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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마르크스_ 정치경제학

엥겔스의 폭력 이론

김승국

엥겔스는 군사 부문에 정통했다. 이 때문에 ‘장군(general)’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장군’ 엥겔스는 몸소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전쟁 ・평화 문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다음은 ‘장군’ 엥겔스의 활약상을 언급한 문구이다: “1849년 5월 9일 엘버펠트에서 봉기가 시작되었다. 엥겔스는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지방 공안위원회의 부탁으로 바리케이드 설치작업을 지도하였다. ‥‥5월 봉기가 있던 위기의 시기에 {新 라인 신문(Neue Rheinische Zeitung)}의 논조는 특별히 격정적이고 분노에 차 있었다. ‥‥편집실에 있는 착검된 8정의 총, 250통의 탄약, 그리고 식자공들의 붉은 자코뱅 두건으로 인해 엥겔스의 집은 장교들 사이에서 어떠한 경우에라도 단순한 기습을 통해서 함락되지 않을 일종의 요새로 통했다.”(주1)

“엥겔스는 잘 훈련된 우수한 투쟁가로 입증된 많은 노동자들이 배속되어 있는 아우구스트 빌리히 지원병 부대에서 부관의 지위를 맡았다. 그는 라스타트 요새에서의 대접전(大接戰)을 포함한 네 번의 전투에 참가하였다.”(주2)

이러한 참전 경험 탓인지 엥겔스는 전쟁 ・군사문제에 정통하게 되었고, 마르크스-엥겔스의 역할분담 구도에서 군사문제는 자연스럽게 엥겔스의 몫이었다.(주3)

1. 엥겔스의 ‘Dühring 폭력론’ 비판

엥겔스가 폭력(전쟁) 문제와 관련하여 정력적으로 매달린 작업은, 뒤링(Dühring)의 폭력론을 비판한 일이다.
엥겔스는, ‘폭력(Gewalt)’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 대한 규정, 곧 근대국가에 체현되어 있는 폭력 혹은 무력(정치권력)과 그것의 경제적 조건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인 {반뒤링론(Anti-Dühring)}의 「폭력론(Gewaltstheorie)」에서 뒤링에 대한 반박을 통해 정치에 대한 경제의 우위를 논증하고 있다.(주4)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의 체계를 수립하였다고 자처하는 뒤링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총괄될 수 있다: “정치적 제 관계의 형태는 역사적으로 기초적인 것이며 경제적 종속관계는 다만 하나의 작용일 뿐이거나 하나의 특수한 경우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항상 제2차적인 사실에 불과하다. ‥‥그러나 본원적인 것은 직접적인 정치적 폭력(politische Gewalt)에서 찾아야 하며 간접적인 경제력(ökonomische Macht)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주5)

이와 같은 뒤링의 정치우위주의에 대해 엥겔스는 그가 과거의 역사를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의 역사로 파악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렇다고 문제의 근본을 포착한 것은 아님을 비판하면서, 뒤링이 제시한 예증, 즉 로빈슨 크루소를 역시 예로 들어 그를 반박한다. 엥겔스는 “어떻게 해서 로빈슨 크루소가 프라이데이(Friday)를 노예화하였는가”라는 질문을 전면에 부각시켜 이 관계를 순수히 경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주6)

