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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운동/평화기행

일본 서부 지방 탐방기 (5)


김승국

 

프롤레타리아트 음식-라아멘

 
 
 
필자가 8월 1~14일에 일본의 서부 지방을 돌면서 ‘프롤레타리아트 음식’을 먹은 경험을 싣는다. 일본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즐겨 먹는 라아멘 · 규동 · 우동 · 소바 등을 ‘프롤레타리아트 음식’으로 규정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인 하층민 · 지지리 못난 아랫 것들(subaltern)이 즐겨 먹는 먹거리가 프롤레타리아트 음식인 셈이다. ‘서민 음식’이라고 하면 싱거우니까 붙인 이름이다
 
필자는 14일간 일본에서 지내면서 ‘라보때’의 생활을 했다. ‘라보때’란 ‘라면(일본의 라면은 ‘라아멘’이라고 발음한다)으로 보통 때우기’의 줄인 말이다. 제한된 여비가 ‘라보때’를 강요한 것이다. 라아멘 등의 프롤레타리아트 음식을 주식 삼아 14일간 지내는 것은 고행(?)이지만, 일본의 프롤레타리아트들과 음식 맛을 통해 심리적인 연대를 즐기는 행위이다.

먼저 한국의 라면과 일본의 라아멘은 질적으로 다른 점을 강조한다. 한국의 라면은 대표적인 인스턴트 식품이며 식당에서도 인스턴트 라면을 끓인다. 그런데 일본의 라아멘은 인스턴트 음식이 아니며, 식당마다 라아멘의 맛이 다를 정도로 다양성을 자랑한다. 라아멘은 노란 색의 밀국수로서 중국 수입품이다. 일본인이 원숭이처럼 모방을 잘하기로 유명하지만 라아멘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에서 들여온 라면(拉麵)을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개조한 것이 라아멘이다.

일본의 장기불황으로 프롤레타리아트들의 호주머니에 찬바람이 분 탓인지, 라아멘 전문 식당들이 성업중이라고 한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라는 노래가 있듯이 일본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은 돈이 없으면 ‘라보때(라아멘으로 보통 때우기)’한다. 라아멘으로 끼니를 때우는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숫자가 급증한 탓에 라아멘 전문 식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 손님 끌기 경쟁이 치열하다고...그래서 4~5년 전부터 ‘라아멘 붐’이 일본 열도를 강타하고 있단다.
그럼 지금부터 독자들을 ‘라아멘 붐’의 한가운데로 모신다. 일본의 언론매체는 틈만 나면 라아멘을 대서특필한다. 유명한 라아멘 식당을 심층취재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라아멘의 철인(撤人)’ ‘라아멘의 달인(達人)’ 등의 프로그램은, 유명한 라아멘 식당에서 독특한 맛을 내는 비법을 비밀리에 취재했음을 알리며 요란한 목소리로 떠벌린다. 유명한 라아멘 식당마다 등급을 매겨 상세하게 안내하는 프로그램도 많다. 그런 식당을 찾아가는 방법 등을 너무나 자세하게 소개하는 바람에 라아멘 맛이 달아날 정도이다. 소비지향적인 주간지도 취재경쟁에 뛰어들어 라아멘 붐을 일으키는데 큰 몫을 했다. 라아멘 붐은 우주공간에서도 확인되었다. 얼마 전 우주선 디스커버리 호에 승선한 일본인이 우주에서 인스턴트 라면을 먹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라아멘 붐은 강력하다.

그럼 왜 라아멘이 인기 있는가? 산전수전 겪으며 살아가는 인생의 짠 맛이 라아멘 속에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서민들(프롤레타리아트)의 땀 냄새가 라아멘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100엔짜리 동전 두서 닢으로 따끈따끈한 국물 맛을 느끼며 쫄깃쫄깃한 면을 씹을 수 있는 것은 라아멘 뿐이다. 자신들을 수탈하는 지배계급을 씹기 어려운 사회구조를 지니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가장 값싸게 씹을 수 있는 음식이 라아멘이다.

모순이 많은 사회일수록 아랫 것들(프롤레타리아트)은 씹는 음식을 좋아한다. (지배계급을 마음속으로) 실컷 씹으면서 먹어도 값이 싸고 배가 부른 음식을 좋아한다. 바로 라아멘이 그런 음식이다. 필자가 14일간 일본에서 지내면서 가장 적은 투자로 가장 배불렀던 음식은 라아멘과 규동 뿐이었다. 필자의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라보때’ 기행을 했지만, 라아멘을 먹을수록 독특한 맛에 빠져들었다.

