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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마르크스_ 정치경제학

초기 마르크스의 폭력 개념

김승국

1. 교통형태와 폭력
---{독일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동저작인 {독일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생산력과 교통 형태(교류형식; Verkehrsform)의 모순’으로 파악함으로써 사적 유물론의 출발점을 이룬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교통형태’는 단순히 인간노동의 성과인 생산물의 교환에 머물지 않고 인간활동의 교환, 개인 ―사회집단 ―모든 나라들 사이의 물질적 ・정신적 교류, 즉 성(性) ・언어 ・전쟁 ・법률 ・세계시장 ・분업 등을 포함한 ‘생산관계’개념으로 발전한다. 전쟁이 교통형태의 한 종류라고 밝힌 {독일 이데올로기}는 폭력 ・약탈 등이 역사의 추진력임을 강조하면서 ‘생산력과 교통형태의 매개항’으로 폭력(전쟁)을 상정한다. 위의 교통형태를 ‘생산관계’로 대치할 수 있다면 생산력과 생산관계, 즉 생산양식과 폭력(전쟁)이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생산양식과 폭력(전쟁)의 관계를 규명하는 예비행위로서 생산력과 교통형태의 모순을 밝힐 필요가 있다.

  1) 생산력과 교통형태

교통형태는 생산력과 개인활동의 교환을 의미한다. 개인활동의 교환은 분업을 통하여 나타나며 여기에서 생산력과 교통형태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분업은 사적 소유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계급’을 상정할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서 생산력과 교통형태의 모순이 발생한다.

    ① 분업-사적 소유-폭력

각 개인은 보편적 교통(der universelle Verkehr) 속에 현존하는 생산력을 자기 것으로 획득함으로써 자기를 활성화(자기활동; Selbstbetätigung)하는 가운데 생존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 교통을 가능케 하는 장(場)은 시민사회이다. 그런데 부르주아 계급이 이 시민사회를 주도하기 때문에 물질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 사적 소유, 자본과 노동의 분열 등의 부정적 측면이 세계사적으로 드러나면서 시민사회의 보편성이 무너지고, 바로 여기에서 폭력(전쟁)의 계기가 발생한다. 이
러한 분열이 있는 곳에서 자기활동으로서의 노동은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노동의 주체인 각 개인이 자기를 활성화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의 부정적 측면으로서 노동의 소외, 노동자의 소외 문제가 제기된다. 노동의 분할, 즉 분업이 초래한 노동의 소외는 자본주의적 폭력의 진원지가 되며,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계급을 형성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분업과 사적 소유는 동일한 표현 곧 똑같은 것이 한편에서는 활동에 관하여, 다른 한편에서는 활동의 산물에 관하여 언표된 것이다. 나아가 노동의 분업과 더불어 고립된 개인 혹은 개별가족의 이해(利害)와 상호교통하는 모든 개인이 가진 공동이해 사이의 모순도 아울러 생긴다. 더구나 이 공동이해는 단지 관념상의 ‘일반이해(一般利害)’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노동을 분배하는 개인들의 상호의존 관계로서 현실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업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인간이 자연발생적인 사회에 머무르는 한, 다시 말해서 특수이해와
공동이해 사이에 균열이 존재함으로써 활동이 자유의지에 의해서 분배되지 않고 자연발생적으로 분배되는 한, 인간 자신의 행동은 자신에 대립하는 하나의 소외된 힘으로(zu einer fremden, gegenüberstehen Macht), 인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구속한다는 사실의 최초의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노동이 분화되자 각 개인은 하나의 일정한 배타적 활동 영역을 갖게 되고, 이 영역이 그에게 강요되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한 사람의 사냥꾼, 한 사람의 양치기, 한 사람의 어부 혹은 한 사람의 비평가이며, 그가 그의 생계수단을 잃지 않고자 하는 한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사회적 활동이 이렇게 고착화된다는 것, 곧 우리 자신이 생산한 것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고 우리의 기대를 뒤집어엎고, 우리의 계산을 수포로 만드는, 우리를 넘어선 물질적 폭력(die sachliche Gewalt)으로 고착화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역사발전에서의 주요한 계기 중 하나이다. 그리고 특수이해와 공동이해 사이의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공동이해는 국가라는, 즉 현실의 개별이해와 전체이해(全體利害)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 형태를 취한다. 그와 동시에 공동이해는 하나의 환상적인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갖지만, 언제나 그 공동체는 혈육, 언어, 비교적 대규모의 분업 및 그 밖의 이해관계 등의 온갖 가족 및 씨족집단의 현존하는 유대에, 특히 우리가 뒤에서 전개해 보겠지만, 이미 분업이 낳은 계급에, 다시 말해서 그와 같은 각각의 인간무리로 나눠지고 그 가운데서 하나가 다른 모두를 지배하는 계급에 그 실질적 토대를 두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국가내의 모든 투쟁, 곧 민주제, 귀족제, 그리고 군주제 사이의 투쟁, 선거권 등을 위한 투쟁은 각 계급 상호 간의 현실적인 투쟁이 행해질 때의 환상적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더 나아가 지배권을 노리는 모든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와 같이 그들의 지배가 낡은 사회 형태와 지배 일반을 완전히 폐지하는 데까지 도달한다 하더라도, 정치권력(die politische Macht)을 장악하여 그들의 이해를 일반이해로 제시(darstellen)해야 하는데, 그것은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다. 개인들이 특수이해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또한 그들이 보기에 특수이해가 그들의 공동이해와 일치하지 않고 결국 일반이해는 공동체의 환상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공동이해는 그들로부터 ‘소외된’ 그들로부터 ‘독립된 것(unabhängiges)’으로서, 그것 자체가 특수하고 고유한 ‘일반’이해로 간주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은 민주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양분상태 속에서 움직여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공동이해 및 환상적인 공동이해에 끊임없이 현실적으로 대립하는 이러한 특수이해의 실천적인 투쟁은, 국가로서의 환상적인 ‘일반’ 이해에 의한 실천적인 개입과 제어를 필요로 하게 만든다. 사회적인 힘(die soziale Macht), 곧 분업이 낳은 다양한 개인들 사이의 협업을 통해서 성립되는 배가된 생산력은, 협업 자체가 자발적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개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통일된 힘(die vereinte Macht)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소외된, 그들의 외부에 존립하는 폭력(eine fremde, außer ihnen stehende Gewalt)으로 나타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회적 분업이 존재하는 한, 특수이해와 공동이해의 분열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행위는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인간과 대립된 힘, 자신의 활동과 통일되지 못하는 힘,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형성되며, 이 권력은 인간의 의지 ・행동을 지배하는 ‘소외된 폭력(die fremde Gewalt)’의 상징이다.

