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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중립화의 길

김승국

중립의 구체적인 개념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국가의 국제법상 지위를 뜻하는바, 양 교전국에 대한 공평과 무차별 ・무원조(無援助)를 그 내용으로 한다. 이를테면 중립은 어느 일국(一國)이 전쟁을 전제로 하여 교전국에 대해서만 취득하는 지위이다. 때문에 중립국은 교전국에 병력 ・무기 등의 공급을 회피할 의무(회피의 의무: abstention)와 중립국의 영역이 교전국의 군사기지로 사용되지 않도록 방지할 의무(방지의 의무: prevention), 일방의 교전국에 군사적 원조를 행하는 중립국에 대하여 타방(他方)의 교전국이 일정한 제재를 가하는 것을 묵인할 의무(묵인의 의무: acquiescence) 등 공평과 무원조의 의무를 져야 한다.

중립의 종류에는 ‘단순 ・잠정 중립(simple occasional neutrality)’과 ‘영세중립(permanent neutrality)’이 있다. 이 두 가지의 형태는 그 적용대상에 있어서 반드시 국가여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단순 ・잠정 중립은 전시를 전제로 한 한시적인 개념으로서 전쟁의 종식 또는 전쟁에의 참가로 인하여 그 지위가 종료되는 데 반해 영세중립은 평시(平時)와 전시를 초월한 개념으로서 항구적으로 그 지위가 보장되는 비한시적(非限時的) 개념이다. 단순 ・잠정 중립은 일반 국제법에 따라 어느 국가나 수시로 택할 수 있는 ‘전시 국외 중립(戰時 局外 中立)’으로서 중립의 원래 개념과 대차(大差)가 없어 이를 ‘통상 중립(ordinary neutrality)’이라고도 한다. 반면에 영세중립은 관련 당사국들 간의 다변조약(多邊條約)에 의하거나 또는 중립화할 당사국의 일방적인 선언 후 여타 국가들로부터의 개별적 승인을 얻어 완성된다.

‘중립화(neutralization)’라는 개념은 중립과 영세중립의 연관개념으로서 ‘중립의 상태로 되어 가는 과정 또는 그러한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행위’를 뜻하는바, 그 궁극의 목표는 중립화 조약에 의한 영세중립인 것이다. 그러나 영세중립은 반드시 국가를 단위로 하지만 중립화는 더욱 포괄적이어서 국가는 물론 국제적 세력관계에서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특정지역 예컨대 하천 ・운하 ・해협 등을 망라한다. 따라서 중립화라 함은 특정지역에 있어서 특정한 국가의 침해를 규제하기 위해 마련된 특수한 국제적 지위를 지칭한 것이다. 재론하자면 중립화는 전쟁과 관련된 중립제도의 현대적 존재 양태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중립제도는 원래 전시 국제법상의 ‘중립’의 관행에서 출발하여 ‘영세중립’이라는 비한시적 양태로 발전되었고 그것은 다시 현대적 국제관계 상황에서 ‘중립화’라고 하는 분쟁 지역 관리제도로 그 명맥이 이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박희호 「구한말 한반도 중립화론 연구」(박사학위 논문, 1997) 10~11쪽>

1. 한반도에서 제기된 중립화

유명철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한국 중립화론 연구」(1989년)에서, 유형별 ・시대별 배경 ・제안 목적 ・제안자의 성격 ・중립화 모델 ・중립 보장국 ・주도국 ・지정학적 여건 ・수용 능력 등으로 구분한다. 그는 조선조 말기의 중립화론을 임오군란 이후의 중립화론, 거문도 사건 이후의 중립화론, 청일전쟁 이후의 중립화론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어 해방 이후의 중립화론은 1945년 이후의 중립화론, 1960년대의 중립화론, 1970년대 이후의 중립화론으로 나눈다.

필자 역시 유명철의 시대 구분에 따라 한반도에서 제기된 중립화론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1) 조선조 말기의 중립화론

