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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안보-군사/안보론-안보 패러다임 전환

‘합리적 충분성’에 의한 전수방어

김승국

1. ‘합리적 충분성(Reasonable Sufficiency)’의 원칙 도입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를 중심으로 하는 소련의 지도부는 ‘새로운 사고’(주1)의 관점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페레스트로이카의 맥락에서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단기적으로 재정의 과도한 군사적 부담을 줄이는 한편, 장기적으로 소련의 경제성장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을 서방으로부터 도입하려고 했다.

이 같은 방향의 개혁은 국내정책과 대외정책의 변혁을 필요로 했지만 변혁의 장애는 마찬가지로 체제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존재하였다. 내적인 장애는 한 예로 군사 분야에서 제기된 교리수정에 관한 논쟁이었으며, 외적인 장애는 냉전적 대립의 관성 속에 작동하는 고착된 서방진영의 의심과 불신이었다.

1988년 12월 8일 고르바초프의 유엔총회 연설은 소련의 군사교리를 ‘합리적 방어의 충분성[합리적 충분성]’의 원리에서 재정립하고, 그 원리에 따라 군사력을 ‘일방적으로 감축’하겠다는 것으로서 세계환경의 변화에 대한 냉전적 대응방식을 포기한다는 선언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연설은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소련의 군축은 기존의 군축제의 및 선언과는 다르게 군사교리 및 전략의 근본적인 수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 소련의 군축방식은 기존의 양자 간의 협정 및 다자간의 조약 등 타협에 기초한 군축과는 다르게 상대방의 아무런 행위도 요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군축의 한 가지 방법으로서 일방적인 행위(Unilateral Initiatives)는 오스굿(Charles E. Osgood)이 제시한 GRIT(Graduated Reciprocation in Tention-Reduction)와 같은 개념에서 이해된다.<최병운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의 군사개혁」 {국제정치 논총} 제40집 3호(2000) 174~175쪽>

‘합리적 방어의 충분성[합리적 충분성]’의 원리는 소련 공산당 제27차 및 제28차 전당대회, 1987년 베를린 문서(Berlin Document), 1987년 9월 프라우다(Pravda)와의 고르바초프 회견, 그리고 1988년 12월 유엔연설 등에서 ‘피해 갈 수 없는 국가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라고 언급되었다. 합리적 방어의 충분성의 내용은 소련 군사력의 근본적인 역할이 소련과 동맹국에 대한 침략을 격퇴하기에는 충분한, 그러나 공격을 감행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도록 명백하게 방어적인 것으로 군사조직을 재편성하고, 그 규모는 합리적이고 신뢰할 만한 충분한 수준에서 일방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최병운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의 군사개혁」 {국제정치 논총} 제40집 3호(2000) 181쪽>

위의 합리적 충분성의 원리를 한반도에 적용하면, ‘남한 정부가 북한에 대한 침략을 격퇴하기에는 충분한, 그러나 공격을 감행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도록 명백하게 방어적인 것으로 군사조직을 재편성하고, 그 규모는 합리적이고 신뢰할 만한 충분한 수준에서 일방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북한에 대한 총체적인 군사력 우위에 선 남한의 대통령이 고르바초프처럼 새로운 사고 즉 ‘안보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군사력을 일방적으로 감축하겠다는 선언을 해야 한다. 더 강한 국력을 가진 남한 정부가 오스굿의 GRIT 개념에 따라 일방적인 군축을 시행하지 않는 한 남북한 간의 원만한 군축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zero sum game에 의한 군축’은 이루어진 적이 없다. 더 가진 자가, 더 힘이 있는 자가 선도적으로 군축을 선언함과 동시에 화해의 외교를 추진하는 길만이 평화통일에 다가가는 첩경이다.