이렇게 직접적 생산자(노동자)로부터 독립하여 ‘자립하는 권력(die selbständige Macht)’이 존재하는 한(限), 노동관계 ・생산물은 직접적 생산자에게 낮선 물질적 폭력, 즉 소외된 폭력(Gewalt)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2) 생산력과 교통형태의 모순

생산력과 교통형태의 모순은 계급의 충돌, 의식의 모순, 사상투쟁, 정치투쟁으로 나타난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모든 충돌이 ‘생산력과 교통형태의 모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일정한 생산관계(교통형태)의 총체가 그 시기에 현존하는 생산력을 토대로 성립하고, 그 생산력의 성격에 조응하며, 또 그 생산력의 발전 조건을 이루지만, 뒤에는 생산력의 발전에 질곡이 되고 그것과 모순되기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순은 질곡으로 작용했던 이전의 교통형태를 대신하여 하나의 새로운 교통형태로, 더욱 발달한 생산력에 적합한 교통형태로 교체됨으로써 해결된다. 마르크스는 ‘역사상의 모든 충돌은 그 원인이 생산력과 교통형태 간의 모순에 있다’는 것, 그래서 이 모순은 ‘그때마다 혁명에 의해 작렬’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에 의해 발견된,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성격에 반드시 조응한다는 경제적 법칙은 이미 확고한 고전적 명제로 정식화되었고, 마
르크스의 저작 {정치경제학 비판}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 법칙을 자본주의의 분석에 이용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에 대해서 그는 이 사회를 하나의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또한 동시에 역사적으로 당연히 소멸되어야 할 교통형태로 보고 있다. 마르크스는 생산력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생산력을 구속하는 질곡으로 되고, 이 질곡은 반드시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서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폭력(전쟁)을 교통형태의 하나로 상정한 {독일 이데올로기}는 분업 ・사적 소유 ・국가(자본주의의 국가권력)가 폭력의 근원임을 지적한다. 竹村民郞에 따라 {독일 이데올로기}의 폭력(전쟁) 개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폭력(전쟁)은, 생산 ・분배의 중요한 경제적 기능의 기초를 이루는 소유의 발생에 있어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 폭력(전쟁)은, 계급형성의 중요한 정치적 계기이다.
      ㉢ 폭력(전쟁)은, 소유형태의 전변(轉變)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이룬다.

