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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해외의 '중립화'

김승국 정리

* 이 글을 쓰기 위해 강종일 선생의 중립화 연구논문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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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부, 정치가, 학자들은 1947년부터 1970년 중반까지 주한미군의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의 중립화 방안을 검토하거나 논의했다. 미국은 동북아 문제를 관리해야 하는 조정자의 입장에서 한국의 중립문제를 국가이익과 연계하여 검토했다.
1953년 6월 휴전협정 조인을 앞두고 미 국무성은 휴전 후 대한반도 정책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서 한국의 중립화 방안을 국가안보회의(NSC)에 제출했다. 국무성의 한국 중립화 연구목적은 한국전쟁을 종결하는 휴전협정 초안 중 “휴전협정 서명 후 3개월 내에 한반도 내 외국군 철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양측의 고위급 정치회담 개최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한편 미국의 정치가, 학자들도 한국의 중립화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웨드마이어(Albert Wedemyer) 장군은 1947년 7월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만약 한반도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할 경우 ‘한국의 영세중립을 보장할 것’을 건의했다. 맨스필드(Mike Mansfield) 상원의원은 1960년 11월 상원 외교 위원장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미국은 한국 통일문제를 오스트리아식의 중립화 조건으로 해결하는 가능성을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버클리 대학의 스칼라피노(Roert A. Scalapino) 교수는 1961년 3월 맨스필드의 발언에 대해 오스트리아식 중립화의 실현성은 희박하나, 외국 군대를 철수시키고 한반도의 중립화를 모색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브레진스키(Zbigniew Brezinski) 교수는 1972년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남북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로 지목되고 있는 만큼 남북통일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4강이 한반도의 중립화 보장을 하여야 한다.”고 언급했다.
한국문제 전문가인 헨더슨(Gregory Henderson) 교수는 1975년 한국은 중립국이 되어도 어느 인접국에도 해를 주지 않을 것이므로, 미국은 한국의 오스트리아식 영세중립을 승인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터(James E. Carter) 대통령은 1976년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반도의 중립화가 필요할지 모른다고 언급하면서 정책검토를 지시했다.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교수는 1976년 주한미군의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으로부터 미군의 철수는 보다 더 긍정적이며 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국 정부가 외부의 압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들의 통일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4강이 한국 중립화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한국 중립화 주장의 특징은 주한미군의 철수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한반도의 중립화 문제가 거론된 점이다. 이는 주한미군이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국가이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지역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미국이 필요하다는 것을 반증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이러한 추론이 확실할 경우, 장차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한다면, 미국은 한국의 중립화를 다시 공론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주한미군의 철수와 한반도의 중립화는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갈퉁 교수는 1989년 한반도의 중립화는 통일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4대 강국의 협조와 UN의 지원을 받아야 할 것이며, 여기에는 외국군의 철수와 비도발적인 국방력의 창안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한국은 스위스로부터 중립화의 과정을, 오스트리아로부터 강대국과의 협상기술을, 스웨덴으로부터 비동맹 국방정책을, 핀란드로부터 폐쇄적 사회와의 우호관계 유지방법을 배워야 하며, UN으로부터는 후원을 받아야 할 것임을 제시하고 있다.<강종일 ・이재봉 편저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 249~252쪽>

1.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한국을 중립화하는 길 이외에 관계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길 없다는 것은 이제 국제정치상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미국 덜레스 국무장관이 1953년 11월에 이 중립화안을 그 당시의 외무부장관 변영태에게 제의한 것을 보거나 미 상원의원 맨스필드가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를 조건으로 통한문제의 해결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언명한 것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강종일 ・이재봉 편저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 176쪽>

한국전쟁이 끝나고 휴전조약이 체결되던 1953년 7월에 당시 미 상원의원 캘리포니아 공화당 대표였던 윌리엄 노랜드는 동북아시아에서 국제적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안은 미 ・소 ・중 ・일 보장으로 한반도를 오스트리아와 같이 영세 중립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 외에도 미국 주일대사이고 민주당 총무였던 마이크 맨스필드는 1960년 외교위원 상임위원회 보고서에서 한반도는 오스트리아와 같은 영세중립국이 되는 길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언명한 바 있다.<강종일 ・이재봉 편저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 218쪽>

