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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마르크스_ 정치경제학

자본-국가와 폭력

김승국

화폐가 자본으로 전화(轉化)될 때, 자본은 경제적 가치형태임과 동시에 경제적 사물을 지배하는 폭력이 된다. 그러므로 자본제 생산양식은 경제적 생산양식임과 동시에 폭력의 생산양식이기도 하다.

자본의 지휘기능에 관하여 언급하는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은 전제적인 권력, 즉 폭력을 내포한다: “많은 임노동자의 협업이 발전함에 따라 자본의 지휘(Kommando)는 노동과정 자체의 수행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생산의 현실적인 조건으로 발전한다. 생산 공장에서의 자본가의 명령은 이제 전쟁터에서의 장군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바이올린 독주자는 자기 자신을 지휘하지만, 하나의 교향악단은 지휘자를 필요로 한다. 지휘 ・감독 ・매개라는 이 기능은, 자본에 예속된 노동이 협업적(協業的)으로 되자마자 자본의 기능으로 된다. 자본의 독자적인 기능으로서의 지휘의 기능은 독자
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자본가의 지휘는, 사회적 노동과정의 성질로부터 생겨나 자본가에 속(屬)하는 하나의 특별한 기능일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하나의 사회적 노동과정의 착취기능이며 따라서 착취자와 그의 착취 재료 사이의 불가피한 적대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된다.”<Marx {Das Kapital} MEW 23, p.350>. 자본의 이러한 지휘기능은 그 형식에 있어서 전제적(專制的; despotisch)이다.”<Marx {Das Kapital} MEW 23, p.351>.

今村 仁司에 의하면, 자본의 전제적 권력[폭력]은 자본제 생산의 발전과 더불어 권력의 계층화(階層化)를 낳는다<군대의 하사관에 필적하는 지배인 ・직공장(職工長) 등>. 푸코(Foucault)가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에서 밝히듯이, 19세기의 공장 ・학교 ・병원 ・군대는 거의 같은 관리형태를 갖고 있었다. 푸코식(式)으로 말하자면 권력은 시민사회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지배’를 미치게 하며, 모든 인간을 권력의 담당자로 변(變)하게 하여 자기 재생산 과정의 궤도를 확립한다. 거시적인(macro) 권력과 권력장치는, 국가의 차원에서 보이며 미시적인(micro) 정치, 미시적인 권력의 재생산 과정은 시
민사회 내부에서, 특히 자본제 생산(공장)에서 전개된다. 자본은 物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권력도 창출한다. 자본과 더불어 권력의 생산양식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기초를 이루는 잉여가치는,경제 속에 파묻힌 정치, 즉 자본의 노동에 대한 지배권력의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권력으로서의 자본의 지배력은 공장 내부뿐만 아니라 사회체(社會體) 자체도 포섭한다. 자본제 생산양식은 직접적인 노동과정 ・유통 ・분배 과정은 물론이고 그것을 넘어 시민사회 전체를 가치형태로 거두어들이며 더욱 권력의, 미시적 정치의 그물코를 생활세계 전체에 둘러친다<今村 仁司 {理性と權力}, 57~58쪽>.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자본제 생산양식이 시민사회 전체를 가치형태로 거두어들이며 권력의 그물코를 생활세계 전체에 둘러치는 가운데 국가의 본질이 드러난다. 여러 저서에서 국가의 본질(주1)에 관하여 언급한 마르크스는, 경제 관계 특히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유물론적(唯物論的)인 국가론을 심화시킨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3권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부불 잉여노동(不拂 剩餘勞動; die unbezahlte Mehrarbeit)을 직접적 생산자로부터 강탈하는 특수한 경제적 형태가 지배 ・종속 관계를 결정한다. 왜냐하면 그 특수한 경제적 형태는 생산 자체로부터 직접적으로 발생하면서 또 생산 자체에 대하여 하나의 결정적인 요소로서 반작용하기 때문이다. 생산관계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경제적 공동체의 전체 구조, 그와 동시에 그것의 특수한 정치적 형태는, 이 특수한 경제적 형태에 입각하고 있다. 직접적 생산자에 대한 생산조건 소유자의 직접적인 관계 ―이 관계의 특수한 형태는 당연히 노동방식 그리고 사회적 노동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항상 상응한다 ―에서, 우리는 언제나 사회구조 전체의 가장 깊은 비밀과 은폐된 토대,또한 주권 ・종속 관계의 정치적 형태[요컨대 그때그때의 특수한 국가형태(Staatsform)]의 가장 깊은 비밀과 은폐된 토대를 발견하게 된다<Marx {Das Kapital} MEW 23, pp.799~800>.

