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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한반도 통일-평화협정

‘겨레 복지’라는 발상을 키우자

김승국

평화운동을 하는 필자가 얼마 전에 노동관련 토론회의 사회를 보면서 잠시 외도했다. 그런데 노동 쪽으로 외도하여 사회를 본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겨레 복지’에 대한 발상을 얻었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겨레 복지’는 예사롭지 않은 뜻을 갖고 있다. 겨레 복지의 ‘겨레’를 ‘민족’으로 바꾸면 ‘민족 복지’가 되어 좀 경직되고 규정되는 느낌을 주므로 겨레 복지라는 함의가 더욱 빛난다. 어쨌든 겨레의 주요 구성원인 남북한 민중의 복지에 관하여 고민한다는 의지가 ‘겨레 복지’에 깃들어 있다. 현재 남한에는 상대적 빈곤과 절대적 빈곤이 공존하고 있으며, 북한은 절대적 빈곤의 수렁에 빠져 있다. 남북한이 이러한 빈곤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게 ‘노동자(민중) 복지’와 ‘평화 통일’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지름길이다.

그러면, 평소에 멀게만 느껴지는 노동자(민중) 복지와 평화 통일을 연결시켜 주는 끈끈이는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 생각건대 요한 갈퉁(Johan Galtung)의 구조적 폭력-적극적 평화를 한반도에 적용하면 실마리가 풀릴 것 같다. 갈퉁이 말하는 구조적 폭력의 제1항은 빈곤이다. 빈곤 때문에 개개인이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구조에 폭력이 내재하고 있으며, 그런 폭력을 지양하는 것이 적극적인 평화이다.

갈퉁의 이런 발상을 한반도에 적용하면, 남북한의 상대 ・절대적 빈곤(구조적 폭력)을 지양하는 평화통일 운동을 통하여 적극적인 평화를 달성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노동자 복지를 위한 이론 ・실천은 노동운동의 전유물이 아니며 평화통일 운동의 주요한 관심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빈곤이라는 구조적 폭력을 지양하는 운동을 에워싸고 노동 운동권과 평화통일 운동권이 넘나들어야 하지 않을까? 넘나드는 수단이 ‘겨레 복지’임을 인정한다면, 겨레 복지라는 화두에 매달리는 평화 운동이 긴요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반전 평화에 주력해 온 소극적 평화 운동의 저력을 살려 ‘겨레 복지-남북한의 빈곤 타파’를 앞세운 적극적 평화 운동에 서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말]2005년 8월호)에 실린 글을 수정했다>

 출처=[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94호(2005.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