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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마르크스_ 정치경제학

자본축적 ・소유론과 평화

김승국

Ⅰ. 마르크스의 이론(필자의 박사 논문 [마르크스가 본 전쟁과 평화]을 참조할 것)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유인들의 연합(Verein freier Menschen),’<Marx {Das Kapital} MEW 23, p.92> 자본주의의 노동방식인 통합노동(combined labour)이 아닌 連帶勞動(結合勞動, associated labour)을 수행하는 ‘노동자의 자유로운 결사(die freie Assoziierung der Arbeiter)’ 즉 ‘Assoziation’(주1)으로서의 ‘공산주의’는 세계적 규모로 실현될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의 실현에 의하여 국가는 사멸(死滅)하고 인간의 자기소외(自己疏外)가 극복되어 땅(地上)에 평화가 깃든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평화구상은 ‘(세계 공산주의) 혁명에 의한 평화’이며 ‘Assoziation’이 이러한 평화의 담지자(Träger)이다.(주2)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란, 지상(地上)에 지복천년왕국(至福千年王國)이 도래하는 것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하는 labour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나라가 아닌, 자유롭게 각기 개성적인 제작-창조활동(Work)에 흥겨워하는 신(神)들의 나라 즉 인간역사의 종언이다. 마르크스 자신은 공산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인류의 전사(前史)가 끝나고 ‘인류의 본사(本史)’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다.<日本政治學會 편, {政治思想史における平和の問題}(東京: 岩波書店, 1992) 52쪽>

마르크스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영구전쟁(永久戰爭) 상태에 있는(in ewigem Kriegszustand) 인류의 전사(前史)가 막을 내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고한노동(苦汗勞動, labour)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구평화 상태에 있는(in ewigem Friedenszustand) 인류의 本史(공산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의 지양(Aufhebung
der Arbeit)<주3>을 통하지 않고는 평화를 누릴 수 없다.

Ⅱ. 송태경의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론

앞에서 언급했듯이 ‘自由人들의 연합(Verein freier Menschen)’에 평화의 계기가 있다. 이를 한반도로 끌어들이면, ‘자유인들의 연합을 통한 사회 구성체 형성’이 한반도 평화 로드맵의 요체이다. 자유인들의 연합을 통한 사회 구성체를 어떻게 형성하느냐가 한반도 평화통일의 관건이라는 말이다.

‘자유인들의 연합을 통한 사회 구성체 형성’과 관련된 문헌 중에서 송태경의 글을 우선 인용한다:
“공동으로 확보된 생산수단(the means of production held in common)으로 일하며, 또 자기들의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충분히 자각하고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연합체(An Association of Free Men)를 상상해 보자.”<송태경 {소유문제와 자본주의 발전단계론}(서울, 자유인, 1994) 157쪽>

물질적 생산과정, 즉 사회적 생활과정은, 자유롭게 연합된 인간들에 의한 생산(the Production by Freely Associated Men)으로 되고, 또한 그들의(자유롭게 연합된 인간들의) 의식적 계획적 통제 밑에 놓이게 될 때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을 벗겨버린다.<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자본} 1권(서울, 비봉출판사, 1989) 98~99쪽>

‘자유롭게 연합된 인간들에 의한 생산’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소유 형태는 어떠한 것이 바람직한가? 주식회사와 같은 소유형태가 바람직한가?
주식회사에서 기능은 자본소유권(capital ownership)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그리하여 노동도 생산수단과 잉여노동의 소유권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고의 발전이 낳는 이러한 결과는 자본을 생산자들의 소유-그러나 이제는 개별 생산자들의 사적 소유로서가 아니라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associated producers) 또는 직접적인 사회적 소유(directly social producers)-로 재전환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이행점(a necessary point of transition)이다. 즉 생산수단은 사회적 생산의 발달에 따라 사적 생산의 수단이나 생산물이기를 멈추며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적 생산물임과 동시에 그들[연합된 생산자들]의 수중에 있는 생산수단, 이리하여 그들의 사회적 소유[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적 소유]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그것 안에서는 이러한 수탈은 소수인에 의한 사회적 소유의 취득이라는 반대의 형식을 취하여 나타난다.<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자본} 3권(비봉출판사, 1989) 537 / 540~541쪽>