1882년 7월 조선에서 발생한 임오군란으로 중국의 대조선 영향력이 강화되자, 일본은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일본의 영향력을 증가하기 위해 중국, 영국, 독일, 불란서, 러시아 등 5개국의 협상을 통해 조선의 영세중립을 중국에 제의했다. 일본이 진정으로 조선의 중립을 원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군사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기 위한 것으로 중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주(駐)조선 독일 영사관 부영사 부들러(Hermann Buddler, 卞德榮)는 1885년 3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 방안을 김윤식을 통해 고종 정부에 문서로 건의했다.
김옥균의 개화파 일원으로 1883년 9월부터 미국에 유학 중이던 유길준(1856~1914)은 유럽견문 결과를 토대로 조선의 중립론을 저술한다. 그의 이론은 전시중립과 영세중립으로 구분하고, 조선의 중립은 벨기에와 같은 영세중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 왕립 아시아 협회 중국지부 회원인 둔칸(Chesney Duncan)은 1889년 8월 발행한 그의 저서 {Come and the Power}에서 조선이 강대국에 의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오류에서 발생한 잘못된 생각을 거부하면서, 그러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시정하고, 다른 국가들의 이익을 수호한 차원에서 조선이 ‘평화적 중립지대(peaceful neutral zone)’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조선 궁내부(宮內府) 고문으로 초빙된 미국의 샌드(William F. Sands)는 1900년 1월 조선에 부임한 후부터 스위스와 벨기에 모델에 따른 조선의 영세중립화 방안을 조선 정부에 건의했다.
러시아는 1900년대 중국에서 발생한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점령한 만주를 일본의 침입으로부터 방비하기 위해 한반도의 중립화 구상을 일본에 타진했다. 그러나 일본은 1902년 1월 영 ・일 동맹의 진전과, 일본 정계에서 러 ・일 제휴론자들의 퇴조로 러시아의 제의를 거절했다.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 기운이 팽배하던 20세기 초, 고종 정부는 1900년 8월 일본에 파견된 조병식 특사를 통해 일본정계의 중진 고에이(近衛篤磨)에게 일본이 조선을 대신하여 열강 국가들에게 조선의 중립을 제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고에이는 조선의 중립국 준비 부족을 지적하면서 거절했다.
일본과의 조선 중립화 교섭 실패 직후, 조병식 특사는 주일 미국공사 버크(Alfred E. Buck)에게 조선이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이 될 수 있도록 미국이 협력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버크 공사는 조선이 정식 외교문서로 미국 정부에 직접 제출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접수를 거절했다. 조선의 중립화를 위한 일본과 미국과의 교섭에서 실패한 고종 정부는 1904년 1월 일방적으로 조선이 중립국임을 선포하고,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게 될 경우 한반도를 전쟁터로 이용하지 말 것을 일본과 러시아에 요구했으나, 러 ・일 전쟁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강종일 ・이재봉 편저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서울, 들녘, 2001) 242~244쪽 요약>

박희호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조선조 말기에 30개의 중립화 방안이 제안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연표를 만들었다. 박희호는 30개 중립화 방안 중 영세중립론이 21건, 전시 국외 중립이 7건(이 가운데는 지역 중립이 3건), 열강의 공동 보호가 2건으로 영세중립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밝혔다.<박희호 「구한말 한반도 중립화론 연구」 196~198쪽>

유명철은 조선조 말에 국내외의 인사들이 제기한 중립화 방안을 소상하게 설명한다.<유명철 「한국 중립화론 연구」(박사학위 논문, 1989) 39~59쪽>

  2) 해방 이후의 중립화 방안

재미교포 김용중은 1952년 미국에서 발행된 {The Voice of Korea}지에 한반도의 중립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주필을 역임한 김삼규는 일본에 체류하면서 1953년부터 한반도 중립 통일론을 일본과 한국에서 발표했다. 재일교포 이영근은 1955년 8월 일본의 {세계(世界)}지에 한반도 통일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으로, 통일을 위한 선거감시와 외국군의 철수문제라고 지적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주한 UN군을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군대로 교체하고, 한국전에 참가하지 않은 국가의 대표로 ‘국제선거감시단’을 구성하여 중립 통일선거를 관장케 할 것을 주장한다.
언론인 김석길은 1961년 4월 한반도 중립화 통일방안으로 중립국 대표로 구성된 선거위원단이 남북 총선거를 주관하고, UN의 감시하에 한반도의 중립을 전제로 한 선거를 실시하며, 한국의 중립화 통일은 오스트리아식으로 하고, 통일 후 주한 외국군은 철수하며, 한국과 외국 사이에 체결된 군사협정도 폐기되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재미 동포 황인관은 1970년대부터 한반도의 중립 통일론에 관한 저서와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한반도의 ‘중립과 통일’을 동시에 달성하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중립통일의 방법으로 남북한의 입장과, 외세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장면 정부가 1960년 8월 수립됨으로써 한국의 혁신당과 사회단체들은 한반도 중립 통일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특히 이들은 1960년 11월 미국 맨스필드 상원의원의 한반도 중립발언에 자극되었다. 대표적 사회조직은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민자통)’와 ‘중립화 조국통일 운동 총연맹(중통연)’과 혁신정당으로 사회민주당 등이다. 그들의 주요 중립 통일론은 다음과 같다. 사회대중당, 혁신당, 사회당, 천도교, 유교 등이 모체가 된 ‘민자통’은 1961년 2월 천도교에서 집회를 갖고 ‘민족통일 건국 최고 위원회’를 조직하고, 남북협상을 진행할 것을 촉구하면서 남북 통일방안으로 ‘영세중립 통일안’을 채택했다.
광복회 등이 중심이 된 ‘중통연’은 1961년 2월 한반도 통일방안으로서 국제적 보장하에 한반도의 영세중립 통일정강을 채택하고 국민운동을 전개했다. 통일사회당 김철 위원장은 1971년 2월 ‘국민에게 드림’이란 글에서 한반도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과의 국제적 조약을 통해 남북한의 중립화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강종일 ・이재봉 편저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 245~248쪽 요약>