현재 남한 정부는 미국과 한 ・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있으며 북한 정부는 소련[현재의 러시아]과 조 ・소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을, 그리고 중국과 조 ・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을 맺고 있다. 앞으로 실현될 통일 정부는 한반도에서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강대국과 어떠한 군사동맹도 맺지 않으면서 민족 자주화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 통일 후 우리 민족은 국제적으로 중립화 특히 영세중립화 노선을 견지함으로써 평화를 사랑하는 미 ・소[러시아] ・중 ・일의 모든 국민들, 그리고 세계 모든 평화애호 세력과 우호 ・친선관계를 증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제관계에 이와 같은 중립화 노선 확립은 국내적으로 그것을 추진할 민족주체 세력 형성 없이는 불가능하며, 설혹 국제정치 역학 관계의 일시적 타협으로 어떤 나라가 중립화되었다 하더라도 그 중립화가 지속되기가 어렵다고 할 것이다. 우리들은 그 구체적 예를 제2차 세계대전 후 중립화에 성공한 오스트리아와 중립화에 실패한 라오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8.15 해방 후 여운형의 민족자주적 정치노선에 따라 통일정부가 수립되었던들 우리 민족은 이미 40여 년 전에 국제적으로 오스트리아와 같은 영세중립화를 실현하였을 것이며 분단의 비극과 고난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지정학적 위치를 지닌 오스트리아는 2차 대전 후 미 ・소 ・영 ・불 4개국 점령하에 들어갔으나 일종의 좌우합작을 통하여 1955년 오스트리아 중립연방헌법을 입법하여 동년 5월 15일 상기 4대 강국과 국가조약을 체결하고 영세중립을 실현하여 그것을 견지함으로써 동서 냉전시대의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강종일 ・이재봉 편저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 53~54쪽>

중립화된 통일한국의 안전보장은 오스트리아와 같이 사전에 관계 각국의 승인을 얻어서 한국이 영세중립국임을 관계 각국을 비롯하여 세계 제국에 승인시키고 유엔에 가입함으로써 충분할 것이나 그 외에 진일보하여 어떠한 형식(비록 각서의 형식이라도)으로든지 4대국(미 ・일 ・중 ・소[러시아])의 보장을 얻도록 하는 것이 더욱 든든한 일임은 많은 설명을 필요치 않을 것이다.<강종일 ・이재봉 편저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 180쪽>

김대중은 1989년 6월 “장차 이 나라가 통일이 되면 오스트리아식 영세중립 국가로 가게 될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요한 갈퉁은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를 다음과 같이 추천한다. 한국의 재통일 과정 중에 독일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스트리아로부터 배울 것이 매우 많다. 한반도의 상황은 오스트리아와 더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의 경우에는 통일을 도왔던 것이 소련보다 미국이었다. 이 점은 장래 협상들을 전개함에 있어 고려되어야 할 관심사이다. 4대 강국 모두를 포함해야만 할 협상과정에서 기본적인 주안점은 통일을 중립과 교환하는 것이며, 이는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동시에 신뢰할 만하고 비도발적이며 방어적인 국방의 창출을 의미한다. 한국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오스트리아를 중립화시켰던 협상들의 역사를 집중 연구함으로써 통일의 과정에 관해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
로 모든 측면에서 강대국들과의 활동적인 교역 상대국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해서도 배울 수 있다.<강종일 ・이재봉 편저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 188~190쪽 요약>

강종일은 다음과 같이 오스트리아의 중립정책을 설명한다.
오스트리아는 세계 제2차 대전 중, 독일에 협력했기 때문에 1945년 7월 4일 모스크바 선언에 의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분할 통치와 4개국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 지도자와 국민은 1945년 외국의 점령 직후부터 자주독립국 건설을 목표로 외국군의 철수에 국가적 목표를 두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들은 사회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국내적 또는 국제적으로 중립을 기본정책으로 영세중립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는 1946년 12월 1차적으로 연합국위원회의 자문을 거치지 않고 외국과 통상협정을 체결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다. 이러한 조치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오스트리아가 동구권과 같이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오스트리아의 두 번째 목표는 외국 점령군의 주둔비용을 삭감하는 문제였다. 전후 오스트리아는 연합국에 대한 점령군의 비용을 부담함으로써 경제가 더욱 어려움에 직면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1950년 3월 점령국들에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외국 군대의 수를 감축시켜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한편, 불란서, 영국, 소련에 대해서도 주둔 비용을 주둔 국가의 정부가 부담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그러한 요청에 대해, 서방 3국은 1950년 5월 런던에서 외상회담을 갖고 자유롭고 독립된 오스트리아의 건설을 위하여 서방점령군의 조속한 철수를 천명하는 성명을 발표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정부는 통치권 확대와 점령비용의 경감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정책 과정을 살펴보자. 첫째, 오스트리아 국민은 처음부터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정책을 지향하겠다는 국가의 외교목표를 분명히 천명했다. 둘째, 오스트리아는 동구권과 같은 공산화 국가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방국가와 긴밀하게 노력했다. 예를 들면, 1948년 2월 미국이 주도하는 마샬 플랜(Marshall Plan)의 수혜자가 되었다. 셋째, 오스트리아는 1951년 11월과 1952년 2월 외교정책으로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정책을 지향하여 세계 어느 국가에도 편향되지 않은 공평한 중립정책을 유지할 것을 발표했다.