자유의 왕국[보다 높은 단계의 자유인들의 연합체 또는 공산주의]은 궁핍과 외부적인 편의에 의해 규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진정으로 시작된다. 즉 사회화된 인간, 연합된 생산자들이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여 그 신진대사가 맹목적인 힘으로써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진대사를 집단적인 통제하에 두는 것, 그리하여 최소의 노력으로 그리고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적합한 조건하에서 그 신진대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아직 필연의 왕국[실질적으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분배받는 낮은 단계의 자유인들의 연합체 또는 공산주의도 아직은 물질적인 규정성에 얽매인 필연의 왕국이라는 뜻)], 이 왕국을 넘어서야만 진정한 자유의 왕국이 시작된다. 비록 자유의 왕국은 필연의 왕국을 그 토대로 하여야만 개화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노동일 단축은 그 기본조건이다.<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자본} 3권(비봉출판사, 1989)  1010~1011쪽>

자유인들의 연합체를 상상해 보라고 권유한 송태경은 마르크스의 원전에서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 개념을 발견한 다음, 자신의 지론으로 삼는다.

송태경은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으로 되는 사회상태는 단순한 이상일 뿐인가? 이상이 아니라면, 그러한 사회적 조건은 무엇인가?”

위의 사회적 조건 중 하나가 노동자들의 공동소유에 있다고 보는 송태경은 아래와 같이 간결하게 요약한다: “대우자동차라면 대우자동차에서 생산의 실질적인 당사자인 전체 노동자들의 공동소유로! 포항제철이라면 포항제철에 자유롭게 결합한 전체 노동자들의 공동소유로! 모든 자본주의적 생산형태들을 노동자들 자신의 소유로!”<송태경 {소유문제와 자본주의 발전단계론}(서울, 자유인, 1994) 24쪽>

송태경은 위의 발상을 다음과 같은 정치적 슬로건으로 제시한다. “주주들의 투표가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주주들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주주들의 이익을 위한 이사와 감사가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한 이사와 감사로. 주주들이 소유한 기업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이 소유한 기업으로.<송태경 {소유문제와 자본주의 발전단계론} 77쪽>

송태경에 따르면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에서는 개별 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분배받게 되는 생활수단의 소유 이외에는 없게 된다. 즉 개인의 생명활동에 필요한 생활수단을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분배받기 시작한다. 개인이 소유하는 생산물은 이제 더 이상 타인을 착취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다양한 소비욕망을 충족시키는 생명활동의 요소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인적 소유가 하나의 진실로 되는 것이다.’<송태경 {소유문제와 자본주의 발전단계론} 78쪽>

자신들이 생산한 생산물의 판매자로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제는 자본가나 자본가를 위해서 일하는 대리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일하는 직접적인 생산의 담당자들이다. 즉 이윤을 위해서 일하는 자본가나 그 이윤을 생산해 냄으로써만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생명활동을 위해서만 마주하게 되는 실질적인 자유인들이다.
따라서 교환을 매개로 한 교류라고 하더라도 이윤을 위한 교류가 아니라 생명활동을 위한 교류이며, 그 교류의 사회적 성격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송태경 {소유문제와 자본주의 발전단계론} 80쪽>

송태경은 이와 같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동증서의 활용을 권유하면서.<송태경 {소유문제와 자본주의 발전단계론}(서울, 자유인, 1994) 83쪽> 스웨덴 모델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스웨덴의 소부르주아적 공상가들은 임금과 잉여가치의 항상적인 분리를 전제로한 복지국가 모델을 상정했던 것이다. 스웨덴의 소부르주아적 공상가들은 이 지점까지만 옳았었다. 그들은 ‘국유화=사회화’라는 등식을 현실운동의 경험 과정에서 포기해야만 했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투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소유문제를 현실의 영역에서는 배제한 채,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니며, 그렇다고 다음 사회도 아닌 제3의 길을 찾아 방황하고 있었다.”<송태경 {자유인들의 연합체를 위한 선언}(서울, 자유인, 1993) 41쪽>

이어 송태경은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소유의 권력을 매개로 자본의 권력을 노동의 권력으로 형태변환시키자!’고 주장한다.<송태경 {자유인들의 연합체를 위한 선언} 54~57쪽 요약>

그는 ‘문제의 핵심은 혁명(Revolution)이며, 이 혁명은 소유관계에서의 혁명이다’고 결론 내린다.<송태경 {자유인들의 연합체를 위한 선언} 77쪽>