강종일은 남북한 지도자들이 중립화에 관하여 관심을 표명했음을 상기시킨다. 김대중은 1989년 6월 광주교육대학에서 가진 시국강연에서 “장차 이 나라가 통일이 되면 오스트리아식 영세중립 국가로 가게 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하면서 한반도의 중립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의 한반도의 안전보장에 대한 4개국 보장 필요성 언급과, 오스트리아식 중립화 가능성 전망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원대한 구상으로 평가된다.
한편 김일성은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창당 제6차 대회에서 ‘고려 민주연방 공화국 창설안’을 발표하면서 “고려 민주연방 공화국은 어떠한 정치와 군사적 동맹이나 블록에도 가담하지 않는 중립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1985년 10월 평양에서 가진 장세동(당시 안기부장)과의 대담에서 한반도의 중립화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남북한 군대의 10만 명 감축방안도 제시했다. 그는 또한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 연설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전 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을 발표했다. 그는 첫 번째 강령에서 “전 민족의 대단결로 자주적이고 평화적이며 중립적인 통일 국가를 창립해야 한다.”고 제시했다.<강종일 ・이재봉 편저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 248~249쪽 요약>
김정일도 한반도의 분단은 냉전의 부산물로서, 남북이 각자의 안보를 위해 주변 강대국과 군사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통일된 한반도는 어느 나라와도 동맹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정일은 통일된 한반도의 독자적 외교노선으로 “스위스식 무장중립(Swiss like armed neutrality)”과 비핵 정책을 통하여 세계의 모든 나라들과 친선관계를 증진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통일된 한반도가 왜 스위스와 같은 무장중립국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김정일의 시각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반도의 냉전체제를 종식시켜야 한다. 한반도를 장기간 속박하고 있는 냉전체제의 종식을 위해 통일된 한반도는 통일 전 남북의 정책에 반대한 어떠한 국가와도 정치나 군사적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 즉, 통일정부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중 어느 국가와 군사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평화를 애호하는 민족이다.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외국을 독자적으로 침범한 경험이 없다. 한민족은 침략이 아닌 방어만을 위하여 군대를 유지해 왔다. 그러므로 한민족에게 침략과 보복은 생소한 것이다.
셋째, 남북민족은 한반도의 전쟁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한민족은 19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100년 이상 일본과 미국의 수중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지금은 평화를 회복하여야 할 때이다. 그러므로 남북민족에게 새로운 고통을 줄 수 있는 어떠한 전쟁도 정당화 될 수 없다.
넷째,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이다. 세계의 최대 강국인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에 둘러 쌓여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주변의 강한 국가와 동맹관계를 유지하려는 위험스러운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현명한 방법은 문제가 될 수 있는 동맹의 소지를 사전에 제거할 수 있는 공정한 중립정책을 유지하는 것이다.
끝으로, 통일된 한반도는 중립에 필요한 충분한 국방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가 통일된다면 어떠한 인접국가로부터의 침략도 격퇴할 수 있는 국방능력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현재 북한의 군대는 지구의 어느 거리에 있는 목표라도 가격할 수 있는 공세적 무기와 어떠한 외부의 공격도 막을 수 있는 방어적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 남북의 군대가 합하면 주한미군이 남한으로부터 철수 한다하여도 그 공백을 충분히 메울 수 있다.<강종일 「한반도의 통일환경과 중립화 대안」 {평화 만들기(http://peacemaking.kr)} 134호>

유명철은 1945년 이후에 제시된 중간파, 웨드마이어, 미국 국가 안전보장회의, 미 국무성 극동국, 맥아더, 올리버, 덜레스, 노우랜드, Economist誌의 안(案)을 소개한다.<유명철 「한국 중립화론 연구」(박사학위 논문, 1989) 60~74쪽> 그는 이어 1960년대~80년대에 나온 중립화론을 자세하게 소개한다.<유명철, 위의 논문, 74~105쪽>

강종일은 김대중의 3단계 통일방안을 기본 틀로 하는 ‘5단계 한반도 영세중립 통일접근 방법’을 제시한다.<강종일 ・이재봉 편저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 256~263쪽>

위의 중립화론에 대하여 ‘영세중립’의 낡은 개념 대신 ‘동북아 평화의 중추’가 목표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19세기 말 약소국이었던 조선이 영세중립을 내세운 것이 낡은 개념이라는 뜻이다. 이제 한국의 국력이 신장되어 세계 12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나아갈 채비를 하고 있으므로, 이에 걸맞은 ‘동아시아 평화 중추’론을 제기하는 게 마땅하며, 약소국 시절의 ‘영세중립’론이 적절하지 않다는 논리이다.
이런 논리를 주장하는 강만길 상지대 총장은 “영세 국외 중립화 방안은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로 21세기에 이것만으로 독립을 유지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동아시아 평화 중추’라는 자기규정 아래 동아시아(평화) 공동체 건설에 주체적으로 나설 때 평화와 통일이 가능하다는 적극적인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이제훈 기자 「중립 대신 능동적 ‘동북아 평화중추’로」 {한겨레 신문}(2004.5.25) 6면 기사>
(200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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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국 지음『한반도의 평화 로드맵』(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148~157쪽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