 

‘라보때’ 기행

 

음식 인심이 사납기로 소문난 일본 땅에서 한국인은 배겨나기 힘들다.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위장이 큰 대식가(大食家)’인데 비하여 일본인은 ‘위장의 크기를 줄이는 소식가(小食家)’이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지배계급이 민중(프롤레타리아트)을 수탈하는 방식에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생활사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경우 지배계급이 민중들의 밥통(위장) 즉 욕구의 크기를 인위적으로 줄이지 않은 반면 일본은 민초들의 밥통을 제도적으로 줄여왔다. 한국 민중들의 식탁이 푸짐한데 비하여 일본 민중의 식탁이 초라한 것은 이를 반증한다. 한국의 식당이 5~10가지의 반찬을 내놓는데 비하여 일본의 식당은 밥(주요 메뉴)과 한두 가지의 반찬만 나오는 초라한 식탁을 꾸며준다. 일본 식당에서 밥 · 반찬을 더 달라고 조르면 돈을 더 내라고 손을 벌린다. 야박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음식 인심이 사나운 일본 땅에서 지내는 프롤레타리아의 쪼그라든 밥통의 면적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밥통 늘리기 투쟁’이 필요하다. 밥통 늘리기 투쟁이 바로 민중운동이 아닌가? 밥통 늘리는 연습을 하며 투쟁력을 길러야 민중운동이 잘되지 않을까? 일본의 민중운동이 잘되려면 기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밥통을 늘리는 투쟁을 해야 하며 민중 스스로 밥통을 늘려야한다.

일본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라아멘을 배터지게 드시라! 라아멘 대식가가 되시라! 라아멘을 통해 ‘위장(욕구) 늘리기’ 연습을 하며 지배계급을 향해 칼을 가시라! 한국인들이 김치의 힘으로 투쟁하듯이 ‘라아멘의 힘’으로 투쟁하시라!

필자는 이렇게 ‘라아멘 투쟁가(‘라아멘을 많이 먹고 투쟁하자!’고 일본의 민중들에게 주문함)’를 부르며 ‘라보때’ 기행을 즐겼다.

8월 1일 히로시마에 도착한 날의 첫 식사부터 라아멘을 먹음으로써 ‘라보때’ 기행을 시작했다. 7월 31일 부관페리(부산~히로시마를 해상운행하는 여객선 이름) 속에서 하룻밤을 지낸 필자는, 아침식사를 거른 탓인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히로시마 항구의 부두에 오전 10시경에 내렸다. ‘아점(아침과 점심 사이의 식사)’의 메뉴를 라아멘으로 결정하고 항구 주변의 라아멘 식당을 찾았으나 실패.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노면전차를 타고 히로시마 시청으로 달려갔다.
히로시마 시청에서 볼 일을 마친 다음 시청의 구내식당에 들어갔다. 수많은 대중적인 메뉴 중 ‘닭고기 라아멘’이 눈에 띠어 300엔(3,000원)짜리 식권을 샀다. 그런데 라아멘 한 그릇만 달랑 주고 반찬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반찬 한조각도 주지 않고 라아멘만 먹으라니 너무 하지 않나 싶어 볼멘 목소리가 나오려 했다. 옆 사람들은 어떻게 먹나하고 힐끗 살펴보니, 반찬을 먹고 싶은 사람들은 반찬만 따로 파는 진열장에 가서 추가 요금을 내고 먹는 게 아닌가? 그래서 반찬 진열장에 갔는데 까무러칠 뻔했다. 푸성귀 몇 조각을 앙증맞은 그릇 안에 넣고 150~250엔(1,500원~2,500원)을 달라고 하지 않는가? 라아멘 값의 절반 이상을 투자하여 한 가지 반찬을 사 먹어야하는 궁색함을 저주할 힘도 없이 배가 고파서 라아멘 한 가지만 먹어제꼈다.

