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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마르크스_ 정치경제학

마르크스 평화론의 특징

김승국

근대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평화론의 특색은, ‘평화’를 전쟁이 없는 상태로 보는 데 있다. 이들은 전쟁 부재(不在)로서의 평화를 상정함으로써, 평화에 관한 목가적(牧歌的)인 신념을 배양하거나, 평화에 대한 이성적 ・도덕적인 태도를 갖게 하는 데 공헌했다. 이들은 무엇보다 제후와 국왕의 권세욕과 탐욕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보고 이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이런 지배 세력들이 제거된다면 인민들 사이의 평화도 실현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와 인민 대중이 봉건 지배세력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토록 갈망하던 평화를 얻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의 현실은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예고했던 이상(理想)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가 인간을 지배하는 힘이 되는 한, 계급투쟁과 전쟁은 노동계급과 그 밖의 근로대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만큼이나 합법칙적 현상이다. 자본주의는 본성상 평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처럼 마르크스의 평화론은 ‘자본주의가 평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데에서 시작한다.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평화론이 ‘전쟁 부재로서의 평화’를 강조하는 데 그쳤으나, 마르크스의 평화론은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으로서의 평화’를 주장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평화론은 근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평화론에 대한 반명제(反命題; anti-these)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1.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하는 평화

부르주아지가 벌이는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는 서로 다를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는 본성상(本性上) 평화 ・전쟁방지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노예나 중세기의 농민과 달리 사회적 행동에 있어서 독립된 주체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인신적(人身的)인 종속관계로부터 자유로우나 생산수단의 소유를 완전히 빼앗긴 근로자이다. 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쟁을 통하여 이득을 기대할 수 없으며, 전쟁에 대한 어떤 이해관심(利益關心)도 갖지 않는다. 그러므
로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늘 전쟁의 반대자이었다.(주1)

프롤레타리아트가 평화에 마음을 두는 이유를 밝힌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의 규칙은 평화이며, 노동이 평화의 버팀목임을 강조한다. 참된 평화를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이 평화의 근간이며, 평화를 위한 수미일관(首尾一貫)한 최초의 세력이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주도의 평화는,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평화와 성격을 달리하고, 평화 지상주의의 ‘평화’와 차원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2. 평화도 정치의 연속이다

계급사회의 지배계급이 자신의 이익 때문에 전쟁을 벌이는 데 저항하는 정치투쟁 가운데서 평화의 사상이 싹튼다. 즉 평화의 사상은, 전쟁의 원인인 계급사회를 파기하는 정치투쟁, 전쟁을 불가피하게 수행하는 낡은 국가권력을 타도하는 혁명과 당연히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과학적 사회주의는, 이러한 정치투쟁과의 연결 속에서 평화의 사상을 고찰한다.(주2)

마르크스에 의하면, 평화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투쟁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전쟁이 정치의 연속’인 것처럼 ‘평화도 정치의 연속’이라는 가설을 수립할 수 있다.

계급사회에서 평화는 전쟁이 아닌 상태, 즉 전쟁들 사이의 휴지기를 의미하며, 이 기간 동안 지배계급은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거나 다른 국가나 민족을 전쟁이라는 수단을 쓰지 않고도 예속시킬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한다.

계급적으로 적대적인 사회에서 전쟁과 평화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존재 형태일 뿐이어서 강고한 평화체제를 이룰 수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대중들에게 평화롭게 살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적인 평화가 깃들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투쟁을 통하여 정치권력(국가권력)이 프롤레타리아의 손 안에 있도록 해야 참된 평화가 확보될 수 있다. 이처럼 정치투쟁을 통한 평화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보면 ‘평화도 정치의 연속이다.’

