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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마르크스_ 정치경제학

마르크스와 비판적 평화연구가들

김승국

마르크스는 ‘폭력의 부재(不在)’로서의 평화, 부르주아지의 폭력이지양된 평화를 강조한다. 마르크스의 ‘평화’는 계급착취 ・계급차별 ・억압 ・학정(虐政) ・빈곤이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상태를 뜻한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소수의 지배계급(부르주아지)만이 평화를 향유하는 사회는 평화로운 사회가 아니다. 그는,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폭력이 근절되어 사회 ・국가에 폭력이 내재하지 않는 평화상태를 지향한다.

마르크스는 평화에 관하여 말하면서 폭력 ・전쟁 ・계급투쟁 ・혁명 등 복합적인 요소를 동시에 고려하는바, 마르크스의 평화론은 중층적(重層的)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적인 후계자들 중 일부는 이러한 중층적인 요소를 간과하거나, 마르크스 평화론의 다양한 심급(審級; level)을 외면하기도 했다. 이 결과 마르크스 사상에서의 평화지향적인 부분이 거론되지 않는 경향을 낳았다.

이렇게 협소해진 마르크스 평화론의 영역을 넓히는 데 노력한 갈퉁(Galtung), 젱하스(Senghaas) 등의 비판적 평화연구가들에 의하여 마르크스 평화론의 정수(精髓)가 계승되고 20세기의 시대상황에 걸맞게 현대화되었다. 비판적 평화연구가들은, 마르크스의 ‘Gewalt’와 유사한 범주를 갖는 ‘구조적 폭력(構造的 暴力)’을 통하여 폭력 지향적인 현대사회를 해부하며, ‘구조적 폭력’을 지양할 ‘적극적 평화’를 실천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1. 비판적 평화연구가들의 ‘적극적인 평화’

평화연구가들이 평화를 실현하는 조건을 탐구하기 위해 폭력이나 갈등에 관한 연구를 하는 것은 옳지만, 여기에만 치중하게 될 때에는 소극적 평화(negativer Friede)에만 매달린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까지의 이른바 보수적인 평화 연구가들은 당장의 폭력과 갈등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것이 평화의 당면 과제라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비판적 평화 연구가들은, 이러한 평화 연구는 소극적인 평화 탐구일 뿐이라고 한다. 그들은 갈등과 폭력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한 탐구와 그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즉 그 원인을 해소시키는 적극적인 평화의 강구 없이는 일시적으로 억제되거나 제한된 갈등과 폭력은 또다시 나타나게 되고 더 위험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더욱더 적극적인 평화(positiver Friede)는 인권의 보장 또는 사회 정의, 경제 발전 등의 평화의 적극적인 요건들이 충족되는 상태이다.(주1)

그러면 비판적인 평화연구가 밝히고자 하는 대상과 방법은 무엇인가? 보수적인 평화연구, 안보전략적인 평화연구를 비난하면서 비판적 평화연구가 얻어낸 중요한 개념은 평화에 관한 적극적 개념(der positive Begriff)이다. 평화란 것을 단지 전쟁이 안 일어나는 상태(Abwesenheit des Krieges)로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조용한 상태나 표면적으로 평온한 상태를 의미하게 된다. 이것을 이들은 평화(peace, Friede)가 아니라 평정(平定; pacification, Befriedung)이라고 개념적으로 구별했다. 평화연구를 평정상태를 이루는 조건에 관한 연구로만 생각한다면 이것은 권력을 가진 지배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진정한 평화연구는 적극적인 평화의 개념을 얻음으로써만 수행될 수 있는데, 이것은 특히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잠재적인 요인들이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고 갈퉁이 주장했다. 갈퉁에게 있어서 이 요인은 바로 폭력이다. 그래서 갈퉁은 평화 개념을 적극적으로 정의해서 폭력이 없는 상태(Zustand von Gewaltlosigkeit), 그리고 사회 정의의 상태라고 규정했다.(주2)

결국 평화연구는 갈등과 폭력이 없는 평화체제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에 관한 연구라고 젱하스는 주장하고 있다. 전쟁과 폭력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국제관계와 사회질서는 조직화된 평화부재의 상태(die organisierte Friedlosigkeit)일 뿐이며, 이것은 항구적인 위협체제(Drohsystem)이다. 평화연구는 바로 이 위협체제를 평화체제(Friedenssystem)로 바꾸어 놓는 전략과 방법을 개발하는 실천적이며 해방적인 연구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평화체제의 탐구는 피히트(Picht)가 말한 대로 평화의 유토피아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주3)

2. ‘구조적 폭력’과 평화의 확대 개념

마르크스의 ‘Gewalt’와 ‘Macht’의 개념상의 혼선을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폭력’의 범주를 더욱 포괄적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에 착안한 갈퉁 등의 비판적 평화연구가들이 ‘구조적 폭력(die strukturelle Gewalt)’이라는 대안을 내놓음으로써, 마르크스의 폭력 개념을 크게 손상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마르크스의 ‘Gewalt’가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을 확대한다.

