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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마르크스_ 정치경제학

폭력의 부재적(不在的) 현전(現前)

김승국

마르크스의 ‘실체’로서의 사회적 노동(추상적 인간노동)은, 구조의 결과로서의 상품(직접적으로는 구조의 한 계기를 이루는 구체적인 생산노동의 결과로서의 상품) 가운데서 작용하고 있는 경우에만 존재하지, 그 자체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 마르크스가 지적하듯이 사회적 노동 또는 일반적 ・추상적 인간노동은, 상품체(商品體; Warenkörper)를 어떻게 분석할지라도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 노동(추상적 인간노동)은, 상품들의 사회관계(가치형태)의 행태를 서술(darstellen)
함으로써만 그것의 현전(現前)을 지적할 수 있다. 사회관계야말로 사회적 노동 그 자체이며, 사회관계가 물리적인 의미가 아닌 한(限) 사회적 노동을 발견할 수 없다(不在한다). 이러한 부재적 현전(不在的 現前), 현전적 부재(現前的 不在)라는 기묘한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사회적 관계로서의 사회적 노동, 구조로서의 사회적 노동이다.(주1)

{자본론}에 대한 징후적 독해방법(徵候的 讀解方法)<주2>을 통하여 ‘부재적 현전(不在的 現前)’을 이끌어내는 알튀세르(Althusser)는, {자본론} 제2권의 서문(MEW 24, pp.21~24.) 등에 등장하는 ‘Darstellung’에 주목한다.(주3)
 
‘Darstellung’은 마르크스 가치론의 인식론적인 핵심개념이며, ‘구조가 그 결과 앞에 현전(現前)한다’는 ‘구조적 인과성(구조적 인과관계; structural causality, causalité structurale)’(주4)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Darstellung’은 ‘présentation’, ‘exposition’, ‘position du présence’ 등의 의미를 포괄한다. 여기에서 요점은 ‘présence(現前)’에 있다. ‘표상(Vorstellung)’이 그 배후에 무엇인가를 상정하는 데 비하여 ‘Darstellung’은 그 배후에 아무것도 상정하지 않는다. 현전(現前)의 장(場)에, 거기에(da) 있다는 말이다. ‘Darstellung’은, 첫째 ‘결과 속에 구조가 현전하는 것, 결과 속에 현전하는 구조의 효과(effect; 효력)에 의하여 결과가 변용되는 것’이라는 개념규정을 갖는다. ‘Darstellung’은 둘째로 ‘부재의 효과’라는 개념이다. 부재의 효과에 역점을 둘 경우, 구조의 효과는 ‘환유적(換喩的; me' tonymique) 인과성(인과관계)’이라고 불린다. ‘Darstellung’이라는 구조의 행동은, 결과에 있어서 구조의 不在인 동시에, 구조 또는 원인의 결과 가운데로 육박하는 현전 ・내재 ・실재를 포괄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주5)

알튀세르가 ‘Darstellung’을 선정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Darstellung’이란, 상품형태론(가치형태론)에서 매우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은유 개념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본제 생산양식이라는 구조는, 상품 ・화폐 ・자본의 형태를 전개한 이후에, 생산론(生産論) 속에서 비로소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상품론이야말로 자본제 생산양식의 구조를 정의하는 것이다. 자본제 생산양식이라는 구조는 상품형태(요소, 결과) 속에서 ‘현전하는 한편 부재’한다. 그리고 구조(하부 구조)는, 어떤 국면에서도 어떤 요소에 있어서도 항상 ‘부재적(不在的)으로 현전’하고, ‘현재적(現前的)으로 부재’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본제 생산양식의 구조 규정의 장소로 보고 있는 자본제 생산과정도, 자본제 생산양식의 구조 자체가 아니라 생산양식의 결과 ・요소이다. 자본제 생산과정(요소 ・결과 ・부분) 속에서 자본제 생산양식의 구조는 ‘현전하는 한편 부재’한다.(주6)

‘상품 ・화폐 ・폭력’의 문제가 논의의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관계없는 듯한 사항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했다. 언뜻 보기에 멀리 돌아가는 듯 보이나, 자본제 생산양식과의 관련 속에서 상품형태론의 의의 ・자리매김을 하는 일이 불가결하다. 왜냐하면 ‘상품형태론에 있어서 폭력의 부재적 현전(不在的 現前)’의 문제는, 바로 ‘자본제 생산양식의 구조에 내재하는 폭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품형태론 또는 화폐형태론이 원초적(原初的)이며 기초적인 형태(Elementarform)를 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그 자체일 경우 상품 ・화폐 ・폭력의 내밀한 관계는, 비록 원초적 ・추상적인 형태를 취하더라도 사회구조 전체에
널리 통용되는 보편적 의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주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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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今村 仁司 지음 {暴力のオントロギ-} (東京: 勁草書房, 1992). 48~49쪽.