마르크스의 폭력(전쟁)에 관한 위의 세 가지 규정(소유 형성적 계기 ・계급 형성적 계기 ・소유 전변적 계기)은 변증법적인 상호 규정성을 갖는다. 폭력(전쟁) 개념에 관하여 상정한 변증법적 구성의 정립은, {독일 이데올로기} 단계에서는 일반적 ・추상적인 차원에 머문다. 이 변증법적 구성의 정립은 {철학의 빈곤}-{공산당 선언}-{요강}을 거쳐 {자본론}에 이르러 마르크스 이론의 핵심으로 발전한다.

2. {철학의 빈곤} ・{공산당 선언}의 폭력 개념
--- 부르주아지의 Gewalt와 프롤레타리아트의 Gewalt

이미 앞의 절에서 마르크스의 폭력(전쟁) 개념이 사적 유물론의 주요 개념으로 규정됨을 확인했다. 이제 논의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하여 {철학의 빈곤}과 {공산당 선언}의 폭력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공산당 선언}은 ‘소유권과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에 대한 전제적인 침해(der despotische Eingriff)를 통해서만 혁명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고 밝혔는데, 이 ‘전제적인 침해’는 (부르주아지의 폭력을 지양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력(强力)이 구체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관한 기술인 ‘전제적인 침해’는 경제적으로 불충분하고 불안정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운동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뛰어넘으며 (낡은 사회질서에 대한 가일층의 침해를 불가피하게 요구하며) 생산양식 전체의 변혁을 위한 수단으로서 [채택이] 불가피한 방책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공산당 선언}의 공동저자인 엥겔스는 {공산주의의 원리}에서 이른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한 견해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주주의가 사적 소유를 직접 침해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더욱 철저한 방책들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즉각 이용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철저화(徹底化)이며, {공산당 선언}에서 말하는 ‘민주주의의 쟁취(die Erkämpfung der Demokratie)’(MEW 4, p.481.)이다. 그리고 {공산당 선언}의 혁명론은, [Gewalt에 의한] 강력 혁명론(强力 革命論)에 투철한바 “공산주의자는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질서를 강력에 의하여 전복함으로써만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음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강력에 의하여 타도(durch den gewaltsamen Sturz)(MEW 4, p.473.)함으로써 자신의 지배권을 수립할 수 있다.

{공산당 선언}을 통하여 ‘생산양식의 변혁’이라는 급진적인 관점을 보이는 마르크스는, 자본제적(資本制的) 생산양식의 성립단계에서 ‘소유자의 권력=자본의 권력’과 ‘정치적 권력=국가권력(Staatsmacht)’의 변증법적 연관을 명확히 한다마르크스에 의하면 “소유는 어쨌든 일종의 폭력이다. 경제학자들은 자본을 예컨대 ‘타인의 노동에 대한 폭력(die Gewalt über fremde Arbeit)’이라고 부른다. 요컨대 한편으로는 소유의 폭력, 즉 소유자의 폭력,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폭력(die politische Gewalt), 즉 국가권력이라는 두 종류의 폭력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유자의 폭력’은, 어떤 사람이 생산수단을 소유함으로써 타인에 대하여 경제적으로 자기의 의사를 강제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강제라는 것이 존재하므로 그 강제를 행사하는 자(者)는 경제적 지배자이다. 마르크스의 ‘경제적 권력’이라는 개념이 있고 ‘경제적 권력수단’이라는 개념도 있다. ‘경제적 권력’ 내지 ‘경제적 권력수단’을 갖고 있는 자는 경제적 지배자이다.