갈퉁은 ‘폭력’의 개념을 확대시킴으로써 인간에 의한 물리적 폭력 이외에도 사회구조적 조건들이 인간에게 폭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갈퉁의 견해에 따르면, “만일 인간들이 영향을 받아 그들의 현실적인 육체적 정신적 실현이 그들의 잠재적인 실현(가능성) 보다 적다면, 거기에 폭력이 있는 것이다.”(주4) 여기에서 ‘폭력’은 ‘잠재적 가능성(das Potentielle)과 현실적인 것(das Aktuelle)의 차이의 원인’으로 정의되고 있다. ‘폭력’은 ‘가능했을 것(das, was hätte sein
können)’과 ‘현실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das, was ist)’ 사이의 차이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이 둘 사이의 거리를 더욱 확대하는 것이거나 혹은 이 차이의 축소화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주5)

갈퉁은 폭력을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부정적 ‘영향력’으로 이해하고 있다. 영향력은 세 가지 전제조건을 지니고 있다: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 혹은 인간주체, 영향을 받는 어떤 것 혹은 인간객체, 영향을 미치는 실천적 방법 혹은 인간의 행동, 이 전제조건들에서 갈퉁은 폭력의 여섯 가지 차원들을 밝혀낸다. 각 차원은 각기 두 가지 유형의 폭력형태를 포함하므로 이 여섯 차원들에서 폭력의 열두 가지 유형(주6)이 드러난다.

갈퉁은 영향을 끼치는 주체와 관련하여 개인적인 차원과 구조적인 차원으로 분류한다. 즉 한 인격으로서 행동하는 주체가 있는 경우를 갈퉁은 ‘개인적 폭력(die personale Gewalt)’ 혹은 ‘직접적 폭력’이라 부른다. 행동주체가 없는 경우는 ‘구조적 폭력’ 혹은 ‘간접적 폭력’으로 불린다. ‘개인적 폭력’이란 폭력의 주체와 객체가 분명한 경우이며, ‘구조적 폭력’이란 폭력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명한 관계가 없는 경우를 의미한다. 한 남편이 그의 아내를 구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개인적 폭력’이다. 그러나 백만의 남편들이 백만의 아내들을 무식한 상태에 머물게 한다면 그것은 ‘구조적 폭력’이 될 것이다. 만일 상류층의 평균수명이 하류층의 평균수명보다 두 배나 된다면 거기에는 ‘구조적 폭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구조적 폭력’의 경우에 폭력은 체제 안에 불평등한 권력관계, 삶의 불평등한 기회, 자원의 불공정한 분배 등의 형태로 포함되어 있다. 자원의 불공정한 분배는 교육기회의 불평등, 의료혜택의 불평등 뿐만 아니라 자원에 대한 결정권한의 불평등한 분배를 초래한다. ‘구조적 폭력’의 조건은 사회적 부정의인 것이다.(주7)

구조적 폭력이란, 간단히 말하면, 한 사회의 구조나 체제가 갖는 폭력성을 말하는데, 가령 한 노동자가 저임금의 구조 때문에 착취를 당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다면, 그는 이 사회로부터 구조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억압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여 자아실현을 할 수 없는 것은 대체로 이 구조적인 폭력에 의한 것이며, 실제로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땅이나 집이 없어서 굶주려 죽고, 영양실조로 죽게 되는 수천만의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들이라는 것이다.(주8)

‘구조적 폭력’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 전제조건은 사회구조, 특히 사회계층에 대한 연구이다. 갈퉁은 사회구조를 설명하기 위하여 ‘행위주체(Akteur)’, ‘체제(System)’, ‘구조(Struktur)’, ‘위계(Rang)’, ‘영역(Ebene)’ 등의 개념을 사용한다. 행위주체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면 체제가 조직된다. 체제 안에 존재하는 상호작용을 통하여 가치들(Werte)이 교환되고 분배된다. 행위주체들은 보통 여러 체제들 안에서 상호작용한다. 이 상호작용 체제들의 전체가 구조인 것이다.(주9)

갈퉁은 개인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의 기본적인 구별에 의거하여 폭력이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폭력의 부재(不在)로서 이해되는 평화도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그림 4>와 같이 폭력의 확대개념(擴大槪念)으로부터 평화의 확대개념이 나온다.
* 김승국『마르크스의 「전쟁‧평화」론』(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228쪽에 <그림 4; 갈퉁에 있어서 폭력과 평화의 확대 개념>이 실려 있으니 참고하세요.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평화에도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즉 개인적 폭력의 부재(不在)와 구조적 폭력의 부재이다. 이것들을 각각 소극적 평화(消極的 平和)와 적극적 평화(積極的 平和)라고 명명(命名)한다.(주10) 여기에서 소극적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이며, 적극적 평화란 ‘억압 ・착취 ・압정(壓政) ・인권탄압 ・인종차별 ・빈곤 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따라서 갈퉁의 ‘평화-해방’은 마르크스의 ‘평화-해방’과 접맥될 수 있다. 전쟁 부재 상태로서의 평화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억압 ・착취 ・압정 등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한 갈퉁의 입장이,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으로서의 평화’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평화연구가인 덴시크(Dencik)는, 적극적 평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첫째 변혁의 전략에 따라야 하며, 둘째로 평화연구가 ‘혁명연구’의 성격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주11) 이렇게 해방적 관심(解放的 關心)을 갖는 비판적 평화연구가들의 변혁지향적인 태도(주12)는, 마르크스의 ‘혁명에 의한 평화관’과 비슷한 점이 많다.