이처럼 직접적 생산자(노동자)로부터 부불(不拂) 잉여노동을 짜내는 특수한 경제적 형태에서 시민사회와 국가의 구조를 해독(解讀)할 수 있다고 마르크스가 지적했는데, ‘국가형태의 은폐된 토대’는, 직접적 생산자에 대한 생산조건 소유자(자본가)의 폭력에서 발견된다. 이 폭력의 결과물이 잉여가치이다. 브뤼노프(Brunhoff)에 따르면 “잉여가치의 수탈은 ‘공장의 전제(專制)’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고,국가적 관계 내부에서 폭력 혹은 국가의 존재이유로 나타나며 또 그것을 재생산한다.”<쉬잔느 드 브뤼노프 지음 신현준 옮김 {국가와 자본}(서울: 새길, 1992),217쪽.[Suzanne de Brunhoff {État et Capital: Recherches sur la politique économique}(P. U. G.-Maspero, 1976)] 이처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런데 자본은 경제관계의 폭력에 의해서만 충분한 양(量)의 잉여노동을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권력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Marx {Das Kapital} MEW 23, p.286>. 이와 같이 국가는 자본에 대한 ‘경제외적(經濟外的)인 잠재력’(주2)이므로 ‘국가의 개입’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자본주의 사회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분석하는 데 한계가 따르며, 자본의 내재적인 폭력구조를 밝히기 어렵다.

예를 들어 정상적 노동일의 확정은 자본 자체의 운동논리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또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국가의 개입이 언급됨이 없이는 설명 불가능하다. 이러한 점들은 자본일반 이론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 커다란 중요성을 지니는데, 즉 국가가 노동일을 확정하는 데 개입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운동을 매개하는 자본주의 국가 자체가 이미 전제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본이론에서는 자본운동을 매개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운동이 체계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지만 국가이론에서는 바로 국가가 자본운동을 어떻게 매개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연구대상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본이란 가치운동의 경제적 범주만이 아니라, 자기의 경제운동을 관철시킴에 있어 이에 요구되는 정치적 범주를 아울러 관철시키는 ‘정치’경제적 범주라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김세균 편역 {자본주의 위기와 파시즘}(서울: 동녘, 1987),17~18쪽>.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 체제란 언제나 동시에 상부구조로서의 국가 등을 포함한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로서의 자본주의 체제이며, 이러한 사회구성체 속에서의 자본주의 경제와 상부구조로서의 국가는 서로 밀접히 연관된 사회적 총체의 본질적 구성부분들이다. 자본주의 국가 일반이론은 순수한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 있어 국가와 경제가 그 체제 내부에 내재하는 모순의 발현에 대응하여 ‘필연적으로’ 맺을 수밖에 없는 결합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이때 자본일반 이론이 자본의 ‘경제적 논리’에 관한 이론이라면, 자본주의국가 일반이론은 자본의 ‘정치적 논리’에 관한 이론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전제하에서 이론적으로 재구성된 자본주의국가 운동은 역사현실 속에서 결코 그 순수한 형태로 전개되지 못할 것이다<김세균 편역 {자본주의 위기와 파시즘}(서울: 동녘, 1987),20쪽>.

