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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안보-군사/안보론-안보 패러다임 전환

(춘추전국 시대의) 군사 구성체를 평화 구성체로

김승국

춘추전국 시대는 전쟁 ・군사 지향적인 사회 즉 ‘군사 구성체’를 대변한다. 이 군사 구성체를 ‘평화 구성체’로 전환(transformation)하는 것이 춘추전국 시대의 과제였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하여 중국 고대의 성현들(공자 ・맹자 ・노자 ・장자 ・묵자 등)은 평화 지향적인 사회 구성체(평화 구성체)의 대안을 제시했다.

이 글은 춘추전국 시대의 ‘평화 구성체 담론’을 유가의 의전론(義戰論), 묵자의 반전론(反戰論), 노자의 비전론(非戰論)으로 나눈 다음, 이를 ‘지속적인 평화를 위한 사회 구성체’론으로 연결하기 위해 ‘대동사회(大同社會)’와 ‘소강사회(小康社會)’라는 틀로 다시 수렴한다. 그럼 먼저 춘추전국 시대의 ‘전쟁의 참상’을 설명한다.

Ⅰ. 춘추전국 시대의 참상

춘추전국 시대 5백 년간은 제후들이 군웅할거하며 쟁패하는 전쟁의 시대였다. 춘추전국 시대는 전쟁, 지배계급의 착취, 민중의 굶주림으로 점철된 말세였다.

{춘추좌전}을 보면 해마다 전쟁이 없는 때가 없었다. 토지와 농노를 차지하기 위한 약탈 전쟁이 일어났으며,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겸병(兼倂) 전쟁이 벌어졌다. 이로써 정전제(井田制)는 무너지고 민생은 파탄되었다.

춘추전국 시대의 전반부인 춘추 시대에는 하루 또는 며칠간이었던 전쟁이, 전국 시대에는 수개월 또는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그 양상에 있어서 춘추 시대에는 전차를 중심으로 하는 정면충돌이었던 것이, 전국 시대에는 전차와 보병 ・기병(騎兵)이 혼합된 진지전과 공격전이 병용되었다(윤무학, 1999, 76).

전쟁이 빚어낸 참상과 그 피해는 엄청나며 이것은 곧 민생의 파탄으로 연결된다. 묵자는 당시 이와 같은 격렬한 전쟁에서 살상되는 인명피해를 “많게는 수만에서 적게는 천여 명에 이른다.”고 지적하고({墨子} 非攻中) 침략전쟁의 전반적인 참혹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에 견고한 갑옷과 투구, 예리한 무기를 만들어서 죄 없는 나라를 공벌(攻伐)하러 간다. 남의 나라 변경에 침입하여 곡식을 마구 베어 버리고, 수목을 자르며, 성곽을 허물고, 도랑과 못을 메우고, 희생을 멋대로 잡아 죽이며, 조상의 사당을 불태워 버리며, 백성들을 찔러 죽이고, 노약자를 넘어뜨리며, 나라의 보물을 강탈하면서 끝까지 나아가 극렬하게 싸운다.”({墨子}非攻下)

그 당시의 전쟁은 계절적으로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피하여 봄과 가을에 빈발하므로 농사일에 커다란 장애가 되어 민생의 파탄으로 연결되었다. 공격 당하는 측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공격을 하는 쪽에서 보더라도 전쟁이 빈발하면 농사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사회의 혼란뿐만 아니라, 생산활동에 중대한 타격이 되어 이른바 백성들의 세 가지 근심[三患]은 날로 커지게 된다. ‘삼환(三患)’이란 굶주린 자가 먹지 못하고, 추운 자가 입지 못하고, 피곤한 자가 쉬지 못하는 것을 지칭한다.

1. 전쟁이 빚은 구조적 폭력

위의 ‘삼환(三患)’이야말로 전쟁이 빚은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춘추전국 시대의 구조적 폭력은 가혹한 형벌과 전쟁난민에서 두드러진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당시의 형벌은 얼굴에 먹물을 뜨는 묵형(墨刑), 코를 베는 의형(劓刑), 불알을 거세하는 궁형(宮刑), 발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 목숨을 끊는 사형(殺刑) 등 오형(五刑)이 있고, 오형의 죄목은 각각 500가지로 도합 2천5백가지 죄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안자(晏子)는 엄형(嚴刑)주의의 실정을 ‘구천용귀(屨賤踊貴)’라는 말로 표현했다. ‘구천용귀’는, 정상인의 온전한 신발은 값이 싸고, 죄를 지어 발꿈치를 잘린 병신들이 신는 뒤축 없는 신발이 비싸다는 뜻이다. 즉 형벌이 가혹하므로, 형벌을 받은 병신이 성한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것을 풍자한 말이다.(기세춘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18호>