구조적 폭력의 축적은, 사회적 공정(公正)의 불균등 배분 ・사회적 가치의 비대칭적(非對稱的)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구조적 폭력’은, 지배적인 특권을 쥔 권력 엘리트와 차별대우 받는 대중들이 구분되는 현실에서 출발하므로 마르크스의 ‘Gewalt’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폭력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구조적 폭력의 축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갈퉁, 젱하스 등의 비판적 평화연구가들이 강조한 ‘사회의 부당한 폭력’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억압체제’와 연관되며 양자는 ‘부르주아지의 폭력 제거’라는 공통된 지향점을 갖고 있다.

비판적 평화연구가들이 계급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체제의 반평화성(反平和性), 사회체제의 ‘조직적인 평화부재 상태’, 차별대우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Abschreckung)체제・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지양할 실천학(Praxeologie)을 강구한 점에서,마르크스의 폭력 ・전쟁 ・평화론과 만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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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이삼열 「평화의 개념과 평화운동의 과제」 {현대사회와 평화} (서울: 서광사,1991), 180쪽.
(주2) 이삼열 지음 {平和의 哲學과 統一의 實踐}, 42~43쪽.
(주3) 이삼열, 위의 책, 46쪽.
(주4) ガルトゥング 지음, 高柳先男 외 옮김, {構造的暴力と平和} (東京: 中央大學出版部, 1991) 5쪽.[Johan Galtung 「Violence, Peace and Peace Research,1969」 외]
(주5) ガルトゥング 지음 高柳先男 외 옮김, 위의 책, 6쪽.

(주6) 물리적인 개인적 폭력, 심리적인 개인적 폭력, 물리적인 구조적 폭력, 심리적인 구조적 폭력, 대상이 존재하는 개인적 폭력,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개인적 폭력, 대상이 존재하는 구조적 폭력,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구조적 폭력, 의도적인 폭력, 의도적이 아닌 폭력, 현재적顯在的(명시적)인 폭력, 잠재적인 폭력.

(주7) 윤응진 「평화운동과 비판적 평화연구의 배경과 주제들」 {평화- 이론과 실천의 모색(Ⅱ)}(서울: 삼민사, 1992), 181쪽.
(주8) 이삼열 {平和의 哲學과 統一의 實踐}, 67쪽.
(주9) 윤응진 「평화운동과 비판적 평화연구의 배경과 주제들」, 위의 책, 184쪽.
(주10) ガルトゥング 지음 高柳先男 외 옮김, 위의 책, 44쪽.

(주11) 평화의 상태를 명시적인 갈등의 표출과 저항이 없는 상태로 동일시하는 보수적인 평화연구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평정의 연구일 뿐이라고 덴시크는 비판한다. 그는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는 평정의 전략(Befriedungsstrategie)이 아니라 변혁의 전략(Revolutionsstrategie)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삼열 {平和의 哲學과 統一의 實踐}, 45쪽).
덴시크는 앞으로의 평화연구는 ‘혁명연구(Revolutionsforschung)’의 성격을 지닌 것이어야 함을 역설한다. 평화연구는 폭력에 책임이 있는 구조적 관계들의 폐지를 위한 수단들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은 기존의 권력구조들의 질적인 변혁을 성취하기 위하여 필요한 방법으로써 요청되는 것이다. 이제 혁명적인 평화연구는 ‘통제 ・통합 ・평정’ 대신에 ‘착취, 잔인성, 인간과 사회의 훼손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 세계의 폭력의 뿌리를 공격’함으로써 ‘현실적인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해방 ・양극화 ・혁명’에 관하여 연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평화연구의 새로운 ‘학문적’ 인식인 것이다(윤응진 「평화운동과 비판적 평화연구의 배경과 주제들」,위의 책, 196쪽).

(주12) 결국 비판적인 새로운 평화연구가들이 주장하는 평화운동은 적극적 평화개념에 입각해서 기존의 국제정치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위협체제의 원칙과 합리성을 극복하자는 운동이다. 이를 위해서는 위협체제의 합리성의 강요에서 벗어나려는 해방적 관심이 작용해야 한다고 젱하스는 {위협과 평화(Abschreckung und Frieden)}에서 주장한다(이삼열 「평화의 개념과 평화운동의 과제」, 위의 책, 181~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