비록 반찬이 없지만 라아멘은 맛이 있었다. 쫄깃쫄깃한 면에 숙주나물이 들어 있고, 돼지 뼈로 우린 라아멘 국물이 위장 벽을 따끈따끈하게 했다. 라아멘 특유의 향신료 냄새를 맡으며 먹으니 기분도 좋아졌다. 바로 이 맛을 즐기려고 일본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이 라아멘 전문 식당 앞에서 줄을 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라아멘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운 필자는 성에 차지 않았다. 3천 원짜리 라아멘 한 그릇이 필자의 곳간(위장)을 절반 정도밖에 채워주지 못했다. 그래서 배를 채우기 위해 170엔(1,700원)짜리 가께 우동 한 그릇을 추가로 먹으니, 뭔가 먹은 듯한 포만감이 생겼다. 라아멘 국물과 가께 우동 국물이 위장 속에 들어가 출렁이면서 뒤섞이는 쾌감을 느끼며 시청 청사를 나왔다. 4,700원을 들여 ‘라보때’의 첫 기행을 마친 셈이다.
8월 1일 저녁의 ‘라보때’ 기행은 좌충우돌 속에서 이루어졌다.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의 본부에서 마련해준 소규모 호텔 직원에게 라아멘 식당의 위치를 물으니 이내 알려주었다. 그 식당에 가 보았는데 라아멘 전문 식당이 아니라 대중 술집(이자까야) 겸 식당이었다. 뒤돌아설 수 없어서 가장 값싼 음식 중 ‘매실 차에 밥 말아 먹는 음식’을 520엔(5,200원)을 주고 시켜 먹었으나 간에 기별이 가지 않아 진짜 라아멘 식당을 찾아 나섰다. 물어 물어 겨우 찾은 라아멘 전문 식당에서 라아멘을 먹고서야 저녁 식사를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일본에 도착한 첫날부터 하루 종일 라아멘을 먹으니 흰 쌀 밥에 고깃국 생각이 간절했으나 눈을 딱 감고 이불 속에 들어갔다.

8월 1일 밤늦게 찾아간 라아멘 전문 식당의 라아멘 맛은 역시 달랐다. 8월 2일부터 히로시마를 떠나는 8월 6일까지 그 집에서 여러 종류의 라아멘을 시켜 먹었는데 라아멘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라아멘 붐’을 타고 라아멘 전문 식당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기 때문에 라아멘 전문 식당들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서로 맛 자랑을 하며 이웃 가게와 경쟁하기 위해 식당 주인들이 분발한다고 들었다. 라아멘 식당 주인들이 밤을 새워가며 자신들만의 라아멘 요리법을 개발하는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자주 비추이는데...그런 이야기가 실감 날 정도로 라아멘 맛이 좋아졌단다. 인생을 걸고 라아멘 맛 내는데만 주력한 주인공의 미담이 텔레비전에 나온 다음날 그 식당 앞은 손님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라아멘의 달인’이 운영하는 식당은 인산인해라고 한다. 그런 집에서 라아멘 한번 먹어 보았으면...

라아멘 먹는 이야기만 하면 재미 없으니까 화제를 잠깐 돌려 일본인의 음식 먹는 습관을 말하련다. 일본 사람들은 라아멘 등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을 때 후루루~~ 마시듯 먹는다. 일본인들은 음식이 담긴 그릇을 입 주변으로 갖다대면서 나무 젓가락으로 돌돌 말아서 입안에 넣으며 물 마시듯 모든 음식을 먹으니까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마시듯 먹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그 맛에 심취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일본에선 후루루~~~ 소리내는 게 양반의 식사법이다. 이와 달리 한국 사람들은 소리내며 음식 먹는 사람을 상놈 취급한다. 한 · 일간에 음식 문화에 따라 양반 · 상놈이 갈린다.

헌대 일본사람들이, (입을 음식 그릇 쪽으로 향하며 퍼 먹는) 한국 사람들을 야만인 취급하면서 ‘조센징은 개밥 먹듯한다’고 야유하는데 문제가 있다. 이게 야유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지메(집단 왕따)로 흐르면 더 큰 일이 벌어진다.

필자가 1993~96년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아들을 일본의 초등학교에 다니게 했는데, 우리 아들이 음식 먹는 습관 때문에 집단 왕따를 당했다. 우리 아들이 점심 식사할 때 일본의 학생들과 달리 입을 밥그릇 · 국그릇 쪽으로 향하며 밥을 먹자 일본인 동급생들이 우리 아들을 향해 ‘개처럼 밥을 먹는 조센징은 야만인!’이라고 왕따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상이 걸린 우리 가족은 아들의 왕따를 일거에 물리칠 대안으로서 ‘일본인도 야만인’이라는 반격작전을 구사했다. ‘한국 사람들은 그릇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큰 소리로 후루루 마시듯 밥을 처먹는 사람을 야만인으로 취급한다. 이런 한국인의 식사습관으로 볼 때 바로 너희들 일본인들이 야만인이다’는 점을 일본인 급우들에게 강력하게 설명하며 맞받아치라고 아들에게 특별명령(?)했다.

이런 기억을 되뇌며 쓴 웃음을 지은 필자는, 야만인(?) 일본인들이 라아멘 그릇을 손에 들고 후루루 마시는 버릇없는 짓을 즐겨 바라보며 라아멘 맛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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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은,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99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