(左傳/ 昭公3년):
晏子曰 此季世也(안자왈, 지금은 말세입니다)
國之諸市 屨賤踊貴(나라마다 장터에서는 온전한 신발은 싸고, 발꿈
치가 잘린 죄인들의 신발이 더 비싼 형편입니다)
춘추전국 시대라는 난세에 민중들은 전쟁과 착취로 유랑민이 되어,
도둑이 되지 않으면 자식과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
는 비참한 처지였다.

Ⅱ. 성현들의 평화 담론

그 당시 민중들의 소망은 천하에 무엇을 요구하기보다는 자기를 괴롭히지 말고 잊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장자는 {莊子} 天運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忘親易 使親忘我難(친구의 우정을 잊기는 쉬우나 친구들에게 나를 잊게 하기는 어렵고)
使親忘我易 兼忘天下難(친구들에게 나를 잊게 하기는 쉬우나 천하를 두루 잊기란 어렵고)
兼忘天下易 使天下兼忘我難(천하를 두루 잊기는 쉬우나 천하로 하여금 나를 잊게 하기는 어렵다)

민중이 소망하는 태평성세란 [전쟁의 주동자인] 임금이 누구인지 모르고 아무 간섭 없이 농사짓고 우물 파서 등 따습게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풍년이 들면 태평성세를 기뻐하며 격양가(擊壤歌)를 부른다. 노장[노자 ・장자]이 말하는 ‘무치(無治)의 성군정치(聖君政治)’는 이러한 민중의 소망을 대변한 것이다.

日出而作(해가 뜨면 일어나 들에 나가고)
日入而息(날이 저물면 들어와 쉰다)
鑿井而飮(우물을 파 물을 마시고)
耕田而食(농사를 지어 밥을 먹으니)
帝力于我 何有哉(나에게 임금의 노력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위의 ‘격양가’는 요 임금 시절의 태평성세에 민중이 부른 노래로 인류의 오랜 소망인 무치(無治)의 사회, 즉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열망한 것이다.

전쟁이 지긋지긋하여 ‘격양가’를 부르며 평화의 세상을 꿈꾸었던 민중들. 이들의 희망을 담아 ‘평화의 담론’을 제시한 성현들의 말씀을 중심으로, 춘추전국 시대 당시의 ‘지속적인 평화를 통한 사회 구성체’론을 살펴본다.

  1. 유가의 평화 담론: 의전(義戰, Just War)론

맹자는 {춘추(春秋)}에서 ‘의전(義戰)’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공자가 살던 춘추(春秋) 말기는 이른바 겸병(兼倂)전쟁이 가열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제후들 서로가 영토를 넓히려고 벌이는 전쟁은 ‘강전(强戰)’이다. 이 ‘강전’이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였다.

그렇다면 정의[‘義戰’의 ‘義’]가 갖는 의미의 기준은 무엇인가? 孔(공자) ・孟(맹자) 측의 의(義)란 신분질서 설정의 당위성을 가리킨다. 역(逆)으로 주(周)왕조 체제를 위태롭게 만드는 움직임 모두를 불의(不義)로 규정짓는다.

“천하에 도(道)가 있으면 예악(禮樂) ・정벌이 천자(天子)로부터 나오며, 천하에 도(道)가 없으면 예악 ・정벌이 제후로부터 나온다.”({論語}季氏)

‘정벌’은 부정 ・불의에 대한 응징이다. 반드시 천자의 명(命)에 의한 것이라야 정당하다. 여기에 ‘정벌’과 ‘강전(强戰)’은 실제로 어떻게 다른가? ‘정벌’은 ‘난(亂)’을 평정시키려는 정치형태였다.

孔・孟이 결코 전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춘추 이후 제후들 간의 전쟁이 불의 ・비례(非禮)라고 반대할 따름이다. 孔・孟이 부르짖는 ‘의전(義戰)’은 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끊긴 세습귀족의 가계(家系)를 잇는 이른바 ‘인사(仁師)’의 발동이었다. 서주(西周) 이래의 노예주 사회 상부구조를 파괴하려는 신흥지주 세력을 응징하는 정벌(반혁명) 전쟁만이 정당하다는 것이었다(이운구, 1995, 61-64).