3. 평화의 최고상태는 공산주의이다

1840년대 영국 노동자의 처참한 생활을 그린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의 결론 부분에서 엥겔스는 ‘자본가의 착취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노동자 계급에 의한 혁명은 오고야 말 것이다.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이끌어내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고 경고한다. 한편 엥겔스는 위의 경고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성장발전이 아닌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에 좌우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수용하는 데 비례하여, 그에 정비례(正比例)하여, 혁명은 유혈 ・복수・광포(狂暴)를 감소시킬 것이다. 공산주의는, 그 원리에 따르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불화(不和; Zwiespalt)를 초월한다. 공산주의는 이 불화를, 오직 현재에 대한 역사적 의의라는 점에서만 승인하며, 이 불화가 미래에도 정당화될 것으로 인지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꼭 이 불화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이 불화가 현존하는 한, 억압자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분격(憤激)이 필연적인 것으로, 초기 단계의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지렛대로서 승인한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 분격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바로 인류의 문제이며, 단지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주3)

위의 인용문에서 평화와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는, 공산주의가 평화를 완벽하게 보장할 수 있는가, 공산주의 단계의 평화상태는 어느 정도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둘째는, ‘공산주의 단계에서 평화의 수혜자는 프롤레타리아트뿐인가’라는 질문이다.

엥겔스가 말하듯이 공산주의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불화를 초월하는 ‘화(和)’ 자체이다. 공산주의는 반드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불화를 지양할 것이기 때문에, 현재시제(現在時制)에서만 이 불화를 인정한다. 인류를 거의 양분하다시피 했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화(和)’야말로 최고의 평화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공산주의에 의하여 이러한 지고(至高)의 평화상태를 달성할 수 있다.

엥겔스는 (공산주의에 의한) 두 계급의 불화 초월(평화)을 언급한 부분이 한갓 낭만적인 계급화해를 주장한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음을 의식한 듯, 1892년의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 독일어 재판(再版)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자기비판한다: “본서(本書)의 이론적 입장이 오늘날의 나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주의할 만하다. [본서를 집필한] 1844년에는 근대적인 국제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이 저서는 국제사회주의의 맹아적(萌芽的)인 발전단계의 하나를 대표할 뿐이다.”(주4)

이러한 엥겔스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엥겔스는 ‘공산주의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불화를 초월한다’는 문구를 수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엥겔스의 ‘공산주의=두 적대계급의 불화 초월’을 평화 문제로 끌어들여 ‘공산주의는 두 적대계급의 불화를 초월(지양)한 최고의 평화상태 ・지고(至高)의 평화상태’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공산주의는, 인류 역사의 선행(先行)한 어떤 단계와도 다른 단계, 즉 참으로 ‘항구적(恒久的)인 평화’의 단계, 전반적인 평화의 단계이다. 이는, 세계 공산주의 사회의 시민인 각 개인에게 평화가 도래하는 인류문명의 새로운 발전단계이다. 이와 같은 평화, 즉 공산주의 평화에 도달하기까지 멀고 먼 역사의 도정(道程)을 더듬어 찾지 않으면 안 된다.(주5)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공산주의가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닌 인류의 문제’라는 엥겔스의 언급에 따라 ‘공산주의가 보장하는 평화도 노동자만의 것이 아닌 인류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평화를 주도했으나, 그 평화의 성과는 인류에게 돌아간다고 풀이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인류를 대표하여 평화를 쟁취했기 때문에, 인류가 평화의 수혜자로 될 수 있다.

그런데 엥겔스는 ‘공산주의는 인류의 문제이며 단지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기술에 대해서도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 독일어 재판(再版) 서문(1892년)을 통하여 자기비판을 한다: “예컨대 ‘공산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단순한 당파적 교의(黨派的 敎義; Parteidoktrin)가 아니라 자본가를 포함한 전 사회(全 社會)를 해방하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는 주장은, 추상적인 의미에서는 올바르지만 실제로는 무익하며 좋지 않다.”

