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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마르크스_ 정치경제학

마르크스 ・엥겔스의 군비 축소론

김승국

1. 군비(軍費)에 관한 입장

마르크스 ・엥겔스는 군비(軍費)에 반대하지도 않고 찬성하지도 않는다. 어떠한 역사적 조건 아래에서 군비가 형성되는지를 문제 삼기 때문이다. 군비는 일정하게 주어진 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이루어지므로 군비의 성질이 역사적인 조건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마르크스 ・엥겔스는 늘 이러한 관점에서 군비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군비에 찬성하고, 다른 경우에는 군비에 반대했다. 마르크스 ・엥겔스에 있어서 군비는 계급투쟁의 용구(用具)이다. 군비가 ‘어떤 계급의 용도로 쓰이느냐’는, 군비의 역사적 성질에 의하여 규정된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이 생산관계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군비에도 적용될 수 있다.

2. 상비군을 통한 ‘강력(强力; Gewalt)’ 확보

마르크스 ・엥겔스에 따르면 근대자본주의 국가의 상비군(常備軍) 제도는 부르주아지의 계급지배 강화의 도구이며, 군국주의 ・군비확장을 통하여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관념적으로 군비를 부정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성립된 현실은 어떻게 할 수 없다. 군비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사회주의적인 태도가 아니다. 실제로 유력한 사회주의자로서 군비를 부정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마르크스는 근대국가의 상비군 제도의 역사성을 해부 ・비판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민병제(民兵制)로 발전해 갈 수 있으며,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이러한 전화(轉化)를 촉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 있어서의 내전(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에서, 상비군은 중앙집권 국가권력의 계통적인 분업계획(分業計劃)의 일부이며, 봉건제도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강력한 무기이며, 부르주아 혁명에 의하여 상비군이 완성되었다고 지적했다. 상비군이 노동계급을 압박하는 계급지배의 도구이지만 마르크스는 상비군제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상비군 제도를 통하여 국민 전체,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무기 사용법을 습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무기 사용법의 습득은 소수자의 군사독점을 타파하여 장래의 노동계급이 정권을 획득하는 중요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혁명은 강력(强力; Gewalt)을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신앙이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럽의 혁명이 항상 봉기 ・바리케이드전(戰)에 의하여 이루진 점에 강렬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강력수단(强力手段)이 없이 혁명을 고려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상비군에 관한 고찰에서도 강력에 관한 사상이 깃들어 있다.

마르크스는 1866년 제1차 인터내셔널 중앙위원회의 지침을 작성했는데, 이 지침의 제10항 ‘군대(Die Armeen)’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들은 국민의 전반적인 무장(allgemeine Volksbewaffnung)과 무기 사용법의 전반적인 습득(allgemeine Ausbildung im Waffengebrauch)을 제안한다. 우리들은 민병(民兵)의 간부훈련학교(Schulen für Offiziere
der Miliz) 역할을 할 소상비군(小常備軍)을, 과도적으로 필요불가결한 방책으로 승인한다. 각 시민은 짧은 기간에 이 군대에 복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가 말하듯이 군사력을 소수자의 손에서 국민 전체로 옮기는 일은, 국민개병적(國民皆兵的)인 상비군제도를 지향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위를 위한 소규모의 상비군을 강조하면서, ‘군사력이 구체적으로 민중들 사이에 온존하는 민병제(民兵制)’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걸맞은 것이라고 밝힌다. 이 점에서 보면 마르크스는 자위권(自衛權) 자체를 부정하는 평화 지상주의자(Pacifist)와 다른 입장을 갖고 있다.

