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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마르크스_ 정치경제학

마르크스의 가치 형태론과 폭력 (1)

김승국

자본제 생산양식의 구조에 내재하는 폭력(내재적 폭력)을 마르크스의 가치형태론과 관련시켜 설명함으로써, 상품-화폐-폭력의 연관성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먼저 마르크스의 상품형태=가치형태의 전개도식(4가지 형태)을 살펴본다(생략):

마르크스가 자본제 생산양식의 내재적인 폭력을 추출(抽出)해내기 위하여 가치형태론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론} (제1권 제1편 제3절)에서 마르크스가 가치형태론을 전개하는 과정을 면밀히 분석하는 가운데 ‘내재적 폭력’의 논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마르크스 자신이 가치형태론을 서술하면서 폭력 문제를 직접 제기하지 않은바, 가치형태론과 폭력의 연관성을 연구한 문헌이 많지 않다. 본 연구는 이러한 제한된 문헌 중에서 今村 仁司의 {暴力のオントロギ
-} {排除の構造} 등과 미쉘 아글리에타(Michel Aglietta) ・앙드레 오를레앙(André Orléan) 공저의 {화폐의 폭력(La Violence de monnaie)}을 바탕으로 폭력 문제에 접근한다. 今村 仁司는 구조주의적(構造主義的)인 시각에 입각하여 마르크스의 가치형태론에서 폭력의 요소를 이끌어내며 아글리에타 ・오를레앙은 자본주의 조절이론(調節理論; regulation theory)의 입장에서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에, 노동가치론 등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적인 논의에서 벗어난 느낌을 준다.

{자본론} 제1권에서 마르크스가 노동의 모순에 앞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성(긴장관계, 모순)을 거론하는 이유는, ‘욕망이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품을, 상품의 사회관계를, 物(Ding)의 관계에 반사된 시민적 사고양식 ・행동양식 ・존재양식(Seinsweise)을 욕망한다. 상품은 인간에게 욕망을 채워주는 성질, 즉 유용성을 갖고 있다. 物에 대한 유용성이 있기 때문에 그 物은 사용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글리에타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욕망’ 이론을 접합시킴으로써,{자본론}의 ‘가치형태론에 폭력이 내재(內在)함’을 증명하려고 한다. 아글리에타는 ‘미개사회(신화)에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지라르의 이론을 근대 시민사회에 끌어들여 내재적 폭력을 설명한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La Violence et le Sacré)}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와 폭력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이디푸스와 라이오스(Laios)가 네거리에서 처음 만날 때는 아버지도 왕도 없었다. 처음에는 주인공의 길을 막는 낯선 자의 위협적인 몸짓만이 있었으며 그다음에 이 낯선 자를 때리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는 곧 왕위와 왕비를 향한 욕망, 즉 폭력적 대상을 향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폭력적인 것이 아버지와 왕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확인과정이 있다. 달리 말하자면 폭력적인 것의 대상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폭력이다. 라이오스가 아버지이기 때문에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폭력적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왕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폭력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자 왕’이라고 단언할 때, 그가 의미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아글리에타는, ‘주체-대상-경쟁상대’라는 지라르의 욕망의 3각형<그림2 참조; 지라르의 ‘욕망의 3각형’은 ‘오이디푸스적(的) 3각형’, 즉 ‘오이디푸스(욕망 주체) ―어머니(욕망 대상) ―아버지(경쟁 상대)의 3각형’으로 대체될 수 있다.>에 근거하여 마르크스의 가치형태론과 폭력의 관련성을 이끌어낸다[<그림 2> 생략].

예컨대 두 개의 상품이 교환될 경우 일방(一方)의 상품이 동시에 화폐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A-B가 거래될 경우 B는 A의 등가물(等價物)이지만 이 등가물은 A의 ‘가치’를 측정해 주기 때문에, B는 가장 원초적인 화폐형식을 이미 떠맡게 되어 버린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A-B의 2항 관계(二項關係)는 동시에 3항 관계(三項關係)임이 분명해진다(B는, 하나의 상품이면서 화폐이기도 한 점에서 두 개의 상품형식과 화폐형식을 아우르는 3항 관계이다).