    1) 송태경의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론에 대한 비판

송태경 씨의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론에 대하여 김성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송태경 씨의 잘못된 이해로부터 우리는 곧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에 대한 그의 이론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하에서 발전하는 공동생산과, 주식자본 형태에서 형식적이나마 발전하는 공동소유로 특징져지는 주식회사 자본주의는 다수의 주식 자본가의 공동소유를 해당기업 전체 노동자의 공동의 주식소유로 전환함으로써 자본관계를 지양하고 실질적인 공동생산과 공동소유, 이른바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로 전환한다. 이 사회는 해당기업 전체 노동자의 공동소유,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소유)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것은 주식회사 자본주의의 지배형태인 주식자본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 그 계승 위에서 이를 노동자들의 공동소유로 전환함으로써 성립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새로운 사회를 주식회사 사회주의라고 명명하는 것이다.”<김성구 「사회주의의 공상과 자본주의의 승인 그리고 ‘우리사주 사회주의론’」 {진보평론} 제4호(2000년 여름) 223쪽>

김성구 교수는 송태경의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론을 ‘우리사주 사회주의론’으로 폄하하면서 비판한다. 이는, 송태경의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론에 영향을 받은(?) 민주 노동당의 ‘우리사주 사회주의론’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되므로 긴장된 논의를 유발한다.

Ⅲ. 황태연의 소유론

… 자본주의적 점취양식,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privateigentum)는 개인적인(individuell), 즉 자기노동에 근거한 사적 소유의 첫 번째 부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 그 자신의 부정을 낳는다.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이 부정은 사적 소유를 다시 산출하지는 않지만, 물론 자본주의 시대의 전취물(戰取物), 즉 협업 및 대지(Erde)와-노동에 의해 생산된-생산수단의 공동점유(Gemeinbesitz) 토대 위에서 개인적 소유(individuelles Eigentum)를 다시 산출한다.<Marx ・Engels {MEW} 23권, 791쪽>

마르크스가 ‘개인적 소유(individuelles Eigentum)’를 사회주의적 소유제도의 한 결정적인 요소로 내다보고 있음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 ‘개인적 소유’는 자기노동과의 통일성에 기초한 소유인데, 이것은 노동하는 개개인의 손에 확고히 들어가 있되, ‘공동점유(Gemeinbesitz)’의 형태로 연합한, 즉 연대한 소유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이 ‘개인적 소유’는-자기노동과의 통일성에 기초하는 한에서-개인적이되 동시에 사적인 소유인, 小생산자들의 ‘개인적인 사적 소유’와 엄격히 구별되는 것이고 중소자본가들의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도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개개 노동자들의 명확히 구별된 개인적 소유부분들의 연합방식으로서 ‘공동소유(Gemeineigentum)’가 아니라 ‘공동점유’를 제안하고 있다.<황태연 {환경정치학과 현대 정치사상}(서울, 나남, 1992) 122쪽>

마르크스는 ‘공동점유’ 상태의 생산수단에 대한 ‘개인적 소유’에 대해 두 가지 구체적 형태를 염두에 두고 있다.
“자본주의적 주식기업은 협동조합 공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연대적 생산양식(assoziierte Produktionsweise)으로 넘어가는 이행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Marx ・Engels {MEW} 25권, 456쪽>

이것으로부터 중소자본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지분소유권자들의 ‘공동 점유식’ 연대에 기초한 협동조합 기업을 도출하고 독점적, 과점적인 또는 여타 ‘공동 점유식’ 연대에 기초한, 사회적으로 체제 개편된 주식회사를 도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것인가? 이 두 형태는 이 안에서 주식소유와 노동의 통일 및 지분소유와 노동의 통일원리가 관철된다면, 그리고 이 형태들이 정치권력과 재정지원을 통해 전국적 차원으로 확산된다면 사회주의적 형태로 성장, 전환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변혁은 대자본가들의 수탈과 이들의 자본소유 및 주식소유를 주식과 지분의 형태로 노동하는 개인들에게 분배할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황태연 {환경정치학과 현대 정치사상} 128~129쪽>

Ⅳ. 김낙중의 공동상속제

현재 우리가 남과 북의 경제체제를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로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적 기준은 생산수단의 소유형태이다. 생산수단이 남측에서는 사적 소유가 지배적이며, 북측에서는 사회적 소유, 즉 국가적 소유 또는 집단적 소유가 지배적이다.