그러나 경제적 지배자는, 다른 피지배자에 대하여 개별적 지배를 하기 때문에 개별 지배자이다. 이 경제적 지배자는 개별 자본의 입장을 내세우므로 반드시 정치적 지배자는 아니다. 그런데 개별적인 경제적 지배자는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비로소 개별자의 입장을 넘어 계급 전체로서 전 사회(全 社會)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고, 자신을 정치적 지배계급으로 높여 경제적 개별지배를 전체로서 확보한다. 이른바 총자본(總資本)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자본이 곧 권력(Macht)=폭력(Gewalt)의 근원이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Gewalt’는 ‘Macht’로 나타난다. ‘Gewalt’에 이미 ‘Macht’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 따라서 ‘Gewalt’는 ‘Macht’를 바탕으로 한 권력지향적인 폭력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가권력은 정치적인 폭력이다. 그리고 경제적 폭력인 자본이 국가권력의 실체이기 때문에 자본이 ‘Macht=Gewalt’의 근원이다.

마르크스는 사회 구성체를 형성하는 본질인 폭력이 소유자의 권력-자본의 권력으로 나타날 경우, 그것이 본질적으로 ‘임노동(賃勞動)과 자본’이라는 형태를 지닌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본제 사회는 고립된 사적 노동(私的 勞動)이 노동 생산물의 교환을 통하여 사회적 노동이 됨을 표현하고, 소유와 분업의 관계를 매개로 자연의 영유를 실현한다.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과정이 화폐를 매개로 하는 상품교환을 통하여 실현되는 데 시민사회의 특징이 있다. 그러나 자본제 생산양식은 이러한 시민사회적(市民社會的)인 관계들을 시민사회의 운동형식으로 삼지만, 사실상 ‘소유의 권력=자본의 권력’이 관철된다.

부르주아지가 그 속에서 움직이는 생산관계는 단일한 성격, 단순한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중(二重)의 성격을 지닌다. 즉 부(富)가 생산되는 관계 속에서 빈곤도 생산되고 있는 사실, 생산력의 발전이 일어나는 관계 속에서 억압을 낳는 힘(une force productrice de rèpression)이 존재한다는 사실, 이러한 관계는 부르주아 계급을 구성하는 개개(個個) 성원(成員)들의 富를 끊임없이 절멸시키고 끊임없이 증대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산출해냄으로써만 부르주아적 富, 즉 부르주아 계급의 富를 생산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부르주아지의 富가 축적되면 될수록 프롤레타리아트의 빈곤이 축적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자본주의적 축적의 적대적 성격) 속에서 ‘억압을 낳는 힘’을 발견한 마르크스는, 폭력을 뜻하는 독일어 ‘Gewalt’와 같은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 ‘force’를 선택한다.

마르크스는 노동과정이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 진행되는 경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공장의 내부에서는 분업이 기업가의 권위에 의하여 자세히 규정되고 있음에 반해 근대사회에서는 노동의 분배에 관하여 자유경쟁 이외에는 어떠한 규칙도 권위도 없다. ‥‥또 권위가 사회 내부의 분업을 지배하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분업은 공장 내부에서 더욱 발달하고, 그것은 더욱더 단 한 사람의 권위에 종속된다는 것이 일반적 법칙으로까지 주장될 수 있다. 이처럼 분업과 관련하여 공장의 권위와 사회의 권위는 서로 반비례한다.

바꾸어 말하면, 자본제 생산과정은 결합노동력(結合勞動力)으로서 나타나는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부르주아의 권위 ・지휘에 의한 노동의 편성을 불가피한 조건으로 삼는다. 따라서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을 분업의 시각에서 볼 경우 지배-피지배 관계를 갖는다.

그러므로 권위의 원리에 바탕을 둔 (외적 강제력으로서의) 분업의 편성은 명백히 적대적인 성격을 지닌다. {공산당 선언}은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총괄한다: “현대공업은 가부장제적(家父長制的) 장인의 작은 작업장을 산업자본가의 거대한 공장으로 바꾸어놓았다.공장에 집결된 노동자대중은 군대식(軍隊式)으로 조직된다. 그들은 산업군(産業軍)의 졸병으로서 하사관과 장교들로 이루어진 완전한 위계제의 감시 아래 놓인다. 그들은 부르주아 계급, 부르주아 국가의 노예일 뿐만 아니라 매일 매시(每時) 기계에 의해, 감독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별 공장 부르주아 자체에 의해 노예화된다. 이 전제정치는 영리가 그 목적이라고 노골적으로 선언하면 할수록, 더욱더 좀스럽고, 더욱더 증오스럽고, 더욱더 잔인한 것으로 된다.

