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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칼럼-에세이

[미완성 습작 (8)] 잘사는 평화 (4)

잘사는 평화 (4)

 

평화 경제

 

 

김승국(평화활동가)


 

 

1. 북유럽 국가들

 

 

옛날에 북유럽은, 호전적인 바이킹 때문에 폭력‧전란(戰亂)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노르웨이를 둘러싸고 스웨덴‧덴마크가 다퉜다. 여기에 북방의 영토 확대를 노린 프러시아가 시비를 걸어왔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지금의 북유럽 땅은, 전쟁이 일어나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평화지역’으로 변모했다. 제2차 대전 뒤 평화지역을 만들려는 시도가 유럽 전역으로 확대된 끝에 유럽연합(EU)이 등장했다.

 

 

이러한 경험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 경제적 기반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노르딕 밸런스(Nordic Balance)’에 있다. 노르딕 밸런스에 관한 김진호 교수의 논문「북유럽 평화체제로서 노르딕 밸런스」<『동아시아 논총』(제주대 평화연구소 발간) 제15권 제1호(2004년)>를 통해, 북유럽 국가들이 평화경제를 이룩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럼「북유럽 평화체제로서 노르딕 밸런스」를 요약하면서 평화경제와의 연결지점을 찾아본다;

 

‘노르딕 밸런스’란 말은 노르웨이의 외무장관이었던 랑게(H. Lange)가 처음으로 쓴 표현이며, 브룬트랜드(A. O. Brundtland)에 의해서 이론화되었다. 랑게는, 북유럽 국가들이 각기 독립적인 안보정책을 추구해 나가면서 전체적으로는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이 말은 북유럽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심개념이며, 특히 스칸디나비아 제국의 안보정책결정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노르딕 밸런스’는 이 지역의 ‘세력균형’과 동일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동구와 서구의 양극화와 2대 초강대국의 대결이 이 지역에서 완화되어 균형을 잡고 있다는 뜻이다.

 

 

노르딕 밸런스 이론의 제1 요소는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최저조건에 의한 나토(NATO) 가맹이다. 이들 양국은 국내에 외국기지를 인정하지 않고 평시에 핵의 도입을 인정하지 않는다. 제2 요소는 중무장 비동맹을 모토로 삼는 스웨덴의 외교정책이고, 제3 요소는 소련과의 우호‧협력‧상호원조 조약의 틀을 유지하는 핀란드의 중립정책이다. 이처럼 (소련과의 잠재적인 군사동맹적 성격을 갖는) 핀란드가 동쪽에 있으며, (나토 가맹국인) 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가 서쪽에 존재하며, (중립정책을 취하는) 스웨덴이 가운데에서 완충작용을 하는 노르딕 밸런스의 구도가 평화체제‧평화경제라는 쌍생아를 낳은 것이다.

 

 

북유럽 5개국은 노르딕 밸런스를 유지하며 ‘중립-비동맹-비핵지대화’ 정책을 펼친 끝에 평화경제를 이룩했다. 다시 말하면 노르딕 밸런스→중립‧비동맹‧비핵지대화 정책→군비축소에 의한 평화 배당금 조성→평화 배당금을 복지‧교육‧경제 기반시설 확장에 전용→평화 지향적인 경제발전→평화 경제의 선순환(善循環)에 성공한 것이다.

 

 

2. EU

 

 

경제협력을 통한 평화체제 구축의 모범사례가 EU이다. EU식 평화경제의 모체가 된 것은 슈망(Schman) 계획이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인 슈망이 ‘독일‧프랑스의 해묵은 자원전쟁터이었던 루르(Ruhr)‧자르(Saar) 지방의 석탄‧철강생산을 공동으로 고위당국 권한의 규제 아래에 놓자’는 ‘슈망 플랜’을 발표한다.

 

 

석탄과 철강은 무기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전략물자이다. 불행하게도, 이 전략물자가 풍부하게 매장된 루르‧자르지역(프랑스‧독일의 접경지역)을 에워싼 쟁탈전이 제2차 대전으로 이어지고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분단(철의 장막)을 가져왔다. 따라서 루르‧자르지역의 전략물자인 석탄‧철강을 공동개발하자는 제안은 ‘2차 대전의 구원(舊怨)을 청산하고 경제협력을 통한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제안’으로 여겨졌다. 전략물자를 공동관리 아래에 두고 프랑스‧독일 및 기타 가맹국을 구속하는 결정권을 갖는 새로운 최고기관을 설립하자는 제안이야말로 ‘평화유지에 불가결한 유럽연방으로 나아가는 최초의 실질적인 기반’을 구축한 것이었다(슈망 선언).

 

 

슈망의 제안에 따라 1953년에 출범한 ECSC(유럽석탄철강 공동체)는 부전(不戰)공동체로서 EU통합의 효자 노릇을 했다. 군비증강‧전쟁용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많은 석탄‧철강 산업을 ECSC라는 부전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여 유럽통합의 길을 연 발상이 빛난다.

 

 

2001년 12월 14~15일 라켄(Laeken)에서 개최된 유럽이사회가 채택한「EU의 장래에 관한 라켄 선언」에서 강조하듯이 ‘과거[2차대전]의 악령과 결별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 석탄철강 공동체이었다. 이게 다른 경제활동분야(농업 등)로 점차 확대되었다. 최종적으로는 물자‧인력‧서비스‧자본을 포섭하는 단일시장을 구축하는데 까지 이르러 1999년에는 단일통화도 도입되었다. 2002년 1월 1일에는 유로(euro)가 3억 명의 유럽인 사이에 일상적으로 유통되는 통화로 진척되었다. 이렇게 EU의 모습이 갖춰졌다. 당초의 경제‧기술적인 협조관계가 겹겹이 쌓여 유럽의회의 직접보통선거가 이루어져 공동체의 민주적 정당성이 비약적으로 강화되었고, 이는 정치동맹의 구축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회정책‧고용‧난민‧이민‧경찰‧사법‧외교정책 및 공통의 안전보장‧방위정책 분야에서도 협력관계가 모색되었다. EU의 역사는 성공의 역사이다. 오늘날까지 반세기 동안 유럽은 평화를 유지해왔다. 지금 유럽의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및 그 이후에 정착된 유럽의 인위적인 분단이라는 유럽 역사의 암흑의 1장(章)에 최종적인 막이 내려질 것이다. 이제 유럽은 유혈과는 무관한 하나의 커다란 가족을 이루는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평화경제의 성공사례를 예시했는데, 실패사례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겠다. 이러한 뜻에서 평화를 상실한 경제발전 사례를 기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