로빈슨 크루소가 지닌 총검(무력)에 의해 프라이데이를 복속시켰다고 하는 뒤링의 주장에 대해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로빈슨이 프라이데이를 예속시킨 것은 프라이데이로 하여금 로빈슨의 이익을 위하여 노동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로빈슨은 프라이데이의 노동에서 자기의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가? 여기에는 프라이데이에게 노동능력을 유지하도록 로빈슨이 주지 않을 수 없는 생활수단보다 더 많은 생활수단을 프라이데이가 자기노동으로 생산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와 같이 뒤링 씨가, 폭력이 역사적으로 기초적인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특별히 고안해 낸 이 유치한 실례는, 폭력이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며 오히려 경제적 이익이 목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목적은 그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는 수단보다 더 기초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상에서 제반 관계의 경제적 측면은 정치적 측면보다 더 기초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두 사나이에게로 다시 돌아가자. 로빈슨은 손에 검을 쥐고 프라이데이를 자기의 노예로 만든다. 그러나 이것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로빈슨에게 검 이외에 또 필요한 것이 있다. 노예는 누구에게나 봉사하지 않는다. 노예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면 다음의 두 가지 것을 소유하여야 한다. 즉 그것은 첫째로, 노예의 노동을 위한 노동도구와 노동대상이며 둘째로는, 노예가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노예제도가 가능하게 되자면 그에 앞서 이미 생산의 발전이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고 분배상 불평등이 어느 정도 존재하여야 한다. 그리고 노예노동이 전 사회의 지배적인 생산방식이 되자면 생산, 상업 및 부의 축적수단이 훨씬 더 높아야 한다. 토지가 공동소유로 되어 있는 고대의 자연성장적 공동체에서는 노예제도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거나 혹은 다만 극히 부차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하였다. 아메리카 합중국의 노예제도는 폭력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영국의 면방적 공업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그런즉 뒤링 씨가 오늘날의 소유를 폭력적 소유라고 부르며 그것을 ‘단지 생존을 위한 자연적 수단의 이용으로부터 배제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는 인간을 예속적 노역에 복속시키는 것에 기초하고 있는 그러한 지배형태’라고 특정 짓는 것은 관계 전체를 뒤죽박죽으로 만드
는 것이다.”(주7)

엥겔스는 ‘로빈슨 크루소가 프라이데이를 복속시킨 것은 직접적인 정치적 폭력(총검)이 아니라 간접적인 경제력(프라이데이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하여 제공되는 노동수단 ・노동대상 ・생활수단)이다’고 강조하면서 뒤링의 폭력론을 비판한다. 엥겔스는 프라이데이에게 예속적 노동(폭력)을 강요하기 위해서는 ① 일정한 양의 노동도구 ② 프라이데이를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 ③ 평균수준 이상의 재산 소유(사적 소유)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사적 소유를 전제로 폭력론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 엥겔스의 강조점이다. 그러면 ‘평균수준 이상의 재산 소유’는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엥겔스는 이 질문에 대하여 ‘그것은 약탈하여 온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약탈당하기 전에 먼저 노동에 의하여 획득되어야 한다’(주8)고 대답한다. 즉 사적 소유의 뿌리인 노동의 획득(착취)과 폭력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엥겔스는 “만일 폭력이 사회제도와 정치제도의 원인이라면 그 폭력의 원인은 대체 무엇인가”라고 스스로 물으면서 “그것은 남의 노동생산물과 남의 노동력의 점유이다”고 결론 내린다.(주9)

지금까지 폭력의 본질을 밝힌 엥겔스의 논리를 정리하면, ‘노동(착취)-사적 소유-노동대상 ・노동도구 ・생활수단’이라는 준거(準據)틀을 ‘폭력’개념에 접합시킬 수 있다. 이러한 엥겔스의 폭력관은, 직접적인 정치적 폭력(총검)을 ‘폭력’ 개념에 단순하게 연결시킨 뒤링의 관점과 원초적으로 다르다.

사적 소유와 폭력의 관계에 관하여 엥겔스는 “사적 소유는 결코 약탈이나 폭력의 결과로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사적 소유는 외부와의 교환을 통하여 상품의 형태로 발전한다. ‥‥사적 소유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가 변화한 결과로서 형성된다. 이 경우에 폭력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약탈자가 남의 재산을 전유(aneignen)할 수 있기 전에 이미 사적 소유 제도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따라서 폭력은 소유상태(Besitzstand)를 변경할 수는 있어도 사적 소유 그 자체를 창출할 수는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말한다.(주10)

엥겔스에 따르면, 각각 다른 사회적 ・정치적 형태들은 결국 언제나 동일한 것인 폭력에 의하여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가하여지는 그 대상에 의하여, 약탈의 대상이 되는 그것에 의하여, 즉 주어진 각 시대의 생산물과 생산력, 또한 그 자체에서 생기는 분배에 의하여 설명된다.