공자는 전쟁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고 제후들 간의 겸병전쟁이나 제후국 내의 소자치국(附庸)들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병합하는 전쟁을 반대한 것뿐이다. 천자가 임명한 공경들의 소국을 제후가 없애면, 주례에서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는 제후들이 천자를 무시하고 주례를 범하는 무례를 한탄했을 뿐, 영일 없는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으며, 전쟁비용 때문에 굶어 죽고 얼어 죽는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맹자도 반(反)패도주의를 계승했으므로 당시 제후들의 겸병전쟁을 반대한다. 그래서 맹자가 춘추 시대에 의전(義戰)이 없었다(春秋無義戰)고 {孟子} 「盡心下」에서 비판한 것이다.

공자 당시는 춘추 시대라고 하는 패권쟁탈을 위한 전쟁시대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현안문제는 전쟁과 민생문제였다. 그러나 공자는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걱정했을 뿐 전쟁과 굶주림의 문제[전쟁이 빚은 구조적 폭력]는 중요한 문제로 언급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전쟁에 대한 논의를 회피했다. 물론 그도 전쟁을 찬성하지는 않았다.

{논어}에서 전쟁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것은 네 번뿐이다.
첫째, 공자가 평등과 전쟁과 질병을 두려워했다는 내용이다({論語} 「述而」).

子之所愼齊戰疾(공자께서 걱정하는 것은 전쟁과 질병이다)
齊戰疾(명분을 어지럽히는 평등과 제후들의 전쟁, 백성의 질병이었다)

둘째, 민(民)을 가르치지 않고 전쟁에 내보내는 것은 그들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論語/ 子路29).

子曰 善人敎民七年(공자왈, 착한 지도자가 民을 7년 동안 교육시키면)
亦可以卽戎矣(역시 싸움터에 나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공자 ・맹자의 의전론(‘天子에게 의로운 전쟁의 독점권이 있으므로 제후들의 겸병전쟁은 부정의하다’는 논리)은, 묵자의 반전론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그러면 묵자의 반전론을 설명한다.

  2. 묵자의 ‘겸애-비공(非攻)’: 반전(反戰, Anti War)론

묵자(墨子)가 제창하던 십대(十大) 슬로건 가운데 비중이 가장 큰 정치 이슈로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을 들 수 있다. 묵자는 정치 ・경제 ・사회혼란의 근원을 누구나가 다 ‘불상애(不相愛)’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휴인자리(虧人自)’({墨子} 兼愛上)라고도 한다.
휴인자리는, 남을 손상시켜 자기이익만을 추구하는 일종의 침략행위이다. 특히 제후들 사이의 공벌전쟁은 모두 ‘자애자리(自愛自利)’하는 데서 일어난다. 여기에서 ‘겸애’란 ‘교리(交利)’이며, 바로 ‘비공’ 논리의 이면(裏面)규정이라고 할 것이다.
인인(仁人)이 반드시 해내야 할 임무가 있다. 그것은 천하의 해(害)를 물리쳐서 이(利)를 추구하는 일이다. 천하의 해(害)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제후국(諸侯國)들이 저지르는 침략행위이다. 귀족들 간에 세력이 큰 집안이 세력이 작은 집안을 겁탈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는 일들이다. 이 모두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가려서 달리 보는, 자기 이익만을 챙기려는 데서 일어난 것들이다. 그러므로 묵자는 ‘別, 非也’라고 배척했던 것이다.
묵자가 활약하던 때는 주대(周代) 노예제 사회가 해체 길에 직면한 시기였다. 그는 ‘별(別)’이 역사발전의 커다란 걸림돌이라고 파악하였다. 여기서 ‘겸애 ・교리’는 천하의 해(害)를 물리치고 이(利)를 일으키기 위한 최대의 정치 이슈였다. 그것만이 인류 모두가 서로의 이익을 옹호해 줌으로써 복지증진을 기대할 길이라고 묵자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를 기저로 하여 ‘비공’의 논리가 전개될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하여 고통 받아야 하는 직접 피해의 당사자가 그들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墨子} 전편에 걸쳐 그 기저를 이루는 ‘겸애 ・교리’ 의식은 ‘비공’의 논리를 필연적으로 전개시킨다. ‘비공’은 침략전쟁이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가 없다는 논리이다.
한편 묵자는 ‘今至大爲不義攻國, 則弗知非, 從而譽之, 謂之義, 此可謂知義與不義之別乎’({墨子} 非攻上)라고 지적하였다. 불의(不義)를 한층 더 크게 저질러서 남의 나라를 침공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할 경우 모두 그 잘못을 전혀 모른다. 도리어 그것을 정의(正義)의 전쟁이라고 칭송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이는 의(義)와 불의(不義)가 진정 어떻게 다른지 분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義,利也’({墨子} 經上)라고 하였다. 최종적으로 이득이 민중에게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민중의 이익과 상치되는 침략전쟁은 불의(不義)이다. 그것은 ‘겸상애(兼相愛)’하는 의지와 ‘교상리(交相利)’ 효과에서 분명히 가려진다({墨子} 大取)고 한다.
전쟁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또한 묵자가 당시의 종교적 통념을 가지고, 민중의 소박한 생활(정서) 속에 일찍부터 침투되어 있던 신앙을 바탕으로 ‘공벌(攻伐) ・겸병(兼倂)’이 결코 정당하지 못하다고 적극 반대했다.
‘비공’의 논리는 군사대국주의를 거부한다. 정치(전쟁) 노선의 비리를 준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는 전쟁에 대한 전면 부정이 결코 아니다. 침략을 분쇄할 방어전쟁만을 특히 강조한다. {墨子} 備城門편, 그 밖에 병법(兵法)을 다룬 여러 편들은 오히려 침략자에 대한 선제공격이라고 하는 전략전환도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묵자는 강대국의 침략으로부터 약소국을 구원하기 위한 수어(守禦)집단을 조직하였다(이운구, 1995, 68-75).