따라서 경제적인 영역과 정치적 영역 간의 제도적 분리(institutional separation)의 필연성을 결정하고 또 사적인 법률적 주체들 위에 서있는 비인격적인 공적 권위로서의 국가의 형태를 조건 짓는 것은, 자본주의적 재생산의 요건들에 맞게 법률을 공식화하고 집행하는 것의 두 가지 과제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부르주아적인 지배는 가치의 증식과 실현의 과정에 있어서의 시장세력의 경제적 강제(economic compulsion)와, 하나의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공적 권력에 종속시키는 정치적 강제(political compulsion)로 ‘이중화(doubling)’ ―혹은 상이한 형태들로의 복제(複製; duplication)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중화[중첩]’를 반영해서, 사유재산권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사법(私法)이 정치적 질서의 유지와 정부의 업무에 관련된 공법(公法)으로부터 분리된다. 이것은 정치의 기본적인 형태가 부르주아 사회의 사적인 또는 공적인 영역들을 지배하는 법률적 관계들의 창출 내지 집행에 대한 갈등이라는 것을 뜻한다<봅 제솝 지음, 이 양구 ・이 선용 옮김 {자본주의와 국가}(서울: 돌베개,1985) 127쪽.[Bob Jessob {The Capitalist State}(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82)]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강제는 화폐라는 경제적 폭력에 의하여 매개되며 정치적 강제는, 국가를 통한 정치적 폭력에 의하여 매개된다. 여기에서 국가를 통하여 매개되는 정치적 폭력을 해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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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마르크스에 있어서 국가란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폭력적인 지배장치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폭력적으로(gewaltsam) 소수자(少數者)의 이익을 다수자(多數者)의 이익에 우선(優先)하게 하기 위하여 국가권력(Staatsmacht)
을 남용하는 것’(MEW 6, p.245.)이, 국가에 의한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대의 국가권력(Staatsgewalt)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사무를 처리하는 하나의 위원회일 뿐이다”(MEW 4, p.464.)고 말한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국가관<“사회로부터 발생하였으나, 사회의 상부에 위치하여, 사회와는 점점 더 소원해지는 권력(die entfremdende Macht)이 국가이다”; MEW 21, p.165.>에 동의한다.
이처럼 마르크스에 있어서 국가의 본질은 계급억압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억압의 내용, 즉 어떤 형태로 억압이 이루어지는가에 있다. 계급억압은, 단지 물리적인 폭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급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의 특수 이해(利害)가, 환상적인 ‘일반’이해로 가장하면서 국가 의지로까지 승화되고, 그것이 사회 전체를 단단히 죄는 데 국가의 본질이 있다<津田道夫 지음 {國家と革命の理論} (東京: 論創社, 1979), 52쪽>.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로부터 소원해지는 권력의 체현물(體現物)은 이데올로기로서의 국가 의지, 즉 법률이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국가 의지는, 스스로를 관철해내기 위하여, 자신에 거스르는 것을 ‘강제(强制)’에 의하여 복종시키는 특별한 보장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자면 “공동 이해 및 환상적인 공동 이해에 끊임없이 현실적으로 대립하는 특수 이해의 실천적인 투쟁은, 국가로서의 환상적인 ‘일반’ 이해에 의한 실천적인 개입과 제어(die praktische Dazwischenkunft und Zügelung)를 필요로 하게 만든다.”(MEW 3, p.34.)
이 실천적인 개입 ・제어를 위한 수단, 즉 국가 의지의 집행주체 ・도구가 국가권력(Staatsgewalt)이다<인간을 지배하는 최초의 이데올로기적인 권력(die erste ideologische Macht)이 국가 안에서 나타난다. 사회는 내적(內的) ・외적(外的) 침해로부터 자신의 공동 이해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관(Organ)을 만들어낸다. 이 기관이 곧 국가권력(Staatsgewalt)이다; MEW 21, p.302>. 엥겔스는 이 ‘Staatsgewalt’를 ‘특수한 공권력(die besondre,öffentliche Gewalt)’이라고 부른다(MEW 21, p.165).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로서의 국가 의지와 (국가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도구,즉 ‘특수한 공권력’이 국가의 실체이며, 국가의 실체개념은 국가의지와 ‘특수한 공권력’의 통일이라는 형태로 표현된다(津田道夫, 위의 책, 58~59쪽).

(주2) 국가이론은 부르주아 사회의 해부학의 한 부분이며 국가장치의 정치경제학이다. 즉 국가분석에 있어서 기초적인 것은, 정치경제학 비판의 여러 범주이다. 국가는 근본적으로 경제와 병립하지 않으면, 경제를 넘어서는 ‘경제외적인 잠재력’으로 규정될 수 없다. 국가는, 국가의 형태 ・기능 규정에 있어서, 사회적 재생산 과정과 그 합법칙성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상 국가는 자본의 재생산 과정과의 연관에 있어서 ‘경제외적인 잠재력으로 나타난다. 물론 봉건적 국가나 절대주의 국가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결코 ‘경제외적인’ 것으로 파악될 수 없으나, 그 경제적 기초는, 역사적으로 훨씬 오래된 하나의 또 다른 생산양식이다. 이러한 범위 안에서 국가는 자본에 대한 ‘경제외적인 잠재력’이다.
<ブラウンミュ-ル・フンケン・コゴイ・ヒルシュ 지음, 田口富久治・芝野由和・佐藤洋作 옮김 {資本と國家}(東京: 御茶の水書房, 1983), 193~194쪽. [Braunmühl ・Funken ・Cogoy ・Hirsch {Probleme einer materialistischen Staatstheorie(Suhrkamp Verlag, 1973)]
이렇게 ‘경제외적인 잠재력’으로서 재생산 과정과 자본관계의 조건을 보장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개별 자본가들의 침해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반적 ・외적(外的) 조건들을 지켜내기 위하여 만들어진 자본주의적 기구(Maschine), 자본가들의 국가, 이념상(理念上)의 총자본가(總資本家; der ideelle Gesamtkapitalist)이다(MEW 20,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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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의 제2장 제3절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40호에 실려 있다.
* 김승국『마르크스의「전쟁‧평화」론』(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90~97쪽에도, 위의 글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