남과 북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생산수단의 소유형태를 변화시켜 나갔다. 남측에서는 국유 또는 국가가 관리하던 생산수단들을 점차 국내외의 개인 자본가의 소유로 변화시켰으며, 북측에서는 개인소유이던 생산수단들을 점차 집단적 소유 또는 국가적 소유로 전환시켜 나갔다.

‘남북공동선언’이 선언한 대로 상대방의 체제를 서로 인정 ・존중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려 할 경우, 지난 반세기 동안 서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려와서 이루어 놓은 오늘의 상이한 경제체제를 놓고, 어떻게 하나의 같은 체제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생산수단의 소유형태를 놓고 벌어졌던 지난날의 좌우익 갈등은, 비록 ‘1국가 2체제’가 유지되는 당분간은 잠복해 있을지라도, 결국은 장차 갈등이 다시 표면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좌우익의 갈등 속에서 ‘제3의 길’을 찾는다며, 주로 서유럽식 ‘민주사회주의체제’나 ‘복지사회체제’ 등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구식 ‘복지사회체제’는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들이 지적되고 있다.

첫째, 광범한 사회보장제도의 실시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의 투입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자본축적이 부족하고 그래서 자본 경쟁력이 약한 나라에서는 채택할 수 없는 제도다. 둘째, 광범한 사회보장 제도의 실시는 그 나라 사람들의 치열한 경쟁 의욕을 박탈하고, 드디어는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하는 소위 ‘복지병’을 초래케 한다. 셋째, ‘복지사회체제’란 인간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자에 의한 ‘시혜’로 자본주의적 ‘불평등제도’를 영속시키려는 제도에 불과하다는 지적 등이다.

그런데 오늘의 남북 관계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통일 민주국가가 ‘복지사회체제’를 추구하려면, 이는 사회적 소유로 되어 있는 북측의 생산수단들을 사적 소유로 전환시키고, 남측의 사회보장제도를 대폭 확장하는 것을 요구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과연 남측에서 사회보장제도를 대폭 확충하고, 그 혜택을 소득수준이 낮은 북측 주민들에게도 나누어 주기 위해 자본가들이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조세를 부담할 의지가 있을지, 또 그렇게 하고도 개방체제하의 경쟁을 치를 능력이 있을지 하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

다른 한편으로 지난 50년 동안 빈부 격차가 없는 평등사회, 외국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민족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투쟁했다고 자부하는 북측 사람들 역시, 현재 사회적 소유로 되어 있는 북측 생산수단들을 모두 남측 또는 외국인 자본가들의 손에 팔아 사유화시키고, 그곳 주민들로 하여금 외국인이나 남측 자본의 피고용인이 되게 하거나, 사회보장 혜택이나 받아서 살아가는 처지가 되게 하는 것을 수용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그렇게 때문에, 자본축적이 충분치 않고, 국제경쟁력이 낮은 현재의 남과 북의 경제 형편을 가지고, 이대로 북구식 복지사회체제를 실현하려는 것은 현재로서는 그 실현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라 생각된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사회적 소유가 혼합된 경우를 가리켜 ‘혼합경제체제’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 현재 지구촌의 국가들은 엄밀히 말하면, 모두 ‘혼합경제체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모두 ‘혼합경제체제’라는 점에서는 결코 대립적 체제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장차 우리의 통일 민족국가도 일단 ‘혼합경제체제’일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혼합의 정도는 남과 북이 똑같은 정도일 필요도 없으며, 통일 민족국가의 지향이 사유화와 사회화 중 양자택일하는 것일 필요도 없다. 필요에 따라 사회화나 사유화를 확대할 수도 있고, 시장경제나 국가 개입조절을 확대할 수도 있는 ‘경제체제의 유연함’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통일 민족국가의 모습과 관련하여 사유화와 시장화의 방향도, 사회화와 국가계획의 방향도 결코 ‘절대적인 것’으로 경직화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경제체제의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회화된 생산수단을 사유화하자면, 국공유 재산을 국가나 공공단체가 개인에게 매각 처분하면 되기 때문에 비교적 용이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유재산을 사회화하자면, 국가나 공공단체는 많은 보상금을 지불하거나 아니면 공권력에 의해 강제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때문에 보상금을 지불하자면 자금 부족에 직면하게 되고, 강제 수용하자면 기득권자의 저항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폭력혁명의 필요성이 제기됐던 이유도 바로 무리한 사회화를 강행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경위로든, 일단 자기 소유로 된 사유재산을 포기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역사 속의 신분계급제도란 공권력을 담당할 수 있는 사회적 신분을 특정인들에게만 상속하기 위한 제도였다. 그에 비해 자본주의는 개인적 소유재산을 사적으로 상속하기 위해서 소유권을 절대화했던 또 하나의 계급제도였다. 그러나 모든 계급제도는 사람들의 불평등을 경제 외적 강제의 힘으로 유지하려는 사회제도로서 갈등을 축적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유한한 시간을 살고, 빈손으로 무덤에 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자기가 사유했던 재산이나 권력 ・신분을 특정한 자기 자식들에게만 물려주려는 사사로운 욕심에서 불평등한 계급제도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경제체제가,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을 원활히 해소할 수 있게 하자면, 그리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사회적 소유, 시장 방임과 국가계획 사이를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경제체제의 유연성’을 가지게 하자면, 나는 공동상속제도의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공동상속제도란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이 땅의 자연자원과 인류의 역사문화 유산을 가지고 더불어 살아야 하며, 또 살 권리가 있다’는 철학을 기초로 한다. 사람들 사이에는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 이러저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이 사회정의에 합당한 것이다.