묵자는 전쟁을 인류공동체의 최대의 적으로 단정한 인류사상 최초의 반전 운동가였다. 그는 전쟁을, 노예를 얻기 위한 반인륜적 죄악으로 간주하고 평생 동안 목숨을 걸고 반전운동을 전개했다. 묵가들은 어디든 침략을 받는 나라로 달려가 지켜주었다. 그들은 목수 등 방어무기를 만드는 기술자들이었다. 묵자를 따르는 자는 180명인데 모두가 칼날을 밟고 불속에 뛰어들라 해도 죽어도 물러서지 않는 투사들이었다고 한다(劉安 {淮南子} 泰族訓).

  3. 노자의 비전(非戰, No War)론

老子는 세계(자연) 최초의 근원을 ‘물(物)’로 보고 있다. 그것은 자기요인을 가지고 ‘절(浙)’ ,‘반(反)’ 운동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의 법칙을 ‘도(道)’라 하였다. ‘항상 대립하는 상태에 있으며 또 다른 상태로 반전(反轉)하려 한다. 따라서 잠시도 고정된 상태에 있지 않다. 언제 어디서나 ‘상(象)’이 있고 ‘정(精)’(생명)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有無相生, 難易相成’하는 상대적 전환현상만을 체험한다.
노자는 이 전환의 계기, 피(彼) ・아(我) 간의 대립관계를 일종의 투쟁으로 파악하였다. 삶(생명)의 갈등 모순 자체가 투쟁인 것이다. 노자의 세계관은 소박한 유물론적 경향을 띠고 있다. 자연에 대하여, 그 일련의 움직임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 투쟁의 논리를 결코 그는 정치문제 해결(戰爭)에 전가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노예제 경제사회 고대도시국가 간의 정복전쟁을 기본적으로 부정하는 처지였다. 오히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 而不爭’이라 하여 ‘비전(非戰)’철학을 창
출해 내었다.
‘비전(非戰)’은 어떤 상태에서도 싸우지 않는 ‘부쟁(不爭)’의 논리와 맥락을 함께한다. 이는 몰락해 버린 구(舊)노예주 귀족의 정치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몰락귀족들은 격렬한 정치투쟁 과정에서 기존의 이익과 지배적 위치를 상실한 지 이미 오래였다. 도도히 변해 가는 역사적 사실 그 흐름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한 그들에게 절실한 것은 오직 자신뿐이며 삶만이 관심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노자는 ‘부쟁(不爭)’을 자기 삶의 방식으로 결정하였다. 당시의 사회 정치정세에 대하여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할 것이다.
‘以其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부쟁(不爭)’은 결코 삶의 포기가 아니다. 자기 내면세계로의 투쟁을 통한, 도리어 삶의 적극적 자세라고 이해되기도 한다. ‘자연의 움직임은 그 스스로가 자연스럽기 때문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老子} 27장) 최상의 정치형태는 무력을 동원하지 않는 일이다. 상대와 극한까지 맞서지 않는 이가 실제로 잘 싸우는 자라고({老子} 27장) 한다. 본래 자연의 법칙은 약(弱)이 강(强)을 이기고 유(柔)가 강(剛)을 누르게 되어 있다({老子} 78장)는 것이다. 단단한 나무가 쉽게 부러진다. ‘兵强則滅’이라고 하였다.

