로 변환(Metamorphose)된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에도 근원적으로 제3항(북한) 배제라는 국제사회 형성 폭력의 각인이 찍혀 있다. 이 각인을 한 몸에 지닌 것이 화폐(미국의 달러)이다. 북한을 배제하여 붕괴시키려는 낙인을 한 몸에 지닌 달러가 미국의 자본제 생산양식(구조)의 주요한 담당자인 자본으로 변환된다. 즉 북한 배제용으로 쓰이는 달러가, 미국의 ‘군・산 복합체 자본의 생산양식’을 담당하는 군사자본으로 변환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아글리에타의 논리에 따라 “근대 시민사회가 제3항화 폭력(물리적인지 아닌지를 물을 것 없이)을 사회관계의 그물코의 구석구석까지 삼투시키며 ‘전반화’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제3항 배제의 운동체’로서의 자본이 다시금 상정된다. 그러므로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를 제3항 배제의 논리에 따라 표현하면, 이는 ‘배제된 제3항으로서의 화폐’에서 ‘전반화한 제3항으로서의 자본’으로의 전화이다”고 기술했는데, 이를 제3항인 북한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한 제3항화 폭력을 동아시아 국제 사회관계의 그물코의 구석구석까지 삼투시키며 제국 미국의 권력을 ‘전반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제3항(북한) 배제의 운동체’로서의 미국 자본이 다시금 상정된다. ‘배제된 제3항으로서의 달러’에서 ‘전반화한 제3항으로서의 미국 자본’으로 전화된다.”

다시금 今村仁司의 논리로 되돌아가면, 배제되는 제3항은 말할 것도 없이 폭력의 희생자이다. 제3항으로서의 희생자가 ‘임의적’ ‘자의적’이라는 것은 끝없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今村仁司 지음/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198쪽>.

미국은 임의적・자의적으로 이라크를 희생양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키더니 이번에는 북한을 희생양으로 삼은 전쟁기획을 하는 등 끝없는 전쟁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제3항(이라크・북한 등)의 희생 위에서 끝없는 전쟁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부시 정권의 전략이자 미국 자본주의・제국 미국의 전략이다.

제3항 배제의 순간은 공중에 뜬 공포의 해소인 동시에 자신이 희생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최대의 공포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공포와 불안의 정서가 있기 때문에, 일단 임의의 타인에게 폭력이 집중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격렬한 형태로 집단적 폭력에 열중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상 종종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가<今村仁司 지음/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198쪽>.

9 ・11 사태(테러) 직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이라크・시리아・이란・북한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고 전쟁 영(0)순위 명단을 작성하고 있는 제3항 배제의 순간을 회상해보자. 이때 아프가니스탄・이라크・시리아・이란・북한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이들 국가와 관련이 있는 남한 등의 국민들은 자신이 희생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최대의 공포를 경험했다. 그러나 전쟁의 영(0)순위가 아프가니스탄으로 결정되어 아프간에 미국의 폭격(폭력)이 집중되기 시작하자, 세상 사람들은 격렬한 형태로 집단적 폭력을 전달하는 CNN의 화면에 열중했다. 이어 이라크전쟁에서 미국의 폭격이 개시되자, 친미국가들(영국 등)은 격렬한 형태로 집단적 폭력(이라크 폭격)에 열중했다. 다음 차례인 북한이라는 제3항에 대한 미국의 폭격이 개시되면, 반북(反北)의 제1선에 있는 일본 등의 친미국가들이 격렬한 형태로 집단적 폭력(북한 폭격 또는 미군의 북한 폭격에 대한 후방지원)에 열중할 것이다.

이렇게 제3항(북한)을 매개로 한 동북아 국제질서가 형성되어 있는 점을 고려하면서 북・미 핵공방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제3항(북한)-희생양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일이 제국 미국의 질서 재생산・미국 자본주의의 재생산 구도와 연관되어 있는 점도 고려하면서 북・미 핵공방을 고찰해야 할것이다. 북한이라는 제3항-희생양을 만들어내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북한
위협론’이며 미국은 ‘북한 위협론’을 빙자하여 북한과의 (핵)전쟁을 기획하고 있다. ‘미국의 핵전쟁(These)에 대한 군사적인 저항(Anti-These)’으로서 2 ・10 선언이 나왔음을 생각하면서, 근대 국민국가의 연장선상에 있는 제국 미국의 ‘제3항(북한) 배제’ 구도를 파헤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제국 미국을 파헤치는 작업의 일환으로 (들뢰즈・가따리의 저서인) 앙띠 오이디푸스 의 ‘욕망・정신분열・전쟁기계’론, 네그리의 제국론, 갈퉁의 제국주의론을 분석할 필요가 있으나, 북한 핵보유선언과 관련하여 논리를 전개할 만한 능력을 필자가 갖추고 있지 못하므로 생략한다.(2005.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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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개개인은 자기보존의 힘만으로 사는 한, 반드시 타자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A는 B를, B는 C를, C는 D를, X는 Y를 제치고, 정복하고, 그러면서 산다. 저쪽에서는 A와 B가, 이쪽에서는 C와 D가, 또 저쪽에서는 X와 Y가 서로 힘을 다해 싸우고 있다. 복수의 인간이 생존하고 있는 상태란 이러한 상호 적대 상태이다. 17세기 서구 사상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전쟁 상태’이다. 이것은 이미 질서를 갖는 집단 사이의 전쟁 상태가 아니라, 질서 이전의 개인들 사이의 전쟁 상태이다.(今村仁司 지음/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 1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