이를 {자본론}의 가치형태론에 도입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의 상품형태-가치형태 전개의 제1형태에서 ‘x量의 상품A=y量의 상품 B’는 2항(대립) 관계이다. 그러나 이 2항 관계는 3항 관계를 숨기고 있다. 왜냐하면 등가형태의 위치에 있는 B상품은, 교환되는 物인 한 2항 대립의 1항(一項)이지만, 등가형태를 갖고 A를 척도하는 원초적인 화폐형식이기 때문이다. A에 대하여, B는 제2항이면서 제3항이다. 이렇게 2항 관계에서 제3항이 배제되는 구조를 {자본론}의 가치 형태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근대사회에 내장(內藏)된 제3항 배제 효과를 사태에 즉(卽)하여 파헤쳐 보인 저작이며 {자본론} 모두(冒頭)의 상품 ・화폐론 혹은 가치형태론에 제3항 배제효과가 부재적 현전(“2항 관계가 3항 관계를 숨기고 있다”)으로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 화폐형식이라는 제3항(un troisième terme)은, ‘지라르의 욕망의 3각형’의 경우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라이오스(희생자)에 해당된다.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에게 폭력을 행사했듯이(이러한 부자간의 싸움은 시민사회의 경쟁 ・투쟁과 원리상 동일하다), 자본주의 사회(근대 시민사회)에서 화폐형태-화폐(자본)이라는 제3항이 폭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희생물을 살해하려는 위기의 절정에서 폭력이 모든 욕망의 수단이자 동시에 주체이며 대상이다. 바로 이 때문에 희생물이 없다면 그리고 위기 후에 이 폭력이 문화질서로 변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회질서는 불가능해진다. 희생양은 상호적 폭력에서 공동체적 평화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그 이행을 확실하게 하고 이행 그것 자체가 된다. 오이디푸스는 이제 평화의 초석이 된 것이다.

위기의 절정에서 “우연히 불꽃”이 튀어 상호적 폭력(la violence réciproque) 혹은 폭력적 상호성(la réciprocité violente)을 지우고 평화를 세운다. 우연의 불꽃에 의해 희생물이 되는 것이 속죄양이다. 속죄양은 공동체를 화해시킨다. 오이디푸스 왕을 계속 예로 들자면, 오이디푸스는 페스트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래서 그를 추방했더니 페스트가 사라진다. 희생자의 악(惡)한 면은 그가 죽은 뒤에, 혹은 추방된 뒤에 생겨난 선(善)한 면을 더욱 강화시킨다. 오이디푸스는 처음에는 악하나(maléfique) 다음에는 선하다(bénéfique). 희생양은 혼란에서 질서로 이행하는 것의 상징이 아니라, 이행 그 자체이다. 상
호적 폭력에서 일인(一人)에 대한 만인(萬人)의 폭력으로의 이행이 바로 모든 문화의 기원이다. 그것은 희생적 위기에 일어난다.

역설적으로 ‘(상호적) 폭력이 창출하는 평화’ ・‘좋은 폭력으로 나쁜 폭력을 막는 평화’의 창조적인 국면이 조성된다. 그러므로 창조적이며[창조적 폭력] 사회 보호적인 제의적(祭儀的) 폭력의 악순환은, 상호적이며[상호적 폭력] 전면적으로 파괴적인 폭력의 악순환을 대체하게 된다.

지라르가 말하듯이 희생위기(la crise sacrificielle) 속에서는 그 대상이 아무리 특권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욕망을 어떤 한정된 대상에 결부시키는 것을 피하면서 욕망을 폭력 그 자체 쪽으로 돌려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의 본능이나 폭력의 본능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제3의 길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관찰했던 모든 욕망들 속에는 대상과 주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3항, 즉 경쟁자(le rival)가 있었는데 이번만은 이 경쟁자에 우선권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경쟁자를 너무 일찍 인정하는 것, 즉 프로이트와 함께 그것은 ‘아버지이다’라고 말한다거나 비극들처럼 그것은 ‘형제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경쟁자와 대상과 주체가 함께 형성하는 전체적인 체계 속에서 이 경쟁자가 차지하는 위상을 규정짓는 것이 문제이다. 경쟁자는 욕망 주체와 동일한 대상을 욕망한다. 경쟁자의 우선권을 인정하는 것과 대상과 주체의 우선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경쟁 관계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두 욕망의 우연한 일치의 산물이 아니다. 경쟁자가 대상을 욕망하기 때문에 욕망 주체는 그 대상을 욕망한다. 어떤 대상을 욕망함으로써 경쟁자는 욕망 주체에게 그 대상은 욕망할 만한 것이란 것을 알려준다. 존재방식이니 관념이니 하는 피상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욕망의 좀 더 본질적인 측면에서 경쟁자는 욕망 주체의 모델이다.