전쟁은 인간 최대의 작위(作爲)이다. 老子는 처음부터 이를 부정한다. ‘무위(無爲)’라야만 능히 ‘무불치(無不治)’할 수 있다고 한다. ‘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其事好環’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도(道)’는 자연의 법칙성(不爭)을 말한다. 자연의 움직임에 그대로 맡겨두어 무력 충돌을 피하는 길이다. ‘果而已’할 뿐이다. 바로 ‘비전(非戰)’의 정치철학을 가리킨 것이다.
老子가 제시한 ‘부쟁(不爭)’의 전술에 따르면, ‘不敢爲主, 而爲客’하여야만 한다. 주동의 위치에 절대로 서지 말고 수동의 자세를 취하라. 먼저 도발해서는 안 되며 침공에 대한 방어만이 할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목숨이다. 전쟁 마당은 인명 살상을 예사로 저지른다. ‘비전(非戰)’은 이러한 측면의 인식을 토대로 하는 정치 이슈이다. ‘대군(大軍)’이 주둔한 지역은 황폐하고 전쟁을 치른 다음에는 반드시 기근과 질병이 휩쓴다.’({老子}30장) 그러므로 ‘佳兵者, 不祥之器’라고 하였다. 부득이 그것을 쓸 경우 그 밖에 다른 욕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 결코 전쟁에 이겼다고 자랑거리는 아니다.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군마(軍馬)도 농사짓는 일에 종사하게 마련이었다({老子}46장).

노자는 몰락귀족의 신흥집권세력에 대한 질책에 머물렀다. 그 이상의 적극성은 없다. ‘민중으로 하여금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길 수 있게 해줄 것이며 전쟁무기가 비록 우수하다 할지라도 이를 쓸 데 없도록 만들라’({老子} 80장)고 하는 당부로 그칠 뿐이다. 민중의 직접 항쟁(농민전쟁)과는 질이 다른 ‘부쟁(不爭)’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소방과민(小邦寡民)’은 老子가 그리던 이상적 정치형태이다. 옛날(夏・殷)에는 나라 수가 삼천을 넘었던 것이 춘추(春秋) 시대에 들어와 백 수십 국으로 줄고 다시 전국(戰國) 시기는 칠대(七大) 강국으로 병합되었다고 한다. 이 말은 바로 겸병(兼倂)전쟁을 반대한다는 뜻이다. 당시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비전(非戰)’은 토지 겸병, 대국주의(大國主義)의 부정이며 신흥지주계층의 대두에 대한 반동이었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민중의 처지를 동정은 하고 있으나, 농민의 이해를 반영하지 못하였다(이운구, 1995, 65-68).

Ⅲ. 대동사회-소강사회

중국 성현들의 평화의 담론이 비록 ‘의전론’ ‘반전론’ ‘비전론’으로 갈리지만, 모두 전쟁이 없는 태평성세를 꿈꾼다.

‘태평성세’의 어원은 {禮記} 예운(禮運) 편에 최초로 보이는 이상사회로서의 ‘대동(大同)’이다. 이때의 동(同)은 평(平)과 화(和)의 뜻이며 대동사회(大同社會)는 평등 ・평화 사회를 의미한다. 여불위(呂不偉)는 BC. 239년에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펴냈는데 그는 이 책에서 ‘대동이란 천지만물이 일신동체(一身同體)라는 뜻이며, 천하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천하 만인의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말은 여불위보다 앞서 강태공이 주나라 문왕에게 한 말이다. 그렇다면 주나라 이전에는 대동사회였던 것 같다. 장자도 인의(仁義)를 비난하면서 인의(仁義)의 시작을 순임금 때부터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요임금 때는 대동사회 또는 무위자연의 사회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유향(劉向) 등 한대(漢代) 학자들은 하 ・은 ・주 삼대 이전을 대동사회로, 그 이후를 소강사회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주1)

어찌 되었든 여불위는 이러한 사상적 경향으로 진시황과 충돌하였고 급기야 촉으로 귀양 가는 도중 음독자살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더라도 대동은 ‘천하에 남은 없다(天下無人)’ ‘백성이 주권자(百姓爲主)’라는 공화 민주사상을 주장한 묵자의 사상임이 분명하다. 요약하면 대동사회를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묵자였으며, 그것이 최초로 공론화된 것은 주(周)의 봉건제도가 위기에 봉착한 춘추 말 전국 초이며, 그것을 {禮記}에 기록한 사람은 순자라고 본다(기세춘, 2002, 358-363).