엥겔스는 뒤링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다: ‘경제의 자연법칙은, 우리가 국가 및 사회제도의 작용, 특히 강제적 임금노동과 결부된 폭력적 소유의 작용을 머릿속에서 제거함으로써만-우리가 이 폭력적 소유를 인간의 불변한 본성(!)의 필연적인 결과로 보지 않도록 조심함으로써만 비로소 아주 엄밀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뒤링의 이 주장과 관련하여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경제의 자연법칙은 종래에 존재하여 온 모든 경제를 사상(捨象)할 때에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는 이 법칙이 왜곡된 형태로 작용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인간의 불변한 본성이라고 ―원숭이로부터 괴테에 이르기까지의! 뒤링은 이 폭력론에 의하여 예로부터 어디에서나 폭력을 당하는 자가 다수이고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소수이었던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 하고 있다. 이것 자체가 벌써 폭력관계는 정치적 조치로써 쉽게 제거할 수 없는 경제적 조건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뒤링은 지대, 이윤, 이자, 임금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은 폭력에 의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 폭력
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겼는가? 아무 말도 없다(Non est). 폭력은 소유를 낳는데 소유=경제적 지배력이다. 따라서 폭력=지배력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권 제7편 「자본축적 과정」에서, 상품생산의 법칙은 일정한 발전단계에서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과 그 모든 술책을 낳는데 이를 위하여서는 폭력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논증하였다”(주11)

부르주아지는 아무런 폭력적 요술도 쓰지 않고 순 경제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지위를 이처럼 변혁하고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 냈다.(주12)

뒤링의 연구와 역사적 논증은 단 한마디, 폭력이라는 한마디에 그치고 있다! 그것은 그야말로 악의(mala fides)이다. ‥‥폭력이 한 시대, 한 국민 등의 경제적, 정치적 및 그 밖의 생활조건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폭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누구인가? 조직된 힘은 우선 군대이다.(주13)

폭력이란 단순한 의지적 행위(Willensakt)가 아니며 그 실현을 위한 극히 실제적인 전제조건, 특히 도구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도구들 중에서 보다 완전한 것이 보다 불완전한 것을 이긴다는 것, 나아가 이 도구들은 생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따라서 이와 동시에 통칭 무기라는 보다 완전한 폭력도구(Gewaltwerkzeuge)의 생산자는 보다 불완전한 도구의 생산자를 이긴다는 것, 한마디로 폭력의 승리는 무기의 생산에 기초하며(der Sieg der Gewalt beruht auf der Produktion von Waffen) 무기의 생산은 다시 생산 일반에 기초한다는 것, 즉 폭력의 승리는 경제력(Ökonomische Macht), 경제상황에 기초하며 폭력이 뜻대로 처분할 수 있는 물질적 수단에 기초한다는 것이다.(주14)

그러면 폭력, 군대는 무엇에 의하여 유지되는가? 엥겔스에 의하면 화폐에 의하여 유지된다. 엥겔스는 “폭력 그것은 오늘날 육군과 함대인데 이 양자는 우리 모두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시피 터무니 없이 많은 화폐가 든다. 그러나 폭력은 화폐를 만들지 못하며 기껏해야 이미 만들어진 화폐를 빼앗아 올 뿐이다.”(주15)고 설명한다.

이처럼 폭력은 폭력의 도구 ・수단, 즉 무기를 제조하고 유지하기 위한 자금 ・자본을 공급하는 경제상태에 의하여 규정된다. 자본이 폭력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라는 말이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을 위한 준비노작」에서 이를 다시금 확증한다: “군대의 구성, 편제, 무장, 전략, 전술처럼 경제적 조건에 의존하는 것은 없다. 기본은 무장이며 이 무장은 또한 도달한 생산수준에 직접 의존한다. 돌 무기, 청동제의 무기, 철제의 무기, 갑옷, 기병대,화약 그리고 대공업이 후장총과 대포에 의하여, 즉 규칙적으로 작업하며 거의 절대적으로 동일한 제품을 생산하는 기계를 가진 대공업만이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생산물에 의하여 일으킨 군사상의 대변혁, 군대의 구성과 편제, 전략과 전술은 또한 무장에 의존한다. 이 무장은 또한 교통의 상태에도 의존한다.”(주16)

엥겔스는 여기에서 ‘무장, 즉 전쟁이 교통(교류; Verkehr)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stche Ideologie)}의 폭력-전쟁 개념을 재확인한다.