(주2) 알튀세르(Althusser)는 {자본론을 읽는다(Lire le Capital)}에서 마르크스의 ‘두 가지 독해방법’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와 스미스(Adam Smith)의 관계에 의거하는 첫 번째 독해방법은, “스미스가 볼 수 없었거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의 근본적인 누락으로 나타나게 되는 회고적(回顧的)인 독해방법이다.”<알튀세르 지음, 김진엽 옮김 {자본론을 읽는다} (서울: 두레, 1991) 20쪽.[Louis Althusser {Lire le Capital} (Paris: François Maspero, 1968)]
이 독해방법이 보여주는 것은 “모든 지식활동은 원리적으로는 비전(Vision)의 단순한 관계를 인식하는 것으로 환원되고, 인식대상의 모든 성질은 여건이 갖는 단순한 조건으로 환원된다고 하는 지식관(知識觀)의 논리이다.”(알튀세르 지음 김 진엽 옮김, 위의 책, 21쪽.)
그러나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에게는 첫 번째 독해방법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그와는 전혀 다른 제2의 독해방법이 있다”고 강조한다(같은 책, 21쪽).
그것은 ‘간과(看過)’ ‘보지 못한 것’의 문제가 단지 ‘보지 못한 것’ 그 자체의 ―‘보이는 것’과의 절대적인 구별을 근거로 한 ―부정성(否定性)에 기인(基因)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성의 場(field of the visible)과 비가시성의 場(field of the invisible)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연관, 즉 가시적인 場의 구조가 낳는 필연적 효과로서 비가시성의 감춰진 場의 필연성을 정의하는 그런 연관에 관한 문제이다.”(같은 책, 22쪽.)
그렇다면 간과는 보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아닌 것으로 되고, 간과는 더 이상 대상에 관련되지 않고 시각 그 자체에 관련된다. 간과는 비전과 관련된 간과이다. 그렇다면 비(非)비전은 비전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비전의 한 형태이며, 따라서 비전과 필수적인 관련을 갖는다(같은 책, 24쪽).
‘보지 못하는 것’의 문제는 결코 ‘결여로서 보지 못함’의 문제가 아니다. 今村 仁司는 이와 관련하여 “비가시성(invisible)을 가시성(visible)으로 삼는 것은, 낡은 이론적 문제설정(problématique)을 전면적으로 변혁하여 새로운 이론적 문제설정을 형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알튀세르의 비유를 빌린다면 ‘지반(地盤)’의 변화, ‘이론적 생산양식’의 혁명이 문제로 된다. ‘주체’는 ‘이론적 생산양식’의 변형 과정에 의하여 할당되는 역할을 하고, 낡은 ‘지반’으로부터 새로운 ‘지반’에로 몸을 옮김으로써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今村 仁司 {歷史と認識} (東京: 新評論, 1985), 74쪽>.
알튀세르는 이와 같은 ‘제2의 독해방법’을 ‘징후적 독해방법(徵候的 讀解方法; symptomic reading)’이라고 부른다<今村 仁司 {思想の星座} (東京: 洋泉社, 1987), 195쪽>.

(주3) 이 같은 {자본론} 해석방법은 자본주의 구조를 하나의 표현(representation) 구조로, 즉 체제가 자기 자신을 제시함과 동시에 개별적 주체로부터 자신을 은폐하는 구조로 환원시킨다. 실제로 알튀세르는 제시(Darstellung)라는 용어(교환가치로서 가치를 ‘제시’한다고 하는 등)를 꼬집어 내어 이를 ‘전체 마르크스주의 가치론의 핵심적인 인식론적 개념’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이야말로 자본제적 생산양식이 어떻게 ‘작가 없는 극장’으로서 기능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용어라고 말했다. 극장은 연극이 관객에게 제시되는 장소인바, 연극은 작가가 없이 관객을 속일 수도 있는 것이다<캘리니코스 지음, 황석천
옮김 {마르크스주의의 미래는 있는가} (부산: 열음사, 1992) 128~129쪽.[Alex Callinicos {Is There a Future for Marxism?} (London: Macmillan, 1982)]>.
마르크스는 ‘연출=Darstellung, representation, mise en scène’이라는 연극의 비유를 자주 사용했다. 사람들이 무대 위의 행위, 즉 효과(effect)를 보면서 현실(reality)의 충실한 복사(copy)를 한다고 믿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이 말을 사용한 듯하다<알튀세르 지음 김진엽 옮김, 위의 책, 431쪽>.
한편 들뢰즈(Deleuze)와 가따리(Guattari)는, ‘알튀세르가 생산을 구조적 ・극장적 표상[劇場的 表象; structural and theatrical representation(Darstellung)]과 동일시(同一視)했음’을 비판하면서 “극장이 생산의 모델로 여겨지고 있다”고 말한다<들뢰즈 ・가따리 지음, 최명관 옮김 {앙띠 오이디푸스} (서울: 민음사, 1994), 449~451.참조[Gilles Deleuze ・Félix Guattari {L’Anti-Oedipe} (Paris: Les Editions de Minuit, 1972)]>.

(주4) 알튀세르에 의하면 사회구조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구조들로 이루어진 복합적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를 갖는 사회 전체와 구조들 사이의 효과(효력; effect)를 고려하기 위하여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 마르크스 이전에 고려할 수 있는 두 개의 체계가 있었다. 하나는 데카르트(Descartes)의 기계론적인 모델 ・직선적 인과성(linear causality)이고, 다른 하나는 라이프니츠(Leibnitz)-헤겔 류(流)의 표현적 인과관계(표현적 인과성; expressive causality, causalité expressive)이다. 전자(前者)는 ‘전체’ 개념의 복합성과 양립하지 않으며, 후자(後者)는 ‘전체’ 개념의 기초인 요소들의 이질성과 양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과학, 즉 마르크시즘은 새로운 인과관계-‘구조적 인과관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알튀세르의 논리이다. 알튀세르의 논리에 따르면 ‘지배 내 구조(支配 內 構造; structure in dominance, structure à dominante)’라는 복합적 총체(總體), 즉 지배 속에 구조화된 복합적인 전체(tout)는 ‘현존하면서 부재(不在)한 원인들로부터 비롯된 효과의 구조
(structure of effects with present - absent causes)’이다.

(주5) 今村 仁司 {暴力のオントロギ-}, 55~56쪽.
(주6) 위의 책, 57쪽.
(주7) 같은 책, 57~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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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의 제2장 제3절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40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