  1. 묵자의 ‘지속 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 구성체’: 대동-안생생(安生生) 사회

묵자가 살았던 춘추 시대는 인민이 전쟁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난세였다. 그의 이상사회는 전쟁이 없고 생명이 안락하게 살아가는 ‘천하에 남이 없는(天下無人)’ 안생생 대동사회였다. ‘천하무인의 안생생 대동사회’는 묵자의 ‘지속 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 구성체’였으며, {禮記} 예운 편이 묵자의 안생생 대동사회를 잘 표현하고 있다.

{禮記} 예운 편과 묵자의 안생생 대동사회론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禮記}의 ‘대동사회’는 유가의 사상이 아니라 묵자의 이상사회인 ‘안생생 사회’를 설명한 것이다. {禮記}에 이것을 기록한 것은 묵가들이 주장하는 대동사회를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비현실성을 비판함으로써 이와 대립되는 유가들의 ‘소강사회(小康社會)’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禮記} 예운 편의 대동사회에 대한 기록과 묵자의 천하무인의 안생생 사회에 관한 어록을 비교해 보면 너무도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2. 유가의 ‘지속 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 구성체’: 소강사회

{禮記}를 편찬한 유향(劉向)은 요순(堯舜) 시대를 대동으로, 우(禹), 탕(蕩), 문(文) ・무(武) ・주공(周公)의 삼대(三代)를 ‘예치(禮治)의 소강사회’로 규정한다. 요순의 대동시대에는 대도(大道)가 이루어졌으나, 삼대에 이르러 대도(大道)가 이미 쇠미해졌다. 유향은 요순의 평화 공동체가 존재했던 시기를 대동시대로, 삼왕(三王)의 신분차별이 요구되는 예치(禮治)사회가 존재했던 시기를 소강시대로 구분했다.

이처럼 유향 등 유가들은 {예기}의 역사발전 단계를 ‘대동사회 →소강사회의 이행’으로 본다. 소강사회를, ‘지속 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 구성체’의 이상적인 형태로 본다는 뜻이다.(주2)

공자가 어느 날 노(魯)나라 사제(蜡祭=年末 萬神에 드리는 제사)에 빈객으로 참여한 후 주공의 제도가 쇠했음을 탄식했다. 옆에 있던 언언이 묻자 공자는 대답하기를 대도를 행하는 것은 삼대(三代)의 영걸(英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뜻은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공자의 목표는 주나라 예(禮)를 부흥시키자는 ‘복례(復禮)’였다. 주공(周公)이 정비한 주례는 소강사회의 제도와 예법이면서, 요순의 대동사회 정신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대도는 사라졌지만 대동사회의 목표인 천하일가를 예치로써 이루어내겠다는 뜻이다. 유가의 이상사회는 천하를 일가(一家)처럼 생각하는 소강사회이며, 이 소강사회는 효제(孝悌)를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삼는 사회이며, 그리고 효(孝)를 인간일반과 국가에까지 확장한 것이 인(仁)인 것이다. 그러므로 ‘효제를 인(仁)의 근본’이라고 말했다.

한편 공자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천자의 전쟁은 인정했다. ‘소강사회를 저해하는 패도주의’를 정벌하는 전쟁, 이러한 정벌 전쟁을 일으키는 천자의 부국강병을 인정하였다. 맹자 역시 폭군방벌(暴君放伐)<주3>을 주창했다. 천자가 제후를 징계하는 정치행위로서의 전쟁이 정의의 전쟁(義戰)이며, 이러한 의전이 ‘소강사회에서 추구할 수 있는 현실적인 평화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3. 노자 ・장자의 ‘지속 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 구성체’: 소국과민(小國寡民)

노자는 전국통일(戰國統一)을 지향하는 ‘유가 ・법가의 부국강병에 의한 대국주의(大國主義)’에 반대하면서 ‘소국과민’을 대안으로 제시한다.(주4)

‘소국과민’은 ‘소(小)’와 ‘과(寡)’를 사역 동사로 해석하여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나라의 인구를 적게 하라”는 당위적 요청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홍성화,1999, 149).<주5>

‘소국과민’은 “隣國相望鷄犬之聲相聞, 甘其食, 美其服, 安其俗, 樂其居(이웃 나라의 닭과 개의 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는 지경이다. 王은 백성들에게 그 고을의 음식을 달게 여기게 하고, 자기 고을의 복장을 아름답게 여기게 하며, 그 풍속을 편안하게 하고, 그들의 주거지를 즐기도록 해 준다)”<주6>에서 드러난다.