3. 군비축소에 관한 마르크스 ・엥겔스의 입장 변화

마르크스 ・엥겔스가 군비축소(군축)에 대해 처음 언급했을 때 풍자와 야유로 가득차 있었다. ‘성 페테르스부르크와 파리의 장기꾼들’이 유럽의 국가수장들에게 평화회의를 열자고 제안한 것을 비판하고 있는 [Der beabsichtigte Friedenskongreβ](MEW 13, pp.287~291.)라는 엥겔스의 논문은 바로 이러한 어조로 쓰인 것이다. 아주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초기의 마르크스 ・엥겔스는 당시의 군축 제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군축(軍縮)보다 부르주아지의 무장 해제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인다. 더욱이 그들은 그러한 제의가 무용함을 내심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적어도 그들의 조국인 독일의 경우에 군축이라는 것이 도대체 시의에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급속한 군사력 증강에 직면하여 독일계 국가들이 위협을 느끼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고 마르크스 ・엥겔스는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독일계 국가들이 어떠한 군축 협상에도 참여하는 것을 반대한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현재 프러시아는 열강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시키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독일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병력 증강이 군비지출을 증대시킨다든가 하는 문제는 노동자 계급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 경우 징집이 국민일반에게 보편적으로 실시되느냐 하는 문제는 노동자 계급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이 징집을 통해 무기를 다
룰 수 있는 노동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앞으로의 혁명에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의 고전들은 국제 노동자 운동 및 각국 노동자 운동의 정치적 목표의 하나로서, 상비군을 해체하여 그것을 국민군(민병)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요구는 제1 인터내셔널에서 채택되었는데, 이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정치적 효과에 있어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군비지출 문제에 있어서도 경비가 절감되리라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제안은 그것이 실행되는 방법 여하에 따라 매우 근본적인 군축 조치의 효과가 있을 수도 있었고, 또는 부분적인 군축 조치의 효과를 거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엥겔스는 군축문제에 대하여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부분적으로는 평화 지상주의(Pacifism)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 태도와도 맥락을 같이하는데, 그들은 Pacifism 자체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일부로 간주했다. 당시의 대다수 평화 지상주의자(Pacifist)들이 부르주아, 쁘띠부르주아, 부르주아 지향적인 지식인 그룹에 속(屬)해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Pacifism의 진정한 목적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의식을 무디게 하며 부르주아의 계급 지배를 계속 유지하려는 데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판단된다. 군축과 Pacifism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태도는 그 이후에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된다.

마르크스 ・엥겔스가 군축 개념을 다루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이미 사회주의자들의 대열 내부에서 이 문제에 대한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일부 사회주의자 그룹들은 Pacifist들의 활동과 그들 자신의 부르주아 정부가 이따금씩 주도하는 군축 제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정치 전술 문제에 대한 상반된 인식은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사회주의 사회의 미래상)와 그 달성을 위한 최적의 전략에 대해서 이견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Pacifist들의 군축문제에 대해 마르크스와 그 추종자들이 내린 부정적 평가는, 일차적으로 부르주아 사회를 혁명적으로 그리고 필요하다면 강력(强力; Gewalt)에 의하여 변혁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태도와 맥락을 같이한다.

평화와 군축을 포함한 일련의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일부 사회주의자 그룹들 사이의 논쟁은 제1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여전히 불씨를 안고 있었다. 세계의 사회주의적 변혁을 위한 투쟁은 (전쟁의 위협을 제거함으로써 좀 더 발전되고 좀 더 윤리적인 부르주아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Pacifist들의 제한적인 의도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훨씬 더 광범위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입장이었다.