2. 생산력과 폭력의 상호관계

엥겔스는 더 나아가 무기 ・무장(폭력수단)-전쟁과 생산력(경제력・생산수준)의 상호관계를 다음과 같이 이끌어 낸다:
1) “바로 이 육군과 함대처럼 경제적 조건에 의존하는 것은 없다. 무장, 편성, 조직, 전술, 전략은 무엇보다 그때그때의 생산수준과 교통수단에 의존한다. 여기에서 혁명적 작용을 한 것은 천재적 장군들의 ‘지성의 자유로운 창조물’이 아니라, 보다 우수한 무기의 발명과 병력자원의 변화였다; 천재적 장군들의 영향력은 기껏해야 전투방식을 새로운 무기와 전투원에게 적응시키는 데 지나지 않는다. ‥‥14세기 초에 폭약이 아리비아에서 서유럽으로 건너갔고‥‥이 폭약은 전쟁진행 전반에 변혁을 일으켰다. 그러나 화약과 화기(火器)의 도입은 결코 폭력행위가 아니었으며 하나의 공업적인 진보, 따라서 경제적인 진보였다. ‥‥화기의 도입은 전쟁진행 자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배-예속 관계에도 변혁적으로 작용했다. ‥‥화약과 화기를 가지기 위하여서는 공업과 화폐가 필요했는데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도시의 시민들(Städtebürger)이었다. 그러므로 화기는 처음부터 도시와 도시에 의거하고 있던 신흥 군주제의 무기로서 봉건귀족에 대항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난공불락이었던 기사(騎士)들의 돌 성벽이 시민들의 대포 앞에서 무너지고 시민들의 화승총의 탄
환이 기사의 갑옷을 꿰뚫었다. 갑옷을 입은 귀족의 기병대와 더불어 귀족의 지배도 붕괴하였다.(주17)

2) “군대의 전체 조직과 전투방식, 그리고 이와 아울러 승리와 패배는 물질적인, 즉 경제적인 조건들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적 자원과 무기재료, 따라서 주민의 질과 양, 그리고 기술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술의 진보는 거의 폭력적으로 전투방식의 변화, 아니 변혁을 강요했다. ‥‥그 밖에도 전쟁진행이 생산력의 발전, 자국의 후방이나 교전 지역의 교통수단에 얼마나 의존하는가 하는 것은 오늘날 근면한 하사관이면 누구나 뒤링 씨에게 설명하여 줄 수 있다. 요컨대 어디에서나 또 언제나 폭력을 도와 승리하게 하는 것은 경제적 조건과 경제적인 강력한 수단 ―이것이 없이는 폭력은 폭력이기를 중지한다 ―이다.(주18)

3)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본원적인 것은 직접적인 정치적 폭력에서 찾아야 하며 간접적인 경제력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그와 정반대이다. 폭력 자체의 ‘본원적인 것’으로 드러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대공업의 강력한 수단(Machtmittel)을 뜻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경제력(Ökonomische Macht)이다.”(주19)

3. ‘군사’와 생산양식의 관계

엥겔스의 군사에 관한 이론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 ‘군사(軍事)’가 ‘생산양식’에 의존하거나 생산양식의 반영이라는 점이다. 엥겔스에 있어서 생산양식,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총체(總體)는, 무력전(武力戰)의 주요한 구성요소인 군비(軍備)의 질(質)과 병력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명제는 엥겔스의 {반(反)뒤링론} 제2편 「폭력론」에서 깊이 다루어진다.

2) 이들은 ‘군사’, 특히 군대의 기능적 측면인 ‘폭력-전쟁’을 ‘하나의 경제적인 힘’으로 파악한다. 또 ‘폭력-전쟁’이 ‘생산양식’ 생성의 지렛대로서, 생산양식 생성의 조산부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비중을 둔다. 이 문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권의 「본원적 축적」에서 다루어진다.(주20)

이러한 두 가지 문제제기는, ‘군사’를 생산양식과 연관 지어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엥겔스에 있어서 ‘군사’와 생산양식의 역사적 관련은, ‘군사’가 생산양식에 의존한다는 정식(定式), ‘군사’가 생산양식의 생성을 촉진하는 계기라는 정식으로 단순하게 환원할 수 없게 만든다. 다음과 같은 엥겔스의 지적은 이를 증명한다: “전쟁수행(작전)이 대공업의 한 분야가 된 순간부터 장갑함(裝甲艦), 속사 연발포(速射 連發砲), 연발총, 강철(鋼鐵)탄피 총알, 무연(無煙) 화약 등 이들 모든 것들은 대공업이 없으면 생산될 수 없을 것이며, 대공업은 정치적 필연성(politische Notwendigkeit)이 되었다.”(주21)