이러한 임금노동의 강제는 한편으로는 국가적 조직의 기초, 즉 가장 본원적이고 가장 내용이 풍부한 구조인 시장구조를 받아들이며,또 이 점에서는 상품적 강제이지만, 동시에 국가의 매개적 개입을 이용하여 어느 한 계급이 행사하는 강제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그것은 생산에 대한 강제, 노동력 지출에 대한 강제로서도 파악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권위의 원리에 입각한 분업의 편성’이라고 말할 경우의 ‘권위의 개념’32)에는, 자본의 권력이 자본의 권위(Autorität)로 탈바꿈하는 문제가 포섭되어 있다. 여기에서 자본의 권력과 국가권력의 변증법적인 관계에 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산당 선언}은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 소유 및 인구의 분산을 점점 더 폐기한다. 부르주아지는 인구를 밀집시키고, 생산수단을 집중시키고, 소유를 소수의 손에 집적시켰다. 이로부터 나오는 필연적 결과는 정치적 중앙집권이었다. 상이한 이해관계들, [상이한] 법률들, [상이한] 정부들, [상이한] 관세들을 갖고 있던 그리고 거의 동맹관계에 의해서만 연결되어 있던 독립적 지방들이 하나의 국민, 하나의 정부, 하나의 법률, 하나의 전국적 계급이해, 하나의 관세구역으로 통합되었다.

여기에서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처리하는 하나의 위원회’일 뿐인 근대의 국가권력은 ‘자본의 권력’이 발전하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출현한다. 그런데 “부르주아지는 백 년도 채 못 되는 그들의 계급지배 속에서 과거의 모든 세대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들을 창조하였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이 자본의 권력에 의하여 규정된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자본의 권력과 근대의 국가권력을 구성하는 여러 요인의 상호관계를 다음과 같이 총괄한다: “정치제도에 있어서 공권력(公權力; pouvoirs publics)의 집중과 사적 이해(私的 利害)의 분할이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도구의 집중과 노동의 분할(분업) 또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처럼 소유의 권력과 근대의 국가권력은 각기 하부구조, 상부구조로서 각각의 구성을 이루고 있으나 양자는 밀접한 상호연관의 관계에 있다. 이 상호연관의 관계 속에서 소유의 권력이 궁극적인 규정자로서 확립되어 있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단순한 상호연관이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여 근대 국가권력의 폭력장치-군대 ・경찰 등의 근대적 편성은 권위의 원리에 입각한 분업의 편성, 공장 내부의 완전한 위계질서, 즉 생산관리 시스템의 피라미드型 구성에 상응한다.

자본제 생산양식에서 노동과정이 ‘자본의 생산과정’으로서 가치증식 과정의 물적 기초(物的 基礎)를 이룬다. 노동과정에서 자본의 생산과정으로의 강력한 탈바꿈, 자본의 생산과정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하여 자본의 권력이 관철된다. 자본의 권력이 관철되는 시민사회를 조율하는 국가권력은, 법에 의한 지배(이것의 제도적 표현이 三權 분립이다), 즉 법이라는 형식을 빌린 폭력을 행사한다.

{공산당 선언}은 “본래의 의미에서의 정치적 폭력[정치권력]이란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한 계급의 조직된 폭력(die organisierte Gewalt)”이라고 규정하면서,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국가권력의 계급적-폭력적 성격을 명백히 밝힌다.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의 조직된 ‘국가권력의 폭력’은 시민사회를 옥죄는 ‘외적 강제로(auf äußerm Zwang)’ 나타난다. 그러므로 국가의 강제, 총칼, 경찰, 즉 法이라는 형식을 갖춘 폭력이 부르주아 사회의 기초를 이룬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계급의 부정의(不正義)한 폭력’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의로운 강력(强力)’을 맞세운다: “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필연적으로 계급으로서 단결하고 혁명을 통해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만들고, 또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들을 강력으로(gewaltsam) 폐기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 생산관계들과 아울러 계급대립의 존립 조건들과 계급일반을 폐기하게 될 것이고, 또 이를 통해 계급으로서 자기 자신의 지배도 폐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인(各人)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결합사회(Assoziation)가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낡은 생산관계들을 강력(强力)으로 폐기하는 힘의 발현형태에 관하여 언급한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계급의 폭력을 부정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힘’이 필요하며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인(各人)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결합사회가 나타날 것’이라는 전제 ・조건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강력한 힘,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력을 동원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의 강력한 힘=제1차적인 Macht는,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과정을 소외시키는 ‘자본의 생산과정’을 인간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폭파 ・해체시키는 힘으로 나타난다. 그 발현형태는 맨 처음에는 자본의 생산과정에서 개개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직접적으로 ‘개개의 부르주아지에 대하여 충돌하는 형태’를 취한다.