오스트리아는 소련과 함께 1955년 4월 15일 모스크바에서 오스트리아가 향후 영세중립정책을 지향한다는 전제를 포함한 모스크바 각서(Moscow Memorandum)를 발표했다. 모스크바 각서에서 소련과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가 스위스와 같은 형식의 영세중립정책을 선언함에 따라 미국, 영국,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정책을 소련과 합의했다.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정책에서 한국이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살펴보자.
첫째, 오스트리아가 외국군의 철수를 목적으로 영세중립정책을 추구한 것은 현재 주한미군의 철수문제로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군 철수를 위한 합법적 대안으로 한국도 영세중립정책을 통하여 주한미군을 합법적으로 철수케 할 수 있다.
둘째,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은 소련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주변국이 강요하지 않고, 오스트리아의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한국도 미국과의 협정을 통하여 영세중립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의 성립 과정에서 스위스와 상이한 절차와 방법을 통하여 영세중립국이 되었으나,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의 모델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한국도 오스트리아식 영세중립국이 된다 해도 스위스식 무장중립을 통한 영세중립국의 국제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끝으로, 오스트리아식 영세중립은 스위스의 영세중립 과정에 비해 단순하고 용이하다.
즉, 남북이 주변의 모든 국가와 1 대 1로 협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남북은 분단 상태이므로 우선 남북이 영세중립 통일에 합의하고, 남북의 합의된 영세중립통일 대안을 4강의 대표 격인 미국과 합의하고, 미국으로 하여금 나머지 3국과 한반도의 영세중립을 합의하면 한반도는 오스트리아식으로 영세중립통일을 할 수 있다.<강종일 「영세중립의 개념과 국가사례」 {한반도 중립}(영세중립 통일 협의회 발행) 26호(2004.7.1)>

2. 스위스의 영세중립

스위스는 왜 영세중립국 정책을 선택하였을까?
스위스가 영세중립정책을 추구하게 된 동기는 국내적 요인과 국제적 요인의 두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내적 요인으로 스위스는 15세기 중엽부터 자치권을 가진 각 주(州: Canton) 간에 영토확장을 위한 치열한 내전이 계속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대내적 중립이 필요했다. 대외적 요인으로 스위스는 주변 국가의 침략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이중적 목적에서 영세중립정책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면 스위스 영세중립정책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자.
스위스는 중세시대 동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1291년 3개 주의 동맹국가로 출발했다. 하지만, 스위스는 1436년부터 각 주와 도시를 중심으로 한 극심한 내전이 계속되었다.
스위스인들은 내전의 초기부터 어떻게 하면 격화되고 내전을 종식할 것인가의 대응책에 고심하던 중, 각 주 간의 갈등과 대립을 종식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전쟁을 하지 않는 각 주는 다른 주들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토록 했다.
스위스가 영세중립정책을 선택한 보다 큰 요인은 주변 국가의 침략 때문이었다. 스위스는 1515년 프랑스와의 마리그나노(Marignano) 전투에서 대패한 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면서 주권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영세중립정책을 선택했다.
스위스는 1546년 영세중립정책을 정식 발표했다. 그 후 스위스는 유럽에서 발생한 30년 전쟁(1618-1648), 루이14세 전쟁(1638-1715), 7년 전쟁(1756-1763)에서 철저한 중립정책을 실천했다.
스위스는 1803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요구로 자국의 군대 2만 4,000명을 프랑스군에 배속함으로써 1813년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스위스 의회는 모든 교전 강대국들에 다시 중립정책을 선언했다.
그 결과, 스위스는 1815년 3월 나폴레옹 전쟁을 종결하는 비엔나 회의에서 영세중립 국가로 잠정 승인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파리회의에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프러시아, 러시아, 포르투갈의 승인을 받아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스위스의 영세중립은 1919년 6월 개최된 베르사유(Versailles)조약에서도 주변 국가들로부터 영세중립의 국제적 지위를 재확인받았으며, 세계 제2차 대전 중에도 명실상부한 중립정책을 지속함으로써 영세중립국가로서의 의무를 충실하게 유지함으로써 1815년 이래 어떠한 주변 국가의 침략도 받지 않고 경제적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은 스위스의 영세중립정책에서 두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스위스는 중립정신을 통하여 내전을 종식하고 영세중립정책을 통하여 외국의 침략을 방지한 것이다. 남북도 중립정신으로 갈등을 극복하고 영세중립통일로 주변 국가의 침략도 대비해야 할 것이다.<강종일 「영세중립의 개념과 국가사례」 {한반도 중립} 26호>
(200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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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국 지음『한반도의 평화 로드맵』(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157~167쪽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