이러한 획기적인 안보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해서는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있는 안보관부터 폐기하지 않으면 안 되고, DMZ 부근에 배치한 대량파괴 무기를 일방적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한 정부가 ‘합리적 충분성’ 원칙에 따라 군축을 먼저 선언하면 북한도 이에 부응할 것이다. 이때 비로소 6 ・15 공동선언이 군사적으로 실천되는 입문에 들어설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지배계급은 남북한의 무한 군비경쟁을 유도함으로써 남북한 민족을 분할 통치(divide and rule)하는 ‘한반도의 평화적 분단관리’ 정책을 취하고 있다. 이 정책에 말려드는 남한 정부는 미국이 의제(擬制)해 준 북한 위협론에 대비한다며 최첨단 대량파괴 무기를 도입하고 있으며, 군비경쟁을 감당할 수 없었던 북한은 ‘핵개발’을 통해 극단적인 맞대응을 함으로써 남북한 사이의 극한적인 군사대립이 그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군사대립은 미국의 군사적인 분할통치 전략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미국의 군사적인 분할통치에서 벗어나 극한적인 군사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지름길은, 남북한이 각기 ‘합리적 충분성’ 원칙에 따라 전수방위를 펼치며 공동안보를 모색하는 것이다.

2. ‘합리적 충분성’ 원칙과 전수(專守) 방어

남북한이 각기 ‘합리적 충분성’ 원칙을 지키면 저절로 전수 방어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남북한 정부가 ‘합리적 충분성’ 원칙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침략을 격퇴하기에 충분한, 그러나 공격을 감행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방어적인 것으로 군사조직을 재편성하는 것 자체가 전수 방어를 예약하는 일이다.

남북한이 ‘합리적 충분성’ 원칙에 따라 방어정책을 취하면 DMZ 부근의 미사일도 장사포도 전차도 최첨단 군사감시 장치도 불필요하다. 망원경 정도로 상대방의 진지를 지켜보며 방어를 하면 된다. 대량파괴 무기도 중무장도 전혀 필요하지 않고 재래식 무기로 상대방의 침입을 억제할 만큼의 자위력을 보유하면 된다. 한미 연합군이 북한을 종심 공격할 필요도 없으며 남북한군 당국이 상대방의 영토에 스파이를 보내 군사 정보를 염탐할 필요도 없다. 남북한이 실정법상 방어할 땅, 영해, 영공만을 전적으로 지키는 전수(專守) 방어에 임하면 된다. 이 정도로 남북한의 전력(戰力)을 감축하는 ‘군축’ 없이 한반도에서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없으며, 남북 공동안보를 시도할 수 없다.(2004.9.7)

* 김승국 지음『한반도의 평화 로드맵』(파주, 한국학술정보, 2008) 108~113쪽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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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주1) 고르바초프 시대에 들어와 소련은 그간의 경직성을 탈피하고 놀라운 유연성을 발휘하여 평화구조를 정착시키고 이른바 ‘제2의 긴장 완화 시대’를 만들어냄에 있어 주도권을 발휘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소련은 핵 선제공격을 포기하고 20세기 말까지 전 세계에서 핵무기를 완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강령을 채택했고 이미 발효된 중거리 핵미사일 제거 협정을 주도했으며 핵무기 완전 폐기를 위한 한 단계로서 전략 핵무기를 50%로 감소하기 위한 교섭을 미국과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을 추구함에 있어 소련이 내세우고 있는 것이 국제문제의 해결에 있어 ‘새로운 사고’의 적용인데, 이 ‘새로운 사고’를 행위에 일치시킴으로써 ‘소련으로부터의 위협’을 내세워 군비확장을 주도해 온 서방 강경파의 주장을 무력화시키고 세계 평화애호 세력의 고르바초프 대외정책에 대한 지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김세균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운동」 {사회와 사상} 1988년 10월호, 91쪽>
‘새로운 사고’는, 군비축소 ・군사비 삭감-경제력 증강에 유리한 국제환경을 조성하려는 소련의 대외정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1989년 10월 23일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안전보장은 상대방보다 많은 병기를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향하고 있는 병기를 줄이는 것이다.”라고 언명했다. 이처럼 군비의 양적 측면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새로운 사고’의 안보관은 ‘병기의 산술’을 ‘정치의 대수학’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이의 결정판이 ‘합리적 충분성’ 개념이다. 합리적 충분성이란 ‘방위에 주력하면서 공격을 펼치는 데 불충분한 수준의 병력’을 뜻한다. ‘합리적 충분성’은 미국의 군비증강에 발맞춰 뒷북을 치며 모조리 모방하는 바람에 귀중한 자원을 낭비했다는 뼈저린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합리적 충분성’은 절대적 안전보장의 반대 개념이다.<김승국 {한국에서의 핵문제 ・핵인식론} (서울, 일빛, 1991) 306쪽>