그렇지만, 저마다 능력을 개발할 기회의 균등을 보장한 뒤의 경쟁이라야 공정한 것이 된다. 사람들의 자유경쟁은 능률 향상을 위해 바람직하지만, 경쟁 조건은 삶의 출발선에서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공동상속제도는 자유롭고 보다 능률적 공정경쟁의 필수조건이며, ‘사회주의 분배원칙’ 실현의 길이기도 하다[필자 주: 사회주의 분배 원칙이란 ‘능력에 따라 일하고, 그 성과에 대해 정당한 분배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적 분배원칙이 실현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산수단을 국유화 ・집단화하는 사회화가 사회주의 분배원칙 실현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되기는 하지만, ‘사회주의 분배원칙’을 실현하는 절대조건은 아니다. 현실사회주의가 ‘국가사회주의’라고 불리고, 또 그것이 ‘실패했다’는 말을 듣는 이유도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생
산과 저축, 분배를 담당하는 국가 관료들의 비능률과 불공정으로 ‘사회주의 분배 원칙’이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장차 우리의 통일 민족국가가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또 물적 ・인적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보장하는 사회로 되게 하자면, 나는 남과 북이 모두 공동상속제를 도입하여 경제체제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자기 경제체제를 변화하도록 해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생산수단의 소유권에 관해 유연성을 가지는 경제체제로 되자면, 남측에서는 우선 누진상속세를 점차 강화하고, 드디어는 사적 상속 허용재산의 상한액을 정하고 그 초과분을 ‘공동상속기금’으로 하여, 해마다 일정 연령에 도달한 청년들에게 자본을 배분하는 제도를 도입하여야 한다. ‘공동상속기금’으로 공교육제도를 대폭 확대하고, 사적 상속 허용 범위를 점차 축소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북측에서는 각종 생산수단의 운영에 성과배분 제도를 대폭 도입하고, 관료주의에 의하여 경직화된 국가적 ・집단적 소유 기업체들을 과감하게 종업원 지주회사 또는 주식회사 형태의 사유적 기업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공동상속제에 의해서 경제체제 변화의 유연성을 획득한 ‘혼합경제 체제’는 언제라도 국민대표기관에 의해서 생산수단의 사유화, 자유시장화를 확대할 수도 있고, 아니면 생산수단의 사회화, 국가 개입 조절 영역을 확대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면 사회주의 지향이냐 아니면 자본주의 지향이냐는 것을 가지고 머리 터지게 싸워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리고 공동상속제도의 도입은 자본축적이 미약한 나라에서나, 과잉축적으로 인한 유효수효가 부족한 나라에서나, 빈부격차가 극심하여 그 극복이 절실한 나라에서나, 한결같이 그 나라 경제의 필요에 따른 가장 적절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국민과 국
가 경제정책 당국에 부여하게 될 것이다.<김낙중 「‘통일 민족국가’가 지향해야 할 정치 ・경제체제」 {진보평론} 제6호(2000년 겨울) 155~162쪽 요약>
(200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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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국 지음『한반도의 평화 로드맵』(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418~436쪽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