1868년 9월 브뤼셀에서 열린 제1 인터내셔널 제3회 대회는 마르크스의 영향력에 의해 그리고 약간의 입씨름 후에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자유평화연맹(League for Freedom and Peace)」과는 정치적으로 일체 협력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시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프루동과 바쿠닌 추종자들의 소수 입장을 고려하여, 대회는 인터내셔널의 성원들이 「자유평화연맹」의 활동에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허용하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나는 동안 여러 군축제의에 대한, 부르주아 정부들의 이와 관계된 활동에 대한,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Pacifist들에 대한 마르크스 ・엥겔스의 초기의 부정적 견해는 현저하게 유화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점진적 변화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사망 이후에(1893년) 발표된 엥겔스의 논문 {유럽은 군비를 축소할 수 있나(Kann Europa abrüsten?}이다. 이 논문은 마르크스주의의 두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이 군축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저술이다. 엥겔스는 여기에서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내린다. 엥겔스는 이 논문에서 독일의 부르주아들과 그 정부에 대해 ‘유럽의 군축이 그들에게 이롭게 작용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지지를 호소한다. 엥겔스는 독일과 서유럽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군축이 필요하며 또한 그 실행도 가능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마르크스 ・엥겔스의 초기 입장이 이렇게 판이하게 달라진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황적 요인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첫째, 19세기 말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군비경쟁이 격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엥겔스는 당시 군비경쟁의 격화가 질(質)과 양(量)에서 전대미문의 전면전(全面戰)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는 당시 군사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우려의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그렇게 무모한 군비경쟁의 사회적 ・물질적 대가(代價)가 엄청나리라는 점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둘째, 사회민주정당들, 특히 독일사회민주당의 정치적 입장 강화와 선거에서의 승리 가능성에 대해 당시 희망적 관측이 팽배해 있었다. 이들의 성공적 진출에 고무된 엥겔스는 사회민주정당들이 선거라는 평화적 수단에 의해, 그리고 유권자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국가 기구 및 군부에 대해서도 그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써, 정권을 획득할 가능성이 있다는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낙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평화 상태가 앞으로 한 10년 동안만 더 계속된다면, 독일사회민주당은 승리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이 모든 것을 다 걸어야 하는 전쟁이라는 도박보다는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좀 더 확실하게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현재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평화를 옹호해야 하는 이유이다. 나는 군축과 그것을 통한 평화보장이라는 것이 저 멀리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확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문명국가들 중에서도 독일은 현재 그 절대 호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평화를 확보할 수 있는 최상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엥겔스의 이러한 평가와 제의는 군축과 평화문제에 관한 인터내셔널의 입장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그리하여 1890년대 후반에 이르면 군축 슬로건이 제2차 인터내셔널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게 된다.

4. 엥겔스의 군비 축소론

엥겔스는 당시의 3국(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동맹과 프랑스 ・러시아 동맹의 군사 ・정치적 블록형성에 따른 미증유(未曾有)의 군비확장 위험을 지적하면서 ‘군축’을 제창한다.

엥겔스는 {유럽은 군비를 축소할 수 있나}에서 군축을 실행하지 않으면 ‘전면적인 섬멸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전(全) 유럽의 상비군 제도는 적당한 시기에 국민 총무장(國民 總武裝)을 기초로 한 민병(民兵)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사비 부담을 통하여 여러 국민을 경제적으로 파멸시키든가 전면적인 섬멸전쟁(allgemeiner Vernichtungskrieg)으로 악화될 정도로 극단으로 치달을 것이다.”

엥겔스는 “25년 전부터 전(全) 유럽이 전례 없을 정도로 군비를 챙겼다. 모든 큰 나라가 전력(戰力) ・전비(戰備)에서 다른 나라의 앞장을 서려고 애쓰고 있다. 독일 ・프랑스 ・러시아는 서로 상대방을 능가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기술한다. 엥겔스는 당시의 상황에서 미증유의 약탈전밖에는 탈출구가 없다고 단정한 뒤 군축을 ‘평화의 보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군비축소와 동시에 평화의 보장(Garantie des Friedens)이 가능하다. 그것은 비교적 쉽게 실행될 수 있다.”

엥겔스는 유럽열강의 내부모순, 열강 사이의 모순을 분석하면서 군축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일반 의무 병역제’ 아래의 군비확장 경쟁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전쟁의 파괴력을 높일 위험성이 있음을 경계한 엥겔스는, 군사문제의 국민적 통제를 통한 군비축소의 가능성을 제시한다(1996년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