이 ‘隣國相望鷄犬之聲相聞, 甘其食, 美其服, 安其俗, 樂其居’의 ‘지속 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 구성체가 현대인의 삶 속에서 구현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노장[노자 ・장자]은 민중의 생을 억압하고 위태롭게 하는 반자연적 행태를 거부한다. 반자연적 극한 상황은 바로 전 인류를 파국으로 몰아 넣으려는 침략전쟁이다. 처음부터 노자의 정치이상은 ‘소국과민’({老子} 80장)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군사대국을 규탄하기 위한 역설적 표현 방식이었다(이운구, 2004, 22-23).

노자의 ‘지속 가능한 평화를 통한 사회 구성체’인 소국과민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도(道)’ ・‘박(撲)’에서 평화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김충열 교수에 의하면, 춘추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도덕정치라는 미명만 남고 치자(治者)의 자격 요건이 지켜지지 않아 덕치(德治)의 조건은 무너지고 무도(無道)한 군주들이 난립, 도덕적 미명을 역이용하여 백성들을 탄압하기에 이르렀다. 즉 법가의 역치주의(力治主義)가 유가 덕치주의의 가면을 썼다는 말이다. 이를 간파한 노자는 법가 역치(力治)의 허구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먼저 역이용되는 유가의 덕치 개념을 깨야 했고, 그러자면 근본적으로 덕치의 배경이 된 도덕총부로서의 ‘천지(天地)’ 개념을 무너뜨려야 했다.

‘도(道)’는 바로 이러한 필요에서 천지보다 상위에 놓인 절대 개념이다. 그러나 道라는 절대 개념에 의해 천지의 권위는 약화될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道 역시 절대적이고 어쩌면 천지보다 더 높은 권위로 역이용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는다. 그래서 노자는 다시 道를 만유 공능의 포섭 또는 전체 구성의 가장 기본적인 개개체에 분해 ・환원시킨다. 이것이 박(撲)의 개념이다.

그리하여 그는 ‘撲이 비록 작은 것이나 천하의 그 무엇도 그를 신하(從)로 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는 어쩌면 맹자가 말한 ‘백성이 귀하고, 국가가 그 다음이며, 군대는 그중 가장 덜 귀하다(民爲貴, 社稷次元, 軍爲輕)’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정치적으로 국군(國君)의 존재를 부정하고, 상대적으로 민(民)의 절대적 평등과 자존적(自存的) 존재 가치를 자각하게 한 것이다. 양주(楊朱)가 ‘터럭 하나를 뽑아서 세상을 이롭게 한다 해도 하지 않는다(拔一毛利天下不爲)’고 말한 것이나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귀생(貴生)’을 주장한 것은 바로 노자의 ‘천하의 그 무엇도 그를 신하로 대할 수 없다’는 박(樸) 개념을 넓힌 것이다(김충열, 1995, 217-218).

‘道’의 권위는 모든 것의 원형이나 문명 세계에서 볼 때에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樸’에 환원되고, 그 원만구족(圓滿具足)한 공능은 다시 ‘자연’에 의해 역시 권위를 잃는다. 이제까지의 권능 위계를 보면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와 같이 道가 모든 것의 최고 범주였으나, 노자는 ‘道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고 하여 ‘자연’을 최고 범주로 올려놓았다(김충열, 1995, 218).

노자에게 자연계는 있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세계이다. 그와 대비해서 인간세, 특히 인위로 조작된 문화 세계는 박진(撲眞)을 깨뜨리고 형평을 잃어 계속 문제가 가중되어 가는 세계이다. 즉 자연계는 그 자체가 하나의 평화로운 세계인 데 반해, 인간세는 불평 ・불화의 세계이다. 자연은 그 운행이 곧 평화를 회복하는 노력인 데 반해, 인위는 오히려 평화를 깨 나가는 파괴 행위라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 그것만이 근본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길이 된다는 말이다. 노자가 돌아가라는 ‘자연’은 문화 문명이 오염되지 않은 작은 나라 적은 백성(小國寡民)의 조그마한 이상향이었다.