한편 엥겔스는 “사회혁명과 실천적인 공산주의(der praktische Kommunismus)가 우리들의 현재의 관계에서 생겨날 필연적인 결과라면,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제도에 대한 폭력적이며 유혈적(流血的)인 변혁을 방지할 수 있는 방책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한 수단은 단 하나밖에 없다. 즉 공산주의를 평화적으로 실시(die friedliche Einführung)하든가, 적어도 공산주의를 준비하는 것이다.”(주6)라고 말하며 ‘공산주의의 평화적 실시’를 강조한다.

이는 사회문제의 유혈적(流血的)인 해결을 원치 않는 엥겔스의 심정을 잘 드러낸 문구이다. 여기에서 ‘유혈적인 변혁을 방지할 수단으로 공산주의의 평화적 실시’를 주장한 점을 이해할 수 있으나, ‘평화적’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문제이다.

엥겔스가 ‘공산주의의 실시’에 굳이 ‘평화적’이라는 말을 삽입한 뜻을 정확히 간파하는 것이 요체이다. 공산주의는 지고(至高)의 평화상태인데 평화적으로 실시되는 길이 아닌 다른 방법이 있는지에 관하여 엥겔스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앞의 가설(‘공산주의는 지고至高의 평화상태’)은 ‘단(但) 공산주의가 평화적으로 실시될 경우’라는 조건을 부가해야 성립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지고至高의 평화상태’가 미래 시제(時制)에 속한다면, 공산주의의 과도기인 사회주의 단계의 평화(주7)는 현재완료 또는 근접미래(近接未來) 시제에 속할 것이다. 물론 부르주아가 지배하던 부르주아 민주주의 시대의 평화는 과거 시제에 속한다.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이 변혁되는 과정 ・정도 ・속도에 따라 평화의 성격도 변증법적으로 변화(예를 들면 근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평화에서 ‘과학적’ 사회주의의 평화에로의 변증법적 ・질적인 변화)할 수 있음을 간파했다. 여기에서 마르크스 평화론의 동적(動的)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 평화론이 동적(動的)인 요소를 갖출 수 있는 요인은, 그가 혁명을 상정하면서 평화문제에 접근한 데 있다. 마르크스가 혁명의 평화론자로서 자신의 평화관을 설정한 방식을 주제별로 나누어 설명함으로써 마르크스 평화론의 구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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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ヴェ・ザグラジン, 淺原 正基 옮김 「勞動者階級, 社會主義, 平和」 {世界經濟と國際關係}, 1979년 제11호, 10쪽.[Академия Наук СССР: {Мировая Экономика и Международные Отнощения} No.11, 1979]
(주2) 平野義太郞 지음 {平和の思想} (東京: 白石書店, 1978), 71쪽.
(주3) Engels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 MEW 2, p.505.
(주4) 廣松涉 지음 {エンゲルス論} (東京: 筑摩書房, 1994), 293쪽.
(주5) ヴェ・ザグラジン, 淺原 正基 옮김 「勞動者階級, 社會主義, 平和」, 위의책, 30쪽.
(주6) Engels {Zwei Reden in Elberfeld Ⅱ} MEW 2, p.556.
(주7) 사회주의에서는 공업 활동과 농업 활동, 정신적 활동과 육체적 활동 간의 대립이 널리 지양되며, 각 종족 및 민족 간에 권리의 평등화가 실현된다. 착취 없는 사회에서는 상호 협력과 상호 보조가 사람들의 공동 작업과 공동의 삶을 특징짓는다. 노동자와 그 동맹자, 즉 인민이 주인이 된다. 그리하여 자민족과 타민족에 대한 억압과 수탈 및 전쟁과 침략에 관심을 쏟는 어떠한 계급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평화가 사회주의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이다.
사회주의는 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부조리를 안고 있는 낡은 사회와는 반대로 평화를 그 국제적 원리로 하는 하나의 사회 질서를 창출한다. 왜냐하면 이때는 모든 민족들에서의 지배적 원리가 노동이라는 동일한 원리이지 착취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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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의 제4장 1절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40호에 실려 있다.
* 김승국『마르크스의「전쟁‧평화」론』(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189~197쪽에도, 위의 글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