현대의 이론가들은, 인간은 그가 욕망하는 것을 완전하게 알고 있는 존재,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무의식(無意識; inconscient)’을 항상 지니고 있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불확실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그런 영역을 빠뜨리고 있는 것 같다. 기본적인 욕구들이 일단 충족되기만 하면, 아니 때로는 그 이전에도, 인간은 강렬하게 욕망하면서도 무엇을 욕망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욕망하는 것은 존재, 정확이 말해 자신에게는 결핍되어 있는데 타인은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욕망 주체는 이 ‘타인(他人)’이 이 존재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길 기대한다. 만일 이미 뛰어난 존재를 부여받은 모델이 어떤 것을 욕망한다면, 더욱 총체적인 존재의 완전함을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일 것이다. 모델은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써 욕망 주체에게 진짜 욕망할 만한 대상을 가리킨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욕망은 본질적으로 모방적(模倣的; mimétique)이다. 그러므로 모델의 욕망을 흉내 내어 그 모델과 똑같은 대상을 선택한다’는 오래된 생각, 그러나 그 논리적 결과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는 것 같은 생각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이어서 지라르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자기가 지향하는 존재를 발견할 때마다 그 추종자는 타인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을 욕망함으로써 그 존재에 도달하려고 애쓴다. 그때마다 그는 상대방의 욕망이라는 폭력을 만난다. 그러자 그는 논리적이지만 지나친 비약으로 폭력 그 자체가 언제나 그를 피하는 그 존재의 가장 확실한 징후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려 버린다. 이때부터 폭력과 욕망은 서로에게 묶이게 된다. 욕망 주체는 폭력을 당할 때마다 항상 욕망이 눈뜨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욕망 주체는 이 폭력을 숭배하며 동시에 증오한다.

그는 폭력으로써 폭력을 제압하려고 애쓴다. 다시 말해 욕망 주체는 폭력과 싸운다. 어쩌다가 그가 폭력을 이기고 나면 그 폭력이 누리고 있던 마력은 곧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욕망 주체는 다른 곳에서 더욱 폭력적인 폭력, 진정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을 찾아나서야 한다. 모방 욕망(désir mimétique)은 불순한 전염병과 같은 것이어서, 만일 이것을 멈추기 위한 희생물과 이것이 다시 가동되는 것을 막는 ‘제의적 모방(祭儀的 模倣; mimesis rituelle)’이 없다면, 희생위기의 원인인 이것은 공동체 전체를 파괴할 것이다.”

아글리에타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존재의 욕망’이다. 욕망의 목적이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 목적은 똑같은 경우에 놓인 타자(他者)를 통해서만 추구된다. 따라서 존재의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런데 타자는 필연적으로 대상화되는 것에 반항한다. 타자는 대상화의 희생이며 대상화는 타자 자신의 ‘존재의 욕망’을 손상하기 때문이다. 타자는 모델(모방해야 할 대상)이지만, 타자는 또한 경쟁상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모방구조 속에서 物은 사회적 의의를 획득하고 욕망의 대상이 된다.

상품사회에서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모방(모방 충동)함으로써만[타자의 소유를 모방하려는 소유 모방)에 의하여] 충족된다. 그러나 타자는, 주체에 있어서 모방의 모델임과 동시에 장해이기도 하다(이중 명령double bind). 모방충동[모방욕망]에 의거한 ‘주체-대상-경쟁상대’의 3각형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가치형태’이다. 여기에서 상품의 사용가치가, (사람을 직접 지배하는) 욕망을 物의 전유(專有)에로 방향을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글리에타와 오를레앙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낸다: “소유란 존재의 환유(換喩; métonymie)이다. 인간은 소유를 가리킴으로써 존재를 가리킨다. 전유(專有)는 욕망의 형태이다. 왜냐하면 전유가 ‘모방의 적대 관계’에 휩쓸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참된 사회적 주체는, 형이상학적 개념에 입각한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대상- 경쟁상대라는 기본적인 관계 속에 있다. 마르크스는 이 기본적인 관계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모순으로 정의내렸다.”

그러므로 가치형태의 변증법을 폭력형태의 변증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변증법은, 모순이 物의 취득과 관련 있는 것일 경우, 즉 주체와 경쟁상대 사이에 物이 끼워 넣어질 경우의 ‘모순의 전개’이다.

物의 이러한 위상이, (폭력의 방향을 딴 데로 돌리고 그것을 방향 잡아주는) 사용가치의 기본적인 사회적 의의를 부여한다. 物이 개재(介在)되지 않으면, 주체와 경쟁상대와의 대결이, 타자의 인격을 직접 지배하고 싶다는 욕망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욕망을 物의 전유(專有)에로 일탈시킬 수 있는 사회는, 즉 사용가치와 (그 사용가치를 소유하는) 경쟁상대의 인격 사이에 거리를 둘 수 있는 사회는, 거대한 폭력을 견디어 낼 수 있다. 모든 사회질서의 바탕에 폭력이 있음을 기정사실로 간주한다면, 그 폭력이 어떻게 사회의 통합을 낳는지 물을 수 있는데, 이때 가치형태의 발전에 관한 논리가 폭력의 모델을 제공한다.<끝>

* 기술적인 이유로 각주, 그림, 도식을 생략했으니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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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의 제2장 제3절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40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