노자가 바람직한 인간세를 대동(大同)사회로 확대하지 않고 굳이 작은 나라 적은 백성으로 제한한 것은 바로 인성의 본연, 즉 순박성이 지켜질 수 있는 범위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의 이상향을 노자는 다음과 같이 형용했다. “무기가 있어도 사용할 곳이 없고 사람들은 생명을 아껴 위험한 짓을 하지 않는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지 않으며 일이 없으니 행정 사무를 볼 것이 없다.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안히 살며 자연을 즐긴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삶에는 싸움이 없다. 그저 적막하리만큼 평화로울 뿐이다. 이것이 노자가 이상으로 내세운 평화[지속 가능한 평화]의 모습이다(김충열, 1995, 222-225).
(200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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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대동’은 ‘소강(小康)’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禮記} 예운 편에 나와 있다. 예운 편은 예(禮)가 시행된 때와 그렇지 않은 때 곧 ‘예운’을 논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그 첫머리에 나오는 대동사상의 내용은 우(禹) 탕(湯) 문무(文武) 성왕(成王) 주공(周公) 등 은주(殷周)시대의 정치를 ‘소강’으로 보고, 이에 대립된 이상적 사회를 ‘대동’으로 묘사한 것이다(김수중, 1996, 3).

(주2) {禮記} 예운 편의 저자는 대동사회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대동사회가 소강사회로 대체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과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禮記}의 기록을 보면 소강사회는 ‘천하가 가문의 소유(天下爲家)’인 봉건사회이며 공자와 유가들이 지향하는 예치사회(禮治社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禮記}의 소강사회는 ① 정치적으로는 신분세습의 봉건사회이다. ② 도덕적으로는 주례(周禮)를 치법(治法)으로 하는 전제주의 사회이다. ③ 경제적으로는 개인주의 경쟁주의 사회이다. ④ 사회적으로는 정전제와 농노사회이다. ⑤ 전쟁이 정당화되는 부국강병의 사회이다(기세춘, 2002, 371-372).

(주3) 맹자의 폭군 방벌론은 민주혁명을 말한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즉 폭군을 방벌할 수 있는 것은, 인민이 아니라 귀족들의 권한이라는 점이다. 즉 동성(同姓)의 귀족출신 공경(公卿)은 왕을 갈아 치울 수 있지만, 동성이 아닌 신하는 도리로써 간하다가 안 되면 사표를 내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봉건제도의 나라는 가문의 연합체이기 때문에 제후는 가문에 내려진 작위를 상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후는 자기 가문에서 파문을 당하면 가문의 상속권을 상실하는 것이므로 작위를 잃게 된다. 따라서 당연히 제후의 자리도 상실하는 것이다. 맹자의 폭군 방벌론은 이것을 설명한 것으로, 폭군 방벌을 요구하는 춘추전국 시대의 시대적 상황이 내재해 있다.

(주4) {老子}에서의 ‘도(道)’의 개념은 제국(帝國)의 통일 논리로 이어질 수 있는 통일체이면서 거대 담론으로서의 도가 아니라, 개별자를 인정하는 미시 담론으로서의 ‘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적인 ‘도’ 개념은 ‘소국과민’의 정책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老子}에서 주장했다(홍성화, 1999, 153).

(주5) ‘소국과민’을 유토피아로 해석하는 기존의 태도를 수용하지 않는 홍성화는, ‘소국과민’이 푸리에(Charles Fourier)의 ‘팔랑주(Phalange)’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주6) {史記} 卷129 「貨食列傳」에서 인용된 {老子}의 문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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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1. 활자매체
* 기세춘 {동이족의 목수 철학자}(서울, 화남, 2002).
* 김수중・남경희 「대동사회와 유토피아」 {철학연구} 38집(1996년 봄).
* 김충열 {김충열 교수의 노장 철학 강의}(서울, 예문서원, 1995).
* 윤무학 {중국철학 방법론}(서울, 한울, 1999) 76쪽.
* 이운구 ・윤무학 {묵가 철학 연구}(서울, 성균관대 대동문화 연구원, 1995).
* 이운구 {동아시아 비판 사상의 뿌리}(서울, 길, 2004).
* 홍성화 「{老子} 小國寡民論의 社會經濟史的 起源」 {대동문화연구} 제35집(1999년 12월).

2. 인터넷 매체
* 기세춘 「공자 ・묵자와 평화 (3)」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18호(2004.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