여기에서 대공업(大工業)이 ‘정치적 필연성’이라는 역사인식이 주목된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전제는, ‘전쟁수행이 대공업의 한 부문’이라는 역사단계, 군사적인 역사단계, 즉 군사적인 지표에 입각하는 역사단계 규정이다. ‘군사’와 ‘생산양식(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관련에서 전자가 후자를 추진하는 기동력임을 알 수 있다.(주22)

이러한 군사적 역사인식은 엥겔스가 말하는 ‘근대적 전쟁방식’과 관련이 있다. 엥겔스에 의하면 근대적 전쟁방식(근대적 군사제도)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생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정한 발전의 불가결한 전제가 된다.(주23)

엥겔스의 {반뒤링론} 제2편의 「폭력론」 가운데서 군사에 관한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군대의 구성 ・편성 ・무장 ・전략 ・전술은 경제적 조건에 의존한다.
② 군대의 구성 ・편성 ・전략 ・전술은 무장에 의존한다.
③ 무장은 직접적으로 생산의 단계에 의존한다. 군대의 구성 ・편성이 경제적 조건, 생산의 단계, 즉 생산양식에 의존한다는 것이다[‘군사’가 생산양식에 의존한다]. [여기에서] 군대의 ‘구성 ・편성’[‘군사’]와 ‘생산양식’을 매개하는 것이 ‘무장’, 즉 무
기이다.(주24)

엥겔스에 의하면 <‘하나의 경제적인 힘(Potenz)’=‘새로운 사회를 낳는 조산부’=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국가권력의 폭력장치인 군대이며, 이 군대가 ‘군사’와 생산양식을 매개하는 무기를 운용한다
(1996년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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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 지음, 김라합 옮김 {칼 마르크스 전기} 제1권(서울: 소나무, 1989), 311~312쪽.
(주2)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 지음 김라합 옮김, 위의책 제1권, 316쪽.

(주3)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각자 자기 고유의 연구 분야를 갖고 있었지만 학문적 관심에 있어서 대개 일치하였으며 서로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자기 자신을 위해 또는 군사이론과 군사(軍史)의 탁월한 전문가인 엥겔스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면서 군사문제에 손을 댔다. 그렇지만 그는 군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서는 ‘맨체스터의 육군장관(Kriegsministerium zur Manchester)’인 엥겔스를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다(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 지음 김라합 옮김, 위의 책 제1권, 392쪽).

(주4) 이해영 편 {엥겔스 연구} (서울: 녹두, 1989), 155쪽.
(주5) Engels {Anti-Dühring}, MEW 20, p.147.
(주6) 이해영 편, 위의 책, 155쪽.
(주7) Engels {Anti-Dühring}, MEW 20, pp.148~150.
(주8) Ibid., p.150.
(주9) 엥겔스 지음, 한철 옮김 「반뒤링론을 위한 준비 노작」 In; {반뒤링론}(서울:이성과 현실, 1989), 443쪽.
(주10) Engels {Anti-Dühring}, MEW 20, pp.150~151.
(주11) 엥겔스 지음 한철 옮김 「반뒤링론을 위한 준비 노작」, 위의 책, 447~448쪽.
(주12) Engels {Anti-Dühring}, MEW 20, p.153.
(주13) 엥겔스 지음 한철 옮김 「반뒤링론을 위한 준비 노작」, 위의 책, 449쪽.
(주14) Engels {Anti-Dühring}, MEW 20, p.154.
(주15) Ibid.,
(주16) 엥겔스 지음 한철 옮김 「반뒤링론을 위한 준비 노작」, 위의 책, 449~450쪽.
(주17) Engels {Anti-Dühring}, MEW 20, p.155.
(주18) Ibid., p.159.
(주19) Ibid., p.161.
(주20) 笠井雅直 「マルクス・エンゲルスの軍事史の方法(上)」 {經濟科學}(名古屋大學 經濟學部) 30권1호(1982), 61~62쪽.
(주21) Engels {Engels an Nikolai Franzewitsch Danielson in Petersburg(1892.9.22)},MEW 38, p.467.
(주22) 笠井雅直 「マルクス・エンゲルスの軍事史の方法(上)」, 위의 책, 62쪽.
(주23) 笠井雅直 「マルクス・エンゲルスの軍事史の方法(上)」, 같은 책, 66쪽.
(주24) 笠井雅直 「マルクス・エンゲルスの軍事史の方法(上)」, 같은 책, 8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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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43호에 실려 있다.
* 김승국『마르크스의「전쟁‧평화」론』(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255~266쪽에도, 위의 글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