{공산당 선언}은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양한 발전단계들을 경과한다.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그들의 투쟁은 그들의 존립과 더불어 시작한다. 처음에는 개별적 노동자들이, 그 다음에는 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또 그다음에는 한 지역의 한 노동부문의 노동자들이 그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공격을 다만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에 가(加)할 뿐만 아니라 생산도구들 자체에도 가(加)한다. ‥‥그러나 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프롤레타리아는 단지 수적으로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는 더 커다란 대중으로 집결되며, 그 세력이 증대하고 자신의 힘을 점점 더 자각하게 된다. 기계가 점점 더 노동의 차이를 소멸시키며, 임금을 거의 모든 곳에서 동일하게 낮은 수준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이해관계, 생활 처지는 더욱 더 균등하게 된다. 부르주아들 상호 간의 증대하는 경쟁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상업공황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더욱더 유동적인 것으로 만든다. 더욱더 급속하게 발전되는, 그칠 줄 모르는 기계의 개선은 노동자들의 생활상의 지위 전체를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든다. 개별 노동자와 개별 부르주아 사이의 충돌은 점점 더 두 계급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띤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연합을 형성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그들의 임금을 고수하기 위하여 함께 행동한다. 그들은 그때그때의 폭동에 대비하기 위하여 상설적 결사들까지 설립한다. 곳에 따라서 투쟁은 봉기로 터져 나온다.”

상설적 결사체, 즉 계급 정당이 출현하면 노동자 계급의 강력한 힘=제2차적인 Macht가 발현된다. 계급정당 성립 이전의 단계에서 모든 개별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 국가의 한 구성원임과 동시에 시민사회의 한 분자(分子)라는 이중적(二重的)인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계급정당 성립단계의 노동자의 새로운 강력한 힘(제1차적인 Macht+제2차적인 Macht)은, 자본의 권력과 국가권력을 한꺼번에 그 뿌리에서부터 폭파 ・해체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등장한다. {공산당 선언}은, 계급정당 성립단계의 노동자 계급의 강력(强力)에 의한 정치적 해방은 인간적 해방 일반의 최종적인 형태는 아니나, 지금까지
의 세계관 중에서 ‘인간해방에 대한 최극한(最極限)의 형태’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런 방향에서 모든 공권력의 지양에 의한 완전한 인간해방의 실현을 전망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의 강력을 강조했으나, 정치적 폭력의 사용이나 사회구성체에 대한 특별한 ‘제왕절개(帝王切開)’를 사회주의 혁명의 절대적인 전제로 삼지 않았다. 정치적 폭력의 사용이나 사회구성체에 대한 ‘제왕절개’는, 계급투쟁 ・사회적 항쟁에 관한 마르크스의 실천적 이론 속에서 제2의적(第2義的)인 역할을 할 뿐이다. 정치적 폭력 ・사회구성체에 대한 ‘제왕절개’는 언제나 계급투쟁의 ‘궁극적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 ‘계급 없는 사회’의 실현, 계급 없는 사회에서 ‘인류의 전사(前史)’가 막을 내리는 기초 위에서 진정한 인류의 역사가 개시되는 그러한 사회상태를 실현하는 궁극적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의 폭력(전쟁)의 계기는 바로 이러한 수준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수준을 무시한 비평가들이 ‘마르크스의 혁명론을 폭력중심의 혁명론, 폭력에만 의존하는 혁명론으로 무조건 비난하는 태도’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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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적인 문제로 각주를 생략했으니 양해 바랍니다.
 * 위의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의 제2장 제3절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40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